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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치유개척자 이박행목사 8월5일 치앙마이 중앙교회에서의 강의를 듣고서
먼저 밝혀 둘 것은 이 글이 강의자를 부정적으로 몰기 위해서 기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이 전인 치료를 이미 25년 전 그와 관계 된 서적들을 수도 없이 읽음으로써 그 개념에서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들이 앞으로 기독교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서 미리 숙지하고 있었기에 강의를 들으면서 그때의 생각들을 더욱 구체화되어지도록 해주는 그 느낌들을 우리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본의 아니게 강의자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강의하시는 목사님의 사역에 대해서 충분히 존중하며 귀하게 생각함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에 염두 해 두시고 글을 읽는 분들이 순수하게 우리 기독교적 성경관의 관점에서 이 글을 읽어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저는 현재 선교지에서 제가 보냄을 받을 영혼들이 있는 곳을 향해서 아침저녁으로 기도 시간을 갖으며 동시에 갈라디아서를 중국어로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가는 작업 중에 있습니다.
그러는 중 이곳 제가 머무르고 있는 댁의 장로님이 어느 장소에서 전인치료행위에 대한 강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고 저는 참석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강의의 형태나 강조점이 어떻게 진행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참석하여 들어보니 제가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허나 강의를 통해서 더욱 교활해지고 지능화 된 기독교 공격에 대해서 이처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서 조용히 준비하는 마음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운동의 정체를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현대는 갈수록 기독교를 집중해서 공격하는 그 형태가 다양해지고 더 구체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는 통제 시스템을 가동해가는 조짐들이 강해져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베뢰침을 인간들에게 박는 행위가 구체화 되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대가 심하니까 중단되었다가 먼저 병원에서 치료와 관계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저는 7년 전 이 베뢰침 보험 상품에 가입 종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통제와 관련해서 기독교 공략이 더욱 공세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양의학의 부작용들과 부정적 측면에서 “전인치료”라는 대처의학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내부에서 이러한 치료법을 성경의 예수님의 치료사역과 동일하게 해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질병 앞에 장사가 없는 인간의 나약함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무조건 수용하며 그대로 따라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구약교회였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에게서 떠나자 그 대안으로 고대근동지역에서 성행하는 마술(술사, 술객)등으로 대처해서 회중들을 농락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공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능력이 나타나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증거가 없자 자신들 스스로 회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고대근동지역에 이미 널리 알려져서 행해지고 있던 마술을 도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개인적 탐욕들은 언제나 종교 타락의 주 원인인 것입니다. 현대에 수많은 기독인들이 세상 현실로부터 힘을 얻어서 종교적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이러한 타락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것은 확실히 넓은 길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인치료란? 25년 전 제가 한창 공부할 때 책을 통해서 접했던 내용을 중점으로 지적하자면 서양에서 일어난 정신사적 발로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서양의학이 너무 지나친 치료행위로 오히려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반대행위에서 일어난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인도의 명상과 같은 심오하게 느껴지던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종교적 노력들을 기이히 여겼고, 그 가운데서 치료가 나타나기도 하는 그러한 신비한 현상들에 매료 된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서 그것을 현대 인류사회에 보편적인 의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것이 60년대 이후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기독교 배타주의적 운동에 대한 7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movement’ 가운데 한 장르가 되었는데 지금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삶에 대단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로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기독교의 역사적 선교의 본질을 배타적으로 간주하고 포용주의적 노선을 주장하며 기독교의 전통적 성경중심의 복음적 칼라를 버릴 것을 강요하며 그 자리에 이 전인치료법을 대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의 시작은 그 힘을 받아먹으며 자라기 시작하여 지금은 생명공동체라는 지구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거대한 힘으로 성장을 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공동체,
이 의미는 매우 그럴 듯합니다. 이는 본래 '지구 공동체'라는 의미가 바뀌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지구 공동체라는 의미보다 이 생명공동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대중을 사로잡는 구심력이 대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구 공동체라는 이유는 모든 나라를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에 있어서 반발을 얻을 수 있지만 생명공동체는 지구가 하나이고 그 하나를 위해서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을 필수조건으로 하자는데 반대할 나라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개념은 기독교를 꼼짝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즉, 기독교인들을 속이고 제압해 버릴 수 있기에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는 논리전개였습니다. 일반 평신도들은 물론 기독교 지도자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진리의 내용과 과학적 내용을 적절하게 접목을 시켜서 합리적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갔습니다.
더욱이 헌대 과학과 하나님이 접목되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게 되었다고 해 놓으니 어느 기독교인이라고 바로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랜 시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성적으로 원리가 딱딱 맞는 수학적 공식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도 비켜 갈 수 없습니다.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서 논리만 맞으면 꼬박 속아버리도록 우리의 지적 머리는 열려져 있습니다.
교회 중심적 신앙이나 성경본위의 신앙관은 이제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렸습니다. 과학이 말하는 현대 하나님 관은 우리 기독교가 섬기는 성경적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문제의 신개념입니다. 오늘 현대의 신관은 인간 안에 죽어서 산화 된 인간 중심의 신관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과학이 신 개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은 지구 상에 기독교 인구가 거대하기 때문에 반발을 불러 올 필요가 없다는 차원에서 잠시 기독교의 신관인 하나님 이름을 도용할 뿐입니다.
