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는 시제가 없다 / 제은숙
그리움은 과거로부터 걸어 나오는지 현재에서 뒷걸음치는지 알 수 없다. 파도나 바람이 시작되는 것처럼 어딘가에서 문득 일어난다. 천천히 다가앉아 손을 잡는가 하면 숨이 멎을 듯 달려와서 안기기도 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늦은 저녁에 도착하기도 한다. 어떤 그리움은 연기처럼 빠져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껏 나를 관통한 그리움들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곁에 남은 몇몇의 그리움 조각들을 안고 온전한 그리움이 되기 위해 흘러가고 있다.
식탁 위에 김치국밥이 놓여 있다. 혼자 먹기 위해 만든 음식은 왠지 서글프다. 냄비에 물을 채우고 대충 썬 김치와 굳은 찬밥 덩이를 넣는다. 적당히 끓어서 박작박작 소리가 나면 불을 끈다. 맛을 보태거나 색을 더하는 재료들은 없다. 냄비째 불어가며 허겁지겁 삼킨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도 김치국밥을 먹었다. 먹는 시기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잘 익은 배추김치만 있으면 계절을 불문하고 끓였다. 할머니는 종종 “시원한 김치국밥 좀 끓여라.” 했다. 할머니가 드시고 싶을 땐 어김없이 차려졌고 엄마가 끓여준 김치국밥은 언제 먹어도 입맛이 돋았다. 외할머니와 엄마와 내가 둥근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다. 뜨겁고 시큼하고 끈적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졌다. 국밥과 할머니와 오래된 시간은 기억 너머에 저장되었다.
엄마의 김치국밥은 쌀을 불리는 과정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마른 멸치와 생무로 육수를 내었다. 불린 쌀과 육수를 함께 삶다가 냄비에 뜨물이 보얗게 번지면 곱게 썬 김치를 넣었다. 쌀은 푹 익어야 하고 김치는 아직 아삭해야 하므로 시간을 맞추는 요령이 필요했다. 거기에 콩나물 한 줌이나 굴이 들어가기도 했다. 따개비나 미역, 북어 따위가 든 날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홍 고추와 대파를 얹어 한소끔 더 끓였다. 특별한 조리법은 없었지만 엄마의 김치국밥에는 시간과 정성이라는 귀한 양념이 들어갔다.
끓여 준 엄마보다 할머니가 먼저 보고 싶으니 김치국밥은 할머니의 음식이다. 육고기를 입에 대지 않던 할머니가 유독 좋아하신 음식이어서도 그렇거니와 드실 때 오물거리던 입술 모양과 딱딱 틀니 부딪치던 소리가 정겹게 남아 있는 까닭이다. 유형의 물질이었던 김치국밥이 맛과 냄새 혹은 소리로 변했다가 어느새 할머니라는 심상으로 저장되었고 때때로 무형의 감정인 그리움으로 일어난다. 한번 생겨난 감정은 멀지 않은 훗날로 소용돌이쳐 기어이 생사의 경계까지 나를 이끈다. 그러면 충만했던 온기는 예견된 비애로 교체되어 마음 안은 허기로 가득 차 버린다. 그리움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인 현재의 식탁과 할머니를 만날 수 없을 미래의 어느 날까지 순식간에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그리움에는 딱히 어울리는 시제를 명명할 수 없다.
할머니는 어쩐지 그리움과 퍽 어울린다. 옷차림이 정갈하여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읽고 쓰지는 못했지만 말씀은 유창했다. 우스갯소리를 잘해서 머무는 자리가 유쾌했고 장구춤 맵시 또한 근사했다. 지나간 일에는 구슬픈 가락을 곁들여 이야기를 잇다가 먼저 글썽였으므로 나도 따라 울었다. 일찍 돌아가신 내 외할아버지의 삶, 톳밥이 지겨워서 먹기 싫더라는 일화, 할머니 친정이 넉넉했어서 산나물 이름은 잘 모른다는 이야기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가르침, 외갓집 여름 마당에 때마침 피어 있던 붓꽃과 채송화. 어찌 그 모든 것들이 그립지 않을 수 있으랴.
늘 당당했던 할머니가 근래 부쩍 쇠약해졌다. 십여 년 전 둘째 외삼촌이 세상을 떠난 뒤로 자주 편찮으셨다. 예기치 않은 거리두기로 뵙지 못한 동안에는 집에만 계셨던 탓에 더 기운을 잃은 듯했다. 작년 설에 부숭해진 얼굴로 “숙-아” 하고 새겨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나를 붙잡고 앉아 연신 눈가를 훔치던 마른 손등도. 바쁜 엄마를 대신해 우리 삼남매를 업어준 손이었고 어린 볼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토닥이던 손이었다. 그 부드럽던 손가락은 어디에 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는지, 애틋했던 감정들은 어느 곳으로 흘러가고 나는 겨우 명절 때만 찾아가는 무심한 손녀가 되었는지, 김치국밥을 앞에 두고 할머니가 영원히 그리워질 시점에 대해 생각하고만 있다.
김치국밥은 할머니의 유년에도 존재했을 터이니 아주 먼 과거에서 온 유별난 입맛으로 내 아들에게까지 전해질 것이다. “엄마의 외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음식이야.”라고 말하면 그 녀석 또한 먼 훗날에 뜨끈한 국물을 넘기며 자신의 엄마에 이어 외증조 할머니도 울렁울렁 떠올리지 않을까. 시작점을 알 수 없는 물결들이 한데 뒤섞여 마침내 큰 파도가 되고 내 발끝에 한꺼번에 당도하듯 멀거나 가까운 기억들은 모두 녹고 뒤엉키어 그리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움은 혼자 오지 않고 과거와 더 먼 과거의 기억까지 데려와서는 만나지도 못할 미래에 부려 놓을 것이다. 그러니 눈앞에 놓인 음식과 지난 기억과 미래가 혼재된 그리움에는 어떠한 시제도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생을 다하면 실체는 사라지고 그리운 감정만 남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워질 순간을 향해 무화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모든 언어들의 끝에도 그리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과거의 할머니는 함께 지낸 나날만큼 길게 꺼내야 하고 현재의 할머니는 못 뵙는 계절처럼 안타깝게 건너뛴다. 미래의 할머니는 내 남은 목숨 동안 머물렀다가 내 아들에게서 잠깐 일렁인 후 사라질 예정이다. 어떤 존재로부터 비롯된 그리움은 기억하는 이와 함께 소멸되고 시간은 무연히 흐른다. 다음 세대가 간직한 기억들이 새 그리움의 파도를 일으켜 출렁이는 세월의 바다를 완성해 간다.
김치국밥은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지난날이었고 다가올 일들에 미리 울컥해지는 그리움을 품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시공간을 밀고 접어서 한없이 가까워지는 시간, 그리웠고 그리우며 그리울 순간의 또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