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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룡정 원문보기 글쓴이: 반야
대개 종래의 불·보살과 성진·성현들께서 모두 자비로써 사람을 인도하시어 공덕을 쌓으셨다. 귀의(歸依)하시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행하여 지키었으며 범정(凡情)을 간파하여 홍진(紅塵,속세의 티끌)에 미혹되지 아니하여 상지(上智,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가 되었다. 명사의 밝은 가르침을 구하여 수양하여 도를 얻었으며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이고 연기·축기(煉己·築基)하여 下手함으로써 先天一氣를 채취하고 眞陽을 상승시켜 藥(금단사리)을 얻게 되었다.
건곤(乾坤)이 교구(交媾)하고 수화기제(水火旣濟)하여 팽연(烹煉)하였다. 金木으로 平分하고 卯酉 二八로써 온양(溫養)하여 연(鉛,진양)과 홍(汞,진음)을 함께하여 관만주천(貫滿週天)하여 퇴부(退符)하고 근수불태(勤修不怠)로써 身心을 구원(久遠)하여 苦行하고 단숙환원(丹熟還原)하여 金身을 이루고 도를 이루었다. 공덕을 쌓아 비승(飛昇)하여 증과(證果)를 이루었으며 부처에게 아뢰어 직분을 받고 조종(祖宗)에게 뛰어난 大孝를 하였다. 천지를 관리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여 충성을 다하고, 소리를 듣고 감응하여 고통과 어려움을 구원함에 방편을 쓰며, 三界內外의 人天이 우러러보아 귀하고 영화로우며, 반도부회(磻桃赴會)로 상승(上乘)의 位에 올라 현요(顯耀)하며, 법륜상전(法輪常轉)하여, 군생(群生)을 다 인도함으로써 원(願)을 마친다.
무릇 일체의 제불천존(諸佛天尊)이 범부로 말미암아 도를 닦아 이룬다. 지혜롭고 어진 사람이 어찌 머리를 수그려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생사윤회에 있어서랴? 말로는 처량한 고초를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얼굴을 바꾸고 너희가 왕후의 부귀를 논하겠는가? 음률(陰律,명부의 법도)이 삼엄하고 상벌(賞罰)에 삿됨이 없으니 선을 이끌고 악을 떨어뜨림은 고금이 동일한 것이다. 급히 머리를 돌려 三界의 바깥으로 닦아 出하여야 할 것이니 공부를 마치고 공을 이룸에 五行에 얽매이지 아니한다. 물질의 바깥에서 소요하고 천부(天府)에 노닐 것이니 비록 대급(大劫)이 닥친다 할지라도 또한 다시 무엇을 근심할 것이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관세음보살은 주(周)나라때의 女仙이었다. 고불(古佛)께서 범인으로 임(臨)하시어 성도한 후에 원력(願力)이 크고 깊어 남섬부주(南贍部州)에 앉아서 說法하여 사람을 인도하시며 心經(반야심경) 일 권을 전하시니 모든 經의 골수요, 자항(慈航,부처님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제도함을 배에 비유한 말)이며, 經中의 정미(精微)한 묘의(妙義)는 모두 사람을 가르침에 범상한 마음을 제거하여 심성을 밝게 비추어보게 한다. 범인에서 벗어나 성인에 들어 만유(萬有)를 공제(空除)하니 수도성불(修道成佛)의 종지(宗旨)가 된다.
오호라, 고금래(古今來)의 입으로만 닦는 자들이여! 능히 그 오묘한 규(竅,삼마지)를 알고 행하는 자 드물도다. 일찍이 서건강석(西乾講席,인도에서의 법회)에서 얻어듣고 부자(夫子,공자)의 性과 天道의 상세함을 이미 이 經에서 취하였으니 일일이 인정함에 꼭 맞지 않음이 없었다. 인하여 고루함이 없었으며 그 절차를 기록함에 丹道의 지남(지침서)이 된다. 만약 불근종자(佛根種子)가 있다면 스스로 보리(菩提)의 원(願)을 發하여 경주(經註,반야심경과 그 주석)로 말미암아 사람의 몸이 가짜임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스승의 性命의 근원의 가르침을 구하여 수련하여 금단사리(金丹舍利)를 맺을 수 있으니 이로써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증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大淸 嘉慶九年 甲子歲仲秋月 旣望 玉山老人
摩訶者(마하자)는 廣大也(광대야)라. 言道之廣大(언도지광대)하며 包羅天地(포라천지)하며 養育群生也(양육군생야)라. 般若者(반야자)는 智慧也(지혜야)라, 光明也(광명야)라. 波羅者(바라자)는 彼岸也(피안야)라. 言道能度人(언도능도인)하며 超出苦海而到彼岸也(초출고해이도피안야)라. 蜜多者(밀다자)는 譬如蜜之種種釀成一性(비여밀지종종양성일성)이니 卽採取得藥萬法歸一之象而返還無極之意也(즉채취득약만법귀일지상이반환무극지의야)라. 心者(심자)는 人之本源也(인지본원야)라. 言口傳心授之法(언구전심수지법)이니 當從心上用功也(당종심상용공야)라. 經者(경자)는 徑也(경야)라. 猶返本還原之路徑也(유반본환원지로경야)라. 此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十字(차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십자)는 卽全經之題目而統言其大槪也(즉전경지제목이통언기대개야)라.
