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으로의 여행 - 1558년의 지리산
조 식의 [유두류록]
추정 등산로 : 화개 - 삼신리 - 용강리 - 운수리 - 황장리 - 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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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음력 4월 첫여름에 진주목사 김홍, 김홍지, 김수재, 이공량(자 인숙), 고령 현감 이희안(자 우옹), 청주목사 이 정(자 강이) 그리고 나는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산속에서는 나이를 귀하게 여기고 벼슬을 숭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술잔을 돌리거나 앉는 자리를 정할 때에도 나이를 기준으로 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4월 10일
우옹이 초계에서 내가 있는 뇌룡사로 왔다. 함께 묵었다.
4월 11일
계부당에서 식사를 하고 여정에 올랐다. 아우 환이 따라왔다. 원우석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였다. 총명하고 노래를 잘 불렀다. 그래서 불러내 함께 길을 떠났다.
문을 나서서 겨우 수십 걸음을 걸었을 무렵 어린아이가 앞을 가로 막았다. "도망친 종을 쫓아 왔는데, 이 길 아래쪽에 있으나 아직 잡지를 못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우옹이 재빨리 관노비 4,5명을 시켜 주위를 둘러싸게 하였다. 잠시 뒤에 과연 남녀 8명을 묶어서 말 머리에 데리고 왔다.
이윽고 말에 채찍질을 하여 길을 떠났다. 우옹이 "우연히 어떤 일을 했는데 이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니, 이 무슨 조화속이란 말인가?" 하면서 탄식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웃으면서 "우옹이 50년 동안 팔짱을 끼고 앉아 있어 그 주막이 메줏덩어리 같았다. 비록 중국에 있는 황하와 황수 유역의 천만리 땅은 수복하지 못할지라도 한번 숨쉬는 동안에 오히려 일을 하는 방법과 계략을 지휘할 수 있으니 참으로 큰 솜씨라 할 만하다" 라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일행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저녁 무렵 진주에 묵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홍지와 약속하기를,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쌍계사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말티고개에서 뜻하지 않게 호남에서 어버이를 뵈러 오는 종사관 이준민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인숙이었다. 그리고 홍지는 벼슬이 갈렸다고 전해 들었다. 이윽고 인숙의 집에 투숙하였다. 인숙은 바로 나의 자형이다.
4월 12일
큰 비가 내렸다. 홍지가 편지를 보내어 우리 일행을 머무르게 하고 아울러 음식을 보내왔다.
4월 13일
홍지가 찾아와 소를 잡고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우옹과 홍지와 준민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잔치를 끝냈다.
4월 14일
인숙과 함께 강이의 집에서 묵었다. 강이가 우리를 위해서 칼국수, 단술, 생선회, 찹쌀떡, 기름떡 등을 마련했다.
4월 15일
또 강이와 함께 사천강과 길호강이 합쳐지는 사천만 안쪽의 장암으로 향하였다. 강이의 동생 백도 따라왔다. 먼저 옛날 고려 공민왕 때의 무장이었던 이순의 쾌재정에 올랐다. 잠시 뒤에 홍지의 둘째 동생 경과 홍지의 아들 사성이 잇따라 이르렀다. 홍지는 맨 나중에 도착하였다. 잠시 뒤에 사천 현감인 노극수가 고을 수령의 자격으로 와보고는 작은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이들과 함께 큰 배에 올랐다. 사천현감은 술과 안주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마련해주고는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 충순위 정당이 와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여러 물건을 대주어 우리 일행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기생 열 명이 피리와 장구를 가지고 모두 늘어섰다. 그러나 이날은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기일이었다. 그래서 음악은 연주하지 않고 채식만 하였다. 그때 백유량이라는 젊은이가 배 위로 올라와 일행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날 밤의 달빛은 낮같이 밝고 은 같은 물결이 거울을 닦은 듯하였다. 마치 하늘에 있는 별과 아득한 산들이 모두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공이 번갈아 뱃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가 이무기 굴을 뒤집을 듯하였다. 삼태성 별자리가 어느덧 하늘 복판에 오자 동풍이 조금 일었다. 서둘러 돛을 달고 노를 걷어 치우고서 배를 몰아 거슬러 올라갔다. 잠시 뒤에 사공이 배가 이미 하동 땅을 지나쳤다고 아뢰었다.
