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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수사보고서는 ‘바이블’이 아니다 KAL858기 실종사건의 미스터리
장편만화<시마고장>으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히로게네 켄지에게는 <라스트 뉴스>라는 또하나의 작품이 있다. 이 만화는 도쿄에 소재하는 민영방송국 ‘수도TV"의 마감뉴스 프로그램인 <라스트 뉴스>제작팀이 이미 다른 언론에서 보도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다는 스토리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주인공인 히노 PD가 지휘하는 제작팀은 ’발상의 전환‘과 ’철저한 검증‘을 통해 잘못된 보도를 통쾌하게 뒤엎는다.
그런데 KAL858기 실종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심층적인 현장취재를 통해 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친 일본의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안가부 수사보고서와 김현희 자필진술서의 허위와 오류를 낱낱이 밝혀낸 그의 로포기사는 물론 만화가 아니라 실화이다.
진실이라고 믿어 왔던 사건
1987년 11월29일.
김대중 평민당 대선후보가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유세를 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승무원과 승객1백15명을 태운 바그다드발 서울행 KAL858기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와 방콕사이에 있는 미얀마 안다만 해역상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바레인을 탈출하려던 폭파범 용의자 중 한명인 김현희가 생포되었으며,대선 하루 전인 12월15일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됐다.너무나 절묘한 시점에 이뤄진 압송작전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다음날 모든 신문은 큼지막한 활자로 ‘노태우 대통령 당선’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대다수 승객이 중동 근로자였던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뉴스가 처음 알려졌을때만 해도 한반도와 한국민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건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어쩐일인지 대한민국 당국은 가족의 시신만이라도 찾아달라는 유가족들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무성의한 자세로 일관하다 비행기 잔해와 블랙박스 추적을 열흘 만에 중단하고 만다.
그리고 김현희 수사를 독점적으로 주도한 안기부는 이듬해인 1988년 1월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김정일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게 친필지려을 내려 KAL858기를 폭파시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2년4개월 만인 1990년 3월 대법원이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살인 등 6개항의 무시무시한 죄목을 적용해 사형선고를 확정했지만,그것은 곧바로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현희가 사형선고 한 달만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은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제목의 수기를 써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으며,한 남성과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KAL858기 실종사건’ 의 악몽은 그렇게 우리의 기억속에 저장돼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주인공인 김현희는 어떤인물인가.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내용을 중심
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현희는 1962년 1월27일 평양에서 북한 외교관 김원석의 1남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안기부가 밝힌 김원석의 직책은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김현희의 당시 직책은 북한 노동당 조사부 직원으로 ,김옥화(북한),마유미(일본), 백취혜(중국)등의 가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발표했다.
한편 김현희는 인민학교 시절<딸의 심정>등 두편의 영화에 아역배우로 출연했으며,평양중신중1학년 때인 1972년 11월2일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 남한측 부대표 장기영(당시<한국일보>사장,전 경제부총리)에게 화한을 증정한 화동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안기부 수사발표 당시부터 김현희의 인적사항은 곧바로 진위논란에 빠지고 말았다.
우선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주재 외교관이라고 했지만,당시 일본<아사히신문>이 곧바로 확인한 결과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북한도 앙골라에는 북한 무역대표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산대표라는 직책도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현희=북한공작원’임을 설명해주는 결정적 증거라며 안기부가 제시했던 사진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밖에도 이 사건과 관련해 셀수 없이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잇따라 나온 이러한 의혹제기는 정부당국과 국내언론에 의해 철저히 묵살당했다.
