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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아르벤
후속편.
예나의 이야기.
다음 날 라인이 깨어난 곳은 막사 안의 장교숙소였다.
"어헛?"
어젯밤 타는 듯한 열기에 피부가 갈라지는 것까지 기억났다. 그리고 뚝 끊긴 다음 눈 뜬 곳이 느닷없이 이곳이었다.
기분 탓인지 바깥에서 나는 소음도 별로 없어 보였다.
멍한 기운에 기분 나빠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라인은 금방 고개를 흔들고 몸을 살폈다. 뒤이어 일어나 창 밖을 살폈다.
연병장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포 수입을 하고 있었다. 별 다른 소란은 보이지 않았고 간부들도 없었다. 한가한 날이었다.
라인은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연병장으로 나갔다.
"엇, 전포대장님?"
"무적!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어, 무적."
포대원들이 라인을 보는 눈치가 수상쩍었다. 라인은 대번에 분위기를 눈치채고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 어젯밤 절반은 무너졌을 건물들이 멀쩡하고 멀리 보이는 방벽들도 깔끔했다.
"엇? 전포대장님! 어제 즐거웠습니까?"
"어, 응? 그, 그래."
얼떨떨한 기분에 대답을 하자 말을 건 소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눈짓을 했다. 라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 넘겼다.
"아니 전포대장님. 어제 얼마나 좋았으면 아직까지 알딸딸 한 겁니까? 진짜 부럽네요. 그런 미인은 어디서 꼬신 겁니까? 괜찮으시면 저도 다리 좀 놔주시면..."
"어, 어허! 혹시, 다 봤냐?"
"아, 지금 소문이 쫙 퍼져 있어요? 어제밤 늦게 술에 잔뜩 취한 전포대장님을 그 여자가 힘겹게 데리고 왔다고 위병조장이..."
"아 됐어. 지금 한가하지? 나 잠깐 나갔다 온다."
"지금 수비대장님이 오신다는 데요?"
"왜 하필 이럴 때, 언제?"
"이따가 4시에요."
"아직 멀었네. 잠깐 갔다온다."
라인은 당장 부대를 나섰다.
생각하면 할수록 뒷골이 오싹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제 일어났던 일들은 분명히 사실이고 환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는 아무런 이상 없이 평상시와 다름없었고 분명히 무너졌을 네던산도 멀쩡했다.
우선은 예나를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이다.
도시 동쪽 문 앞에 있는 원숭이집이라고 했다. 이름과는 다르게 이곳에선 꽤나 고급호텔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떠들 때마다 라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정작 일이 일어난 것은 예나였다.
라인이 호텔에 도착해 로비에 들어갔을 때 당장 눈치챈 건 식당 쪽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역의 고급 호텔이니 만큼 드나드는 사람도 많고 외부인도 당연하게 많다. 하지만 그다지 이런 곳에 견식이 없는 라인으로서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원인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창가 쪽에 있는 탁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소녀가 힘없이 볼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 앞에는 무슨 일인지 젊은 남자 하나가 엉거주춤 앉아서 예나를 내려다보며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집적거리는 남자다.
라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가 탁자 앞에 섰다.
"예나. 할 이야기가 있어."
꿈적도 하지 않는 소녀를 앞에 두고 웬 딸랑이가 왔냐는 식으로 짜증을 내며 앉아있던 남자가 라인을 노려보았다. 라인은 한번 눈을 마주쳤다가 흥미 없다는 듯 예나에게 곧장 시선을 돌렸다.
"예나. 어제 밤에 일 말인데, 너 도대체 뭐야?"
"잠깐."
라인에게 다시 도전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라인은 무시했다. 예나가 그 말을 듣고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앞에서 그걸 본 남자는 침을 삼키며 굳었다.
한쪽 얼굴을 탁자에 누른 탓에 빨개진 얼굴에 짙은 피로가 깔려 있었다. 입술과 눈자위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호흡은 조금 가빴다. 몸에는 방안에서나 입을 가벼운 잠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는데 밖에 나가도 무리는 없을 디자인이었지만 가슴 쪽이 심하게 파여 있어서 길게 맞물린 앙가슴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순간 라인도 놀라 온 몸이 굳었다.
식당 안에도 순식간에 적막이 퍼져나갔다.
"후아~"
예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얼굴을 손으로 감싸쥐고 비볐다. 몸의 흔들림에 산발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소매자락이 접혔다.
"아, 라인이구나. 미안. 오늘 전망대에 못 갈 것 같아."
정신을 차린 라인은 재빨리 남자를 밀치고 자리에 대신 앉았다. 엉덩이로 밀치는데도 남자는 순순히 물러났다. 어지간히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물론 라인도 충격을 받았긴 했지만 그동안의 여자경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당황을 수습하고 앉아서 예나의 눈만 마주보았다.
"…."
하지만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세상 경험이 많은 줄은 짐작했지만 이렇게 대담하게 노출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성격인 줄은 상상 밖이었다. 이 군사도시에서는 어느 여자도 허술한 채로 돌아다니지 않았고 나라 안에서도 그러했다. 라인은 조금 나았지만 다른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벌거벗은 것만큼 자극적인 것임이 틀림없었다.
라인이 멍청히 쳐다보자 예나는 눈이 쏟아질 것처럼 다시 하품을 하곤 탁자에 엎드렸다.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가슴이 탁자 위에 얹혔다. 어쩐지 굉장히 무방비 하다.
"아, 그래."
빈틈없어 보이던 어제와 전혀 딴판으로 보였다.
"졸리다."
라인은 주위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할 것 없이 다들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가 헛기침을 하거나 고개를 돌렸다. 시비 걸러 오는 놈도 없었다.
라인은 홀에서 예나를 흘긋거리던 서빙을 손짓으로 불러 간단한 것들을 주문하곤 예나를 향해 헛기침을 했다.
"밤새 뭐한 거야? 밤샜어?"
예나는 엎드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인은 어젯밤 목격한 광경에 대해 물어 보고 싶은 느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어쩐지 뻘쭘해서 말을 건네기가 힘들었다.
그대로 주문한 음료가 나올 때까지 라인은 손가락만 만졌다. 여자 앞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휴."
음식냄새가 나자 예나는 돌연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켜 눈을 비볐다. 라인은 잔을 기울이며 곁눈질을 했다. 단단한 외투를 입고 있을 때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동산이었다. 가느다란 몸매에 비해 너무 볼륨이 넘친다.
"여기!"