서로가 서로를 베고 세로로도 눕고 가로로도 누웠다. 홍지의 담요와 겹이불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그 한 쪽을 빌어서 누워 잤는데, 점차 나머지 부분도 차지하여 홍지를 자리 밖으로 밀어냈다. 이것이 아마도 꿈속에 깊이 빠져 자기 물건이 남의 소유가 되는 줄도 모른다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4월 16일
새벽빛이 조금 밝아질 무렵에 거의 섬진에 다다랐다. 잠을 깨었을 때에는 벌써 하동 땅을 지나 버렸다고 한다. 아침 해가 이제 막 떠올랐다.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 듯하고 양쪽 언덕의 푸른 산그림자가 물결 밑에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퉁소와 북을 다시 연주하니, 노래와 퉁소 소리가 번갈아 일어났다. 서북쪽으로 십 리쯤 멀리 바라다보이는 구름 끼인 산이 바로 두류산의 바깥쪽이다. 서로 가리키며 바라보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방장산이 삼한 밖이라 하더니 벌써 가까운 곳에 있구나" 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 고을을 지나쳤다. 강가에 삽암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녹사 한유한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장차 어지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조정에서 불러 대비원녹사라는 벼슬을 주었으나, 그날 저녁으로 달아나 버렸다. 아무도 그가 간 곳을 몰랐다고 한다. 아!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는데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착한 사람을 표창만 하는 것으로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섭자고가 용을 좋아한 것만도 못한 일이다. 그것은 어지러워 망하려고 하는 형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문득 술을 청해 가득 부어놓고 거듭 한유한을 위하여 길이 탄식하였다.
한낮쯤 되어 배를 도탄에 정박시켰다. 두 눈에 정기가 전혀 없는 늙은 아전이 고깔 모양의 소골다를 머리에 쓰고 와서 인사를 하였다. 이들은 악양과 화개 고을의 아전이었다. 또 깃을 둥글게 만든 단령을 입은 아전 두어 사람이 와서 절을 하였다. 홍지의 관내에서 규찰과 권농 등의 직책을 맡은 관리였다.
강가에는 높고 낮은 산간 마을이 이어져 있고 밭이랑이 세로 가로로 나 있었다. 지금은 밭이랑이 열에 하나만 남아 있으나, 임금의 덕화가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미쳐 예전에는 백성들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도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화개 덕은리에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있었다. 선생은 바로 함양 출신의 대유학자였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나중에는 내한이라는 벼슬을 거쳐 안음현감을 지내다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곳은 삽암과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사리에 밝으신 분의 행복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홍지와 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바로 쌍계사로 들어가는 문이다. 푸른 벼랑이 양쪽으로 한 자 남짓 트여 있었다.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쌍계' 왼쪽에는 '석문'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놓았다. 자획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만 하고 바위 속 깊이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 이미 천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앞으로도 몇 천년이나 더 갈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서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면서 아득히 백리 밖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곧 신흥사가 있는 의신동의 물이고, 동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구름 속에서 새어 나와 산을 뚫고 아득하게 흘러서 흘러온 곳을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이다. 절 이름을 쌍계라 한 것도 두 시내 사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절 문으로부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높이가 열 자나 되는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최치원의 글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앞에 서 있는 높다란 다락집은 현판에 팔영루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 뒤에 있는 비석 전각은 아직 수리를 끝내지 않아 기와가 채 덮여져 있지 않았다. 쌍계사의 중 혜통과 신욱이 차와 산나물을 섞어서 우리 일행을 손님으로 맞아 대접하였다. 이날 어두워질 무렵에 내가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해서 음식을 물리치고 누워 있었는데, 우옹이 나를 간호하며 서쪽 곁방에서 잤다.
4월 17일
이른 아침에 홍지가 와서 나를 문병하였다. 문득 들으니, 어란달도에 왜구의 배가 와서 정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곧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는 아침을 재촉해 먹고서 돌아가기로 하고 술 몇 잔을 간단하게 돌렸다.
그런데 쌍계사에는 우리보다 앞서 호남 선비인 김득리, 허계, 조수기, 최연 등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들도 함께 법당에 맞아들여 술잔을 한차례 돌리고 풍악 한가락을 울렸으나, 갑자기 이별하게 되어 서로의 행색이 몹시도 급하였다.
