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연구를 위한 작업 프로그램
라우로 사발라(Lauro Zavala)[멕시코]/송병선 옮김
미니픽션은 한 페이지 안에 들어가는 서사물이다. 이 정의는 간단하지만, 미니픽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매우 많이 있다. 또한 왜 간단히 써야하는지에 이유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미니픽션 글쓰기의 현 상태와 현대 문학의 중심이자 주변부에 위치한 이 장르가 어떻게 토론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미니픽션의 체계적인 연구는 최근에 와서야 진행되고 있다. 이 장르의 본격적인 연구는 대략 10여년이란 짧은 세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문학 내에서 이 장르가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서 제시할 의견들은 미니픽션 선집과 미니픽션 공모대회의 경험에서 유래된 것임을 밝히고 싶다.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은 이런 전통에 있어서 세계의 다른 국가들보다 몇 십 년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의 주요 주제는 왜 미니픽션이 새 천년의 가장 특징적인 글쓰기가 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미니픽션은 아주 짧은 분량의 글쓰기이다. 그것은 전자매체에 적당한 하이퍼텍스트 글쓰기의 병치적 파편화에 매우 근접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쉽게 미니픽션이 21세기 문학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미니픽션의 이론과 작품 읽기, 그리고 미니픽션의 출판과 연구와 글쓰기의 문제들은 적어도 여섯 분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간결성, 다양성, 독자와 작가의 공범관계, 파편성, 신속성, 가상성이다. 여기에서는 이런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다루면서,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몇 가지 결론을 지적하고, 가까운 미래에 보다 심오하게 연구될 수 있는 몇 가지 영역을 언급하려고 한다.
간결성
1971년에 『안티스토리』(Anti-Story)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실험 소설 선집의 서문에서, 필립 스티빅은 가장 과감한 실험 형식의 하나로 극단적으로 짧은 작품들, 즉 A4 1페이지가 넘지 않는 작품을 포함시킨다.
흔히 이렇게 짧은 글쓰기는 잘 알려진 작가들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이전에 문체를 실험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최근 20년간 이런 형식의 글쓰기는 이런 주변적인 위치를 탈피한다. 오히려 미니픽션은 갈수록 유명 작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 장르가 되고 있으며, 다양한 부류의 독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괴물 혹은 성스러운’ 작가라는 개념 자체가 죽음의 위기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독자들이 요구하던 다양한 미학적․서사적 필요성에 부응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탄생한다. 그것은 문학적 글쓰기가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하나의 문학 정전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목소리 중의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한 미니픽션은 한 페이지라는 짧은 공간 속에서 가장 어려운 문학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으며, 일정한 분량을 지닌 문학 작품만이 문학사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기존의 개념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아주 짧은 문학 텍스트는 효과적인 교육의 전략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사용된 대부분의 텍스트는 구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또한 아주 짧은 이야기는 외국어 학습의 기초 및 고급 과정뿐만 아니라, 기초 및 고급 문학 이론 과정과 문학 작품 분석 수업에서 그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특히 작품 분석 수업에서 한 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한편의 소설 혹은 일련의 단편소설보다 아주 짧은 텍스트를 통해 심도 있게 연구하고 비평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사를 통해 살펴볼 때, 극단적으로 짧은 텍스트들은 교육적 관점에서 그 효용성을 입증했다. 이것은 비유 (성경적이건 다른 유형이건), 아포리즘, 정의(定意), 예언, 그리고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의 다양성과 암시성은 ‘간결한’ 장르 연구나 선집에서 그대로 증명된다. 신화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최근 신데렐라의 신화의 보편성이 검증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서사적 구조는 오이디푸스 신화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그 생명력이 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가족 구조에 관한 짧은 이야기에서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근에는 아주 짧은 에세이도 부활하고 있다. 이런 에세이는 흔히 ‘쇼트 short'라고 불린다. 가령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버지니아 울프, 옥타비오 파스와 같은 작가들의 극단적으로 짧은 에세이들은 너무도 독창적이고 상세하여, 이들 작가들의 두꺼운 텍스트들과 경쟁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하이쿠나 수피즘 혹은 도교와 같은 종교적 전통의 이야기들이 왜 현대에 재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데도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