적당히 졸음을 쫓은 예나가 턱을 괴고 외쳤다. 그 목소리에 식당 안에 있던 남자들이 죄다 고개를 돌렸다. 라인은 갑자기 이 상황이 한심스러워져서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리고 표정을 감췄다. 자신만 너무 심각한 것 같아 우스워졌다.
예나는 과자 같은 것들을 한아름 주문하더니 앞에 놓인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주위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꿀꺽거리는 목울대부터 깊이 파인 앙가슴까지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데도 부끄러움 하나 없었다.
"저기, 예나? 한숨 좀 돌렸어?"
"응. 좀 낫네. 방안에 누워 있으려니 숨막혀서."
손가락으로 입술을 훔친 예나는 어깨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탁자에 기댔다. 어깨를 움츠리는 모양새는 의식하지 않고 그런 다면 타고났다고 볼 수밖에 없는 몸짓이었다.
"뭘 했기에 아직까지 엎어져 있던 거야?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어?"
라인은 일단 시치미를 뚝 뗐다.
"으응. 뭐 그렇지. 간밤에 난리도 아니었어. 웬 녀석이 방 앞에 와서 밤새도록 시비를 거는 바람에 혼났지. 보아하니 오늘은 더 많을 것 같네."
"밤새 그냥 놔뒀단 말이야? 그럴 성격으론 보이지 않는데?"
"자려고 누웠는데 나가긴 싫어서. 겨울연가를 아주 구성지게 부르더라고."
"이런데서 그렇게 민폐 끼치면 당장 쫓겨날텐데 잘도 있었다?"
"돈이라도 쥐어 준 모양이지. 적당한 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런데 여기보다 나은 데가 없더라."
예나는 나른한 눈으로 라인을 바라보며 조잘거리다가 문득 주위를 돌아보곤 배시시 웃었다. 무방비한 그 웃음이 미모와 겹쳐지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라인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그릇 하나를 예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무방비한 가슴 쪽이었다.
"흐응."
그러자 예나는 방금 과는 다른 의미로 진하게 미소지으며 몸을 숙였다.
자연히 탁자에 얹힌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오르며 동그란 굴곡이 진해졌다. 일부러 장난치는 모양새에 욱한 라인은 대놓고 시선을 가슴으로 향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좋은 광경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어떤 여자와도 비교를 불허했다.
"너, 혹시 남의 시선 즐기냐?"
"딱히 그런건 아닌데?"
"자랑하는 모양새잖아."
"자랑할만 하지."
"그, 그렇긴 하네."
웬만큼 면역이 있는 라인도 이런 공세에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여자애는 겨우 15세 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너무나 대담했다. 수줍음과 부끄러움 따위는 엊저녁에 팔아먹었다. 얼굴도 흘리는 웃음도 전혀 요부 같지 않은데 몸짓이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는 너도 되게 당당하네?"
"되도록 오빠라고 부르는 건 어떻냐?"
"싫어. 남녀관계는 그런게 아니라는게 내 지론이야."
라인은 웃어서 당황함을 감추었다. 단칼에 잘라 말하며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다른 여자들과 전혀 달랐다. 최소한 경험한 여자들 중에 이렇게 남자와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는 없었다. 연애관계는 더 그랬다. 만난지 하루 밖에 되지 않은 남자를 일부러 찾아오는 여자는 거의 없다.
"그러면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거야? 제발로 곱게 돌아갔다고 생각하긴 힘든데?"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던걸?"
주문한 것들이 나오는 바람에 말이 잠시 끊겼다.
예나가 시킨 것은 라인과 달리 주로 달달한 과자들과 디저트 종류였다. 씀씀이를 보니 값을 따지지 않는 부류인 모양이었다. 라인으로선 가끔 얻어먹기라도 하면 황송한 것들이 잔뜩 나왔다.
서빙이 흘긋거리자 예나는 탁자 밑에서 감색 천을 꺼내서 어깨에 둘렀다.
"먹는게 왜 다 과자 뿐이야? 보아하니 아침도 안 먹은 얼굴인데?"
라인은 사양하지 않고 가장 좋아 보이는 과자를 집었다. 예나는 예상대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손이 크림을 얹어먹는 과자로 제일 먼저 갔다.
"밤새 시달렸더니 입맛이 안 땡겨."
"되게 끈덕진 놈이었나 보네. 썩은 도끼자루로 쇠나무를 마구 찍는 그런 놈 아냐? 크레트쉬라던가."
라인은 살짝 운을 띄웠다.
"그렇네. 그런 이야기도 했어. 태양신 크레트쉬의 광명을 옮겨놓은 듯 황홀하다 어쩌다 하더라. 시시콜콜한 이야기야."
예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직 방어를 뚫기는 한참 모자르다. 라인은 슬쩍 식당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여유시간을 가늠했다. 여기 식당의 가격은 뼈아프지만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과자와 함께 침을 꼴깍 삼키며 라인은 예나의 얼굴을 보았다. 이런 타입을 욱하게 만들기 위한 단어들이 몇 가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우연이네. 어제 밤에 나도 악몽을 꿨어. 남의 머리 위에서 이상한 것들이 막 싸우더라고. 희안한건 성경에서나 봤던 크레트쉬가 나왔단 거야. 나 솔직히 역사에 관심은 없어서 잘 모르는데 싸우는 걸 보니까 역시 그런 데에 실릴만 하더라. 완전 영웅왕 같았어. 영화였으면 감동 먹었을거야."
과자에 크림을 얹는 손길이 조금 흐트러졌다. 예나는 라인을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난 그런 녀석들 별로 안 좋아해."
"오, 그래? 여자가 보기엔 그런가? 아니면 네 감상이야?"
"둘 다라고 할까, 세번째지. 그런 주제에 얌전한 놈들은 없어. 여자를 가만 놔두는 놈들도 없고. 영웅왕이니 기사니 해도 결국 같잖은 무기 휘두르는 야만인이잖아. 남의 골통 깰 시간에 생산적인 걸 해야지."
"우와. 너 은근 입이 험하다?"
말이 많아졌다. 라인은 원하는 반응이 유도되자 흥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느껴져 가슴이 떨렸다. 어제 밤 본 광경이 정말이라면 지금 예나와 관계되는 것은 악령소굴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나 예쁘지?"
"음, 응. 뭐 그렇지."
예나가 자신을 가리키며 하는 소리에 라인은 순간 벙 쪘지만 금방 대답했다. 다른 여자가 그런다면 꼴값 떤다고 비웃었겠지만 예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수도의 사관학교 임관식 때 본 사마하 공주님의 미모는 그때까지 봤던 모든 여자들을 뛰어 넘었지만 예나에게선 비교조차 불가능할 오오라가 풍겨져 나왔다. 그래서 이토록 자신만만한 말을 해도 밉지 않은 것이다.