우리가 결코 흔들림없는 진실이라고 믿어왔고 ,믿고 싶었던 안기부의 KAL858기 실종사건 수사결과는 사실 이렇게 처음부터 허점을 드러냈다.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김현희가 호텔에서 만난 세 명의 동양인
우리는 안기부 수사보고서와 김현희 자필진술서를 근거로 1988년1월15일 발표된 수사결과를 KAL858기 실종사건의 영원불변한 정설과 상식으로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공중파 방송을 비롯한 수많은 언론매체를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그것이 ‘허구적 신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특히 지난 11월18일와 29일에 각각 방영된 MBC<PD수첩>과 SBS<그것이 알고 싶다>는 일반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김현희가 시한폭탄을 수령하기 위해 묵었다는 유럽의 한 호텔직원이 등장해 “당시 김현희가 짙은 감색 양복을 입은 세명의 남자와 만났다”고
증언할때는 군사정권 시절 유언비어처럼 떠돌던 "안기부 조작설‘이 낭설로 치부될 수만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전율해야 했다.
더욱이 <안기부 수사보고서>(1988년 1월15일발표)와<김현희 자필진술서>(1987년 12월28일작성)을 바탕으로 작성됐음에도 불구하고 김현희 수기<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년 6월20일발간)는 앞의 두 문서와 수많은 곳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김현희의 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안기부 수사결과가 시간이 흐르면서 각종 부실과 오류로 얼룩지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인 셈이다.
그런데 맨 앞에서 언급한 대로 ,‘김현희 신화’가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기까지는 노다 미네오라는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땀과 발로 쓴 로포집<파괴공작>의
역할이 컸다.
945년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난 노다 미네오는 월간지와 주간지를 무대로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안기부의 수사발표 이후 김현희와 김승일이 밟았던 궤적을 그대로 추적하며 확인취재를 한 뒤 쓰여진 <파괴공작>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소학관에서 발행하는 시사지 <주간포스트>에 총25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것을 보강한 책이다.
“나는 1987년 12월1일 바레인에서 벌어진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의 음독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그 충격으로 취재를 시작한 것이지만 맨주먹으로 시작했다.
가진것이라곤 한자루의 볼펜뿐이었다.이후 약 2년반동안 취재여행을 계속했다.
오직 도보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볼펜 한자루만 들고 맨주먹으로 시작해 쓰여진<파괴공작>은 크게1부 (코리안커넥션)와 2부(참극으로의 여행)로 나뉘어져 있다.지면관계상 이글에선 <PD수첩>등 공중파 방송 해외취재의 텍스트가 된 2부만 살펴보기로 한다.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김현희와 김승일은 1987년 11월12일 평양 순안비행장을 출발해
모스크바→부다페스트→빈→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를 거쳐 12월1일 바레인
무하라크공항에서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행로를 따라 확인취재를 진행한 노다 미네오의 집념에 의해서 ‘김현희 신화’는 파도에 부서지는 거품의 운명이 됐는데, 이제부터 그 여로의 동반자가 되어보자
1.부다페스트(11.13~11.18):의문의 점자암호
노다미네오의 취재여행은 김현희 일행이 6일동안 체류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됐다.그는 김현희가 자필진술서에서 밝힌 내용을 현장취재를 통해 일일이 검증한 결과 적지 않은 부분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우선 김현희 자필진술서에는 이런 내용이 기술돼 있었다.(일련번호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위해 기자가 매긴것이다).
① “1987년11월12일 밤12시가 조금지나 소련 비행기(모스크바~부다페스트)를 타고 13일 새벽4시쯤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였다.
② 이날 못가면 며칠동안 모스크바에서 기다려야한다고 해서 주모스크바 조선대사관 초대소에서 저녁식사를 한후 밤 11시쯤 떠나 모스크바 비행장에 나왔다.”
이 부분에 대한 취재결과를 노다미네오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1987년11월12일 밤~13일 아침 사이에 모스크바에서 부다페스트로 떠나는 비행기는 13일 오전2시 35분에 출발하는 아에로플로트423편이 유일했다.밤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던 것이다.②11월13일 모스크바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는 아에로플로트423편 이외에도 아에로플로트131편(오전8시25분 출발),아레로플로트131편(오후1시30분 출발)등 모두 4대나 있었다.”
부다페스트의 행적과 관련 김현희는 자필진술서에서 이렇게 증언하기도 했다.
