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아침 할머니의 선종 소식을 듣고
몇 명의 지인들께 저의 지인들께 연락을 당부하며 창평 병원으로 갔습니다.
사실 카페에 글을 쓰던 중에 고모님의 전화를 받았으나 사실 밤 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 12시 반쯤 잠을 자려 자리에 누워 불면의 고통 속에 몸부림을 치던 중 전화가 울렸습니다.
보성의 큰 고모님께서 광주의 작은 고모님이 제가 전화를 안받는다고 연락을 해왔는데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니 병원에 연락을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고모님께 전화해서 물어보니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지금 가보려고 하니 저보고는 시골이니 그냥 있어보랍니다.
그래서 그럼 고모님이 병원에 가보시고 연락을 주시라고 햇습니다.
1시 반쯤 고모께서 한고비 넘겼으니 자라하셔서 별일 아니려니 하고 잤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고비가넘어가는게 아니었나 봅니다.
사실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약간은 허둥거렸습니다.
대충 집안을 정리하였습니다.
빨래를 걷어 방에 널고 아래 닭장문 열어두고 모이도 충분히 주고 물도 큰 용기에 가득 채우고
보일러 끄고....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준비물 챙겨서 나가다 이웃 종민형집에 들려 소식을 전하려다 너무 조용해서 그냥 나왓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이장에게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올라간다고 전화했습니다.
그런데 이장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임동아짐은 너무나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종민형에게 전화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중에 이춘문회원에게 상조회 관련하여 협조를 구했습니다.
트럭으로 이동하는 중에 몇군데 전화를 해서 필요한 조치를 하며 창평 병원에 갔습니다.
할머니는 하늘방에 병원 시트에 덮여 누워계시고 고모님은 창가에 앉아계셨습니다.
막 도착하니 조 부원장이 언제쯤 도착하시냐 물어, 도착했다니 마중을 나왔습니다.
조부원장이 나름 친절히 안내하고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9시 반쯤 상조회에서 할머니를 모시러 와 이미 정해 놓은 금호장례식장으로 보내고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아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이곳에서도 제가 도착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장례가 상주 중심으로 흐르고 결재자 중심으로 흐르기 때문에 제가 결정을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저는 당시 장례가 허례허식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평소 제가 생각했던 장례방법을 지키려 애를 썼고 단호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할머니를 사랑하고 안식을 위하는 마음이야 모두 수용하고 바라지만 그것이 살아 생전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그런 류는 일절 배제하였고 음식을 차리고 술을 따르고 하는 것도 배제하였습니다.
사실 저의 학창시절의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은 할머니의 노고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저와 함께 생활하셨고 밥을 해주셨고 대학시절부터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 광주 저의 집을 여러차례 방문하였고
할머니의 거의 전부인 저의 친구나 선후배는 적어도 몇차례는 할머니께서 해주신 밥을 먹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할머니와 인사도 했을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할머니 상에 부고를 내는 일이 별로 없음을 알면서도 할머니의 부음을 알린 것은 많은 이들이 할머니를 알고 할머니의 장례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조모님은 우리 연세로 98세입니다.
2003년인가 2005년인가 12월 31일 저희가 완도 당사도 섬에 갔을 때 당신 방에서 넘어져 왼쪽 고관절 골절이 있었고
2007년 1월 당신 생신날 외손자의 차를 타시다 넘어져 오른쪽 대퇴골 골절 두번의 수술,
이후 혼자서는 걸을 수 없어 병원과 노인요양병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조대병원에서 정형외과 수술을 두차례 받고 월곡동의 요양원과 성심병원, 광산참사랑, 장성한마음, 창평한마음을 전전하며 사시다가
결국 담양 창평의 한마음 노인전문병원에서 선종하셨습니다.
집에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직장생활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모실 수도 없었을 뿐만아니라 전문성 등여러 측면에서도 병원에 계시는 것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작은 고모님(임종을 봤던 딸)이 당신의 시어머니 사후 친정어머니인 할머니를 모시고 싶어 해서 두달 한달 그렇게 모시도록도 했지만
장기적으로 모시지 않도록 했습니다.
3년 병수발에 효자 없다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마져 사라질 수도 있기에 장기적인 수발을 말렸던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저희에게 베푼 당신의 사랑과 헌신을 저희가 다 갚을 수는 도저히 없다고 여깁니다.
저희 어머니 때도 그렇듯 그분들의 사랑을 이웃과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이 그분을 생각했을 때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랑을 보답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찮가집니다.
주변의 저와 저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 사람에게 되돌려 보은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분이 제게 보여주신, 행하신 사랑과 은혜는 또 다른이에게 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할머니 선종에 조문하신 모든 분들에게 똑 같이 되갚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인 줄 모르지만
대부분 제가 그분의 애경사에 오라는 의미에서 조문하신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안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 역시도 당신이 저의 애경사에 부의를 했으니 나도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것입니다.
이번에
개인적으로 알아서 조문하는 분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제가 활동하거나 했던 조직의 동지들이었습니다.
가톨릭대학생회, 가톨릭청연회, 교구청직원들, 한반도, 청소년서포터즈, 학교동창들, 다사람, 공동체연대, 현재 살고 있는 마을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나 보고싶고 함께했던 선후배동지들이었습니다.
일부러 모일려 해도 그렇게 모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너무도 고맙고, 고마운 동지들입니다.
가족관계로 엮인 친인척들이야 다 어쩔 수 없는 관계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다 드려야겠습니다.
3일장과 내일 삼오제로 탈복을 하겠지만
앞으로 더욱 서로 돕고사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동안 보여준 저희 형제(4촌 포함)들의 우애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앞으로 맏형으로서 저의 어깨가 더욱 무겁습니다.
참 소흔제의 닭들도 무사히 잘 있었습니다.
어제는 약간의 저의 도움에 힘입어 닭들이 계단을 이용하여 닭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몇번만 더 도움을 주면 이제 스스로 올라갈 듯 합니다.
농사일은 삼오가 끝나는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