마하란 넓고 크다는 뜻이다. 道가 광대하여 천지를 감싸고 만물을 양육함을 말한다. 반야란 지혜이며 광명이다. 바라란 저 언덕이다. 도가 능히 사람을 이끌어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여 저쪽 언덕에 이르게 함을 말한다. 밀다란 비유하면 벌들이 꽃가루를 모아 꿀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니, 곧 채취하여 약을 얻고 만법이 귀일하는 상이며 무극으로 반환한다는 뜻이다. 심이란 사람의 본원이다. 구전심수의 법으로 마땅히 마음으로 용공함을 말한다. 경이란 지름길이다. 반본환원하는 지름길과 같다. 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열 자는 곧 전경의 제목으로 그 대개를 말하는 것이다.
觀自在菩薩
주) 관(觀)이란 바깥으로 향한 빛을 되돌려 道를 지키는 것이다. 자재보살(自在菩薩)은 곧 自家의 주인공이다. 따라서 관자재보살이란 빛을 되돌려 내면세계를 비치는 주인으로서 神을 길러 그 흩어지는 마음을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다.
해) 우리 마음의 빛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에 의하여 몸밖의 곳에 탐착(貪着,탐하여 집착함)을 일으킨다. 따라서 마음이 본체를 잃어버리고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떨어지게 되어 사물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욕망의 고해에 빠져들게 된다. 여기서 觀의 의미는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의 빛을 되돌려 근본을 비춰 봄(回光返照)으로써 자기 本性의 주인공으로 모든 일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흩어지는 마음의 기운, 즉 神을 모으고 기름으로써 방심(放心)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 神을 모은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수련시 하단전에 마음을 집중하면 그 마음이 머무는 곳에 氣가 모이게 된다. 神의 성질은 화성(火性)이요, 氣의 성질은 수성(水性)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수련을 통하여 水·火가 한데 어우러져 엉기게 된다. 그 기운이 점점 커짐에 따라 몸 속에서 뜨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기의 덩어리가 형성되게 된다.(이는 태양이 바다물을 비추게 되면 이윽코 뜨거운 수증기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던 몸 속에 뚜렷한 형체와 열감을 느끼게 됨으로써 마음이 몸 안에 머물 수 있는 최초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이때부터 길을 갈 때나 책을 볼 때나 운동을 할 때에도 언제나 그 기 덩어리에 마음을 집중하여 放心을 제어한다. 이를 "回光返照 意守丹田" (이것이 輕安觀照이다)이라고 한다.
行
주) 行이란 마음과 뜻을 몸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실제적인 수련을 통하여 功을 이루는 것이다.
해) 이 경전이 단순한 생각으로써 이치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하수법(下手法,단순 생각이나 입으로만 공이니 마니하며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인 수련법이 존재한다)에 의하여 수련을 쌓는다는 뜻이다.
深
주) 심화(心火)가 해저(海底, 三摩地를 말함이다)로 하강하여 先天의 眞金을 채연(採煉)한다. 오래도록 定을 지켜 군·신·민(君·臣·民)의 三火를 모아 감궁(坎宮)의 진금(眞金)을 단련한다.
해) 觀自在菩薩이 下手하여 수련함에 그 심처(心處)가 깊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깊은 곳이 어디인가? 海底라 한다. 해저는 어디인가? 下丹田을 말한다. 心火는 곧 神인데 이것이 하단전 기혈을 관조(觀照)함으로써 선천의 진금을 채취한다. 오래도록 단전을 관함으로써 精·氣·神 삼화를 모아 진금을 채취한다.
문) 왜 眞金이라 하였는지요?
답) 한방에서는 배꼽 밑을 氣海혈이라 한다. 즉 기의 바다가 있다는 뜻인데 丹學에서는 아랫배를 坎宮이라고도 한다. 坎宮이나 氣海는 모두 水를 상징하며 이는 곧 精이 된다. 金生水의 이치에 의하여 금이 물을 생하니 수중의 금을 찾아 단련한다 함은 坎괘의 中爻는 乾金(건금)괘의 중효(양효이다)를 취한 것으로 精 가운데에서 眞陽의 선천기를 채취함이다.