“①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다음날인 11월14일 우리 (김현희,최과장,최지도원)는 김선생(김승일)만 남겨두고 시내에 나와 주재 지도원의 안내로 관광을 하였다.
② 15일과16일이ㅔ도 주재 지도원의 안내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부다페스트 광장, 사자다리(라이온브릿지),부다의 궁전 등을 참관하고 사진을 찍었다.
③ 17일 저녁 힐튼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18일 출발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증언에 대해서도 노다 미네오는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지적했다.
“① 당시 부다페스트는 미국 CIA의 동구 공적 거점으로 김현희를 안내한 주재 지도원의 이름과 얼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한국도 사건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헝가리와 무역사무실
상호개설협정을 체결하는 등 국교수립의 포석을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었다.
더욱이 김현희 일행이 관광했다는 거리에는 한국대표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CIA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고 한국도 자유롭게 활보하기 시작한 부다페스트에 일부러
바그다드발 KAL858기 공작원을 보낸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②“부다페스트를 관광하며 실제로 확인해보니 부다페스트 광장도,사자다리도 없었다. 부다페스트는 도나우(다뉴브)강을 경계로 중세유럽 최대의 도시인 부다 지구와 현대적빌딩이 들어선 페스트 지구로 구성돼 있다.따라서 이곳에 한번이라도 와본 사람이라면 부다와 페스트라는 별도의 지구 명칭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광장이 애초에 있을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것이다.”
③“힐튼호텔 레스토랑 종업원에게 김현희와 김승일의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그들은 ‘11월은 이미 여행 시즌이 끝난 후였기 때문에 5명의 동양인이 몰려 왔다면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전혀 기억에 없다. 당시만 해도 이곳에서 동양인은 신비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금방 눈에 띄었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한편 안기부는 수사보고서를 발표하면서“김현희가 소지한 수첩에 기재되어 있는 점자암호‘164635’라는 부다페스트 주재 북한공작지도원과의 연락 전화번호였다. 이 암호는 1985년 2월에 검거된 제3국 우회 스파이 신광수(당시 복역 중)가 사용한 점자암호와 동일 계역의 암호 시스템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노다미네오는 이부분에 대해서도 곧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항공기 폭파라는 엄청난 공작을 수행하는 스파이들이 이미 남한당국에 체포된 스파이가 활용했던 낡은 암호 시스템을 사용했다는것도, 안기부에 의해 기억력이 뛰어난 공작원으로 발표됐던 김현희가 기껏 6자리에 불과한 숫자 암호를 수첩에 적어 놓았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눈에 띄는 커다란 마스크를 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민완기자 노다 미네오는 부다페스트를 취재하던
도중 안기부가 증거로 제시한 점자암호를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자는 발상을 했다.
“1,6,4,6,3,5” 다이얼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다이얼을 눌렀다. 잠시후 테이프에 녹음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 번호는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7,6,3,8,5,8’로 걸어 주십시오.”
그 번호로 걸자 이번에는 전화가 연결되었다. 수화기를 통해 3,4명의 젊은 여자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가 북한과 관계있는 사무실입니까? 아니면 이 전화 소유자는 북한사람입니까?”
“북한 말입니까? 전혀 관계없습니다. 여기는 유치원입니다.”
그곳은 헝가리 국영 방송사 종사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메저’라디오 앤드 텔레비전 유치원‘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노다 미네오는 유치원 원장에게 “164635라는 전화번호를 알고 있냐”고 물었다. 곧바로 “그것은 1987년11월 훨씬 이전부터 사용했던 유치원 사무실의 옛날 전화번호”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노다미네오와 유치원 원장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답을 통해 점자암호의 진상은 드러났다.
“지금까지(헝가리의)정보,경찰 관계자 혹은 한국, 북한, 일본, 미국등의 외국인에ㅣ게 이전 전화번호 164635에 대해 문의가 없었습니까?”
“한번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처음입니다.”
