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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교프랑크푸르트교당 원문보기 글쓴이: 고요한지혜
상산 박장식 종사님 관련 일화
상산 박장식 종사님의 출가 1
상산 박장식의 회고이다.
나는 단순히 어머님(계타원 정형섭) 회갑을 모셔 드린다는 생각으로 총부에 왔고,
왔기에 대종사님을 뵙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대종사님으로부터 선방에서 공부를 해 보라는 말씀을 받들고
열흘을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공회당 뒤에서 어느 분이 쇠죽을 끓이고 있었다.
세상에서는 그때만 해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퍽 천하게 보는 때였다.
그런데 다음날 어제 쇠죽을 끓였던 그분과 똑같은 사람이 예회시간에 나와 사회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이상해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분의 대답은 내가 보았던 쇠죽 끓이는 그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산업부원이었던 것이다.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라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귀천이 없이 평등한 삶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인간애를 형성해가는 단체,
이곳이 바로 내 생애의 지표를 발견한 도량이 아니었던가.
내가 총부에 와서 대종사님을 뵙고 그 자비하신 성안에 감동받은 바도 컸지만
이에 못지않게 생활하는 모습에서 내 자신의 인격 향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계기를 만난 것이다.
그 당시는 일제시대 지만 자력생활을 부르짖는 사회풍조가 일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양반과 상놈, 적서 등 차별제도 속에서 귀함과 천함의 분별의식이 잠재해있어
안일한 생활양식으로 살아가려는 일반적 태도였다.
이렇게 자력으로 누구나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이념 제시는 획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통사회에 새로운 사회윤리로 등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산 박장식 종사님의 출가 2
상산 박장식의 회고이다.
원기 25년 일제 당국이 대종사님께서 일본에 다녀와야 한다 하여
나는 대종사님을 모시고 부산에 다녀온 후 경진(원기 25년)동선에 입선하게 되었습니다.
선 기간 동안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고달픈 인간생활의 수고로움을 딛고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설계를 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면 무엇이든 힘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은 먹었으나 노모(계타원 정형섭)가 계시고 병중에 있는
처와 다섯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으로 전무출신에 대한 생각을 접고 재가로서 공중사에 일조하려 했습니다.
하루는 나에게 혜산 전음광 선생이 말했습니다.
“대종사님 뜻도 계시니 이왕이면 전무출신으로 공중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복잡한 사가 일을 염려하신 대종사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정안심행(매타원)으로 하여금 가정 일을 조력하라 할 테니 안심하고 공사에 임하라.”
당시 누구나 전무출신 하면 총부나 각 교당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집에서 내왕하며 일을 보았습니다.
내가 전무출신을 하는 데는 대종사님의 크신 뜻과 정안심행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원기 26년 2월 23일,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공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박장식의 총무부장직 사임
상산 박장식의 회고다.
나는 대종사님이 열반하시기 전 내게 주어졌던 총무부장직을 사임할 것을 말씀드렸다.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도 수석부장인 충무부장 자리에 앉아 있기가 민망스러웠다.
전무출신을 서원한 연조도 짧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 힘이 부족하였으며 어른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마음으로 허용이 안 되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 “총부의 정산 교감이나 영산에 주산 지부장이 총무부장직을 맡아 주면
저는 시키시는 대로 다른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리하여 나는 원기 28년 4월 26일 공익부장 일을 맡게 되었다.
남원교당 교화의 시작
상산 박장식의 회고이다.
나의 어머님(계타원 정형섭)께서는 원기 22년 당신의 회갑기념으로
남원에다가 교당을 창설했으면 하시는 것이었다.
이런 어머님의 뜻을 따라 나는 곧바로 남원읍 향교리에 한옥(4칸 1동)을 신축하고 남원출장소 간판을 걸었다.
그리고 혜산 전음광, 의산 조갑종님 등이 교대로 순회법회를 보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남원읍 교화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정식으로
제 1대 교무님에 경타원 정관음행 선생님을 모셨고 정례법회를 개최하였다.
원기 23년 3월 새 회상의 원음이 남원 땅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명예롭게도 초대 교도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초창기 교화의 어려움은 어느 곳이나 다 겪어야 하는 애로였다.
교당 창설 1년 후인 원기 24년 법당이 좁아져 동충리에 집을 새로 짓자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교당 신축의 대역사는 14칸에 달하는 집이었다.
