
Peddler’가 내 별명이 됐던 사연
- 굴양식 急發展 믿어지지 않아 받은 別名, 한국식 급성장 인식으로 꼬리 떼
- 初心으로 돌아가 노동경쟁력 회복돼야 우리 자리 지키지 않을까 ?
‘Peddler’란 말은 ‘행상’이란 말이지만 ‘마약 밀매인’, ‘소문을 받아 옮기는 사람’, ‘역 마다 서는 완행열차’ 등의 의미도 있는 것을 보면 좋은 의미보다는 좋지 않은 뉘앙스가 풍기는 말이다.
Peddler는 미국굴통조림업계의 큰손인 East Point Seafood사의 Bendiksen (이하 벤 사장) 사장이 내게 붙여준 별명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1971년 나는 주월 한국군용 한국전투식량을 미군에게 수출하던 대한종합식품의 무역과장이었는데 굴양식사업의 성공으로 세계시장에 굴 통조림 판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당시 굴 통조림시장은 미국, 일본, 독일, 호주, 등으로, 일본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일본눈치를 보아가며 미국, 독일, 호주 등지에 직접 판매망을 구축해야 했다.
이를 위해 나는 해외세일즈 여행에 나서 미국방문중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내 친구 강세흥 군의 주선으로 벤 사장을 만나 굴 통조림 수출을 위한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 후 그가 나를 Peddler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니 나를 신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수 있는 것이 벤 사장은 2 년 전에 한국과 일본을 돌아보고 충무에 직접 가서 국제수산공사의 굴 통조림도 수입해 보았다. 한국을 잘 아는 그로서는 내 말은 도대체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전에는 국제수산공사 같은 곳에서 소량씩 수출을 하고 있었지만 대한종합식품이 수출하는 규모가 초년도부터 한국 전체물량의 85% 이상을 점한 것을 보면 믿어지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대한종합식품은 충무에서 굴을 직접양식과 어민과의 계약양식도 병행, 수확된 굴은 충무 등 자체공장 2 곳 뿐 아니라 10 여 개 계열회사에 공급하여 통조림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하청생산체제를 갖추었다.
굴양식은 수출전략사업으로 대한종합식품이 사업자로 지정되어 양식과 가공, 수출을 맡아 성공하여 그 후 남해안 전체에 확산됐다. 1970년 대한종합식품은 수출실적이 1400만 불, 한국 4위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는데 그 후 한 해에 굴제품 수출이 수 백만 불을 점했으니 당시로서는 단일품목으로서 큰 품목이었다.
대학 졸업 후 강세흥 군은 영풍상사에, 나는 삼호무역에, 시험 쳐서 들어가 통조림을 수출했다. 삼호무역이 1965년 수출실적 한국 1위였으니 강군과 나는 지금으로 말하면 삼성이나 대우 같은 곳에서 같은 품목으로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관계이자 대학동장, 친한 친구였다.
그 후 강군은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시애틀 University of Washington에 유학을 갔다. 내가 미국에 갔을 때는 그는 박사학위과정에 있었는데 부업으로 East Point의 위탁연구를 하게 되어 벤 사장을 알게 되었다. 내가 미국에 온다니 샌프란시스코까지 마중 와서 벤 사장을 만나게 해준 것이다.
그 후 강군은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벤 사장 회사에 입사하여 굴 통조림 수입사업을 전담, 그에 의하여 East Point는 그 후 미국에서 굴지의 한국산 굴 통조림 수입상이 된 것이다.
벤 사장의 불신을 해소시키지 일이 시급했다. 우리 회사가 강군과 벤 사장을 초청, 충무의 굴사업 현장을 보여주었다. 충무로 가는 길에 울산의 현대중공업(조선)에 들러 조립공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독크에서는 배를 조립하는 광경, 울산시가 허허벌판에서 만들어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여기가 2년 전에는 황무지였었다“고 설명하고
충무에서는 굴 채취와 가공현장을 보여주며 ‘여기도 2년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충무지역은 이미 미국 FDA(식품의약국)가 인정하는 청정해역으로 지정되었고 공장은 FDA의 인증공장으로 등록되었음‘을 확인시킨 후 대규모의 수출계약이 체결되었다.
그 때 나는 Peddler 대신 ’Long Lee‘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고 양식과장으로 있던 내 동창이자 친구인 이동호 군은 ’Short Lee‘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그 후 Ben사장은 10 여년 전에 타계했고 강 군은 시애틀에서 무역상을, 이 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복합운송회사를 자영하고 있다.
오늘 TV특집에서 고임금에 경쟁력을 잃어 공장 시설만 헐값에 뜯어 팔 매물이 도처에 쌓여 있지만 사가는 사람은 없다는 프로를 보며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 공장 하나 하나가 지어질 때는 한국을 믿어주지 않던 시대에 한편으로는 없던 공장을 지어가며, 생산과 판매를 개척하면서 신용을 쌓아왔는데 벌써 고임금에 경쟁력이 없어져 파장이라니...
요즈음 국제적 신용회사들이 연이어 음반 총선으로 원내에 진출한 민노당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것도 한국이 앞으로 얼마나 빠르게 노동경쟁력을 잃어갈 것인가를 정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국민 모두가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뛰어야 중국이나 동남아에 밀리지 않고 우리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 된다.
이호영
베네모어통상 대표/함부르크항만청 한국대표
【물류신문】 2004년 5월 4일자 『이호영의 千字칼럼』(135) 에 게재
첫댓글 우리보다 앞서 선진국 문을 두드리다 추락한 중남미와 필리핀 등의 국가 들이 쉽사리 재기 하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음미 해볼 일이다.젊은 날에 산업현장에서 국내외 무역 현장에서 동분 서주하던 시절이 鄕愁 처럼 떠오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