어제 배 안에서 홍지가 자색띠를 허리에 매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토끼와 원숭이를 묶는 물건인데, 도리어 토끼와 원숭이에게 묶여 갈까 염려가 되는데"라고 농담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웃은 일이 있었는데, 지금 농담대로 그렇게 된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기른 힘이 없어 한 늙은 벗을 보호해서 다함께 신선이 앉을 만한 조용하고 깨끗한 곳 위에 앉아서 창자에 가득한 띠끌을 토해내고, 중국 한나라 때 적송자가 신선이 된 금화산의 무한한 정기를 빨아들여 늘그막의 절반 양식으로 삼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기생 봉월, 강아지, 귀천과 피리를 부는 천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보내 버렸다.
이날 온종일 큰 비가 그치지 않고 검은 구름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이곳과 산의 바깥 인간세상과의 사이에 구름과 물이 몇 겹이나 둘러싸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낮 무렵에 호남 지방의 역리가 종사관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봉화대에서 보고한 내용은 왜구의 배가 아니고 2,3척의 우리 배라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홍지의 관상이 신선과는 연분이 없어서 도끼 자루 하나 썩는 동안의 말미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홍지는 한량없이 베풀 줄은 알았다. 그는 수없이 많은 술과 안주를 보내왔고 소식과 서찰이 잇따라 이르렀다. 그리고 놀이기구인 육갑과 취사에 쓰이는 여러 도구들을 모두 강국년에게 맡겼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땔나무와 밥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국년은 진주의 아전이다.
이날 강이의 친척인 이응형이 쌍계사에 왔다. 저녁에 인숙이 설사를 하고 신음을 하였다. 해가 어스름할 때에 강이가 갑자기 가슴과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두어 말이나 토해냈다. 창자가 꼬이는 듯하고 위장이 뒤집히는 듯하여 매우 괴로워하더니 설사가 점점 급해졌다. 소합원과 청향유를 먹여도 효과가 없었다. 그가 전부터 가까이 했던 기생 강아지가 강이의 머리 맡에서 지키며 간병하였는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강이는 아침에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어제 저녁 가슴이 아파서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내 비록 죽더라도 그대들이 곁에 있는데 어찌 여인네의 손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그의 말을 받아 일행 모두가 강이를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 "그대 역시 겁쟁이다. 오로지 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대단찮은 병에 걸려도 죽지나 않을까 안타까워 한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중요한 것인데 어찌 그와 같이 하찮은 것이겠는가?"
4월 18일
산길이 비에 젖었다. 그 때문에 불일암에 오르지 못하고 시냇물이 불어나서 신흥사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호남순변사 남치근이 인숙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종사관의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진사 하종악의 종인 청룡과 사인 정계회의 종 등이 함께 술과 생선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신흥사 지암 윤의가 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동생이 타던 말이 병이 났다. 그래서 접천 밖에 사는 진이라는 사람에게 보살피도록 맡겼다. 저녁에 우옹과 함께 뒷 불당의 서쪽 방에서 잤다.
4월 19일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인숙과 강이는 병 때문에 동행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아무리 뛰어난 경치일지라도 매우 참된 연분이 없으면 신령님께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진실로 알 수 있다. 인숙과 강이가 예전에 한번 들어와 보았다고 하는 것은 꿈에서였고 진정으로 온 것은 아니라 하겠다. 홍지와 비교하면 서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그 또한 뒷연분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세 번이나 청학동에 들어왔어도 아직 속세의 인연을 다 끊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나 자신과 변변한 벼슬 한번 못하고서 팔십 노인네가 되어서는 일찍이 봉황지에 세 번 갔다온 일을 회상하는 이와 비교하면, 나는 오히려 상대가 안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 차례나 악양에 들어갔어도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던 이와 비교하면, 그보다는 내가 못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날 아침 김경의 병 때문에 같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기생 귀천을 데리고 바로 떠났다. 이때 김경의 나이는 77살이었으나, 산을 나는 듯이 올라가 처음에는 천왕봉에 오르려 하였다. 그 사람됨이 기개가 있었으니, 마치 중국 한나라 현종이 배우 기술을 가르치던 이원에서 노닐다 온 젊은이와 같았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 이 두 사람만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올라 나무를 잡고 좁고 험한 길을 타고 나아갔다. 우석은 허리에 맨 북을 두드리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이들을 따라가면서 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전진하면서 중간 무리를 형성하였다. 강국년과 요리사와 종들과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들 수십 명은 뒷무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중 신욱이 길을 안내하였다.