그리하여 이해 7월 지부로 승격되었고 원기 25년 3월에는 대종사님을 모시고 낙성봉불식을 가졌다.
대종사님께서는 “불법연구회는 불법을 시대화·대중화·생활화하는 종교이며,
사실신앙 진리신앙으로 미신스러운 행위는 절대 하지 말라. 참답고 실다운 수행으로 생활에 활용하라.”고
불교혁신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남원은 성춘향이 고을로도 유명하지만 불교의 교세가 활발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교도 중에는 사찰에 드나드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원기 23년 어느 날 향교리에서 경산 조송광 선생이 설교를 통해
절에 모신 부처님이 미신스럽다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이 흙과 손으로 눈과 코 등을 만들어 놓고
부처님이라 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하여 절에 다니던 분들의 반발을 사게 된 것이다.
이 후유증은 바로 고소를 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희사금을 받아 착복한 협잡꾼이라는 것이다.
불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물품을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관음행 교무님이 구금(拘禁)되었다.
1주일 동안 경찰서에 구속시켜놓고 장부를 조사하며 한 사람씩 대질 심문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사한 결과 아무 것도 잡힐 것이 없었다.
집은 어머니 회갑기념으로 지었고, 유지비만 형편 따라 냈으므로 걸릴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고소한 사람들은 집을 짓고 갑자기 사람들이 모이니 무슨 흑막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일주일 후 교무님은 무사히 풀려 나오시게 되었다.
교단사적으로 교무가 옥중고를 겪기는 아마 제일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교단적으로 일제치하에서 수난을 받은 것이 이뿐이 아니었지만 지방교무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정법으로 운영해 나가므로 일시적 고통은 따랐지만 큰 변화는 있을 수 없었다.
정전에 불교혁신론이 먼저
대종사님 당대에는 누구나 자기의 생각을 말씀드리는데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상산 박장식은 이런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하나 배우며 나름대로
의견을 이것저것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정산종사님께서 《불교정전》 편찬에 불교혁신론이 먼저 나온 것을 보시고는
대종사님께 “우리 교리가 먼저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진언을 드렸다.
이에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무엇이든지 동기가 있어야 한다.
체모만 보지 말고 여러 가지 상황과 동기와 과정을 보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교혁신론이 먼저 나오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솔성요론의 순서
솔성요론 제 1조와 제 3조를 바꾸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상산 박장식의 회고다.
대종사님께서 《정전》을 편찬하실 때에 제가 곁에 있다가
솔성요론 각 조목의 순서를 신·해·행·증으로 하기 위하여 제 1조와 3조의 위치를 바꾸면
좋을 것으로 사뢰었더니 승낙하여 주시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 표어
상산 박장식의 회고이다.
경진년(庚辰年) 동선 중 원기 26년 1월에 불공(佛供)에 대한 표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종사님께 말씀드렸다.
그동안 무시선 무처선은 나와 있었다.
대종사님은 이에 대해 선원 대중 모두에게 표어를 만들어 보라고 과제를 주셨다.
대종사님께서는 이미 심중에 구상이 다 되어 계시면서도 제자들의 능력과 역량을 개발 시키고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마의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문제를 던져 주셨던 것이다.
대종사님은 작은 일에서 큰일에 이르기까지 제도나 규율과 교리형성에 이르기까지
단독으로 하명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대중의 뜻을 존중하시고 공의에 의해서 결정하셨고, 그리고도 미치지 못한 점을 채워주시면서
대중들을 이끌고 가르치며 선도하셨다.
그래서 불공에 대한 표어도 선원 대중들로 하여금 관심 있게 깊이 생각하고 궁구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신 후 결정하셨다.
불공에 대한 표어가 ‘무시불공 무처불공’의 안이 나왔으나
대종사님께서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 지으셨다.
이 표어가 나온 후 정전의 불공법의 내용도 다소 수정 편집에 임하게 되었다.
교리도의 사요
상산 박장식이 대종사님께 여쭈었다.
“《육대요령》의 교리도에는 사요(四要)가 들어 있는데 《불교정전》 교리도에는 어찌 빼셨습니까?”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신앙문과 수행문 속에 사요의 정신이 다 들어 있으므로 빼고 보은의 대요로 천지은에 응용무념의 도,
부모은에 무자력자 보호의 도, 동포은에 자리이타의 도, 법률은에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는 세우는 도를 넣었다.”