미니픽션에 관한 모든 연구는 이 장르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 혼합성임을 인정하고 있다. 미니픽션은 내적 구조에서만 혼합적인 장르일 뿐만 아니라, 여러 문학 장르들과 매우 유사하다. 두 번째 경우에 최근에 출판된 탐정적 혹은 과학소설적 성격의 아주 짧은 작품 선집의 제목은 미니픽션이라는 말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아이작 아시모프와 그로프 콘클린이 엮은 『짧은 우주이야기』(Microcosmic Tales, 1997)이나 로버트 웨인버그와 스테판 지미아노비츠가 엮은 『비겁하게 작은 100개의 탐정 이야기』(100 Dastardly Little Detective Stories, 1993)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미니픽션을 산문시의 글쓰기와 구별하기 어려울 경우도 있다. 그것은 동일한 텍스트가 종종 단편소설 선집이나 에세이 선집 혹은 산문시 선집에 동시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니픽션이 이렇듯 장르적으로 다양성하다는 특징은 예술적이고 교훈적인 그림, 흔히 소위 미니만화라고 일컬어지는 아이러니컬한 컷과 함께 텍스트가 수록되는 것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런 작품은 대부분 한 페이지가 넘지 않는 일련의 콩트이며, 그 책에 삽입된 여러 이야기들과 공통적인 주제를 가지면서 전개되면서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현대 글쓰기에서 혼합성을 보여주는 특별한 예는 야수집과 우화집이다.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우화적 글쓰기의 전통은 매우 풍요롭다. 특히 식민지 시대동안 원주민 공동체 내부에서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우화적 글쓰기를 했으며, 이것은 19세기 말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한편 마술적인 동물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다루는 환상적 전통은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 분야의 전문 사전까지 제작되었으며, 그런 사전들은 여러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조그만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괴물이나 요정, 용이나 천사를 비롯한 상상적 존재를 다루는 사전 이외에도, 라틴아메리카에는 환상적 야수집이 흔히 발견된다.
라틴아메리카의 야수집에 관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작품이 언급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바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마르가리타 게레로가 엮은 『환상동물학 사전』(1954), 후안 호세 아레올라의 『야수집』(1959), 레네 아빌레스 파빌라의 『기적의 동물들』(1989)이다. 우화의 영역에서는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검은 양과 다른 우화들』(1969)과 같은 패러디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미겔 앙헬 데 우르다피예타가 엮은 『아주 존경받는 로드리고 데 마쿠스파나의 라틴아메리카 야수집』(1995)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으고 있으며, 그 안에는 알레고리적이자 동시에 상이한 종류의 경험적 지식이 망라되어 있다. 이 선집에 대한 후속편으로 최근에 라울 아세베스가 엮은 『아메리카의 마술적 동물과 초자연적인 존재들 사전』(1995)이 출판되었다. 이런 작업들은 미니픽션을 다양한 형식들을 보다 많이 보급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멕시코 정부의 도움으로 진행되었다.
독자와 작가의 공범관계
이름을 붙이는 모든 행위는 기원적인 행위이다. 하나의 산문 장르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의무감은 다양한 이름을 탄생시켰으며, 동시에 그런 이름들은 독자와 텍스트의 공범관계가 얼마나 다양한 형식을 띠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정확한 기술적 용어들은 분량이란 측면에서 텍스트를 구분하는데 집착할 뿐, 그 형식의 다양함에 관해서는 별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몇 가지 예를 보자. 멕시코의 작가이자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알폰소 레예스는 아주 짧은 자신의 글들을 ‘메모, 스케치, 그리고 소품’이라고 불렀다. 다른 작가들, 특히 산문시를 쓴 작가들은 자신들의 짧은 글들을 각각 ‘디테일, 순간적인 작품, 미니어처’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어떤 작가들은 ‘그림, 상황, 사건 관계’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작품들의 분량은 한 페이지 미만의 작품들이며, 비평가들은 무차별적으로 단편소설 선집, 에세이 선집, 혹은 산문시 선집에 이 작품들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것은 이 작품들의 혼합적 성격으로 인해 이런 모든 영역에 동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소위 말하는 ‘서든 픽션’보다 더 짧고, 심지어는 ‘커피 잔’소설 혹은 ‘엽서’소설이라는 것보다도 더 짧은 경우가 많다.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이런 작품들을 미니스토리라고 불렀고, 현재 영어권에서는 플래시 픽션, 긴 담배연기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단순히 미니픽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이름이 중요한 것일까? 이런 이름들은 독자들에게 특정한 기대감을 만든다. 가령 독자들은 기예르모 삼페리오의 『이상한 텍스트』 혹은 호르헤 티모시의『작은 이야기와 그 변형들』과 같은 제목을 읽을 때, 아주 특별하고 이상한 것을 기대한다. 여기서 ‘이상한 텍스트’는 실험적이고 자기지시적인 그림이 포함되어 있으며, 두 번째 것은 시사만화가 키노의 캐리커처들이 삽입되어 있다.