이로써 안기부가 ‘김현희=북한공작원’의 결정적 증거로 제시했던 점자암호는 북한과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전화번호로 밝혀졌다. 아울러 안기부가 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이전에 이 전화번호에 대한 기초적인 확인작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2.빈(11.18~11.23):암파크링호텔에는 존재하지 않는 603호
안기부는 수사보고서에서 김현희 일행이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도 6일동안 체류했다고 발표했다. 김현희와 김승일이 지도원에게 북한 여권을 돌려준 뒤 일본 위장여권을 받았다는 곳이 바로 빈이다. 빈에 도착하던 당시의 상황을 김현희는 자필진술서에서 이렇게 묘사
했다.
“ 11월128일 하오 1시쯤 빈의 남역에 도착한 후 지도원은 차를 탁로 돌아갔다. 남역에서 호텔 예약을 김승일 선생이 해 가지고 돌아온 다음 우리는 택시를 타고 호텔에 갔다”
그런데 김현희는 3년 6개월이 지난 뒤 발간한 수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바꿨다.
“오후1시쯤 그 전에도 와 본적이 있는 빈(비엔나)서역에 도착했다.
역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김승이 혼자 내려 서역 관광안내소에 호텔 예약을 하러가고 전 지도원과 나는 차 안에서 주위를 감시했다.“
앞에서는 ‘남역’이라고 했다가 뒤에서는 ‘서역’으로 바꿨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런데 김현희가 수기에서 남역을 서역이라고 정정한데는 이유가 있었거니와, 김현희 수기보다 앞서 발간된 노다미네오의 르포집을 읽어보면 금방 눈치챌수 있다. 다음은 노다 미네오가 1987년 사건 당시 빈 서역 호텔접수처에서 근무했던 여성 직원 미르기타 슈라이츠 씨와 나눴던 대화내용이다.
“마르기타씨,당신은 87년 사건 당시 빈의 어느쪽 역에 있었죠?”
“서쪽 역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군요. 김현희라는 여자는 빈의 남쪽 역에서 호텔 예약을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남쪽 역 말입니까? 왜 남쪽 역이죠?”
마르기타는 다시 한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 일행의 호텔을 확보한 사람은 그때 서쪽역에 있었던 저입니다.”
그렇다면 마르기타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수 있었던 것일까.그녀의 설명을 들어보자.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오스트리아)내무성 사람이 찾아와 그들이 여기서 암파링호텔을 예약했다길래 빈 서쪽역 호텔 접수처의 예약시 선불 증명서를 봤더니 제가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남역과 서역은 빈의 2대 국제터미널이다. 빈의 중심부에서 봤을때 이름 그대로 남녁은 남쪽에 있으며, 서역은 서쪽에 있다. 서울의 남부터미널과 상봉터미널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수 있거니와 ,빈에 있는 두개의 역은 도저히 착각할수 없는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노다 미네오는 이렇게 자문했다.
“왜 김현희는 이렇게 확실하게 위치가 다른 남쪽역과 서쪽역을 혼동했던 것일까.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서역을 남역으로 굳이 위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사건 직후부터 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했던 전직 감사원 직원 현준희 씨는 그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통상 동구 공산권에서 빈에 도착할때는 남역에 내리고,스위스.독일.프랑스 등 서방 자유국가에서 올때는 서역에 내린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김현희는 공산국가에서 온 것처럼 남역에 내린 것으로 하여 북한 범행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서역에서 내린 것으로 보아 그녀는 서방세계에서 왔을 공산이 크고, 실제로 그녀가 머무른 빈 호텔방에서도 스위스 호텔의 메모 용지가 발견됐었다.”
그런데 김현희 진술의 오류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김현희 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해 작성된 안기부 수사보고서에는 “하치야, 마유미 명의의 일본 위조여권을 받은 후 빈에 도착하여 그곳 암파크링 호텔603호에서 5일간 투숙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김현희는 수기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우리방은 322호실이었다”고 정정했다.
