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관직 활동을 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이 격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박문수는 소론의 당색을 가지고 당론을 가장 추종하던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 점은 1741년(영조 17) 반포된 신유대훈(辛酉大訓)에 대한 입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신유대훈은 영조의 왕위 계승과 관련해서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의 논의 절충을 통해 발표된, 정치 현안에 대한 결정 문안이었다.
신유대훈이 반포되자 박문수는 노론 측의 김용택과 이천기를 역적의 죄로 단정한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김용택과 이천기는 노론 측 인물로, 경종 연간에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을 지지하다가 1722년(경종 2) 목호룡의 고변에서 국왕을 시해하려고 했다고 하여 죽임을 당했다. 신유대훈의 반포로, 역적으로 죽임을 당했던 김용택과 이천기가 이제는 충신이 되었다. 이에 박문수는 김용택 등이 이미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종의 모의를 하였으며, 경종의 신하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들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론 당론을 추종하던 강경 소론들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점차 노론으로 정치의 주도권이 옮겨져 가던 시기 박문수의 이 같은 정치적 자세는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데 한계가 되었다. 그가 사망하던 시기에 작성된 실록의 졸기에는 “이광좌를 사표로 삼아 지론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영조실록])”고 하였다. 이광좌는 영조 대 전반 소론의 영수에 해당하는 인물로, 그에 상대하던 노론 측의 영수는 민진원(인현왕후의 오빠)이었다.
이렇게 강경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던 박문수였으나, 당론보다 앞섰던 것이 ‘공’을 우선시하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반대당이었던 양주 조씨 조태채와의 관련 일화가 전하고 있다. 조태채는 경종 대 신임옥사 때 죽임을 당한 노론 측 4대신 가운데 한 명인 만큼 박문수와는 정치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주지하듯이 영조 대는 이른바 탕평책이 정치운용술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탕평채는 이때 만들어진 음식이라 한다. 영조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탕평책 하에 관료 생활을 하던 박문수는 어느 날 대궐에서 숙직하며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반찬으로 콩나물이 나왔다. 그러자 박문수는 콩나물 대가리를 꼭 떼어버리며 “콩나물 대가리는 어차피 잘라버려야 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콩나물을 한자로 표현하면 ‘太采(태채)’가 되는데, 그 음이 조태채(趙泰采)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이렇게 조태채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박문수였으나,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에게 보여준 다음과 같은 자세는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조관빈은 박문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정치 활동을 하였다. 한번은 조관빈이 극형에 처해질 위기가 있었다. 이때 박문수는 국왕을 알현하고는, “조관빈이 지극히 흉악한 죄를 지었으니 죄상으로 보아서는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하나 지금 말해지고 있는 일 정도로는 죽일 사안이 아닙니다."라며 관대한 처벌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조관빈은 경의 원수가 아니오!”라며 의아해 하였다. 박문수가 이어서 “사적으로는 원수이오나 공적인 판단으로는 죄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관빈을 죽이고 싶으시다면 신 문수의 원한을 갚기 위해 죽였노라고 중외에 포고한 다음 죽이소서”라 하였다. 결국, 조관빈은 박문수의 요청에 의해 사면되게 되었다. 비록 반대당 인물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개인적인 감정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공적인 입장을 우선시한 것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