이렇듯 아주 짧은 작품을 두고 수많은 이름이 존재하지만, 아직도 상상적이고 정확한 이름을 창조할 공간은 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 중에서도 무엇이 이 장르의 특성을 잘 표현해주는가의 차이는 있다. 가령 파라오니 문화그룹이 자신의 창작물들을 매우 무미건조하게 『15줄: 아주 짧은 소설』(1996)이라고 제목을 붙이는데, 이것은 베아트리스 발디비에소의 『현기증 나는 이야기들』보다 문학적이지 못하다. 한편 윌리엄 페덴의 ‘비쩍 마른 소설’이나 필립 오코너의 러셀 뱅크스의 ‘포우’(에드가 앨런 포우를 기리는 의미에서)와 같은 새로운 이름이 채택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가령 러셀 뱅크스는 “나는 포우를 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여권에 “직업: 포우 작가”라고 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파편성
통일성이란 모더니티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파편적으로 여기는 것, 혹은 하나의 텍스트가 그 내용이 지닌 통일성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방식으로 읽힌다는 것은, 계몽주의 시대에 탄생한 이성적 논리에 의하면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말에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실제 독서 방식이다. 다니엘 페낙은 독자의 절대적인 권리를 말하면서, 페이지를 뛰어넘으면서 읽는 권리, 아무것이나 읽을 권리, 부리로 콕콕 쫄 권리를 강조한다. 특히 이 마지막에 관해 페낙은 그의 작품 『소설처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쫀다. 너는 쫀다. 우리 그냥 쪼도록 놔두자. 그것은 우리 장서에서 아무 책이나 선택해서 읽는 것이고, 아무 부분이나 펼쳐서 잠시 그 안에 빠져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순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도 없고, 베네치아에서 일주일을 보낼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왜 그곳에서 5분을 보낼 권리도 거부당해야 하는가? (......) 실망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위험도 없이 .프루스트, 셰익스피어, 혹은 레이몬드 챈들러의 <서신>을 아무데나 펼쳐서, 이곳저곳을 쪼아댈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파편성은 글쓰기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독서 방식이기도 하다. 그럼 이런 파편적 독서의 몇 가지 증언을 보도록 하자. 그런 증언에는 예전에 무심코 지나쳤거나 혹은 보다 큰 통일성의 일부분으로 연구되었을지도 모르는 파편적인 텍스트들이 진지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런 파편적 텍스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우의 하나가 소설 전체와의 관계에서 자족적인 지위를 누려오면서 수많은 언어학적․ 문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던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팔방놀이』의 68장이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것에 대한 보충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환 호세 아레올라가 제시한 박식한 장르인 ‘다양한 만들기’에 속하는 여러 책들도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시리즈의 한 부분으로 읽을 수 있는 미니픽션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부류의 텍스트로는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기인과 속물 이야기』(1962), 레이몽 케노의 『문체 연습』(1947), 루이스 브리토 가르시아의 『새로운 형식의 광기』(1984) 등이 있다.
통일성과 파편성의 관계는 구조적으로 극단적 개연성을 띠는 작품으로 나타날 수도 잇다. 이것은 성찰적 단상의 형식으로 씌어진 롤랑 바르트의 여행 연대기인 『기호의 제국』(1970), 내면적 성찰의 이미지로써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롤랑 바르트에 의한 롤랑 바르트』, 혹은 선집 형식의 창작물, 즉 암시적인 형식으로 그 안에 포함된 텍스트를 읽게 구성된 것들도 포함된다.