중간에 큰 돌 하나가 있었다. 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오암에도 시은형제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었다. 아마도 썩지 않는 것에 이름을 새겨서 영원히 전하려 하는 것이다. 대장부의 이름을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은 것으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새겨져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구구하게 숲속 잡초더미 사이 짐승과 이리가 사는 곳의 돌에 이름을 새겨서 썩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는 아득히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짓이다. 훗날 세상 사람들이 그것이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중국 진나라 두예라는 무장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름 있는 책을 썼기 때문이다.
열 걸음에 한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하였다. 바로 이곳이 세상 사람들이 청학동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바위로 된 묏부리가 허공에 매달린 듯 내리 뻗어서 굽어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서서 서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 벼랑을 깍아내어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오곤 하였다.
그 밑에는 학연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를 않았다. 좌우 상하에 절벽이 고리처럼 둘러 서서 겹겹으로 쌓인 위에 다시 한 층이 더 있고, 문득 도는가 하면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초목이 무성하여 수북히 우거져 있고 물고기나 새 또한 지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천리나 멀리 떨어진 중국 서부에 있는 약수보다도 더 아득해 보였다.
바람소리와 우레같은 물소리가 서로 뒤얽혀 아우성치니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는 신선의 무리와 큰 힘을 가진 거령, 길다란 교룡과 짧은 거북이가 한데 몸을 웅크려 숨어 있고, 그들은 이곳을 영원토록 지키면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아 겨우 그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 낀 돌을 긁고 더듬어 보니 삼신봉 이라는 세 글자가 있었다.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옹이 나의 아우와 원생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이리저리 내려다 보고서는 다시 올라왔다. 나이가 젊고 다리의 힘이 좋은 자는 모두 향로봉에 올랐다. 이윽고 돌아와서는 불임암의 방에 모여 앉아 물과 밥을 먹었다. 그런 다음 나와서는 절문 밖 소나무 밑에 앉아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다. 또한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우레와 같은 북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져 그 소리가 온 산을 뒤흔들었다.
동쪽에는 폭포수가 백길 낭떠러지를 내리질러 한데 모여 학담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우옹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물길이 만 길 구렁을 향해 내려가는데 곧장 내려만 갈 뿐 다시 앞을 의심하거나 뒤를 돌아봄이 없다 하더니, 여기가 바로 그와 같은 곳이다." 우옹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쾌하였으나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잠시 후에 언덕에 올라 길을 더듬어 지장암을 찾아갔다.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그 가지 하나가 마치 은빛 진주 한 말을 모아놓은 듯했다. 그곳에서 곧장 내려가는데, 한번에 두서너 리 정도나 달려간 다음에라야 겨우 한차례 쉴 수가 있었다. 이윽고 양의 어깻죽지 고기를 삶을 정도의 짧은 겨를에 드디어 쌍계사에 도착하였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때에는 한 발자국을 내디디면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어렵더니,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형국이었다. 이것이 어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좇는 것은 무너져내리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인숙과 강이가 팔영루에 올라서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였다. 저녁에 인숙과 우옹과 함께 다시 절 뒤쪽의 동쪽 방에서 잤다.
4월 20일
신흥사로 들어갔다. 신흥사는 쌍계사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그 사이에는 보잘 것 없는 가게가 두어 군데 있었다. 절 문간 앞에서 백 보쯤 되는 곳에 흐르는 칠불계 근처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줄지어 앉았다. 시냇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말에서 내려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넜다. 절의 주지인 옥륜과 지임인 윤의가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다.
절에 왔으나 문 안으로 들어갈 겨를도 없이 곧장 앞 시냇가의 반석에 가서 그 위에 줄지어 앉았다. 인숙과 강이만은 가장 높은 바위에 밀어 올려 앉히고서는 "그대들은 비록 위급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이 자리를 잃지 말게나. 만약 몸을 하류에 두게 되면 올라갈 수가 없게 되고 말 것이네" 하니, 인숙과 강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바라건대 이 자리를 뺏지나 말게나."
얼마 전에 내린 비에 시냇물이 불어 있었다. 시냇물이 돌에 부딪혀 치솟아 오르고 부서졌다. 때로는 마치 만 섬 구슬을 들이마시고 내뿜고 하면서 다투어 솟는 듯하고, 때로는 마치 천 가닥 우레가 거듭 쳐서 씨근거리며 으르릉 거리는 듯하였다. 마치 하늘에 은하수가 어슴프레하게 가로 뻗쳐 뭇별이 빛을 잃고 시들어 버린 듯하고, 신선이 산다는 중국 주나라의 요지에서 그 옛날 목천지가 서왕모를 맞아즐여 잔치를 벌이고 난 뒤 비단 자리가 마구 흐트러져 있는 듯하였다.