般若波羅
주) 반야(般若)는 지혜(智慧)이다. 바라(波羅)는 저 언덕(彼岸)이다. 진양(眞陽)을 채취하여 상승시켜서 광명지혜(光明智慧)를 발출(發出)시키며 後天을 따라서 先天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저 언덕으로 이끌어간다.
해) 이쪽 언덕은 苦海의 세계이며 저 언덕은 이상(理想)의 세계, 진리(眞理)의 세계이다. 부처님께서는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수단을 지혜라고 하셨다. 그러면 이 지혜는 무엇인가? 생각으로써 얻는 지혜인가? 여기에서는 수련을 통하여 얻어지는 빛을 지혜라고 하였다.
經에서 중생이 고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無明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선도에서는 무명을 음기(陰氣)라 하고 이 음기와 대칭되는 기운으로서 밝음을 상징하는 陽氣를 수련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양을 독맥(督脈,등뒤에 있는 기의 통로)을 따라 상승시켜서 그 밝음의 기운이 상단전(뇌속에 있슴)에 이르러 음기를 제거하면 광명의 지혜가 발생되니 이 지혜의 빛으로써 저 언덕으로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蜜多
주) 약(藥)을 얻는 妙한 경상(景象)이다. 여러 가지의 성질들이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 수만 가지 다름이 모두 한 가지 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해) 우리 몸에는 수많은 종류의 氣가 있고 마음도 또한 수없이 많은 神的변화를 일으킨다. 이 모든 것이 하나에 집중되어 녹아서 근본물질로 되돌아간다. 마치 각양각색의 쇳덩어리가 용광로에 들어가 녹으면 모두가 한 쇳물이요, 각양각색의 빙산이 녹으면 모두가 물이 되듯이 수많은 유·무형의 種種之性이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가 모두가 하나가 된다.
時
주) 正見을 이루는 때이다. 일양(一陽)이 복래(來復)하고 약물(藥物)이 단정(丹鼎)으로 상승하여 들어갈 때이다.
해) 관자재보살이 깊은 곳에 下手하여 眞陽의 광명지혜(光明智慧)로써 모든 종종지성(種種之性)을 하나로 녹였을 때의 時이다. 이때가 바로 正見이 일어나는 때이다. 진양의 광명지혜로써 小周天(소주천,하단전에서 발생한 一陽이 등뒤의 독맥을 따라서 상승하여 뇌속의 상단전에 이르고 다시 몸의 앞면에 있는 임맥을 따라서 하강하여 하단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함. 흔히 법륜을 굴린다는 것이다.)을 돌리고 단전기혈에 입실하여 고요히 定에 들어 山河大地가 모두 무너지고 자신의 몸마저 멸(滅)하여 오온(五蘊)이 空함을 보게 되는 때이다.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
주) 蘊(온)이란 藏(장)이며 積(적)이다. 五蘊은 色(색), 受(수), 想(상), 行(행), 識(식)을 말한다. 色이란 장애, 막힘 등의 뜻, 受란 받아들인다는 뜻, 想이란 망상, 생각의 뜻, 行이란 마음이 멈추지 아니한다는 뜻, 識이란 분별하고, 친하고, 섬기며, 좋아하고, 나빠하는 등의 뜻이다. 이는 金이 性으로 돌아가는 초기에 이미 還丹(환단)이라 칭하며 火를 올리는 候(후)를 말한다.
回光返照에 의하여 진양을 얻고 이 진양이 상승하여 상단전에 들어간 것을 이미 還丹을 이루었다고 옥산 노인은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진양이 상승하여 마땅히 일주천을 하여 다시 하단전 기혈로 돌아와야 하지만 절반의 공을 이루어 상단전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이미 바깥의 사물에 貪着(탐착)을 일으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희로애락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또한 陰邪(음사)한 氣를 청소함으로써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볼 수 있는 절반의 공을 얻었다고 논하고 있다.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
주) 色이란 色身을 말한다. 깨달아 杳冥(묘명)한 상태에 들어서 삼라만상이 모두 고요해지고 一物도 있지 아니한 상태에 들어서 몸마저 太虛(태허)와 같이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허공과 다르지 않다.