김현희가 또다시 말을 바꾼 이유는 뭘까?그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이번에도 노다미네오였다. 확인 취재를 위해 암파크링호텔을 직접 찾아았던 그는 프런트맨인 카스테리츠 홀스트씨를 만나본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안기부 수사보고서에 나와있는 603호를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노다미네오는 6층에서 내렸다. 밤중이었기 때문인지 엘리베이터홀은 어두웠다. 노다미네오의 르포집에 이 장면이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융단이 깔린 복도를 따라 방이 쭉 늘어서 있는, 그런 흔히 있음직한 광경을 상상하고 있던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융단은 커녕,앞은 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벽의 오른쪽 끝에 유리문이 하나 있었다.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열리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벽에 세로 30~40cm,가로 60~70cm의 동판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다가가 보니 옅은 빛속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무엇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일까.노다 미네오는 동판에 쓰여진 글자를‘OPSTERREICHISCHE DONAUKRAFTWERKEAG"라고 소개했다. 그것을 번역하면 ’오스트리아 도나우 발전소 주식회사‘가 된다. 이와관련 홀스트씨는 노다미네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 호텔의 1층에서 10층까지는 다양한 회사의 사무실이 들어서 있습니다.
1987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랬죠.6층은 전부 도나우 발전소의 사무실입니다. 호텔 객실은 11층부터 13층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방번호는 11층이면 101,102.....,12층은 201,202......,최상층인 13층은 301,302.....식으로 매깁니다. 따라서 머리에 ‘6’이 붙은 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명의 하치야가 묵은 방의 13층의 322호였습니다.“
그는 호텔 안내센터로부터 주문을 메모한 노트까지 보내달라고 해서 노다미네오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1987년 11월18일 두명의 하치야가 묵었다는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김현희는 다시 한번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뒤늦게 펴낸수기에서 방번호를 603에서 322호로 재빨리 수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음과 같이 쓸데없는 해설을 늘어놓은 것이다.
“호텔 건물은 6층이지만 3층까지는 일반 사무실로 사용하고 호텔방은 4층부터였다.승강기는 3층까지는 일반 사무실로 사용하고 호텔방은 4층부터였다. 승강기는 3층까지는 그냥 통과하고 4층 이상만 멈추었다. 322호실은 6층에 있었다.(1권240쪽)”
물론 그 설명은 암파크링 프런트맨인 홀스트 씨의 설명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김현희의 진술은 일관성도 없이 왜 이렇게 계속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기억의 착오에 따른 단순한 실수와 오류였을까? 아니면 이 오류의 우연에는 어떤 필연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3.베오그라드(11.23~11.28):김승일은 과연‘테러주범’일까?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할 공간이다.북한에서 여기까지 동행한 공작지도원에게 김현희와 김승일이 폭발물을 수령한 장소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김현희는 1987년11월28일 안기부에 제출한 자필진술서에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다로 떠나기 전날인 11월22일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22일 상오에는 휴식한 다음 하오에 김승일선생이 오스트리아 주재 조선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최 과장을 찾아 비행기표 구입과 베오그라드에서 27일 저녁 7시 메트로폴리탄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진술서에 등장하는‘약속’이라는 말에서 호텔을 사전에 예약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김현희 수기에도 “우리는 항공권을 확인하고 11월23일 베오그라드에서 투숙할 호텔도 예약해 달라고 하니 컴퓨터로 확인한 후 그 자리에서 메트로폴리탄호텔로 예약해 주었다”(1권244쪽)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사건 발생 이후 김현희의 여행 궤적을 정밀하게 추적한 노다 미네오가 확인한바에 따르면, 김현희의 진술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파괴공작>을 근거로 노다 미네오의 추적과정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 이 사람입니다.”
메트로폴리탄호텔의 리셉션 매니저 자리치 씨가 노다미네오에게 말했다. 두사람이 마주 앉은 흰 테이블위에는 김현희와 김승일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위조여권에 붙어 있던 사진을 복사한 것이다.