검푸르게 깊은 못은 용과 뱀이 비늘을 숨긴 듯 깊이를 엿볼 수 없고, 우뚝하게 솟은 돌은 소와 말이 모습을 드러낸 듯 서로 뒤섞여 있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냇물의 모습은 저 중국의 양자강에 있는 물살이 센 구당협 정도라야 견줄 수 있는 형편이었다. 이는 진실로 하늘나라 장인이 빼어난 솜씨를 숨김없이 마음껏 발휘한 곳이라 하겠다.
우리는 그 광경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넋을 잃었다.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자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바탕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보아도 그 소리라는 것이 기껏해야 큰 항아리 안에서 니나니벌 우는 정도와 같아서 제대로 소리를 이루지 못하였다. 단지 시내에 사는 물귀신의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절의 중이 술과 과일을 소반에 갖추어서 우리 일행을 위로하였다. 나 또한 우리 일행이 가져온 술과 과일로 서로 대접하며 바위 위에서 춤을 추면서 한참 즐기다가 그만 두었다. 내가 억지로 5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
물을 아름다운 구슬 토해내고 / 산은 봄 신의 얼굴보다 짙구나
나에게 겸손함과 자랑함이 없으니 / 다만 그대를 마주보며 즐긴다
저녁에 서쪽 승방에서 묵었다. 밤에는 누워서 조용히 글을 외웠다. 그리고 또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이름 있는 산에 들어온 자는 누군들 그 마음을 씻지 않겠으며, 누군들 자신을 소인이라 하기를 달가워하겠는가마는, 필경에는 군자는 군자이고 소인은 소인이니, 한번 햇볕을 쬐는 정도로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월 21일
큰 비가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김사성이 갑자기 하직하고 비를 무릅쓰고서 굳이 떠났다. 백유량도 함께 떠났다. 기생 셋과 악공도 그들과 함께 떠나도록 하였다. 호남에서 온 여러 사람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절의 누각에 앉아서 불어난 시냇물 구경을 하였다.
4월 22일
아침에는 비가 왔으나 저녁 녘에 개었다. 시냇물에 돌다리가 잠겨서 절 안과 절 밖이 서로 통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중국 한나라 고황제가 흉노족에게 7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던 백등산에 갇혀 있었던 것만 같았다. 사람 숫자가 무려 40여 명에 달하여 양식이 모자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양식을 담은 자루를 헤아려 평소에 주던 양의 반으로 줄였다. 다만 술만은 제한없이 마시도록 하였다. 아마도 수십 항아리쯤 되었을 터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남 선비 기대승의 일행 11명도 비에 막혀 천왕봉에 올랐다가 아직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쌍계사와 신흥사 두 절은 모두 두류산의 한복판에 있다.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구름이 문을 잠근 듯하다.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을 것 같은 데도, 이곳 절까지 관가의 부역이 폐지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양식을 싸들고 무리를 지어 오고가는 자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모두 흩어져 떠나갔다. 절의 중이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세금과 부역을 조금이라도 완화해주기를 빌었다. 나는 그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편지를 써주었다. 산에 사는 중의 형편이 이러하니 산촌의 무지렁이 백성들의 사정은 알 만하다.
행정은 번거롭고 세금은 과중하여 백성과 군졸이 흩어져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돌보지 못하고 있다. 조정에서도 이를 크게 염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등뒤에서 여유작작하게 한가로이 노닐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참다운 즐거움이겠는가? 인숙이 벼루보자기에다가 글귀 한 구절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강이와 함께 차례로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
높은 물결은 우레와 벼락이 서로 싸우는 듯하고 신령스런 봉우리를 해와 달이 갈아놓은 듯하다. 격조 높은 이야기와 빼어난 풍채로 얻은 바가 과연 어떠한가.
시내는 천 층의 눈처럼 솟아나고 숲은 만 길의 푸르름 떨쳤네. 살아 움직이는 생기는 끝없이 넓으니 장엄한 모습으로 높다랗게 우뚝 서 있네.
