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제국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후, 큰아들인 아르카디우스(재위 395∼408)가 동(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데 대하여,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가 서방의 황제로서 서로마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은 국력이 약하여 내외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476년 게르만인 용병대장(傭兵隊長) 오도아케르에게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자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동쪽과 분리된 서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에 비하여 그 국력이 훨씬 약한 데다가 게르만인 스틸리코를 처형한 뒤로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게르만인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그것이 국력 쇠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브리튼섬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고, 갈리아 지방에는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이 침입하였으며, 에스파냐는 수에비족·반달족 등에게 점령되었다. 410년 로마시마저도 알라리크 1세(재위 395∼410)가 인솔한 서고트족에게 강탈되었다. 이어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의 모후(母后)인 가라 프라키디아와 무장 아에티우스 등이 국운(國運)의 재건을 도모하여 451년 훈족의 왕 아틸라를 카탈라우눔전투에서 격파하였으나, 455년 로마시가 재차 반달족의 게이세리쿠스(재위 428∼477)의 습격을 받아 황폐하게 되었다.
이처럼 서로마제국의 영토가 게르만인의 침입으로 유린당하거나 그들이 정착함으로써 국고(國庫) 수입이 격감하고 국가재정의 유지도 곤란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소진(消盡)하여, 실질적으로도 제국의 해체 때에는 야만인들 무장(武將)의 지배하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이라고도 한다.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루스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온에 제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330년 5월 11일 개도식(開都式)에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거리)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존속한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의 점령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동방으로의 지배를 제한당한 로마제국의 1000여 년에 걸친 시기에 후대(後代)가 붙인 이름이 비잔티온의 이름에서 유래한 비잔틴제국이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이념·제도를 이어받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기조로 한 중세의 로마제국은 북쪽으로부터 잇따라 침입한 스텝의 유목민족, 동방의 위협적 존재인 사산왕조 페르시아인 및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人), 투르크인에 대해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쪽 관문을 지켜, 동(東)유럽 제국(諸國)의 역사적 초기에 그리스도교 포교를 통하여 그 문화적 기초를 준비하여, 재건이 막 시작된 동시대의 서(西)유럽에 정치적 ·문화적 교섭을 통하여 계속 영향을 끼쳤다.
이리하여 그리스 정교권(正敎圈)이 형성되어 비잔틴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이반 3세의 ‘제3의 로마 ·모스크바’의 이념에 계승되었다. 또, 이 제국에서 보존된 그리스어의 지식은 문예부흥기의 서유럽인에 의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신성로마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