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마하시샤도우전통의 수행을 하시는 분들에게 제 글이 심려를 끼친점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이 곳은 마하시샤도우전통의 전용카페가 아니고 위빠사나수행과 관련된 견해를 누구나 피력할 수 있고 위빠사나에 대해 비판과 토론을 통해 좀 더 성숙된 길로 나아갈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심려불구하고 글을 올리게 되엇는데요 이 점 양해바랍니다.
우리나라에 미얀마의 마하시전통의 위빠사나가 가장 먼저 소개되었고
그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위빠사나수행의 모든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수행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 내용이 마하시전통의 수행을 하면서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 있는 분들이나 처음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지적한 부분들이 유용한 정보가 되리라 믿습니다.
[가든님질문]
연방죽님의 말씀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어 몇 가지 말씀드립니다.
<연방죽>
부처님께서는 출입식념을 말씀하셨는데 처음 수행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흡에 마음집중을 하면 상기가된다하고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혹자는 Ratana님의 글을 보고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라고 충고하실분도 있을 것입니다.
호흡을 관찰(sati)하는 원칙이 통하지 않을때 다른 변칙을 선택하게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변칙 즉 아랫배와 같은 테크닉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시작된 수행은 지속적으로 테크닉을 불러들입니다.
그런 수행을 하는 테크니션들은 아랫 배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호흡에 마음을 두는 것보다 굉장히 '파워 풀'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Garden>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변칙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변칙적인 수행법이 아니라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요소(지수화풍의 四大)에 대한 관찰법입니다.
대념처경이나 염처경에서 이 4대에 대한 관찰법이 제시되어 있고, 마하시 스타일에서 이 방법을 배의 움직임에 적용한 것입니다.
배의 움직임은 4대 가운데 風 즉 바람의 요소에 대한 관찰에 속합니다.
바람의 요소란 다름아닌 움직임이므로 호흡에 동반되어 생겨난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연방죽답변]
제가 테크닉이라 말씀드린것은 4대 요소의 하나인 배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탓한것이 아니라 유독 마하시전통에서만 강조되고 있는 명칭붙이기입니다.
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담아두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여쭙겠습니다.
가든님께서 순수위빠싸나란 표현을 하셨는데 마하시전통의 위빠싸나가 가든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수위빠싸나와 동일한지요 ?
아니라면 순수위빠사나와의 마하시전통의 위빠사나와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마하시전통의 일어난 현상에 따라 명칭을 붙이는 명칭 그 자체가 곧sati를 의미하는지요?
[가든님질문]
남방주석서라는 안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지적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보는 Pali 경전은 남방 상좌부에서 전해오고 있는 불전입니다. 그리고 상좌부는 2000년 이상의 전통응 전해오는 가장 초기불교에 가까운 교학과 수행의 전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남방 상좌불교의 독특한 해석의 전통이 있지만, 위의 글은 마치 남방불교의 주석전통이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도록하는 느낌을 줍니다.
어떤 부분이 '안경'인지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연방죽답변]
우리가 보는 Pali 경전은 남방 상좌부에서 전해오고 있는 불전이고 상좌부는 2000년 이상의 전통응 전해오는 가장 초기불교에 가까운 교학과 수행의 전통을 전해 주고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불전을 보고 판단하여 설명하는 개개인의 시각이 문제이겠지요
다시말씀드리면 마하시샤도우의 수행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들이 불교를 대변하는 모든 것들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마하시샤도우라는 분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될 수 있지만요?
더군다나 전통이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인다는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정면으로 위배되고 그것을 떠나 지금까지 역사를 보더라도 대 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한 개인의 견해에 의해서 뒤집어진 실례는 많습니다.
제가 안경이라 표현한것은 그러한 불전에 따른 수 많은 주석서들...그 주석서적인 시각에서 불전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점입니다.예를 들면 마하시전통의 위치에서 대념처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점인데요 마하시 전통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념처경에 대한 이해가 본질과는 전혀 다를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아래는 오래전에 마하시전통의 수행에 심취해 있을때 남방의 위빠사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분과 견해를 주고 받으면서 가든님께서 제게한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답변의 일부입니다.
***********테크닉은 시대와 환경의 산물일겁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거듭 거듭 바뀌어 오는 것입니다. 남방의 위빳사나 기법이 그렇고 북방의 간화선이 그러합니다. (참 위빳사나의 출처로 거론하신 위방가는 남방의 아비담마 논서의 두번째이고요, 청정도론은 제가 남방불교의 부동의 준거로 이미 거론한 붓다고사 스님의 대작이지요. 냐나뽀니까스님, 월포라 라훌라스님의 책도 잘알지요. 그러나 그 스님들의 말씀도 오소독스한 남방상좌부의 견해를 그대로 밝히신 것에 지나지 않지요.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남방불교의 이론이지 근본 불교의 가르침과는 구분되어야하는 것이지요.)
위빳사나 기법은 청정도론에서 40가지 명상주제(깜맛타나)로 정리되어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지금 남방에서 통용되고 있는 위빳사나 기법들은 이 40가지 수행법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얼마 전에 논의된 sati에 대한 경우에서도 임승택씨는 자료실에 있는 우빤띠따스님의 마하시전통의 사띠에 대한 정의를 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고 조준호님은 정반대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능동과 수동. 임승택님은 동쪽을 가르키고 조준호님은 서쪽을 가르키면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잇습니다.
물론 두 분의 견해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sati에 대한 의미와는 다를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모두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하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근기에 따라서 여러가지 수행법이 있었지만 그것이 여러가지로 다양한 sati가 존재하고 있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하시전통에서 말하는 능동적인 성향의 sati가 부처님께서 의미하는 sati와 다르고 조준호님께서 말하는 수동적 주의 집중상태라면 마하시전통에서 이해한 대념처경의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제 주위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실질적으로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그 수행을 하고 오신 분들께서 마하시전통의 수행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 분들도 제 곁에는 많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불교와 관련된 어떤 수행법들도 궁극적으로는 고통의 소멸을 가르키고 있지만 각각의 수행에 다른 문제점을 일반인들이 발견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1주일 코스 10일코스 한달코스의 수행에서 개개인이 느낀점들이 그 수행의 종착점이 되는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잘 못 이해하여 왜곡되게 받아들인 수행법 그릇된 sati는 많은 사람들을 잘 못되게 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래 명칭붙이기에 대한 질문에 대한 가든님의 답글[글번호176]에서 우빤띠따스님의 그대는 항상 깨어 있는가를 인용하셨는데
***부처님께서도 이름을 붙여 가며 대상을 알아차리라고 하셨습니다.
[경전의 주석과 이 주석에 대한 주석을 보면] 명칭붙이는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우빤디따스님께서 명칭 붙이기에 대해 결론 맺으시면서 '부처님께서도 이름을 붙여 가며 대상을 알아차리라고' 하셨다고 정의하셨는데요 어느 경 어디에서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가든님께서 알고 계시면 가르침부탁드립니다.
'경전'의 '주석'과 이 '주석'에 대한 '주석'을 보면 명칭붙이는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남방의 주석서적인 안경을 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