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의 정치윤리 그리고 칸트의 윤리학
1. 윤리는 인간의 행동과 실천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이다. 인간의 행동은 때론 무작위적이며 본능에 따라 충동적으로 작동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산물, 즉 자유의 행위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여야 하는가를 탐색하는 것이 윤리학의 과제였다. 대표적인 윤리학은 이성과 감성의 중용을 바탕으로 ‘행복’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쾌와 불쾌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공리주의 윤리학이 있다. 이 두 개의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감성과 정서를 중시한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으로 나에게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하면 의미없다는 것이다. 비록 ‘행복’의 윤리학은 이성의 역할을 중시했지만, 근본적으로 ‘감성’의 역할이 여전히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2. 이러한 윤리학과 대립되는 것이 칸트의 ‘의무윤리학’이다. 인간의 행위는 감정적 영향과 관계없이 옳음을 바탕으로 한 행동과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행복감을 주거나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옳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무의 윤리학은 인간의 감성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여 행동을 제약하거나 옳음의 기준이 결국 자의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지 않냐는 비난을 받아왔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탄핵사태’라는 위기의 정치현실에 대입할 때, 의무의 윤리학은 우리가 취해야 하는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좋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3. 칸트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논증했다. 이성을 통해 영혼불멸, 우주, 신에 대한 탐색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다. 하지만 실천의 영역에서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인간의 사변이성 중 ‘자유’는 그 자체로 인정되고 허용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 너머의 세계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성너머의 세계를 요청함으로써 ‘자유’에 기초한 행동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무의 윤리학은 인욕과 싸우면서 도덕법칙 오로지 도덕법칙이기 때문에 따르려는 선의지에 입각한 윤리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는 ‘정언명령’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가 있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윤리적 행위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지향점을 강조한 것이다.
4.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들이 행동하는 이유는 대부분 감정의 욕구에 따른 행위인 경우가 많다. 현재의 정치사태가 마음에 들지 않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행동한다. 그러한 정서적 태도에 기반한 갖가지의 편향된 선동에 따라 목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그것은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워주는 효과 때문에 동참하는 것이다.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통과되던 날, 국회 앞에서는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광화문에서는 탄핵에 반대하는 집단들이 모였다. 그들의 구호를 자세하게 들어보면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광화문을 지배하는 극우집단은 일상의 상식을 거부하는 편향된 전제를 통해 집단을 결집시킨다. 그렇기에 선거부정을 말하고, 종북을 주장하며 시민들의 비판의식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옳음’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구국의 신념’은 소수의 왜곡된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거짓의 공간 속에서 형성되었고 그것을 통해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감정적 몰입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5. 반면 ‘탄핵찬성’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에는 ‘옳음’에 대한 판단에 기초한 자유의 결정이 보인다. 발언대에 오른 젊은이들은 현재의 사태가 ‘민주주의적 질서’에 맞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행동에 나섰다는 것을 정확하게 밝혔다. 분명 분노의 감정과 불안의 감정이 등장했겠지만 우선적으로 그들의 행동에는 명확한 윤리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민주적 사회에서 인정되고 통용되는 원칙과 행위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가 있음에도, ‘계엄선포’라는 엄청난 폭력을 동반한 도발은 민주적인 원칙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폭거라는 인식이 작용한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서 윤석열이 남발하는 ‘자유’의 허구가 아닌 개인의 자율성과 올바른 윤리를 찾으려는 진정한 ‘자유’의 의지를 발견한다.
6. 칸트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요청함으로써 최고선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지행해야 할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우리의 자유는 그것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의 기준이 되는 도덕법칙은 무엇인가? 모두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강조하는 세상에 어떤 것이 진정 옳은 것일까? 칸트는 그것을 자연법칙에 일치하는 것이라 말했다. 칸트가 말한 자연법칙은 과학적 인과관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양적 ‘哲理’을 뜻한다. 즉 세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고 합의할 수 있는 판단과 태도라 할 수 있다. 즉 현대사회에서는 공정과 정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원칙’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7. 광장에서 외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에서 윤리와 정치가 통합되는 모습을 확인한다. 젊은이들의 행동은 단지 감정적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민주적 가치를 창조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가 말한 윤리의 핵심적 원칙인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입법(도덕법칙)의 원리로서도 유효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와 일치한다. 그들의 행위(준칙)은 보편적 입법(민주적 정치)을 향한 명백한 ‘옳음’이자 행동인 것이다. 칸트의 윤리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때론 ‘과도함’에 비난을 받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여전히 중요한 판단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정도를 지키라는 말처럼, 위기의 상황 속 개인의 판단은 원칙을 향한 자유의 확신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 2024년 'B급 윤리'의 글은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앞으로 좀 더 생각하고 정리하여 2025년 새로운 글을 올리고자 한다.
첫댓글 - 주술문화가 엮은 상식과 이성이 사라진 시간이라는 생각에 분노, 차분(?)하게 처리하는 절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