교리도의 보은 즉 불공
상산 박장식의 이야기이다.
불공하면 음식들을 올리고 그 앞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아는데
대종사님께서 사은 밑에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란 말씀을 하셨거든요.
제가 대종사님께서 교리도 만드실 때 말씀드렸지요.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있으니까 위에다 따로 ‘보은 즉 불공’ 그렇게 하실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종사님께서 “아, 위에 사은이 있고 하니, 보은 즉 불공이란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이냐?”
그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교리도 제정
상산 박장식의 이야기이다.
대종사님께서 새 교리도(敎理圖)를 제정하실 때에 대중에게 “모두 다 하나씩 써내라.” 하시니,
모두 다 같이 소견대로 써냈습니다.
그러자 대종사님께서는 이를 다 보신 후,
연필로 새로 초안을 해서 “가서 정서(淨書)해 와라.”고 하시어 제가 가서 정리하여서 오니,
대종사님께서 야회 시간에 이를 발표하시면서 그렇게 기뻐하시고 환희하시던 성안이 눈앞에 선합니다.
그때에 하셨던 말씀 중에 “하도낙서(河圖洛書)에 거북이가 팔괘(八卦)를 지고 나왔다고 하는데,
마치 교리도가 비슷하다.”고 하시며 기뻐하셨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일원기로 회기를 제정하다
불법연구회 회기(會旗)는 회체(會體)가 성립되기 전인 방언조합 시절 9인 단원들이 산상기도 할 때부터
팔괘기(八卦旗)를 단기(團旗)로 제작하여 사용하여 왔다
팔괘 단기는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창립 뒤에도 그대로 회기로 사용하였다.
원기 20년 총부 대각전을 신축하고 심불 일원상(心佛一圓相)을 봉안(奉安)한 것과
별도로 회원의 단결과 조직을 의미하는 회기를 팔괘기로 그대로 사용하였다.
원기 24년부터 교정원에서 정식으로 심불 일원상을 각 교도들의 집에 봉안할 것을 장려하자,
서정원에서는 각 지부에 회기를 게양할 것을 지시하였다.
총부를 비롯하여 지방에까지 회기인 팔괘기를 일률적으로 게양하도록 하자니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팔괘 모양의 기(旗)와 법당에 봉안한 심불 일원상이 서로 다른 점도 있고,
일견 주역의 점괘를 상징하므로 미신스런 단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개선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 여론을 숙지한 대종사님께서는 원기 27년경 측근의 실무자에게
일원기(一圓旗)를 구상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총무부장 상산 박장식 등 당무자들은 일원상의 형태, 두께, 색깔 등에 대해 검토하였다.
둥근 원에다가 파랑색, 검정색, 노란색, 그리고 빨강색도 칠해 보았다.
이러한 정보가 불법연구회 총부 사찰 담당 순사에 의해 이리경찰서로 들어갔다.
하루는 이리경찰서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주는 이리경찰서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대종사님께서 총무부장 박장식에게 말씀하였다.
“근자에 저 사람들은 직접 나를 출두하라는 일이 없었는데
뭔가 자기들로서는 광장이 중요한 일인 모양인데 장식이 같이 가보자.”
이리경찰서장 하시구찌(橋口良三)와 고등주임 나이 또는 박장식이 남원에서 운수업을 할 때부터 지면이 있는
데다 경성법전을 나온 인테리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단히 신중한 문제가 있는 태도로 말을 꺼냈다.
“새로 회기를 만들었다는데 이는 대단히 불경스럽소.”
“우리 수행의 표본인 일원상을 회기로 만들었는데 무엇이 불경스럽습니까?”
“대일본제국의 히요마루의 가운데를 도려 내 버리고 테두리만 가지고 회기라고 하니
어찌 불경스럽지 않단 말이오?”
자기들의 국기를 모독하였으니 대단히 불경스러운 짓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원상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데 히요마루를 도려내어 회기를 삼았다니 어불성설입니다.”