"흐음? 나 예쁘지 않아?"
"아니, 예쁜데."
"빈말 같아서 기분 나쁜데."
"누가 빈말이라고? 아니 그보다 너 여기저기 다녔으면 이런 말이야 뻔질나게 들었을 거 아냐. 이제 와서 내가 그런 말한다고 기뻐?"
예쁜 여자는 어디를 가든 가만 두지 않는다. 지금도 이 식당 안에서 예나를 주목하고 있는 남자들은 늘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
어쨌든 라인은 조금 직설적으로 직구를 날렸다. 그런데 예나는 그 말을 듣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 의외로 허당이네."
"내가?"
"됐어. 그건 내거야. 먹지마."
예나는 라인의 왼쪽에 있던 과자그릇을 하나 통째로 들고 가서 자기 앞에 놓고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라인이 살살 긁으니 그것에 심통이 난 모양이다. 다른 여자들이라면 은근히 돌려서 못 알아듣게 까거나 한참 지나서 뒷말이 들려올 텐데 나 화났다는 반응이 아주 신속하게 왔다.
"브뢰탱은 이거랑 먹으면 맛있어."
라인은 잼을 스푼에 적당히 덜어 예나의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신맛이 나서 싫어하는 모양인지 한 입 먹고 말았던 잼을 들이대자 예나는 스푼을 바라보곤 입술을 삐죽이며 덥석 물었다.
"말하고 싶은게 뭐야?"
"별거 없어. 내가 어제 참 뒤숭숭한 꿈을 꿔서 그런거지. 세상에, 네가 나와서 크레트쉬랑 싸우지 뭐야. 용사물에 심취해 있던건 옛날일 같은데 그렇게 화려하게 싸우는 모습을 볼 줄은 몰랐어. 이야, 정말 장난 아니더라. 죽을 뻔했어."
예나는 시선을 과자그릇에 둔 채 입안에 든 것의 맛을 확인하듯 턱을 오물거렸다. 언뜻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꿈에 벌써 내가 나와?"
"그래, 만난지 일주일도 안된 여자애가 꿈에 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참 이상하다. 그렇지?"
"어머. 고백인가?"
"그런 쪽으로 생각해주다니 고마운걸. 하지만 아무리 한눈에 반했다고 해도 난 만사 제쳐두는 타입은 아니니까."
예나는 살짝 눈꺼풀을 올려 라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예나의 앉은키는 라인보다 상당히 작았다. 여자 치고 큰 키인 주제에 그렇게 높낮이가 다른 것을 보면 정확한 비율이 어떠한지 참으로 고민이 되었다.
"하여간 좀 있다 가봐야 돼. 어쨌건 이야기 해보자면 말야…."
라인은 예나의 표정 변화를 감시하며 어젯밤 겪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신의 화신인 거인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거나 도끼를 던졌는데 산이 폭발했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예나는 정말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별 관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라인은 좀 더 이것저것 파고들 틈을 만들기 위해 낚시나 떡밥을 던져 보았지만 15세라고 하는 이 아가씨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라인은 시간에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리엔은 이곳 해안 최전선 도시에서 먼 내륙에 있는 다른 나라다. 거의 다섯 달은 여행해야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곳이었고 그런 곳에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을 보는 건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중대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알게 모르게 퍼지는 소문으로 엄청난 미인이 흘러 들어왔다고 하니 구미가 안 당길 수가 없었다.
"아, 내 팔자도 참."
어제 보았던 일을 마냥 꿈이니 허황된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며칠 지나면 무슨 변화라도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때까지 예나가 거기에 그대로 있을까? 심증은 있는데 전혀 물증이 없고 진실처럼 이야기하기엔 이쪽이 매우 불리했다.
무엇보다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고민해보긴 처음이었다. 이건 그만큼 엄청난 미인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가시가 그렇게 위험한데 매력적이다.
"응?"
돌연 날리는 돌개바람에 라인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틈에 하얀 안개 같은 낮은 구름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바다 쪽을 바라보자 구름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설마…아니겠지."
여름이나 겨울이나 해안에 바다안개가 끼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오후 시간대이다. 라인은 불길한 예감에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부대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질 때쯤이 되자 윙윙거리는 험한 바람 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바다 쪽에서부터 검은 구름이 밀려오며 천장이 삐걱거릴 정도로 돌개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병영에 일단 비상이 걸렸다.
"야! 야단났다! 장벽에서 파고가 15미터 이상이래! 일단 포에 가서 죄다 단단히 묶고 배수로 깊게 더 파! 각 전포대장들은 막사랑 시설물 책임지고 고정 해놔! 포대장들하고 나는 장벽 쪽에 지원 갈 거니까 포대장들 빨리 인원 차출해!"
대대장 휘하 상관들이 죄다 장벽으로 투입됐다. 라인은 점점 험악해지는 날씨에 가슴을 졸였다. 지금은 태풍 따위가 오는 시기가 아니고 겨울엔 악령들말고 커다란 바람이 부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폭풍이 이는 대신 악령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번쩍 하는 빛이 나더니 도시를 둘러싼 장벽 위로 천둥이 내리쳤다. 퍼렇게 번쩍거리며 장벽이 빛나고 방전 불꽃이 여기저기 튀며 하늘에 꽃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와아!"
"뭘 감탄하고 있어! 빨리 다들 포에 가!"
작전과장의 말에 따라 포상으로 가서 비를 맞기 시작하는 포에 방수포를 두르고 일부는 배수로를 정비했다. 한번 비가 오기 시작하니 바람이 더더욱 거세지며 천둥과 번개가 도시 장벽으로 매섭게 내려치며 하늘이 온통 푸르게 빛났다. 이쯤 되니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오금이 저리게 마련이라 병사들이고 장교고 할 것 없이 다들 몸을 움츠리고 떨었다. 하지만 군대는 벼락이 치든 포탄이 떨어지든 할건 해야하는 곳이다.
라인은 떨어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포상 안의 물건들을 정리해 넣었다. 옛 유물인 포나 기타 부수기자재들은 비에 젖어도 고장도 안 나고 녹도 슬지 않지만 언제나 바로 쓸 수 있게 준비해두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사실 망가지면 고칠 수도 없는 물건이 많았다.
"후."
혹시나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안쪽으로 번쩍거리는 번개만 보였다. 이렇게 아닌 때에 찾아 온 폭풍을 보니 불길한 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라인의 그 불길한 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오. 어제는 태양신이더니 오늘은 폭풍의 신이냐?"