해) 色이란 모든 물질을 통칭한다. 그러나 수련을 통하여 자신의 色身이 氣로 化하여 살도 뼈도 다 사라져 텅 비게 되면, 모든 바깥의 물질도 이와 같이 空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地, 水, 火, 風의 네 가지 기운이 인연 따라 모이면 우리의 몸이 형성되고 만물이 생겨나고, 그것이 흩어지면 우리의 몸도 만물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며, 수련을 통하여 자신의 몸이 공함을 체득함으로써 만물이 모두 지, 수, 화, 풍(즉 4대)으로 이루어졌다는 실체를 보게 된다. 때문에 물질과 허공이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이다.
空不異色(공불이색)
주) 空이란 無相의 法身이다. 無相의 相이므로 이에 法相이라 한다. 이미 聖胎(성태)가 형체를 얻었다면 모든 것이 텅 빈 가운데에 자기 부처의 주인공으로서 萬事(만사)를 행사하게 된다. 고로 色과 다르지 않다.
주) 이것은 聖胎(성태)를 溫養(온양)하는 功이다. 色身과 法身이 합하여 一體(일체)를 이룬다. 나와 남의 분별이 모두 없어지고 眞空妙性(진공묘성)이 주인공이 된다. 색신이 이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므로 묘한 경지에 이르게 되니 색신이 곧 법신이다. 어찌 공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卽是(즉시)의 단계에서는 모든 만물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꿰뚫어 공함을 본다. 때문에 육신통이 自在(자재)하다. 처음에 아랫배에 道胎(도태)가 생겨 이것이 자라남에 따라 나의 색신과 법신이 점차 하나로 융합된다. 이에 색신이 곧 법신이며 법신이 곧 색신인 경지에 도달하게 되니 색이 곧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空卽是色(공즉시색)
주) 선·후천이 모두 하나가 되어 綿綿密密(면면밀밀)하므로 녹아서 하나를 이룬다. 河車(하거)가 自轉(자전)하여 그치려고 하나 그치지 아니하고 저절로 돈다. 하여 도는 사실마저 잊어버린다. 때문에 공하나 공하지 아니한 것이다[空中不空]. 선·후천의 기가 일체가 되고 眞空妙性이 일을 주관하니 법신이 곧 색신이다. 단을 맺어 온양할 때에 선·후천이 하나로 녹아서 나와 남이 모두 공하게 되고 陰陽(음양)이 會合(회합)하여 妙用(묘용)이 끝이 없다. 색신은 곧 이에 법신이며, 법신은 이에 곧 색신이니 고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문) 저희 불가에서는 유여열반은 이미 本覺(본각)을 깨달았으나 육체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 색신으로 인하여 모든 업을 받게 되므로 마음은 비록 그것에 구속받지 않으나 몸이 업에 구애를 받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유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죽음에 이른 후에 몸마저 버렸을 때에 진정한 해탈을 얻음으로 이를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저희 불가에서 말하는 뜻과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受想行識亦復如是(수상행식역부여시)
주) 이는 混沌(혼돈)의 공이다. 경계를 만나 無心하며 경계를 대할 때에도 뜻을 잊는다(忘情)는 뜻이다. 보여도 보지 않는 것과 같고, 행하여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고, 알되 알지 못하는 것과 같고, 받되 받지 않는 것과 같으니 비록 受, 想, 行, 識의 경우에 임하더라도 나의 眞空妙性(진공묘성)은 오히려 뚜렷하고 부동하여 텅 비어 일체의 걸림이 없다. 일체의 세상만물이 능히 나의 진성주인을 어지럽게 하거나 요동시키지 못한다.
이른바
竹影掃階塵不起
月穿潭底水無痕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쓰니 먼지가 일어나지 아니하고
달빛이 호수 밑을 비치나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구나)
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해) 앞에서 色에 대하여 4단계 수련적 차원으로 조명하였다. 나머지 五蘊(오온)인 受, 想, 行, 息도 色의 경우와 동일하다는 뜻이다. 일체의 外境世物(외경세물)이 나의 眞性主人(진성주인)에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뜻을 두 줄의 시로써 다시 한 번 천명하였다.
舍利子是諸法空相(사리자시제법공상)
주) 앞에 나온 사리자는 丹을 맺고 도태를 기르는 공으로써 비유하였고, 여기에 사리자는 脫胎(탈태)하여 出神하는 候(후)를 말한다. 대개 十月道胎(시월도태)가 완성되면 頂門(정문)이 진동하여 영아(양신을 말함, 道兒라고도 함)가 출현하고 모든 想이 歸依(귀의)한다. 이때에 모든 法相(법상)이 다 空하게 된다. 이렇게 출신의 후에 도달하면 溫養乳哺(온양유포)하고 水升火降(수승하강)하며 그 자연함을 듣되 聳縮簇之法(용축족지법)을 쓰지 아니한다. 고로 마땅히 모든 법이 空한 것이다.