4월 23일
아침에 떠나려고 하는데, 신흥사 주지 옥륜이 아침을 대접하고 우리를 전송하였다. 두류산에 크고 작은 가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나 분명히 신흥사의 경치가 최고다. 전에 성중려와 함께 천왕봉에서 이 절을 찾아온 적이 있고, 그 뒤 거의 30년만에 하중려와 함께 와서 한여름 내내 머문 적이 있었다.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러 그 두 사람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만 홀로 와서 보니, 마치 은하수 사이에 이르러 어느 날에 뗏목이 올 것인지 까마득히 모르는 것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신흥사 대웅전 안의 부처 앞에는 모란이 살아 있는 듯 꽂혀 있고, 그 사이사이에 기이한 꽃이 섞여 있었다. 바깥으로 나있는 들창에도 또한 복사꽃과 국화와 모란이 울긋불긋 꽂혀 있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이 모든 광경은 우리나라의 절에는 아직껏 없었다. 절은 구례 나루터와 20리 정도. 쌍계사와는 10리 정도, 사혜암과는 10리 정도, 칠불암과는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천왕봉과는 꼬박 하룻길이다.
절을 떠나 칠불암 시냇가에 이르렀다. 옥륜과 윤의가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어 시내를 가로지르게 하였다. 그래서 모두들 천천히 편안하게 건널 수가 있었다. 시내를 따라 내려와 쌍계사 건너편에 이르렀다. 쌍계사의 중 혜통과 신욱이 시냇물을 건너와서 우리 일행을 전송하였다. 건장한 중 3, 4명이 함께 와서 우리 일행이 시내를 건너는 것을 도왔다.
다시 예닐곱 마장을 내려가서 말에서 내려 시내를 건너려 하는데, 전날 우리가 타던 말을 맡아 보살피던 이와 마을 사람 3, 4명이 삶은 닭과 소주를 가지고 와서 우리 일행을 대접하였다. 또 악양 고을의 아전이 대나무를 엮어 가마처럼 만들어서 우리 일행 모두를 매고서 시내를 건넜다. 시냇물이 사나워서 물의 흐름이 몹시 급했고 바닥의 하얀돌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을 건너주던 노복 가운데 넘어지거나 미끄러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잘 건넜다. 누구인들 시내를 잘 건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오히려 때에 따라 잘 건너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시내를 건너 10리 남짓 갔다. 노복인 청룡이 자기 사위와 함께 술항아리를 가지고 오고 소반에다 생선과 고기를 차려 놓았다. 시장에서 파는 것과 똑같았다. 청룡의 처 수금은 예전에 서울 땅에 살았었다. 인숙과 강이가 혼인을 맺어준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다. 여럿이 장난 삼아 그 아낙의 인사를 받는 인숙과 강의를 놀렸다. 배를 타고 점심을 먹었다. 악양현 앞으로 내려가 정박했다. 고을 객사에 들어가 잤다. 강이는 현의 동쪽으로 두어 마장쯤 되는 곳에 사는 숙모를 뵈러 갔다.
4월 24일
새벽에 흰죽을 먹고 동쪽 고개에 올랐다. 이 고개를 삼가식현이라고 하는데, 고개가 높다랗게 하늘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 고개를 오르는 이는 두어 걸음에 세 번씩 가쁜 숨을 내쉬므로 고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두류산 기세가 여기까지 백 리나 내려왔건만, 여전히 높기만 하고 아직 조금도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옹이 강이의 말을 타고 혼자 채찍을 휘둘러 먼저 산을 올랐다. 제일 높은 봉우리 위에 말을 세우더니 돌에 걸터 앉아서 부채질을 하였다. 우리 일행 모두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사람과 말이 비오듯 땀을 흘렸다. 한참 뒤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내가 우옹을 질책하여 "그대는 말 탄 기세에 의지하여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은 모른다. 훗날 능히 의로움에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남보다 앞서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좋겠다"라고 하였다. 우옹이 미안해 하면서 사과하였다. "나는 그대가 당연히 나를 꾸지람을 할 것으로 이미 알았네. 내가 내 죄를 알겠네."
강이가 두류산을 돌아보았으나 검은 구름에 가려 산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산은 두류산보다 큰 것이 없고 한눈에 바라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건만, 많은 사람이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도 오히려 보지를 못한다. 하물며 두류산보다 현명하지도 못하고 가까이 눈앞에 보이지도 않으며 여러 사람의 눈으로도 분명히 볼 수 없는 경우는 어떠 하겠는가?" 그랬더니 모두들 사방을 두루 돌아 보았다.