시가지는 난리가 나있었다.
비정상적인 강우량에 도로나 배수로들이 벌써부터 넘쳐흘러서 사람들이 죄다 뛰쳐나와 난리법석을 떨었다. 윙윙대는 바람이 하도 거세서 도시 장벽 위쪽에 있던 군인들도 모두 철수하고 예나가 있는 원숭이집도 방마다 돌면서 창문 바깥쪽 나무 창문을 내려 모두 닫았다. 그런데도 유리창문이 덜컹거리며 깨질 것 같았다.
"그냥 놔두면 안 가나?"
예나는 목에 걸은 병을 찰랑 찰랑 흔들었다. 안에 있는 하얀 액체는 이제 3분지 2정도 차 있었다. 입술을 부풀리며 바깥을 바라 본 예나는 침대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 위엄이라도 과시하듯 주절거렸던 크레트쉬와 달리 이 폭풍의 신은 거대한 폭풍으로 위장한 채 한마디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두껍게 깔린 구름 안쪽에 강력한 기운이 머물러서 폭풍을 점점 더 거세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폭풍신이 도시 앞에서 버티며 비와 벼락을 내리고 바람을 분들 피해 입는 것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예나에겐 크레트쉬처럼 다짜고짜 덤벼오는 쪽이 더 귀찮았다.
"아빠…."
방 한구석에 세워놓았던 검이 약한 황금빛을 내며 두둥실 날아와 예나의 옆에 내려앉았다. 100억 광년을 넘어 날아오는 동안 검은 예나를 지켜주고 길을 인도했다. 하지만 도착지에 이르러 검도 길을 잃었다. 엄마는 어찌나 다급했는지 많은 메시지를 남겨주지 못했다.
그래서 찾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흔적을 추적해 이곳까지 온 참이었다.
그동안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서 겪은 고초야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지만 문제는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으스스한 악마들이 밤마다 잠에서 깨어 올라오는 데다 낮에는 물 속에 잠복해 있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나갈 수는 없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며 내려놓은 나무 창문이 창틀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검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운 예나는 창문 밖을 노려보며 몸을 웅크렸다. 단순히 비와 바람으로 두드리고 끝날 리가 없다.
라인은 지금쯤 도시 사람들처럼 폭풍에 정신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번쩍거리는 천둥과 번개가 몇 번이나 내려찍으며 창 밖을 파랗게 물들이는 동안 문득 창문턱을 보자 건장한 남자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형님의 뜻에 따라 왔긴 왔지만 나로선 진정한 신의 자손을 해치는 건 영 꺼림직해. 그냥 잠시 참고만 넘어가 주게."
"그건 또 무슨 수작이야?"
"억지로 불려나왔지. 애초에 끝이 올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 이런 짓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러나 그걸 알고 있음에도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총의를 대변하니까."
"그런 여기 묻혀 있는 기계들을 타고 떠나면 되잖아?"
그림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두꺼운 로브를 덮어쓴 그 모습은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 방랑자 같았다.
"준비가 안되었다. 옛 신의 유물을 이해하기에 인간은 아직 미진하기 그지없다. 지금으로선 타고 떠난다고 해도 그저 멸망을 맞을 뿐이다. 그러면 우리도 끝이지."
사내는 예나에게 두 걸음 정도 다가왔다. 그러자 예나의 품속에 있던 검의 황금빛이 강해지며 스스로 떠올라 앞을 막아섰다.
"나는 바람과 폭풍의 방랑자 아쉬라멕. 태양신의 동생이며 대지모신의 남편이다. 멸망이여. 준비가 될 때까지 유예를 줄 수 없는가."
"아주 뻔뻔스럽네. 연체 이자까지 다 받을 테니까 각오해."
"협상의 여지는 없는가?"
남자는 담담히 재촉했다. 예나는 입술을 씹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 격앙된 감정에 검이 두른 빛이 강해지며 그림자뿐인 남자의 모습을 비췄다. 검게 비쳐 보이는 로브 안은 비와 바람이 섞인 돌개바람 밖에 없었다.
"그런거 없어. 겨우 엄마랑 아빠를 만나서 얼마 응석부려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됐거든. 짜증나."
코르크 마개를 입술로 비틀어 열은 예나는 안의 내용물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침대에서 스르르 일어섰다. 검에서 뿜어지는 황금빛이 점점 강해지더니 덜컥거리는 나무 창문을 비췄다.
"그렇군. 결과를 알고 있으나 할 수밖에 없군."
"그럼 그냥 집에서 뒹굴고 있지 그랬어."
검에서부터 황금빛을 띈 하얀색 갑옷 조각들이 떠올랐다. 이 갑옷은 온통 하얀색으로 고대의 고풍스런 기사 갑옷을 연상케 했다. 그것이 예나의 몸에 스스로 붙었다. 가슴 보호대나 건틀렛, 쇠장식들이 쇳소리를 내며 맞물려 조립됐다.
"그럴 수도 없다. 난 자유를 가지지 못했다."
창문을 때리던 거센 바람이 칼날로 변하기 시작해 창틀이 삐걱거렸다. 예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그냥 입었긴 하지만 역시 좀 부끄럽네. 엄마도 옛날 사람이라니까. 패스코드."
검에 붙어 있던 금속상자가 분해되어 떠올라 다시 조립되었다. 손바닥만하게 나뉘어진 조각들이 움직여 길쭉한 레일에 손잡이가 달린 총으로 완성되자 총신에 그어진 무늬들이 황금빛을 뿜었다.
창문이 덜덜거리며 바깥에 걸린 나무 창문 몇 개인가가 떨어져 나갔다.
예나의 갑옷은 검게 물들며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전투복으로 바뀌었다. 고대 영웅의 갑옷은 현대적인 양식의 전투 골격으로 바뀌어 곳곳에서 고주파 작동음이 들렸다.
"난 역시 이쪽이 좋다니까. 빨리 엄마 찾아 돌아가서 콜옵 신작 해봐야지. 밀린 게임만 해도 수 십개는 되겠어."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것처럼 바람이 부딪쳐 오며 도시 방어장을 찢을 것처럼 번개가 쳐댔다. 어찌나 격렬한지 창틀 사이로 새어오는 바람에 시큼한 오존 냄새가 섞였다.
'아쉬라멕의 권세가 하늘을 덮으니, 모두 엎드려 떨어라!'