영아가 처음 出함에 놓아보내고 거두어들임이 중요하며, 신기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에 탐착함이 불가하다. 형상에 집착함도 불가하니 인하여 양신이 오히려 老練(노연)치 못하다. 상에 집착하므로 일이 잘못될까 두려운 것이다. 고로 마땅히 相도 空하다. 한마디로 양신이 출현하면 大丹을 이미 이룬 것이니 법도 또한 씀이 없고 상도 또한 공하고 공하여 없음과 같다.
해) 앞서의 사리자는 출신(出神) 이전의 경우이며, 이번의 사리자는 출신 이후의 경우로 구분하였다. 이미 내단이 양신으로 변하여 대허공계로 출신한 것이다. 진정으로 출신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법도 쓸 필요가 없으며 일체의 형상도 양신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법과 상이 다 공한 것이다. 또한 출신 이후의 위험에 대하여 멀리 나가지 말 것과 신기한 것에 탐착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으나 이는 이 경지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으로 지어낸 말일 것이다.
도태 이전에 본각을 이루었는데 그 위에 양신을 이루고서 또 어찌 사물의 탐착을 일으키겠는가? 또한 陽神과 色身이 하나를 이루었고 양신이 출현한다고 하여도 나의 본성이 조금도 색신과 양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으니 어찌 色身을 잊고 돌아오지 않는 위험이 있을 것인가? 만약 이러한 경우가 있다면 그 양신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닐 것이다.
不生不滅不垢不淨(불생불멸불구부정)
주) 이는 陽神面壁(양신면벽)으로서 연신환허의 공이다. 몸 밖에 또 몸이 있어 法相이 虛靈(허령)하니 어찌 生滅(생멸)이 있을 것인가? 일단의 金光妙相(금광묘상)이 뚜렷하고 淸淨無染(청정무염)하니 어찌 더럽고 청결함이 따로 있겠는가?
해) 구년면벽을 이루고 환허합도의 공을 이루니 身外有身(신외유신)의 법상마저 허령하니 어찌 생멸이 있을 것인가? 찬란한 금광이 여여하여 변함이 없으니 여기에 무슨 더럽고 청정함을 논하겠는가?
不增不減是故空中(부증불감시고공중)
주) 이는 面壁混沌(면벽혼돈)의 경상이다. 몸이 태허와 같으니 어찌 더하고 덜함이 있겠는가? 眞空의 法身이 극처에 도달함마저 空하여 흩어진즉 氣를 이루고, 모인즉 모양(相)을 이루니 일체의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 법신이 적정하여 한 물건도 없으니 낭철원명(朗徹圓明)하고 태허지중(太虛之中)에 앉은 것과 같다. 이것이 還虛(환허)의 묘한 경지이다.
해) 앞에서 신외유신이 영원불멸하다는 것을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그 體(체)가 太虛와 合道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증감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옥산노인은 色과 空의 단계에서 不異(불이)와 則是(즉시)로써 물질과 허공, 기의 유·무형을 수련의 단계로서 말하고 있다. 이는 煉精化氣(연정화기)와 煉氣化神(연기화신)까지의 비유로 볼 수 있으며, 불생불멸에서 부증불감까지는 煉神還虛 (연신환허)이후의 과정으로 비유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이미 색이나 공에 대한 관념은 벗어났으며, 양신 자체와 대우주가 동일시되고 있다.
陽神이 완성된 후 면벽구년을 통하여 眞空과 합체하였으므로 氣나 色을 완전히 벗어났고, 양신 자체도 생겨남과 멸함을 초탈한 경지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動하면 후천이요, 靜하면 선천이라는 동·정 간의 변화도 초탈하였으므로 더럽고 청정함의 경계도 사라진 것이다. 부증불감은 양신이 分化하여 백억화신불로서 시방세계에 모습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조금치의 증감도 없다는 一切眞空(일체진공)의 묘리를 떠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미 우주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전체는 언제나 일여하다는 개념이다.
無色無受想行識(무색무수상행식)
주) 앞의 수상행식역부여시(受想行識亦復如是)는 상(相)도 공(空)하고 마음도 空한 경우이며, 여기서 말한 無色無受想行識(무색무수상행식)은 공부가 이미 환허(還虛)에 들어 경계마저 없어짐이니 오온(五蘊)의 찌끼마저 모두 녹아 사라지는 것이다. 때문에 無라 한 것이다.
해) 앞서의 수상행식(受想行識)과 무(無)자가 붙은 수상행식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無 자는 수상행식이 空하다는 사실마저도 완전히 멸한 것을 표현한다.