아직도 회기를 확정하기 전이고 일원상 색깔도 여러 가지 구상중인데,
내부에서 고의적으로 나쁘게 보고한 것이라고 박장식이 설명을 상세히 하니 그들은
“아 그러냐며 미안하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로 구상하여 그해 대종사님은 흰색 베에다가 감청색 원을 그리는
일원기(一圓旗)로 확정하여 불법연구회를 대외적으로 상징하는 회기가 되었다.
춘원의 마지막 작품
상산 박장식의 회고이다.
나에게 있어서 원기 35년, 그러니까 1950년 민족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을 생각하면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우리나라 문학계에 크게 이름을 떨쳤던 춘원 이광수 선생에 대한 회고담 한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단에서는 유일학림을 개교하고 교가가 있어야 함을 느끼고 그 교가 작사를 의뢰하기 위해 나는
원기 35년 6월 중순경에 서울에 올라갔다.
이때 나는 현 대산종법사님을 모시고 서울 효자동 춘원 이광수 선생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가에 대한 배경 설명을 하고 부탁했더니 흔연히 허락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서
그 당시 부산에서 공연 중인 연극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은 부산 여자교도들이 춘원선생 작인 이차돈의 전기를 극화하여 부산 국제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으니
한 번 가보실 뜻이 없느냐고 묻게 되었다. 춘원선생은 여기에 호감을 갖고 응하며 동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난 6월 23일 나는 교가 가사를 찾으러 갔다.
이 노래가사가 지금 성가집에 실려 있는 ‘불자의 노래(18장)’이다.
춘원선생은 가사를 내주면서 사정이 있어서 부산행이 여의치 못하다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이 춘원선생과의 마지막 작별인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틀 후인 6월 25일
나는 아침 기차로 총부에 내려오게 되었다.
유일학림 교가를 부탁한 것은 그분이 불교에 조예가 깊은 문호일 뿐 아니라
대종사님께서 그분이 지은 《이차돈의 사》 서문을 들으시고 그 사람은 초 견성한 사람이라고
크게 찬양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춘원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 속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북에 납치되었다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월 23일 교가를 찾으러 갔을 때 처음 계획했던 대로 나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더라면
무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추장단지 사건
상산 박장식의 회고이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웃지 못 할 사건은 나의 첫 미국 여행길에서 일어났다.
원기 59년, 국제종교회의에 참석차 동행한 일행 중, 원남교당에 다니던
한 남자교도와 내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대충 짐을 풀어 놓고 바로 이어질 관광채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온 천장과 벽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놀란 정신을 수습하고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원인인즉 그 교도가 심부름으로 가지고 온 단지속의 고추장이 따뜻한 비행기 속에서 알맞게 발효되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급기야 기압을 견디지 못하고 이곳 이국땅 고급 호텔에서 폭발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수치심과 당혹감으로 가슴이 탁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밖에서는 함께 갔던 20여 명의 일행들이 잔뜩 들뜬 얼굴들로
구경 가게 어서 나오지 않고 뭐 하느냐고 야단들이었다.
관광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는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 채 우리 둘은 황급히 오가며 그것을 닦아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다행히 벽면이 페인트로 되어 있어서 감쪽같이 닦아졌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세계종교정상회의
상산 박장식의 회고이다.
원기 60년 10월 19일부터 24일까지 UN창설 3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세계종교정상회의에 ‘세계 인류는 하나’라는 주제로 열린 이 회의에는
한국종교 대표로 천도교 최덕신 교령이 참관인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
이 기사를 보신 대산종법사님께서는 미국에 있는 이제성(원산) 교무에게 급히 연락을 하시어
“상산에게 이 회의에 참가하라.”고 전달하도록 하셨다.
나는 회의가 있는 날, 10시 시작임에도 9시에 미리 가서 빈자리를 잡아 최덕신 교령을 기다리는데,
회의가 시작되어도 최덕신 교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서있고 해서 할 수 없이 맡아 놓은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최덕신 교령이 나타났다. 그래서 내 자리를 내주었더니
최덕신 교령은 미안해하며 사양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참가한 것이고, 최덕신 교령은 한국을 대표해서 온 것이니
최덕신 교령께서 앉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기어이 앉게 하고, 나는 뒤에 서 있었다.
이것에 감동했는지 그는 귀국하여 중앙총부를 방문하였다.
이날 추계 교역자 훈련 중인 자리에서 최 교령은
“동방의 종교, 특히 한국에서 일어난 종교의 사명은 크며 종교는 말을 떠나 행동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우리는 한 형제이고, 하나입니다.” 라고 뜨거운 형제애를 표현했다.