커다란 외침과 함께 창문이 모조리 깨져나갔다. 유리파편 섞인 바람이 칼날처럼 방안을 뒤집어 놓았지만 검을 앞세운 예나는 천천히 걸어나가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폭풍신의 선언과 함께 도시 안에 있는 집들이 피해를 입어 곳곳에서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일은 지들이 다 저질러놓고 왜 내가 뒤처리 해야하는 거야? 내일도 피곤하겠네."
예나는 총을 들고 창틀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동시에 발과 등에서 푸른색 고리가 생성되어 몸을 떠받치고 공중에 띄웠다. 어제 완전히 박살났던 장치는 하루 종일 고쳐서 쓸만하게 됐지만 온전할 때도 예나의 힘을 받아낼 수 없었던 기계라 조심조심 써야 했다. 툭툭 다리를 털며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예나는 고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참 한심하지. 이런 거에 피가 끓어서는…아빠랑 놀러 가는 게 더 좋은데."
거대한 폭풍이 하늘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공기를 마찰하고 벼락이 내리치자 방어장으로 보호받지 못한 도시 주변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크레트쉬를 집어던졌을 때처럼 극적은 아니었지만 산에 자란 나무들에 쉴새없이 번개가 내리찍는데 이 빗속에서도 숲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비는 또 비대로 강물을 이루어 흘러가는데 도시는 이미 침수되었고 바깥은 홍수가 났다.
'하늘의 이치를 움직이는 자가 나 아쉬라멕이니 폭풍과 우뢰가 그 권속이로다. 비와 바람과 번개여 나의 병사여. 나의 군단이여. 나의 적을 찢고 태워 제물을 바쳐라!'
온 하늘에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와 함께 들리는 신의 외침은 도시 안에도 분명히 들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태양신인 크레트쉬는 태양의 권능과 빛의 일주로 갖다 박는 무식한 것 밖에 하지 못했지만 폭풍신인 이 아쉬라멕은 전투가 뭔지를 알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건 똑같네."
예나의 전투골격, 기사 갑옷에서 강화복으로 탈바꿈한 옷에서 작은 날개와 각종 노즐이 솟아오르더니 폭풍 돌개바람에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예나의 등뒤로 날아가 옷에 파고들더니 황금빛을 뿜어내며 추진력을 더했다.
한편 아쉬라멕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폭풍이 신의 의지에 따라 강력한 회오리를 만들어내며 공기를 감아 올렸다. 지상에서 뻗는 번개가 그 회오리에 감겨 뇌운을 형성했다. 그것이 도시의 방어장을 강타하니 엄연히 전자적 방벽인 그것이 온 곳에 전하를 뿌렸다.
폭풍 안에 있는 온 하늘이 죄다 거대한 방전기가 되어 예나를 위협했다.
"바다에서부터 불어오는 폭풍에 새겨진 번개의 이름…사람들이 두려워한 권위를 가진 폭풍신이라, 나중에 발전소 차리면 잘해먹고 살겠는데? 일단 폭풍부터 부숴볼까?"
예나는 총의 덮개를 움직여 장전했다. 그러자 두개의 레일에 그어진 무늬에서 붉은 빛이 빛나며 시퍼런 플라즈마가 레일 사이의 총구에서 흘러나왔다. 상공에서도 눈을 가릴 만큼 비가 쏟아지는데 빗방울이 승화되며 폭발이 일어났다.
총을 견착하고 전방 손잡이를 잡은 예나는 조준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공기 충격파와 함께 예나의 등뒤에서 반동을 견디는 추력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고도 공중에서 100미터는 밀릴 정도로 반동이 거셌다. 그러나 그 위력은 확실해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을 장악한 구름 한편이 완벽하게 터져 나갔다. 빗방울의 방향이 순식간에 수평으로 바뀌더니 수증기 폭발이 일어나 도시 위에서 온통 번쩍거리는 섬광이 일었다.
'옛 신의 유물이군. 진정한 신의 권능인가?'
"엄마 칼을 못 쓰는 거에 감사해."
아쉬라멕은 별로 타격을 입은 눈치가 아니었다. 예나는 혀를 차며 연거푸 총을 쏘았다. 하늘을 휘감던 폭풍과 회오리들이 맥없이 터져 나가며 별빛이 보였지만 구름에 난 상흔 따위는 물에 푼 물감처럼 덧없이 없어졌다. 오히려 공기 중에 남은 전하가 뒤엉켜 예나에게 벼락이 떨어졌다.
"흥!"
아쉬라멕의 본체는 폭풍 어딘가에 잠복하고 있던가 폭풍 그 자체가 본체일 수 있었다. 예나는 전하로 뒤덮여 시퍼렇게 빛나는 총을 들고 더 고도를 올려 아예 폭풍 구름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자 사람 머리통 만한 우박들이 쇄도했다.
"이쪽도 야만인인건 별반 다르지 않네!"
맞아도 별 상관없는 공격이었지만 폭풍 속의 거센 바람에 저항하며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예나에겐 조금 성가셨다. 총을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을 펼치자 거기에서 바늘 네 개가 사방으로 발사되더니 투명한 힘의 장이 형성됐다. 그것에 돌격한 우박은 족족 녹아 내리며 흩어졌다.
'나의 무기들을 손쉽게 무력화시키는군.'
바람 소리에 섞여 윙윙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예나는 총을 흔들어 어깨에 댔다. 거기에서 장갑판 들이 풀려 나와 총에 달라붙어 커다란 레이더스크린 안테나와 길다란 포신이 뻗어 나왔다.
예나는 훌쩍 발을 굴려 추진력을 집중한 다음 내륙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발을 구른지 2초만에 음속을 돌파해 앞을 막는 난기류를 찢어버리고 계속 가속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폭풍을 향해 총을 조준했다.
"비바람 가지고 잘난 체 하긴."
폭풍은 점점 확대되어 도시가 아니라 지역 전체를 덮을 만큼 짙고 두껍다. 하지만 벌써 초속으로 세어야할 속도에 도달한 예나는 폭풍의 범위에서 빠져나와 방아쇠를 당겼다. 동그란 레이더 스크린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뭔가 포착했는지 즉각 포신이 작렬했다.
동그랗게 확산되며 퍼져나가는 빛이 뱀처럼 폭풍구름을 단숨에 뚫고 모든 것을 증발시켰다. 이 일격에는 폭풍 전체가 한순간 와해되어 하늘이 뻥 뚫렸다. 예나는 거기서 지체하지 않고 총을 다시 번형 시켰다. 총신의 레일이 12개로 늘어나며 왼팔의 하박에 들러붙고 오른손에 남은 포신과 레이더가 변형해 커다란 대함도가 되었다.