無眼耳鼻舌身意(무인의비설신의)
주) 이 말은 육근(六根)이 이미 空하여 비록 안,이,비,설,신,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육근의 체(體)와 身이 모두 일성(一性)으로 귀의(歸依)하여 원명(圓明)하여 흩어지지 아니하고 혼연(渾然)하니 안, 이, 비, 설, 신, 의가 모두 일에 관여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있으되 또한 없는 것과 같으므로 無라 하였다.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
주) 이는 육근이 이미 空하여 육진(六塵) 또한 멸한 것이다. 이미 원명하고 청정한 몸을 이루어 텅 비어서 집착이 사라진 단계이다. 신체가 없음과 같으므로 만법이 모두 空하다. 고로 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한 것이다. 무색(無色)이란 눈으로 탐냄이 없음이며, 무성(無聲)이란 귀로 탐냄이 없음이며, 무향(無香)이란 코로 탐함이 없음이며, 무미(無味)란 입으로 탐함이 없음이며, 무촉(無觸)이란 마음으로 탐함이 없는 것이며, 무법(無法)이란 뜻으로 바라지 않는 것이니, 이른바 육근이 청정하여 육진 또한 물들지 아니한 것이다.
해) 無 자는 空마저 멸한 단계이기 때문에 새삼스레 탐착을 논할 필요조차도 없다.
無眼界乃至無意識界(무안계내지무의식계)
주) 이는 공부가 이미 대정(大定)에 이르러 신광(神光)마저 거두어진 단계이다. 신광이 이미 거두어져서 눈이 있으되 보지 않는 것과 같아서, 지(知)와 식(識)이 모두 사라진 단계이다. 극처에 이르름마저 사라져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니 고로 무의식계(無意識界)라고 한 것이다.
無無明亦無無明盡(무무명역무무명진)
주) 앞에서 말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은 육근이 이미 空하고 육진이 이미 멸(滅)한 것을 뜻하는데, 신광의식(神光意識)이 모두 다 원명(圓明)한 각성(覺性) 가운데로 갈무리되어 하나의 체를 이루어 유일무이(唯一無二)해진 것이다. 육근이 모두 녹아서 무극지체(無極之體)로 돌아간 것이다.
무무명자(無無明者)는 이때를 당하여 진공묘상의 광명이 능히 시방삼계를 비추어 밝지 아니한 곳이 없게 됨을 말한다. 고로 무무명(無無明)이라 하였다. 역무무명진자(亦無無明盡者)는 이에 밝음이 극처에 이르러서 다시는 어두어짐이 없으니 고로 무명이 다함마저 사라졌다고 한 것이다.
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내지무노사역무노사진)
주)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란 이미 진공법신(眞空法身)을 이루어 수화(水火)가 불침(不侵)하며, 만겁토록 흩어지지 아니하는 신체를 이루었으니 어찌 늙고 죽음이 있겠는가? 고로 무노사라 한 것이다.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란 이미 대각금선(大覺金仙)의 지위에 이르러 적덕(積德)을 쌓아 비승(飛昇)의 때를 기다려 영원토록 천복(天福)을 누림이다. 天地는 비록 무너짐이 있으되 진신(眞身)은 무너짐이 없으니 어찌 늙어죽음이 다하는 날이 있겠는가? 고로 늙고 죽음이 다함마저 없다 한 것이다.
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무고집멸도무지역무득)
주) 이곳부터는 금단요수(金丹了手)적 경계이다. 앞에서 이미 늙고 죽음마저 다 멸한 상태를 말하였으므로, 자성(自性)이 여여(如如)하고 담연상적(湛然常寂)하다. 세상에서의 고행이 이미 끝나 장차 천궁에 돌아가게 되니 거듭 고해에 빠질 일이 없다. 고로 무고(無苦)라 하였다.
집(集)이란 모인다는 뜻이다. 이제 만법이 본원으로 돌아가고 원만한 몸을 얻었으므로 거듭하여 삼보(三寶)를 채취( 採取)하고 추첨(抽添)할 필요가 없다. 고로 무집(無集)이라 하였다.
멸(滅)이란 마침이다. 이제 극처에 이르름마저 마쳐 더 이상 마치고자 하여도 마칠 것이 없다. 때문에 다시 잡념을 제거하고 음기를 소제하는 등의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고로 멸함마저 없다(無滅)고 한 것이다.
도(道)는 법도를 말한다. 이제 더 닦으려고 하여도 닦을 것마저 없어졌으므로 법도를 지킴마저 사라진 것이다. 고로 도마저 없다(無道)한 것이다.