“11월23일 저녁, 이 두 사람은 직접 왔습니다. 예약도 하지 않고 말이죠.”
“방을 예약하지 않고 말입니까?”
“예,분명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다미네오는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앞에서 확인했듯이, 김현희는 분명히 호텔을 예약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을 직접 맞이했던 호텔직원은 정작 예약한 사실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다시 노다 미네오와 자리치 씨의 문답을 들어보자.
“그들이 묵었던 방, 즉 폭약을 주고 받은 방을 보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한국 안기부 수사보고서에 의하면 그것은 811호실입니다만.”
“그들은 811호에 묵지 않았습니다.”
노다 미네오는 다시 한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고에 도착해 메트로폴리탄호텔811호실에 투숙하였다”라고 적시돼 있는 안기부수사보고서를 자리치씨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둘이 묵은 방은 분명히 806호였습니다. 기록을 보고 말씀드리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몇 분후 나타난 그의 손에는 한권의 두터운 파일이들려 있었다. 그는 파일을 펼치고 당시의 방번호, 숙박자의 이름, 국적등을 기록한 메모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806 HACHIYA J"라고 명기돼 있었다.
한편 자리치 씨는 노다 미네오에게 또 하나의 사사적인 증언을 해주었다. 김현희와 김승일이 호텔에서 보여준 행태와 관련해 자리치씨가 목격한 내용이 기존에 안기부 수사발표를 통해 알려진 두 사람의 ‘관계’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사실 안기부 수사보고서에는 김승일이 이사건의 “주범”이자 “주공작원”으로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김현희는 어디까지나“김승일의 신분을 보호하는”보조공작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손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호텔직원들에덴 두 사람의
관계가 거꾸로 비쳐졌던 것이다. 노다미네오를 806호로 안내한 자리치씨는 1987년 자신이 목격했던 장면을 이렇게 진술했다.
“늙은 남자분(김승일)은 언제나 저기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서 숨죽이며 담배를 피웠습니다.분명 방안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참고로 김현희도 당시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손녀뻘밖에 되지 않는 나이인데다 보조원에
불과한 여성공작원은 방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고령의 노인인데다 이 사건의 실질적인 주모자로 알려진 정예공작원은 거의 인적이 없는 호텔 구석 복도에서 궁상맞게 웅크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더욱이 안기부는 수사보고서에서 김승일을 “일어,중국어, 영어,러시아어 등 4개국어에 능통한 정예 공작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호텔의 프런트맨인 스미루야니치 씨의 눈에는 김승일이 외국어에 정통한 정예공작원으로 전혀 비쳐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승일은)극도로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몇 번인가 말을 걸어봤지만 무슨말을 해도 그저‘네,네’라고 말할 뿐이었죠. 영어를 몰랐기 때문이겠죠.”
의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폭탄을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정작 주범인 김승일은 배제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이 호텔의 도어맨인 요바노비치씨의 목격담을 통해 확인됐다. 그렇다면 우선
김현희가 자필진술서에서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증언했는지부터 살펴보자.
“11월27일 저녁7시에 호텔정문에서 최과장, 최 지도원을 만나 함께 호텔방에 올라갔다.방에서 10분간 최과장은 가지고 온 폭파용라디오와 약주를 넘겨주고 떠났다.”
김현희의 진술을 정리하면 ①폭탄을 전달한 사람은 2명이었고,② 장소는 호텔방이었으며,③김승일도 참석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것은 요바노비치 씨의 다음과 같은 증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두명(김현희와 김승일)이 이 호텔에 온지 사흘인가 나흘이 지났을때였습니다. 호텔로비 소파에서 여자 분(김현희)과 짙은 감색 양복을 입은 세명의 동양인 남자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3명의 남자가 먼저 떠났고 ,여자분이 현관까지 배웅했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 하치야 신이치(김승일)는 없었습니다.”