"앞으론 FPS말고 무쌍난무 같은 것도 해봐야지."
칼을 만족스럽게 쥐어본 예나는 다시 폭풍 안으로 돌격했다.
"이건 정말 장난 아니잖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하늘이 쉴새 없을 정도로 번쩍이며 퍼런 방어장 위로 전하가 물처럼 흘러내렸다. 전기가 흐르는 길이 순간 보이는 것이 번개지만 방어장 위에선 퍼런 물결이 한순간이 아니라 느릿느릿 흘렀다.
"빨리 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
라인은 또 다시 일어난 말도 안되는 광경에 압도되었지만 어제의 경험 때문에 금방 당황을 거두었다. 어제는 빛의 거인이 도시방어장을 두드려 도시 안의 모든 것을 박살냈다. 이번엔 도시 위로 쉴새없이 번개가 내리쳐 생긴 정전기가 물처럼 흘러내린다. 저게 도시를 침수시킨 홍수에 닿는다면 도시 전체가 죽어 나자빠질 것이 틀림없었다.
"우와! 젠장! 정말 장난 아니잖아!"
다행이 막사는 해일을 대비해서 지을 때 반석 위에 높게 지어져 있고 연병장이 꽤 넓어 침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비가 계속 온다면 물에 잠길 수밖에 없다. 병사들을 안에 밀어 넣고 방수작업을 시킨 라인은 행정반 뒤쪽의 계단을 올라가 전망대초소로 들어갔다.
"또 싸움인 거야? 대체 정체가 뭐야?"
예나가 틀림없다.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끌어 올 수 있는 건 그녀뿐이다. 그 매력적인 외모에 감춰진 가시는 범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독침이었다.
전망대 창문은 비바람에 덜컹거리며 깨질 것처럼 휘었다. 라인은 혹시 깨지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어장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어서 자세히 알아볼 수 없지만 비구름 사이에 틈새가 몇 번씩 생겼다. 바람과 폭풍을 불러온다는 아쉬라멕, 남자의 중후한 목소리는 방어장 너머 안쪽까지 똑똑히 들렸고 이 폭풍은 신이 불러온 것이 틀림없다.
숨죽이며 집중하는 가운데 폭풍구름 사이로 빛이 번쩍이며 몇 번인가 구름이 터졌다. 번개 빛과 전혀 다른 종류다. 그러더니 잠시 후 강렬한 빛이 하늘 전체를 뒤덮으며 비구름을 아예 날려버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뒤 창문을 두드리던 비가 멈추고 창문도 잔잔해졌다.
라인은 입을 벌리고 바닥에 앉아 있다가 슬금슬금 창문을 열었다.
공기 중에 온통 비릿한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방금 그 일격에 방어장 위에 있던 전하도 모두 씻겨나가 걸레질을 한 것처럼 투명해졌다. 그 위로 멀쩡히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보이는데 방금 전까지 폭풍이 있던 곳이라고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다.
"진짜, 이게 무슨."
할말을 잃어버린 라인은 멍청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때 내륙쪽 하늘에서 황금빛 빛덩이 하나가 쭉 날아와선 허공에서 멈춰 서서 뭔가를 던졌다.
"예나? 예나!"
닿을리 없지만 라인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빛에 적응되자 사람의 형상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 그녀를 향해 구름들이 다시 물밀듯 밀려왔다. 던져낸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주위를 선회하며 위협했지만 물을 칼로 벨 수 없듯 구름이 다시 하늘을 점령했다.
"우왓! 젠장!"
하지만 라인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비밀을 감춘 여자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 비밀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니 더 그렇다. 영웅 서사시에 있는 군웅할거극의 한복판에 있다 하더라고 그럴진데 이것은 신화 속의 전투를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악령들에겐 흔들리지 조차 않던 도시 방어장이 간단히 구멍날 정도로 초월적인 싸움이다. 그런 싸움을 벌이는 자가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소녀라는 아이러니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격정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다시 구름이 터져 나가며 예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라인은 급히 주위를 뒤져 전망대용으로 쓰는 망원경을 꺼냈다.
전신에 무슨 양식인지 알 수 없는 갑옷을 뒤집어 쓴 예나의 뒤로 은색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흩날리고 등뒤에서 황금색 빛이 분사되고 있었다. 왼손에 붙은 정체불명의 무기를 내쏘자 파란 광점들이 구름 사이로 날아가 폭발하며 폭풍을 해친다. 그러나 폭풍은 도리어 성난 것처럼 번개를 쏘았다. 예나의 갑옷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고고한 예나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 얼굴은 정말 라인이 아는 그대로였다.
"우웃."
망원경을 내린 라인은 혀를 찼다. 저래서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일신에 저런 무력을 지니고 있으니 산적이든 살인범이든 그냥 일개 인간일 뿐이다. 저런 여자를 넘보려고 어떻게 수작을 건 일을 생각해보니 낯이 다 까질 듯 했지만 라인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쫓아냈다.
"야! 예나! 예르시하이나! 듣고 있지!"
'바람의 권력에 대항하는 자! 비의 영성에 저항하는 자! 온전히 쇠락에 몸을 내맡기리라!'
라인의 외침은 아쉬라멕의 웅후한 말소리로 되돌아왔다.
"큿! 내가 이런 거한테 고생하고 있어야 돼?"
예나는 돌아온 칼을 받아들어 갑옷으로 되돌린 다음 이를 갈았다. 아쉬라멕은 어디에 꽁꽁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밑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낯익은 라인의 목소리라 예나는 일부러 무시했다. 앞서 잔뜩 시치미를 뚝 떼고 지금 와서 친근한 척 내려가서 주스 한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잠깐."
하지만 예나는 몰려오는 구름을 바라보다 지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입술이 음흉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어?"
구름 사이로 번개가 번쩍이며 다시 비가 쏟아졌다. 라인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껌벅거리다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하늘에서 황금빛이 지상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뒤를 따라 무언가 하얗게 빛나는 것들이 떨어져 내린다.
"으악!"
라인은 황망한 와중에도 전망대에서 뛰어내려 행정반에서 달려나갔다. 그 뒤에서 쇠와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생활관에 있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뛰쳐나와서 바닥에 쓰러진 라인을 쳐다보았다.
"어머. 여기서 또 만나네?"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는 전망대 쪽 출입구에서 여자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리자 라인에게 쏠렸던 시선이 순식간에 그쪽으로 옮겨갔다. 전투준비태세를 걸어도 그보다 빠르지는 않겠다.