지자(智者)는 지야(知也)라.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 과거, 현재, 미래에 알지 못함이 없게 된다.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로 무지(無智)라 하였다.
역무득자(亦無得者)는 이제 하나의 성(性)이 둥글고 밝으며, 몸은 태허(太虛)와 같아 일체의 만물에 탐착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대도를 이루어 만사를 마침이 된다. 여기에 다시 또 무엇을 얻음이 있겠는가? 고로 역무득(亦無得)이라 하였다.
以無所得故菩提薩陀(이무소득고보리살타)
주) 이자(以者)는 인위야(因爲也)라. 이는 진공의 체(體)를 이루었음으로 인(因)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마쳐서 만물의 탐착됨이 없으므로 얻어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얻지 못할 바가 없다는 뜻이니, 무극지물(無極一物)이 만유(萬有)를 다 포함하는 것과 같다. 보자(菩者)는 각오야(覺悟也)라. 리자(提者)는 상승야(上升也)라. 살자(薩者)는 일성원명지경(一性圓明之景)이라. 타자(陀者)는 과실공성지상(果實功成之象)이라. 이는 空을 얻음마저 마쳐 불보살이 된 것이다. 고로 보리살타라 하였다.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주) 고자(故者)는 법칙야(法則也)라. 법칙에 의지하여 닦아 나아간다. 능력과 지혜광명을 발출하여 신통변화를 가지며 피안(彼岸)에 도달한다. 무극에 이르러 태허와 더불어 일체를 이룬다.
心無罫碍(심무가애)
주) 가자(罫者)는 유변야(留變也)라. 애자(碍者)는 조격야(阻隔也)라. 이 경지에 이르러면 마음이 태허와 같아 일물에도 집착됨이 없으니 쇄락(灑落, 몸이 개운하고 깨끗함)하므로 어찌 유변조격(留變阻隔)이 있겠는가? 이에 心無罫碍라 하였다.
無罫碍故(무가애고)
주) 이미 수련하여 금광이 찬란한 법신을 이루어 천지사방에 걸릴 것이 없으므로 지극히 허하고 지극히 신령스럽다.
故無有恐怖(고무유공포)
주) 이미 무가애한 경지에 이르러 천지에 걸림이 없고, 음양에도 구애됨이 없다. 귀신도 예측할 수 없어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가는 등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어찌 공포와 두려움이 있어 나의 주인공을 흔들 수 있겠는가? 고로 무유공포라 하였다.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
주) 원자(遠者)는 영야(永也), 리자(離者)는 탈야(脫也), 전자(顚者)는 험야(險也), 도자(倒者)는 패(敗), 몽(夢)자는 환경(幻景), 상자(想者)는 사려야(思慮也)라.
수행이 이 경지에 다다르면 주인공이 뚜렷이 밝고 커서 성광(性光)이 랑랑(朗朗, 빛이 매우 밝은 모양, 분명한 모양)하니 心身이 편안하여 선천에 체합(體合)한다. 일체의 흉험성패(凶險成敗)와 희로애락몽매환경(喜怒哀樂夢寐幻景) 중의 사려(思慮)를 영원토록 벗어나게 된다. 고로 원리전도몽상이라 하였다.
究竟涅槃(구경열반)
주) 열자(涅者)는 불생야(不生也)이고, 반자(槃者)는 불멸야(不滅也)이며, 구경자(究竟者)는 궁진야(窮盡也)라. 이미 도(道)가 궁진(窮盡)의 경계에 이르러 불생불멸지향(不生不滅之鄕)에 들어 영원토록 연대법계(蓮臺法界)를 증험한다.
三世諸佛(삼세열반)
주) 삼세(三世)란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제(諸)란 모두를 말한다. 불(佛)이란 자기를 닦아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이루며, 원력(願力)이 크고 깊으며 자비로 세상사람을 인도함을 뜻한다.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주) 이 반야바라밀다의 법을 닦아 이루는 자는 보살뿐만이 아니고, 삼세제불도 모두 이 법을 의지하여 근수고행(勤修苦行)으로 이루게 된 것이다.
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주) 아뇩(阿縟)이란 단전이다. 다라(多羅)란 뭇 보물을 모으는 것이다. 삼먁(三貘)이란 삼화(三華)이다. 삼보리(三菩提)이란 원정(元精), 원기(元氣), 원신(元神)의 삼보(三寶)를 말한다. 이는 삼세제불이 모두 이 반야바라밀다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을 말한다.
단전이란 창구에 보배로움을 모아 진화로 단련하여 삼화를 現出하고 정문에 모여 삼보가 구슬을 결성하니, 묘각영명(妙覺靈明)하여 영원토록 청량한 극락세계를 증험한다.