동남쪽에 파랗게 가장 높이 솟은 것은 남해의 뒷산이고 바로 동쪽에 물결처럼 널리 가득 차서 서리어 엎드린 것은 하동, 곤양의 산들이다. 또 동쪽으로 은은하게 하늘에 솟아서 검은 구름과 같은 것은 사천의 와룡산이다. 그 사이에는 혈맥과 같이 서로 꿰이고 뒤섞여 엉켜 있는 강과 바다와 포구가 경락처럼 얽혀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산하는 그 견고함이 중국 위나라가 보배로 여기는 것 이상이어서 드넓은 바다에 붙어 있고 드높은 성곽에 의지해 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우리 백성들이 조그맣고 추잡한 섬 오랑캐에게 거듭 곤란을 겪고 있으니, 이 어찌 그 옛날 길쌈하는 실이 적은 것은 돌아보지 않고 중국 주나라 왕실이 멸망하는 것을 근심한 과부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녁 늦게서야 하동 횡포역에 도착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인숙의 배낭 속에 있던 과자와 꿩고기 말린 것을 씹어 먹고 추로주 한 잔을 마셨다. 낮에 두리현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나무 밑에서 쉬었다. 모두들 갈증이 심해서 찬 샘물을 두어 표주박씩 마셨다. 그때 짚신을 신고 깃이 곧은 짧은 직령 차림의 사람이 말에서 내려 우리 일행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강이를 보고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서 우리 일행이 가는 곳을 물어 보았다. 그 사람은 다른 아닌 광양의 교관이었다.
그때 장끼 한 마리가 끽끽거리며 울었다. 이백이 활을 들어 시위에 오늬를 메우고 주위를 둘러쌌는데, 장끼가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우리 일행은 지금까지 구름과 물속에 있었으므로 구름과 물이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막 인간 세상에 내려와보니, 보이는 것이란 다름 아닌 광양 교관이 지나는 모습과 날아가는 산꿩 뿐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볼 만하니, 이를 보고 어찌 식견을 기를 수 없겠는가?
저녁에 하동 옥종면 정수리 삼장골에 있는 정수역에 이르렀다. 객관 앞에는 정씨의 열녀문이 서 있었다. 정씨는 승지 조지서의 아내이며 문충공 정몽주의 현손녀이다. 승지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 높은 기상은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 벽 안에 있어도 몸이 춥고 떨릴 정도였다. 그는 연산군이 선왕의 업적을 잇지 못할 것을 알고 10여 년을 물러나 있었지만 그래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부인은 적몰되어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 안고 등에는 신주를 지고 다니면서도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절개와 의리를 모두 지켜낸 것이다.
높은 산과 큰 내를 보고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등 세 군지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해보면, 10층의 산봉우리 위에 다시 옥 하나를 더 얹어놓은 격이요 천 이랑 물결 위에 둥그런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다. 바다와 산을 거치는 3백리 여정 동안에 세 군자의 자취를 하루 사이에 보았다. 산과 물을 본 뒤 인간세태를 보니, 산속에서 열흘을 지내면서 마음 속에 품었던 좋은 생각이 하루만에 불쾌한 생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훗날 정권을 잡은 이가 산수를 구경하러 이 길을 와본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산속에는 바위에다 이름을 새겨둔 것이 많으나 세 군자의 이름은 결코 바위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길이 세상에 퍼져 전해질 것이니, 만고의 역사를 바위로 여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홍지가 또 숙수를 시켜 술과 밥을 역관에 보내온 지도 벌써 4, 5일이나 되었다. 생원 이을지와 수재 조원우가 와서 보았다. 날이 어둡자 을지의 부친이 술을 가져왔고 조광우도 왔다. 밤에 우점에 갔다. 방 하나의 크기가 겨우 한 말 정도였다. 그래서 허리를 구부려 들어갔다. 방은 다리를 뻗을 수가 없을 정도였고 벽은 바람도 가리지를 못했다. 처음에는 답답하여 견디지 못할 듯싶더니, 조금 뒤에 네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베개를 뒤섞어서 단잠을 자면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 광경을 보면, 사람의 습성이란 주의하지 않으면 잠깐 동안에 낮은 쪽으로 내려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도 그 사람이고 뒤에도 같은 사람이었는데, 전날 청학동에 들어가서는 마치 신선들이 된 듯해도 오히려 만족해 하지를 않았었다. 또 신흥동에 들어가서는 모두들 신선이 된 것 같아 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은하수를 걸터 타고서 하늘에 들어가지나, 학을 부여잡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가 인간 세상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뒤에 와서는 모두들 좁은 방안에 몸을 굽혀 잠을 자면서 또 그것을 자기의 분수로 달게 받아 들이고 있다. 이것은 비록 현재의 지위를 편안하게 여기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수양한 바가 높지 않아서는 안되며 머무는 것이 작고 낮아서는 안된다. 또한 착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악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이 되느냐 끊임없이 퇴보하는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도 단지 발 하나 까딱하는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이다.