이미 현대 과학적 신관은 6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진보되어지는 신관입니다. 이 신관은 구약의 신을 실패의 신으로 간주하는 신관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창조를 비롯해서 실패한 구약의 신이 진보해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진보 된 신이 예수로 와서 인류를 위해서 죽어주셨고, 그것을 가리켜서 인간 안에 신성이 부어진 과정이며, 점진적으로 산화됨으로 해서 인간 안에서 죽은 신성이 발전해가고 있다는 신관입니다.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를 매겨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보 된 세계관으로써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가 만난 이것을 가리켜서 현대 과학적 신관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세계 의학계가 영적 세계를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일반인들이 모르는 지구 상위 층의 고도의 지구 통합개념에서 비롯되는 통합을 위한 종교적 정신의 현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종교와 과학이 만났다는 그럴 듯한 논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단의 전략처럼 속이는 전술입니다. 성경을 들먹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을 강조한다고 모두가 참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들의 목적의 세계를 이룰 때까지 종교적 요소를 필요로 하는 사악한 종교성을 불어넣는 행위일 뿐입니다.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약점을 잡아 이용하는 종교놀이 일 뿐입니다.
이를 우리 기독교가 간파하지 못하고 신앙적 요소를 가미했다고 해서 무조건 좋다고 따르는 것은 점진적으로 기독교를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불러오는 방임 밖에 안 되는, 그래서 현재의 어리석은 수용이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현대로 와서 우리 성도들을 미혹하여 속이는 전술로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파괴적 성질로 유도하는데 우리 기독교 내부에서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계속 수용하려고 하는 힘이 오히려 득세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운동들에는 우리의 눈과 마음과 귀를 속이고도 남는 엄청난 함정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지구가 하나로 통합 된다고 그것이 진정한 평화로 연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힘으로 지구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특정한 세력들이 깔아놓은 연막술일 뿐입니다.
이제 곧 엄청난 통제체제가 지구 안에 펼쳐 질 날이 임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조차 사고팔고 하는 행위조차 할 수 없게 하는 통제구조가 펼쳐집니다. 지금의 세계 경제의 혼란도 이러한 맥락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사회의 환율이 가장 값어치 없는 현실이 된 것도 통제사회에 우리 사회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마음의 준비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점차적으로 좁은 지구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인구문제가 더더욱 통제사회로의 필요성을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생명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의미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물론 지구자체가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일 때문에 모든 각 개체가 갖고 있는 고유하고 절대적인 가치 체계들이 무너져야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지구적인 자유를 이룰 수 있는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서 추구하는 생명공동체는 거짓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전인치료, 자연치료, 인격적 치료 등 그럴 듯한 말이나 합리적 방식으로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철저히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 할 뿐입니다. 그래서 현대 과학적 철학은 인류의 모든 것을 생성과 소멸이라는 법칙아래 두었습니다. 마지막 최종 목적이 모두 완료 될 때까지는 그 모든 것은 과정들입니다. 중간 과정, 마지막 결정적 과정 등으로 구분 됩니다.
그래서 생명공동체 운동도 마지막 목적을 향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이를 위해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이를 위해 봉사되어져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도 자신들 본연의 선교 개념을 버리고 이 생명공동체 의식으로 동참해야 할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예수가 우리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죽었다는 십자가의 사랑은 실제적으로 우리 인간, 즉 현대 과학적 시대에 불필요한 종교적 요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신을 갖고 현실 삶 속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물질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것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죄에서 구원 받았다는 원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병든 상태에서 해방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현대 교회를 꼼짝 못하게 묶어버리는 현실의 힘이 되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지구촌에 인구가 많고, 갈수록 병들고, 가난하고, 힘들어 하는 이들이 많아져 갑니다. 이러한 지구촌을 위해서 봉사하는 ‘생명 공동체’ 정말 필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합니다. 허나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이보다 지구에 중요한 것은 죄에서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엄청난 부를 갖고 말로 화려한 구호를 만들어 내지만 결코 가난하고, 병든 자들, 어려움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목적의 사회를 추구하기 위해서 가난한 자 돕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기독교의 본연의 사명을 버리도록 공략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정말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소리 없이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삶 속에서 추구해 갑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떠벌리고, 운동을 전개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10절에서 바울 사도의 강조처럼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그런데 어떤 세력들이 지구적으로 자신들의 통합적 사회 목적을 위해서 추구해가는 그 정신에 우리 기독교를 이용하는 세력들이 교회 안에서 호응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본질적 자산인 영혼구령 운동을 비하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매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사라는 역사 가운데서 교회를 위협한 운동들은 크게 둘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위협요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교회 밖에서 들어오는 물결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호응하고 일어나는 운동입니다.
첫 번 째 위협은 오히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뚜렷하게 영적으로 아니라는 바운다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이러한 물결에 호응하고 일어나는 교회적 운동들입니다. 이는 같은 식구 안에서 움직이는 운동들입니다. 애매하고, 모호하고, 동료의식에, 정적인 관계에 놓이다보니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입니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바로 이러한 케이스로 유럽교회와 미국 교회를 초토화 시킨 것입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무리 보기에 좋고, 그럴듯하게 들리고, 감미롭게 여러분들의 귀를 속삭인다고 그냥 좋다하고 끌려가렵니까?
생명공동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고 지구적 운동에 동참하는 기독교로 전환하라고 강요합니다. 사단의 전략적 소리로 들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귀에는 어떻게 들리는지 물론 각자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들리게 되리라 봅니다. 허나 이 한 가지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이것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진정한 생명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사악한 이 세대의 물결에 내어 주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그들의 달콤한 유혹과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들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는 미혹과 유혹의 거짓 영들이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겨냥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더러운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선다고 했으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주장한다고 했습니다. 은근히 과학을 하나님으로, 물질을 하나님으로 내세우는 이 세상 풍조에 요동되지 않기를 선교지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올리면서 모든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보호 싸개로 감싸주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보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태국에서 김종신 선교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