결국 ①폭탄을 전달한 사람은 3명이었고, ②장소는 호텔 로비였으며,③김승일은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더욱이 이곳에서도 안기부가 점자식 암호라고 발표한‘부다페스트 164635’를 노다 미네오가 직접 연결하자 평범한 화학회사의 전화번호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한편 노다 미네오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실이 최근 드러나기도 했다.김현희와 김승일의 위조여권에 베오그라드 출국 스탬프가 찍혀 있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안기부는“베오그라드에서는 북한의 여권을 사용해서 그렇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던중 차내에서 북괴여권을 반납”했다는 안기부 수사보고서 내용은 물론이고 “빈 입국시 우리의 조선여권을 지도원에게 넘겨주고 일본여권을 받았다”는 김현희 자필진술서 내용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런데 김현희를 만나고 돌아갔던 3명의 동양인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4.바그다드-아부다비(11.28~11.29):시한폭탄은 정말 설치하기는 한걸까?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김승일 선생은 그의 여행용 가방1개와 폭파용 라디오와 약주병,기타 담배등이 들어있는 비밀주머니를 의자위의 선반에 올려놓았다....비행기가 아부다비에 도착한후 우리는 그 폭발물이 든 비닐주머니를 선반위에 그대로 남겨둔채 나의 여자용가방과 김선생의 여행용 가방만을 들고 내렸다.”
김현희가 자필진술서에서 자백한 내용이다.그러나 아부다비에서 교대를 위해 내린 덕분에 살아남은 박길영 사무장과 박은미 스튜어디스는 가장 기억이 생생했던 사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남자(김승일)는 짐이 없었다”고 증언안 바 있다.
한편 김현희는 바그다드 사담 후세인 국제공항에서 아부다비행 비행기를 탈 때 라디오 배터리(건전지)가 문제가 되어 검사관들과 실랑이를 벌였지만 슬기롭게(?)대처해 무사히 통과할수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자필진술서에 담긴 그녀의 증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때 라디오 안의 배터리가 문제로 되었다. 왜냐하면 바그다드공항의 원칙이 배터리라는 물건을 일체 가지고 비행기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김승일 선생이 ‘여기서만 특별히 개인사품을 검열하고 단속한다’며 라디오를 켜 보이며 항의하자 그들도 좀 미안한지 가지고 가라고 승낙하였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시한폭탄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목적한 대로 KAL858기를 폭파시킬수 있었다는 것이 김현희의 증언이다. 이 증언은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수사발표 당시 국민들로 하여금 김현희의 주장에 신빙성을 갖도록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노다 미네오가 공항에서 검사관들과 직접 만나서 나눴던 다음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김현희 진술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수있다.
“당신들은 승객들의 배터리를 문제삼지 않습니까?”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윗험인물이지요.배터리가 안 된다면, 라디오도 카메라도 면도기도 모두 가지고 다닐 수없게 되잖아요,그러니 왜 배터리 따위만 문제삼겠습니까.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김현희 일행은 당시에 실제로 배터리가 들어있는 카메라(코니카 35AF2)도 소지하고 있었다. 따라서“사담후세인 국제공항에는 배터리를 소지하고 비행기에 탈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는 김현희의 주장은 자신의 또다른 소지품인 카메라에 의해서 금방 뒤집어지고 말았다. 애당초 배터리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베터리가 몰수될뻔했을때 단호하게 항의했다는 김승일이 과연 어느 나라 언어를 사용했는지도 궁금해진다고 노다 미네오는 꼬집었다.
왜냐하면 유럽 여행 경로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던 호텔 직원들, 그에게 항공권을 판매한 여행사 직원들,그에게 말을 걸었던 KAL승무원들,바레인에서 그와 면담을 했던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했던 것은 김승일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는것이었다.
한편 노다미네오가 미처 밝혀내지못한 사실중에서 최근 주목을 끄는것도 있다.
김현희가 자필진술서에서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까지의 비행 시간을 50분~1시간 정도로 묘사했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2시간20분이었다는 사실이 바로그것이다.