4월 25일
역관에서 아침을 먹고 각자 흩어져 떠나려 하니 왠지 가슴이 아파서 잠시 동안이나마 서로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인숙은 서울에 살고 있고, 강이는 사천으로 돌아가야 하며, 우옹은 초계로 돌아가야 하고, 나는 가수에 살고 있으며, 홍지는 충청도 보은에 살고 있다. 모두들 이제 나아가 오륙십 내지 칠십줄에 들어서는데 서로가 각각 2, 3백리 내지 5백리 또는 천리 가까이 떨어져 있다. 훗날 다시 만난다는 것도 기약하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어찌 이별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강이가 술잔에 술을 가득 붓고서는 "지금 이 순간의 이별에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하였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말을 잊는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모두들 할 말을 잊고서는 이내 말을 타고서 떠났다.
진양 수곡면에 있는 칠송정에 이르렀다. 높은 누각에 오른 뒤에 배를 타고 다회탄을 건넜다. 인숙은 강을 따라서 내려갔다. 강이는 다시 한 마장을 더 가서 작별하였다. 나는 우옹과 함께 쓸쓸히 돌아왔는데, 망연히 넋을 잃고 있었다. 지리산으로 떠나던 날 우옹과 묵었던 뇌룡사에서 잤다. 다시 우옹과도 이별을 했다. 활 같은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 있고 드문드문 새벽별이 떠 있었다. 이와 같이 서글픈 마음은 정녕 춘정에 겨워하는 처녀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이 내가 두류산에 자주 다녀서 그 사정을 상세히 알 것이라고 하여 나로 하여금 여행의 전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내 일찍이 두류산을 덕산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째였고, 청학동과 신흥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고, 용유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으며, 백운동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으며, 장학동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다. 그러니 어찌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하기를 번거로워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나름대로 평생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직 화산의 한쪽 모퉁이를 빌어 그곳을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오곤 하였으니, 이렇게 했던 일이 열 번이었다. 이제는 박이 시골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걸어다니는 하나의 시체가 되어 버렸다. 이번 걸음은 또한 다시 가기 어려운 걸음이었으니, 어찌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내 이를 두고서 일찍이 시를 지었다. 다음과 같다.
죽은 소 갈비뼈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주파했으나 썰렁한 까치집같은 가수마을에 세 차례나 둥지를 틀었네
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몸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온갖 계책 모두가 어긋났으니 이제는 이미 방장산과의 맹세조차 어기게 되었네.
이번에 모였던 여러 사람들이 다 길 잃은 사람이니, 어찌 나만 허둥지둥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다만 술에 취해 즐거워하는 이들을 위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면서 그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였을 뿐이다.
조 식(曺 植, 1501~1572)은 호가 남명으로, 경상도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그의 숙부 조원경이 1519년 기묘사화 때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그의 부친 역시 관직을 박탈당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재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 양성에만 전력하였다. 그리고 1561년에는 지리산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생을 마칠 때까지 지리산에 묻혀 살았다. 그것이 오늘날 그를 조선 최고 학자의 하나로 우뚝 서있게 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그는 학문이란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하고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마음의 도를 터득하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을 곧게 하고 몸소 의로움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그의 철학이었고 삶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높은 학문과 고매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산천재에서 2km 떨어진 곳에 덕천서원과 세심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조식은 이 글을 쓰기 전에 이미 17차례나 지리산 곳곳을 유람한 일이 있을 정도로 지리산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1558년 음력 4월 10일부터 25일까지 사천-하동-섬진강을 배로 이동한 뒤 쌍계사를 비롯한 화개동천을 유람하고 이 글을 썼을 뿐 아니라, 그때 결심한 바가 있어 3년 뒤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평생을 마쳤다.
이 글은 [남명 선생 문집] 4권에 실려 있는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이다. 1995년에 경상대 남명학 연구소에서 번역한 것을 원문과 대조하여 수정, 보완하되 문맥이 이상한 경우에는 이후 판본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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