故知般若波羅蜜多(고지반야바라밀다)
주) 고(故)라는 것은 까닭을 말한다. 지(知)는 깨달아 얻는 것이다. 즉 지혜광명을 얻음을 말한다. 진양(眞陽)이 상승하여 현관(玄關)에 도달하는 피안의 공부로서 유일무이(有一無二)하여 지극(至極)하므로 다시는 더 추구할 것이 없다.
是大神呪(시대신주)
주) 신(神)은 영통감응현묘막측(靈通感應玄妙莫測)하다. 呪란 사람 몸 가운데의 무극현관(無極玄關)을 말한다. 이 반야바라밀다법을 깨달아 얻음으로써 신통이 광대하고 변화가 무궁하여 능히 천하의 선남선녀(善男善女)를 인도하는 대법문이다.
是大明呪(시대명주)
주) 이 반야바라밀다법을 깨달아 얻으면 광명(光明)이 황랑(晃朗,반짝반짝 빛남)하고 능히 삼계의 시방을 비추니, 대명대량(大明大亮)한 대법문(大法門)이다.
是無上呪(시무상주)
주) 이 반야바라밀다를 요득하면 이는 최고제일의 법문이니, 다시는 이 법문보다 높은 것은 없다.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
주) 이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아 얻으면 이는 최고제일로서, 이 법문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법문과 평등하거나 서로 견줄만한 것도 있지 아니하다.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
주) 중생의 일체 고뇌는 모두 어둡고 미혹하여 닦지 아니하므로 이 神呪法門을 알지 못한다. 고로 생사를 유랑하여 모든 고초를 겪게 된다. 반야바라밀다신주는 법문이 광대하여 능히 끝없는 고초를 제거하여 줌으로써 모든 번뇌를 끊게 한다.
眞實不虛(진실불허)
주) 이는 무극무상의 법문으로서 능히 중생을 인도하여 성불시킴으로써 일체의 고초를 제거케 한다. 몸소 보고 몸소 얻는 진실한 법으로서 헛된 말로 꾸며진 것이 아니다.
故說般若波羅蜜多(고설반야바라밀다)
주) 수행이 이에 다다라 스스로 반야신주의 공을 얻으면 더 이상 견줄 바가 없다. 때문에 반야바라밀다의 법주를 설함으로 써 후인을 인도한다.
卽說呪日(즉설주왈)
주) 이는 신주의 현묘함을 알리는 것이다. 천불(千佛)이 감히 함부로 누설하지 아니하며 만조(萬祖)가 감히 말을 흘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자세하게 설함은 보살의 원력이 크고 깊어 중생을 이끄는 마음이 지극한 까닭이다.
揭諦揭諦(아제아제)
주) 아자(揭者)는 타개야(打開也)라. 제자(諦者)는 묘제야(妙諸也)라. 묘제(妙諸)란 현관두병(玄關斗柄)으로서 인신(人身)의 기둥이 된다. 현관(玄關)을 타개하여 건원면목(乾元面目)을 현출(現出)시킴으로써 끝없는 열반락(涅槃樂)을 얻게 된다. '아제아제'라 중복하여 말함은 현관묘제(玄關妙諸)가 참되고 또 참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波羅揭諦(바라아제)
주) 이는 현관법문(玄關法門)을 말하는 것이니 저 언덕에 도달하는 묘제(妙諸)이다. 모든 중생들이 고해를 벗어나 저 언덕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波羅僧揭諦(바라승아제)
주) 승자(僧者)는 정야(淨也)라. 이 또한 현관법문을 말하는 것으로 즉시 피안에 도달케 하여 정토(淨土)를 증험시켜 주는 묘제이다. 사람마다 닦아서 서방정토를 이룩하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菩提娑婆訶(모지사바하)
주) 보리자(菩提者)는 각오야(覺悟也)라. 깨달은 성품이 원명하여 이미 진공의 경지에 이르렀다. 신령스러운 빛이 천지를 꿰뚫고 법신은 태허와 같다. 娑婆訶란 일체중생을 빠르게 성취시켜준다는 말이다. 일체중생을 모두 성불케 하여 삼계를 벗어나고 다함께 청량한 경계에 들어 영원토록 열반의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는 뜻이다.

첫댓글 작약님...좋은공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에고나..언제나 이 좋은 말씀들을 가슴에 담을 그릇이 되려나 모르겠습니다요...^^ 마음을 다스리고 고요해지면 열공하겠습니다.
늘...한결같으신 작약님...
고맙습니다...()...
저도 우리민족333님처럼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