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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일 한류스타인 박용하가 자살을 하였다.
젊은이들이 무슨 일로 목숨을 끊는지, 그것도 유명 연예인들이... 안타깝고,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 배우의 장례식이 있던 날 저녁 서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살아있지? 너 죽은 지 알아보라고 ○○○에게서 전화가 왔어?” “뭐 내가 죽었느냐고 이렇게 살아서 전화 받는다. 그런데 왠일로?” “케이블 TV에 박용하 화장하는데, 화장 중 명단에 너 이름이 보였다고 ..” “어머 그래 어느 방송이야 연예채널이겠지? 나 명 길겠다. 하 하 하” 그래서 연예계 사건이 있으면 그 것만 종일 방송하는 연예채널을 찾아보니 마침 그 배우 장례식부터 방송이 되고 있었다. 생전에 인간관계가 좋았는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며 그를 보내고 있었다. 눈물 많은 나도 눈물을 흘리며 내 이름을 찾기 위해 계속 채널고정을 하였다. 화장장으로 들어간 방송이 나오고 정말 화장중이라는 글씨가 나오는데, 박용하 아래 선명한 한글의 내 이름 ○○○... 나는 망자가 되어있었다. 그날 밤<죽음>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체적이지는 못하나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 온지 오래이다. 아니 나에게 남은 가장 큰일은 죽음의 일이다 이 죽음을 어떻게 고통 없이 맞아들여서 감사히 사라져갈 것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티끌만큼도 폐스러운 일이 없이 깨끗이... 죽음이란 일정한 시간을 살다가 가는 것. 죽음이란 인간은 그 일정한 시간을 살다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이사 가는 것.. 이러한 한정된 시간을 사는 인간의 목숨이 생명이 아닐까. 영국 시인 S.스펜더는 “인간은 태양에서 나와서 태양으로 돌아가는 짤막한 여정을 사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은 이 짤막한 여정 속에 자기의 이름을 하나 서명하고 간다.”라고 말했고 독일의 R.M 릴케는 “죽음이 잠시 생명을 빌려 주었다가, 빌려 준 생명만큼 기다렸다간 다시 그 생명을 거두어들인다.”라고 말했다. 이 모두 죽음을 심각하게 여러 각도로 생각한 말들이다. 하여간 인간은 죽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만큼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한다. 이 죽음을 어떻게 하면 비참하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맞이할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점점 하얀 밤이 되고 있다. 죽음. 죽음을 연습하자. 죽음은 작별이다. 이제 남은 내 생명 작별을 하며 말도 소용없는 그 허망을 살아야 한다 나의 생명의 길은, 작별의 길은 몇 리가 남았는가. 내 영혼이 영원히 정착할 고향은 어디인가 만족을 하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임마누엘 칸트는 죽을 때 <에스 이스트 굳 (Esist gu.그것으로 좋다)> 이라고 말했다지만, 항상 만나보고 싶은 내일을 두고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닐까? “더 살아 보고 싶은 그 내일” “뭔가 현실보다 낮게 보이는 그 내일을 더 살아보고 싶은 그 갈망” 그 욕망을 미련처럼 남기고 죽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희망, 꿈, 그 갈망을 희구하며 사는 것이다 현실을 살며 현실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뭔가 그 다른 현실, 그 텅 빈 공간, 그 기대를 사는 것이다.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아 벗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되돌아왔네.... 카알 붓세의 이런 말처럼... 이렇게 현실을 떠나서 그 갈망만을 살 수는 없을까 꿈이라는 푸른 초원을 찾다가 목숨 떨어지면 그뿐, 그걸 사는 게 또한 인간의 현상이 아닌가. 이렇게 죽음을 바닥에 깔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 일체를 부정하면서, 일체를 긍정하면서, 오로지 뜨거운 생명, 그 인간을 살자. 보다 많이 느끼고, 보다 많이 생각하고, 보다 많이 행동하면서 살자. 보다 많이 기쁨을, 보다 많이 슬픔을, 보다 많이 고통을, 할 수만 있다면 보다 많이 초탈(超脫)하며 살아보자. 죽음이 툭 툭 치더라도 아무런 후회 없이 순응할 수 있는 모든 여유를 가지고 살아보자. 그리고 마지막 소원, 그 소망은 육체적인 고통 없이 죽음에 순응하고 싶은 마음이다. 또 가족이나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의 주위사람들에게 고마운 인사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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