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00자 10.9매 13.9.13 게재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 考 8
인천인의 애환이 실린 가장 인천다운 거리 신포동
이방에 사는 인천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켜
중구 신포동은 주변 동리들과 마찬가지로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터진개’라는 우리말 지명과 ‘탁포(坼浦)’라는 한자 지명이 전한다. 한자 탁(坼)이 찢다, 터지다의 뜻을 가졌으므로 같은 지명인 것이다.
개항 직후인 1894년 ‘대조선 경기 인천부 탁포현 토지를 일본인에게 매매’한 것을 인천 감리(인천의 행정과 통관 업무를 가졌던 관장)가 확인한 문건, 1896년 ‘인천 각국지계 탁포 화재사건’에 대한 기록, 1899년 ‘인천 탁포리의 형사사건’ 기록, 그리고 1904년 ‘외부(外部. 현재의 외교부)의 인천 탁포 토지매매’ 기록 등이다. 당대에 공문서들은 한자 지명 탁포로 적었고 민간에서는 터진개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터진개 일대가 전부 오늘의 신포동이었다고 특정하기는 어렵다. 답동사거리에서 신포동 쪽으로 치우친 방향에 바다를 향해 탁 터지듯이 열린 개울과 갯벌이 있었고 그걸 터진개라고 부른 것이다. 지금의 가톨릭회관 쪽은 옛날에 붉은 흙이 드러나는 절개지였다. 도로를 내기 위해 땅을 절개하기 전 언덕이 있었고 탁포현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03년 인천부의 중심이 원인천(현재 관교동)에서 개항장지구로 옮겨지고 부내면 명칭이 옮겨갈 때 이곳은 신창동(新昌洞)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위에서 인용한 기록들에 나타나듯이 서구열강의 공동임차지인 각국지계에 속했던 이 지역의 토지는 을사년의 보호조약(2차한일협약) 이전 이미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거류지를 벗어나 옛 청국지계는 물론 각국지계를 잠식하고 조선인 거주지역으로 세력을 뻗쳤다. 지명도 자기들 식으로 바꾸었는데 터진개는 현재의 신흥동 일대를 지칭하던 화정(花町. 하나마치)에 포함시켰다. 신흥동 이야기를 쓸 때 자세히 말하겠지만 화정은 기녀들과 사창가가 있는 거리를 뜻한다.
1914년 인천부의 지명을 전면적으로 일본식으로 바꿀 때 이곳은 신정(新町. 신마치)로 바꾸었다. 신정은 붙이기 만만한 지명이었다. 일본에는 쿄토(京都), 오사카(大阪), 후쿠오카(福岡), 아오모리(靑森) 등 여러 도시에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서울과 대구 등 큰 도시에 붙였다. 한때는 터진개를 개포동(開浦洞)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터진개, 탁포 재래지명은 계속 사용되었고 기록이 1920~30년대 신문 잡지에 남아 있다.
‘인천 제일의 비밀거리 터진개를 찾아가니 신정(新町) 일본인 상점이 빙 둘러싼 곳인데 굴뚝 속 같은 좁은 벽 틈으로 간신히 기어들어가니까 천만 의외에 색주가 10여호가 오붓하게 들어앉아 있다’(월간 「별곤건」 1928.8.1.).
일본인들이 인천을 장악하고 30여 년 만에 오늘의 신흥동과 답동 일대에 사창(私娼)이 들어섰다. 터진개 거리 전부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일부 골목에 창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두운 구석이 있었으나 터진개 지역은 음식거리와 소비재를 파는 저자가 형성되었고 좋은 음식점들과 표관(瓢館 1909년 개관)이라는 근사한 극장도 있었다. 표관은 싸리재의 애관(愛館)과 함께 인천의 문화를 선도했는데 6·25 전쟁 때 무너지고 한동안 공터로 남아 있다가 외환은행이 섰다.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1일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로 바꿀 때 이곳은 신포동(新浦洞)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갖게 되었다. 뜻을 새기면 ‘새로 생긴 포구’이다. 차라리 탁포동으로 하는 게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신포동 거리는 인천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화선장(花仙莊) 같은 고급음식점과 양품점이 계속 문을 열었고, 골목 안에는 값싼 선술집, 순대국집 들이 들어서고 저자거리는 확장되었다. 인천인들은 여기서 삶의 파도에 부대끼고 위안을 나누면서 6·25전쟁의 고비를 넘고 산업화의 언덕을 넘었다.
신포동은 1970년대에 주변의 답동, 신생동, 사동을 통합한 행정동이 되었다. 지금은 남동구, 연수구 지역에 밀려 옛날의 영화(榮華)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근·현대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겪은 거리, 인천인들의 숨결과 애환이 실린 가장 인천다운 거리이다. 이방(異邦)에 사는 50대 이상의 인천인들에게 신포동 거리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로 떠오른다고 한다. 가슈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추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고향을 대표하는 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