"에, 에나?"
손을 휘휘 내저으며 등장한 여성은 역시 예나였다. 아까 보았던 갑옷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뭐라 말할 수 없는 향이 코 속으로 스며든다. 약간 반투명해 안이 비쳐 보이는 듯한 치마 위로 가디건의 단추가 잠겨 있는데 자신의 볼륨을 자랑하는 듯 풍만한 언덕이 옷을 잔뜩 밀어 제치고 깊은 가슴골을 내보이고 있었다.
"어?"
"저어…."
병사들은 어처구니없는, 당황한 시선을 예나에게 쏟았다. 예나는 숨죽이며 바라보는 그 시선에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좀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 라인 중위님. 도와줄 수 있나요?"
"도, 도와 달라고?"
"그래. 골칫덩이가 또 쳐들어와서 난리거든."
하늘을 가리킨 하얀 손가락에 좌중의 눈길이 죄다 천장으로 향했다. 라인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엉거주춤 주저앉은 모양새를 수습할 순 없었다.
"잠깐, 아까는 시치미 뚝 떼고선!"
"어허! 시간 없어. 그 녀석이 온다고. 내 손잡을 거야 말거야? 날 잡으면 스릴 있지만 목숨이 위험한 일이 생길 테고 아니면 지금처럼 여자나 꼬시며 살 수 있어."
라인은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미는 예나를 보고 움찔 떨었다. 자세한 설명 따위 없지만 지금까지 정황으로 알아듣기에 충분했다.
"왜, 왜 난데?"
"그냥."
"그냥?"
"그렇지. 남녀가 호감 갖는데는 3초면 충분하니까. 왠지 네가 맘에 들었어."
"내가?"
"바보 같이 앵무새짓 하면 화낸다?"
막사의 창문들이 갑자기 덜덜 떨리며 바깥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 서슬에 다들 화들짝 놀라 소란스러워졌다. 예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곤 대답을 재촉했다. 라인은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추스린 다음 예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런 마음이 없던 것도 아니다.
"큭! 뭐 죽기야 하겠어!"
호기롭게 외치며 예나의 손을 잡자 예나는 킥킥 웃으며 라인을 일으켜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라인은 집어던져졌다.
"미안! 처음엔 인간방패부터야!"
"으악!"
물이 출렁거리고 있는 연병장으로 내던져진 라인의 몸을 누군가가 잡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얄팍한 수를…."
"하!"
예나는 기합을 외치고 달려나가 아쉬라멕과 격돌했다. 하던 말도 못 마친 아쉬라멕이 뒤로 튕겨 나가자 예나는 물 위를 나는 듯 달리며 달려들어 최소한 세배는 덩치를 가진 장신의 남자에게 정권을 날렸다.
"크악!"
파악!
중단에서 단숨에 꽂힌 주먹의 여파에 빗줄기와 발 밑에서 출렁이던 물이 터졌다. 그걸 뚫고 내달리며 예나는 거리를 주먹 간격으로 유지했다. 아쉬라멕은 그야말로 형편없이 얻어터지며 끝도 없이 밀리다가 담벼락이 등에 닿아서여 주먹에서 겨우 벗어났다.
예나의 매서운 주먹은 담벼락을 파괴하기 직전에 멈췄다.
"오오! 신이라고 자칭하는게 아깝지 않은데?"
희희낙락하며 담을 박차고 뛰어오른 예나가 고양이처럼 몸을 뒤틀며 아쉬라멕을 걷어찼다. 비와 바람으로 변해서 흩어지려던 아쉬라멕의 몸이 급히 실체를 다시 갖추고 방어를 했다. 둔탁한 파열음이 연속으로 울리며 예나와 아쉬라멕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큭!"
아쉬라멕은 비바람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점점 실체화하더니 두텁고 강인한 근육을 가진 검은색 거한이 되어 완전히 모습이 드러났다. 예나에 비하면 거의 네 배에 가까운 근육질 거한은 신화 속 영웅이라 해도 믿을만 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건 함성이 아니라 숨 죽은 비명이었다. 아쉬라멕의 한 손에 쥐어 잡힐 듯한 몸통을 가진 소녀는 아쉬라멕을 문자 그대로 팼다.
"하하하!"
예나는 간만에 신이 나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웃으며 팔꿈치를 찌르고 무릎을 차올렸다. 형식도 없는 마구잡이 난타전이었지만 주먹이 잡히면 박치기를 하고 다리를 후리면 허벅지를 찔러가며 교묘하게 빈틈을 공략하는데 공방이 능수능란하다.
"흐압!"
단 몇 초만에 수십 대를 얻어맞은 아쉬라멕은 기합을 내지르며 예나에게 온몸을 부딪쳤다. 번개를 두르고 달려드는 일격에 예나가 주춤거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쉬라멕은 허공으로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예나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나의 쭉 뻗은 다리가 대놓고 몸통을 향해 날아오자 아쉬라멕은 두 팔로 방어를 했지만 방어 위에 맞은 순간 대포알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졌다.
"으악!"
홍수 난 연병장에 엉거주춤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라인은 거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일단 몸을 날렸다. 아쉬라멕이 땅에 떨어지자 연병장을 채우던 물이 한순간 파도가 되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비가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있는데도 먼지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크아아아!"
대자로 뻗은 아쉬라멕은 별안간 고함성을 내지르며 몸을 튕겨 일어났다.
형형한 신의 눈빛이 번개 빛으로 타올랐다. 빗발이 거세지며 폭풍을 천둥이 하얗게 물들이고 회오리가 도시 방어장 위로 떨어졌다.
예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지상에 내려와 물 위에 섰다. 분기탱천한 아쉬라멕과 달리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허벅지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짧은 치마와 대충 단추 하나 잠근 가디건은 천둥빛에 하얗게 드러나 더욱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비 맞은 생쥐처럼 젖은 라인은 간신히 막사 앞 물이 차지 않은 포석 위에 올라와서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신화 속의 비바람 거인 아쉬라멕은 거대한 영웅설화의 주인공이라 패배를 모르는 영웅으로서 크레트쉬보다 오히려 더 알려져 있었다. 농담 않고 소설책에 등장하는 회수만 해도 100배를 넘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악령들을 퇴치하고 왕국들을 재건하며 모험을 한 이야기는 아느 동네를 가든 흔할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신이 지금은 형편없이 두드려 맞고 분노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나는 어디서 왔는지 근원이 불분명하다. 라인은 그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어깨를 떨었다.
"기세 좋네? 아직도 할 마음이 있는 거야?"
