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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제단은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지만,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사제단의 이름이 갖는 무게감과 폭발력이 예전 같지 않았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사제단의 젊은 신부들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해소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선배 신부들이 눈에 보이는 독재 권력과 싸웠다면, 이제는 모두 당연하게 여겼던 현상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시대에 적실한 문제 의식과 단호한 실천력으로 사제단의 역사를 새로 써나가고 있었다.
세계 유일의 자율적인 사제 조직
올해로 창립 34주년을 맞은 사제단은 한국 천주교의 공식 기구가 아니다. 뜻이 맞는 신부끼리 결성한 일종의 사조직이다. 회칙이 없고, 대표와 총무 등 집행부를 제외하고는 가입이나 탈퇴 같은 소속의 개념도 없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사제단 회의에 참석하면 그날부터 사제단 신부가 된다.
한 번 활동을 함께했다고 해서 집행부의 모든 주장에 동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제단이 삼성 문제를 제기한 것이 탐탁지 않은 신부들은 뒤로 물러나 있으면 그만이다. 이처럼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전국 단위의 조직은 전 세계에서 사제단이 유일하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성격은 다른 기구가 1969년 설립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다. 정평위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감독을 받는 공식 조직이다. 따라서 정평위가 발표하는 성명은 한국 가톨릭의 공식 입장이 된다.
지금은 사안에 따라 긴장과 갈등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70~80년대를 말할 때 정평위와 사제단을 분리하기는 쉽지 않다. 김병상 몬시뇰, 함세웅 신부 등 사제단의 핵심 인물 상당수가 정평위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사제단은 정평위보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주교회의라는 상부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긴급한 사안에 신속하고도 과감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정평위보다 사제단의 이름이 더 많이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다.
사제단이 탄생한 계기는 74년 7월 발생한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이다. 지주교는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발표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 때부터 전국의 신부들은 사제단을 조직하고, 지주교의 석방과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했다.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던 사제들이 지주교의 구속으로 본의 아니게 ‘각성당했던’ 것이다.
사제들은 거침이 없었다. 고비고비마다 전면에 나섰다. 80년 5월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광주교구와 전주교구가 중심이 돼 각 성당에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반정부 성명서를 냈다.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도 사제단이었다. 그해 5월 사제단의 고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독재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런 활동들은 사제단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웠던 일로 평가된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매우 제한돼 있던 시대였지만 성직자에 대해선 탄압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을 정점으로 전 세계에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면에서도 다른 집단보다 특장점이 있었다. 사제에겐 회합 장소인 성당과 전국 교구라는 국내 조직망, 신자들이라는 지지세력이 있었다. 이런 신분상의 특수성은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던 세력 대부분이 이합집산한 현재에도 사제단이 원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2세대 사제단의 전면 부상
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사회는 민주화·다원화됐다. 정치와 경제, 생태, 인권 문제를 다루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70~80년대 사제단이 사실상 홀로 수행하던 역할을 여러 단체들이 분점하면서 사제단의 공간은 그만큼 줄었다.
이런 경향은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확연해진다.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내던 사제단의 ‘의제설정 기능’은 상당 부분 축소됐다. 물론 사제단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운동과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삼보일배 등 사회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주목도는 과거만큼 높지 않았다.
사제단은 인적 구성에도 변화를 겪었다. 70~80년대 명성을 얻었던 ‘간판 스타’들이 집행부 일선에서 퇴장했다. 창립 멤버 중 일부는 ‘주류’로 진입하기도 했다. 함세웅 신부는 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 됐고, 송기인 신부는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의 위원장에 임명됐다.
사제단이 절차적으로 한 세대를 마감한 것은 2006년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바통을 넘겨 받아 통일·생태 운동에 매진했던 문규현 신부가 그해 사제단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전종훈 신부(52)가 새 대표로 선출됐다. 대중에게 이름과 얼굴이 낯선, 이른바 ‘2세대 사제단’이 출범한 것이다.
현 집행부는 90년 이후 사제 서품을 받은 30, 40대의 젊은 신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70~80년대엔 시대가 사제들을 거리로 내몰았다면, 이 세대의 신부들은 스스로 깨어 있어야 했다.
전 신부는 90년 사제 서품을 받기 전부터 명동성당에서 평신도 신분으로 청년 활동을 하며 사회를 향한 문제 의식을 키웠다. 91년 서품을 받은 총무 김인국 신부(45)도 어린 시절 성당 게시판에서 나붙은 사제단의 성명서를 읽으며 ‘행동하는 사제’를 소명으로 알고 자랐다.
이들 새 집행부는 출범 이후 1년 이상을 사실상 ‘무명’으로 지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삼성 비자금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으로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당초 김변호사는 시민단체와 언론을 찾아갔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마지막 기댈 언덕’은 아직도 사제단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정부나 다른 시민사회단체들이 삼성에 관해 몸을 사려 이번 사제단의 주장이 힘을 못받는 측면이 있다”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제단의 입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사건은 ‘사제단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존재 증명이었다.