그리고 원불교 뉴욕교당을 방문한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대산종법사님을 형님으로 모시겠노라고 했다.
미주 교령으로 첫걸음
원기 60년 4월 상산 박장식은 미국 주재 교령으로 발령을 받고 뉴욕으로 떠나게 되었다.
뉴욕교당은 초타원 백상원 교무가 이미 주재하고 있었다.
이때 대산종법사님은 박장식에게 격려 말씀을 하셨다.
“미주 종법사로서 해외교화의 선봉이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해외교화의 터전을 닦으라.”
앞으로 세계를 무대로 하는 해외 종법사 제도의 구상이었었다.
그러나 박장식은 대소사간의 일들을 종법사의 명령에는 수화(水火)를 피하지 않고,
총부의 지시를 받아 수행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신임 종법사께 오체투지를
원기 79년 대산종사의 종법사 재임 33년을 마치고 수위단회에서
원불교 제 11대 종법사위에 좌산 이광정 종사가 당선되었다.
이에 종법사 당선을 알리는 총부 종소리가 울렸다. 교단 최초로 생전에 종법사위를 양위하는 일이었다.
남자원로원에서 신임 종법사 선출의 종소리를 들은 교단최고 원로인 84세의 상산 박장식 종사는
법복을 입고 원로원을 나섰다.
이에 양산 김중묵 종사, 법산 이백철 종사 등 몇몇 원로들이 함께 상산종사를 따라 나섰다.
대각전 솔숲을 따라 내려와 종각을 지나 법은관을 향했다.
이때 총부구내 대중들은 법은관 입구에 운집한 가운데 법은관 2층 수위단회의실에서
남녀 수위단원들이 새로 선출된 좌산 이광정 신임 종법사를 모시고 나와
영모전에 종법사 당선 봉고하러 가기 위해 계단을 따라 내려와 법은관 출입구를 나오고 있었다.
상산종사는 신임 종법사가 현관문을 나서자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의 절을 올리었다.
함께 나온 원로들도 엉겁결에 상산종사가 절을 올리자 신임 종법사께 절을 올리고
신임 종법사도 서로 오체투지의 절을 올리게 되었다.
상산종사가 예를 올리는 모습을 본 대중들은 감동에 감탄할 뿐 누구도 말을 할 수도 없이 침묵만이 흐르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감동의 물결 속에 다 같이 새 종법사와 상산종사께 경배를 올렸다.
한참을 지나서야 대중들은
‘어찌하면 몸도 불편하신 최고 어른이 저렇게 감동스런 오체투지의 예를 올릴 수 있을까.’하고
고개가 숙여 젖다. 그리고 ‘과연 상산종사님이셔!’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 본 대중들은 마음속으로 ‘과연 우리 원불교야, 원불교’하며
가슴 뭉클한 마음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상산종사는 좌산종법사의 직접 스승이요,
좌산종법사는 상산종사의 제자 중에서도 한참 아래 제자인 58세였다.
또한 대산종사 뒤를 이어 상산종사께서 종법사위에 오르셔야 된다고
생각하는 대중들이 많았었던 분위기였었다.
이때 한 사람이 “상산종사님께서 종법사위에 오르셔야지오.” 하자
상산종사는 “그 자리는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일하는 자리이니 젊은 사람이 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었다.
신임 종법사께 절을 올리고 원로들은 원로원으로 돌아오고
신임 종법사와 수위단원들은 영모전에 신임 종법사 당선 봉고를 올리기 위해 출발하였다.
영모전에 봉고를 마친 신임 종법사와 수위단원들이 원로원으로 교단 원로님들께 인사를 온다고
원로원으로 연락이 왔다.
원로들이 신임 종법사를 맞이하기 위해 원로원 문을 여는 순간
막 도착한 신임 종법사 일행이 상산종사와 원로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의 절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신임종법사와 상산종사를 비롯한 원로들과
수위단원들이 같이 오체투지의 절을 하는 모습에 함께 한 대중들은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진한 감동의 여운이 남았다.
대중들은 한결같이 “이것이 원불교야! 이것이 대종사님 제자들의 모습이야! 이것이 원불교의 저력이야!”
하며 두 눈에 이슬이 맺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