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국 천주교 신자는 544만2996명.
총인구의 10.4%, 2012년보다 8만명이 늘었다.
사제 수 2013년 3995명 전년보다 2% 늘었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장세다. 왜 그럴까?
초기 조선의 천주교는 1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제사 문제 때문이었다.
8월 16일 시복식에서 복자가 되는 대표자 윤지충
바오로가 대표적이다.
충남 논산의 양반가 출신 윤지충 바오로는
고종사촌 정약용를 통해 신앙을 접했다.
그는 ‘원리주의자’였고 제사 문제는
천주교인들에게 힘든 문제였다.
1790년 구베아 주교에게 물어본 결과 제사는
안 된다는 답변이 왔다.
그는 집안에 신주들을 불살라 버렸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는 처형됐고 윤지충을 시작 1만명 이상 순교자들은
제사 문제로 세상을 떠났다.
구베아 주교가 제사를 금지한 데 대해서는
오해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조상의 신주를 하느님 이외의 신으로 이해한
천주교 지도층이 금지했다는 것이다.
초기 천주교인들은 신앙을 꿋꿋이 참수되는
순간에도 고개를 들고 숨져 갔다.
조선의 반상 질서도 허물었고 국기문란으로
다스렸으나 신앙 앞에 무기력했다.
천주교인은 교황청, 서구 열강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 왕조를 혼내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병인양요 후 1886년 조불조약, 교민조약(1899)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천주교는
일제에 강력히 저항하지 않았다.
1909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천주교회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분위기를 보여준다.
1945년 광복 후 노기남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이 안중근 의사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도모 ‘귀감’이 되는 인물로 추앙했다.
1939년 교황청은 제사를 허용 조상 섬기는 것이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1969년 한국 최초의 김수환은 추기경은 국민에게
천주교의 역할이 뭔지를 각인시켰다.
100만명 수준이던 한국 천주교는 그가 선종한
2009년엔 500만명을 훌쩍 넘어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복음화, 토착화, 참여와 나눔
종교적 투신 등 4 분야에서 차별화됐다.
불교가 생활문화, 개신교가 반공에 앞장섰고
천주교는 민주화 운동에서 활약했다.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성소가 됐고,
김 추기경은 그 중심 인물이었다.
김 추기경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등불 같았고,
천주교 입교 붐이 일었다
1983년 171만명 수준이던 천주교 신자는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1992년에 300만,
2000년에 400만, 2008년에 500만을 넘어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한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교황청 재정을 개혁하고 마피아를 파문, 신자유주의의
무자비함과 비도덕성을 질타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벗’ 별칭처럼 권위주의를 깨고
소탈하고 파격적인 언행으로 ‘월드스타’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유럽 가톨릭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프란치스코 효과를 기대하고 있지만 교황님은 개종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신자는 올바르게 사는 것이 필요하지 신자 수를
늘리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