다시 기지개 켜는 사제단
사제단의 젊은 신부들은 70~80년대를 현장에서 보내지 않았던 터라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들과 정서적으로 크게 얽혀있지 않다. 따라서 노무현정부를 비롯한 개혁 세력을 거리낌없이 비판할 수 있다. 민주화 세력의 상당수가 주류로 편입됐지만 현 집행부는 재야의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개혁적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집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이들은 함세웅 신부와 송기인 신부가 참여정부에서 공직을 맡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사제가 민주화 운동을 후광 삼아 그런 자리에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송신부는 과거사위로 가기 전에 사제직에서 은퇴했고, 함신부에겐 상근직인 이사장 자리를 비상근으로 역임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사제단은 시민사회 영역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전 신부는 “지난 10년 동안, 사회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관직에 나가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며 “민주화 운동의 영광을 특정 개인들이 차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들이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당사자가 되다보니 지금 정권을 비판할 세력이 남아 있지 않다”면서 “보수 세력으로 권력이 넘어간 데는 시민사회·종교단체의 책임이 크다”고 덧붙였다.
사제단은 시민사회 운동이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했다고 본다. 현 집행부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지난 세월 사제단을 이끈 동력은 국민들의 뜨거운 성원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시대 환경이 바뀐 데다 국민들의 지지가 예전만 못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제단이 삼성 문제에까지 개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사제단도 잘 알고 있다.
김신부는 “우리는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사제단에 목소리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이 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왜 자꾸 나서느냐’는 말을 자주 듣는데, 사실 신부님들이 더 힘들고 괴롭다. 제발 우리가 성당에서 편안히 도를 닦을 수 있게 해달라”며 웃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아무래도 사제단을 조용히 있게만 하지는 않을 듯싶다. 전 신부는 “영어 공교육 논란과 대운하 문제에서 보듯 민족의 정체성과 터전이 단순히 경제 논리로 재단되고 있다”면서 “더 많이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관찰할 것”이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그는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이 목적인 사회를 만드는 게 사제단이 할 일”이라며 “70, 80년대의 시대 정신으로 돌아가 그때보다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하겠다”고 덧붙였다.
〈 최희진기자 〉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내손안의 모바일 경향 “상상” 1223+NATE) -
+ 혹자는 말합니다. 종교가 정치에 너무 깊숙히 개입한다고...
그리고 사제가 너무 오바한다고....
하지만 사제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인도, 서민도 모두 양떼입니다.
양들인 정치인이 정치를 정의롭게 하지 못하면 목자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 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른 양들인 수 많은 서민들(국민)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양들(서민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입니다.
지금의 삼성 비자금 상황은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결탁한 사회의 부조리입니다.
대부분의 언론과 여론 마저 외면한 상황에서(그들도 이미 연계되어 있어서..)
사제단이 사회 정의를 위해 거대 자본을 가진 단체와
이와 결탁된 권력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돈과 힘으로 사회를 통치하면 그 사회는 불의와 부정이 판을 칩니다.
구약시대에 야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많은 예언자를 보낸 이유는
바로 부정부패와 비리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회를 바로 잡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그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사회는 어둠이 판을 치게 됩니다.
돈과 물질로 사회를 쥐고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제대로 깨어 있어야 할 의식 있는 직업군과 양식인이 바로 이 돈에 의해 다른 길에 서 있습니다.
이미 불의의 물을 먹은 그들이 사회에서 도태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비자금 상황은 돈에 의해 상황이 호도되어
용기를 얻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욕은 욕대로 얻어 먹어가며 지쳐가고 있습니다.
"너는 아니겠지?" 하고 협력의 손을 내밀면
그들 마저 이미 자본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많은 양들은 감추어진 상황을 잘 몰라 오히려 목자에게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정치적 식견으로만 판단하면 다른 견해가 나올 수 도 있을 겁니다. ~~
그러나 옳다는 것에 믿음 두고 있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에 신뢰를 버리지 않아도 될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그들에게 화살기도 한 번 만으로도 협력하는 지혜가 필요할 듯 합니다.
- 카페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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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기도합니다~ 이 어려운 여건안에서도 용기 잃지 않고 그분이 함께 해주실것임을 희망하면서요~ 자세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뉴스에서 많이 접했던 것을 자세히 올려주셨군요. 모든 일이 주님안에서 정의로움으로 다스려지길 기도 합니다.
신부님, 잘 지내시고 계시지요. 늘 마음만 전하고 있습니다. 잘 읽었고 제 카페로 스크랩해 갈게요^^괜찮지요?
예, 괜찮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