5.바레인(11.29~12.1):김현희에 대한 야코비얀 박사의 증언
김현희와 김승일이 아부다비에서 내리면서 시한폭탄을 9시간 후에 터지도록 설치했다는 것이 사건당시 안기부가 발표했던 수사보고서 내용이다.
이제 두 사람이 벌어놓은 9시간 안에 멀리 도망만 친다면 모든 것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쩐일인지 폐쇄적인 아랍국가들로 둘러싸인 작은 섬나라 바레인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막다른 골목을 스스로 선택한 어리석은 도망자를 연상케한다.
물론 일본여권에 비자가 없으면 아부다비에 입국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입국’과 ‘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 노다미네오의 주장이다. 다시말해 아부다비공항을 나와서 아랍에미리트에 입국하지 않았던 김현희와 김승일은 애초에 오스트리아에서 예매했던 로마행 티켓을 제시했다면 무사히 아부다비를 빠져나갈수 있었다.
이 경우에는 비자도 필요없다는 것이 아부다비공항을 직접 취재한뒤 내린 노다미네오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공항안내원들의 요구로 바레인행 통과용 티켓을 보여줘야 했다’는
김현희의 진술은 터무니없는 소리가 된다.
통과용 티켓은 그녀가 꾸며낸 말이었다. 김현희와 김승일은 ‘아부다비~암만~로마’항공권을 내고 미리 계획한 대로 로열요르단 항공 603기로 아부다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바레인행 항공권을 건네 주었다. 김현희는 굳이 바레인을 선택한 것이다.”
더욱이 김현희와 김승일은 바레인에서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제로 11월29일 아침 9시5분에 바레인에 도착한 김현희 일행은 12월1일 아침 9시경에
체포될때까지 무려 2박3일 동안 바레인을 충분히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노다미네오가 “추적자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도무지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 이상한 범인들”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김현희는 “그날 (11월29일)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인 30일에는 시내를 관광하며 김선생과 쇼핑을 하였다.”(김현희 자필진술서)
12월1일 아침 공항에서 보여준 김현희와 김승일의 대조적 모습도 의혹을 던져준다.
두 사람은 뒤늦게 무하라크 국제공항을 통해 바레인을 빠져나가려다 위조여권이 발각되면서 위기에 몰리자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대사관의 스나가와 삼등 이사관이 공항에서 두 사람에게 던졌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코너에 몰린 것은 신이치(김승일)가 아니라 마유미(김현희)였다.
“하치야 마유미씨의 여권은 가짜입니다. 따라서 이대로 여행을 계속하실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치야 신이치씨의 여권은 문제가 없으므로 여행을 계속할 계획이라면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살을 시도한 것은 마유미(김현희)가 아니라 신이치(김승일)였다. 더욱이
김현희 자백과 안기부 발표를 통해서 정설로 굳어진 김현희 음독 시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음독 직후에 두 사람을 진료한 바레인 살마니야 병원 응급부장 도크타 야코비안 박사는 노다미네오에게 이렇게 증언했던 것이다.
“그녀는 병원에 옮겨졌을때 혈압, 체온, 안색이 이미 정상이었고, 의학적으로 매우 안정된
상태였습니다.독물을 마신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KAL858기 진상규명 국민운동은 이제 시작됐다
우리가 정설과 상식으로 알고 있던 KAL858기 사건의 텍스트는 노다 미네오의 추적기사에
의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류와 실수로 점철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KAL858기 사건의 바이블 혹은 교과서가 지금부터 새롭게 쓰여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 천주교 신부2백2인의 KAL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주도한 신성국신부(청주교구,안중근학교 교장)의 발언은 시사적이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위를 판단할수 있는 1차자료인 수사,재판기록조차 아직도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상식과 정설이라고 믿어왔던 이 사건의 유일한 근거가 사실은 김현희의 자백뿐이라는 점도 알아야한다. KAL858기 실종사건의 진상규명은 이제야 시작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