'폭풍의 진노가 대지에 닿으매 사방의 모든 백성이 엎드려 절하고 만방의 영웅이 쓰러졌다! 아쉬라멕의 진노가 이 땅에 닿아 모든 것을 집어삼키리니! 비와 바람의 권세는 천지를 진동시키고 벼락의 천벌이 내리리라!'
아쉬라멕의 말은 주위를 온통 뒤흔들어 무력한 인간일 뿐인 병사들은 다들 귀를 막고 쓰러져 비명을 질렀다. 내부가 진탕되었는지 옆에 있던 병사들의 입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라인은 감히 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좋아. 덤벼."
예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려 도발했다. 폭풍 신의 분노를 정면에서 받고 있음에도 여유있는 폼새는 가볍게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새다.
아쉬라멕이 읊은 말은 금새 현실이 되었다. 자욱한 폭풍 한중간에서 번개가 수없이 내리치며 방어장의 한곳을 집중 강타하더니 구멍이 뚫리자 단숨에 지상에 떨어졌다.
번개를 맞은 아쉬라멕의 육체가 한순간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전광이 빛의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예나는 왼손으로 막고 오른 주먹과 다리를 휘둘렀다.
아쉬라멕은 전광으로 그것을 막았지만 힘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녀의 늘씬한 다리에 실린 힘은 아쉬라멕을 장난감처럼 차냈다.
허나 이번엔 힘을 버텨내고 공중에서 회오리바람을 얻어내 다시 예나에게 돌격했다. 자그마한 폭풍이 지면과 수평으로 내달리며 부대의 포상과 담벼락을 갈아버렸다.
예나도 얼굴을 전의로 물들이며 주먹을 말아 쥐고 물을 박찼다. 2차전의 시작이었다.
"무, 무슨 짓거리야!"
라인은 줄줄이 박살나고 있는 포상과 담벼락, 초소들을 보고 두 초월적인 신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물론 한창 싸움에 빠져 있는 둘에게 들릴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아쉬라멕의 돌격을 받아낸 예나의 발 밑에서 해일이 일어나고 연병장이 푹 꺼졌다. 전 부대원이 삽질을 일주일은 해야 메워질만한 크기다.
그런 한편 폭풍신이 불러낸 회오리와 돌개바람은 가차없이 막사를 덮쳤다. 무거운 나무와 돌로 엮은 지붕이 그야말로 눈깜박할 사이에 하늘로 날아 올랐다.
그뿐 아니라 병사들도 비명을 지르며 파편에 맞아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광경을 목도하고 이성을 유지할 인간은 별로 없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패닉이 퍼져나가자 병사고 장교고 할 것 없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에 뛰어들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포대장님! 야! 도망가지마! 거기로 가면 안 돼!"
불길한 바람이 흉흉하게 불어오며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물을 빨아올렸다. 아쉬라멕에게 떨어지는 천둥은 끝이 없었다. 그럴수록 예나의 주먹을 막아내는 횟수가 늘고 교묘한 반격이 파고들었다. 바람과 폭풍신이란 이명에 걸 맞는 강함이었다. 천둥을 맞고 바람에 몸을 내맡길수록 거한은 강철 같이 단련되어 갔다.
"윽."
예나는 짧은 신음을 입술 안에서 지르며 아쉬라멕이 내지르는 팔뚝을 휘어잡고 말에 타듯 등으로 타올라 뒤통수를 걷어찼다. 신의 머리통이 단번에 꺾일 정도로 강렬한 위력이었지만 아쉬라멕은 도리어 빙글 회전하며 예나의 발목을 잡아 채 하늘로 집어 던졌다.
"진짜! 패스코드!"
예나는 혀를 차며 기계를 불러내 몸에 둘렀다. 황금의 고리들이 연속으로 펼쳐지며 속도를 줄여 폭풍구름 바로 아래에서 몸을 멈추게 했다.
뱃속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공복감이 불쾌해 예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양손에 수갑을 불러내어 찼다. 아쉬라멕은 순식간에 눈앞으로 쳐들어와서 두터운 주먹을 지르고 폭풍에서 천둥이 치며 바람이 몸을 죄어 왔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예나는 이를 악물고 쇄도하는 아쉬라멕의 주먹에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디딤발로 삼은 왼발에서 황금의 고리가 수십 개씩 겹쳐졌다 터져 나가며 부딪친 주먹 사이에서 섬광이 터졌다.
전하가 공기를 뚫고 바지직 몸을 떨며 번개 빛이 온 사방으로 뻗었다. 끝없이 울리는 천둥소리에 도시 방어장이 징징 진동하며 울었다.
"합!"
예나와 맞부딪친 아쉬라멕의 오른팔은 전광에 휩싸이며 거의 부서지다시피 뒤틀려 바람이 새어 나왔다. 반면에 예나는 수갑이 그슬린 것을 제외하면 멀쩡하다. 하지만 힘의 우열에 당황하지 않고 아쉬라멕은 왼팔을 휘둘러 예나의 몸통을 끌어안은 다음 폭풍 속으로 날아들었다.
"으익!"
날카로운 폭풍구름을 올려다 본 예나는 질겁한 표정을 짓고 아쉬라멕의 몸을 무릎과 주먹으로 두드렸지만 타격 하는 부위마다 실체감이 없어져 헛손질로 변했다. 초조한 얼굴로 변한 예나는 손에서 느닷없이 대검을 만들어 아쉬라멕의 몸을 꿰뚫었다. 하지만 이미 폭풍으로 반쯤 흩어진 폭풍신에겐 통하지 않았다.
'나는 폭풍! 멀고 먼 은혜의 바다에서 불어 온 바람이 보이는 웅혼한 모습. 인간이 두려워 하고 숭배하던 본질이로다. 역사에 새겨진 그 권위로서 지금 여기에 나의 위엄을 지상에 내리니, 두려워하라. 엎드려라! 폭풍의 자비에 손을 빌어라!'
폭풍으로 흩어진 아쉬라멕의 목소리가 온 사방에서 들렸다. 이렇게 되면 예나로선 손 쓸 방법이 없어진다. 태양의 신 크레트쉬는 무식하게 정면으로 돌격하는 것 밖에 몰랐기에 적당히 손을 봐줄 수 있었지만 아직 경험이 일천한 예나는 이럴 때 쓸 방법이 별로 없었다. 거기다 공복감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어떤 걸 먹어도 메워 줄 수 없는 공허감이 정말 싫어서 예나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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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해주시는군요!
잘읽었습니다
연재하셧군요 ㅎㅎ 생각이나서 다시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