이런 대표적의 경우가 뉴질랜드의 로즈매리 소렌슨이 엮은 ‘작은 이야기’(tiny stories) 선집이다. 이 책은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그리고 논리적이자 상상적인 6개의 부분으로 나눠짐으로써 뜻하지 않은 통일성을 제공한다. 6개의 부분은 마치 신문기사를 작성하는 6개의 원칙처럼 구성되어 있다. (1) 혼란스런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누구‘ (2) 기억과 의미에 관한 ’언제‘ (3) 이야기 예술을 다루고 있는 ’어떻게‘, (4)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일을 왜 하는 것인지 탐구하는 ’왜‘, (5)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어디‘, (6) 저항의 이야기를 다루는 ’무엇‘으로 구성된다. 이 경우 이런 구성은 이야기를 재독(再讀)하라고 초대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해석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아주 짧은 텍스트에 관한 이런 여러 가지 독서전략은 파편성이 현대 글쓰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파편성은 단지 파편적 글쓰기뿐만 아니라, 상이한 파편으로부터 전체성을 구성하려는 연습이기도 하다. 즉, 하나의 파편은 하나의 디테일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되고 탐험되어야 할 전체성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인 것이다.
아마도 자족적이고 자발적으로 재결합할 수 있다는 파편성의 미학은 현재 미학의 열쇠일 것이다. 그것은 디테일을 다루는 현대 미학과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파편성은 파편과 디테일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전체성의 개념은 갈수록 넓어만 진다.
신속성
눈 깜짝할 사이에 쓰고 읽을 수 있는 미니픽션이 미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은 여기서 다루는 여섯 가지 요소들 중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설명을 요하는 것이다. 흔히 혼합성이 눈에 두드러지는 미니픽션과 만날 때,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이것이 단편소설인가?” 이 질문은 일면 일리가 있다. 어떤 미니픽션 연구자는 미니픽션의 최고의 형식은 농담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질문은 바로 “그것이 문학인가?”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니픽션 텍스트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아주 전문적인 독서, 즉 비평에서 발견된다. 이런 연구는 미니픽션이 기존 문학의 정전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정전문학들이 추구하고 있다는 점과 미니픽션이 읽고 쓰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의한다. 미니픽션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은 미니픽션 공모대회에 제출되거나, 선집에 출판되거나, 혹은 미니픽션 특집 잡지나 전문적인 미니픽션 연구에서 사용되는 독창적인 미니픽션들을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미니픽션 공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었고,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역사 깊은 공모대회는 멕시코에서 출판되는 《이야기》라는 미니피션 잡지에서 주최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약 20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분량은 최대 250단어로 한정되어 있다.
또한 1986년부터 플로리다 주립대학이 주최하는 ‘세계 최고의 미니픽션 대회’(World's Best Short Story Contest)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도 최대 분량은 250단어이다. 즉, 대략 A4 한 페이지에 들어갈 수 있는 분량이다. 플로리다 대학의 공모 작품들은 이미 선집으로 출판되었고, 최근 12년간 가장 권위 있는 미니픽션 대회가 되었다.
최근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이런 현상이 눈에 띈다. 베네수엘라의 아라과주(州) 문화부가 주최하는 미니픽션 공모, 아르헨티나의 문예지 《텍스트의 마니아》가 주최하는 공모, 멕시코에 거주하는 콜롬비아 교민들 잡지인 《큰 집》, 콜롬비아의 문예지 《지역》이 주최하는 공모대회가 있다. 특히 이 잡지의 창간호에는 미니픽션의 선언문이 실려 있다.
마지막으로 1993년부터 아이오아 대학의 국제 작가 프로그램(The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이 출판하는 잡지 《100단어 100 Words》를 언급해야 한다. 격월로 출판되는 이 잡지는 편집자들이 제안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100단어 분량의 시와 미니픽션을 출판한다. 여기에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72개국의 모든 작가들이 기고하고 있다.
전문 연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미니픽션 「맞물린 공원」만큼 비평계의 주목을 받은 전통적인 분량의 소설이나 단편소설은 거의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두 페이지 분량의 이 작품을 분석에 모든 지면을 할애한 글만 해도 20여개가 넘으며, 심지어는 이 작품만 다루고 있는 석․박사 논문이 있기도 하다. 비평가들의 관심을 주목시킨 또 다른 작품으로는 오스카르 데 보르보야의 「반란의 이단자」도 있다.
또한 훌리오 코르타사르, 훌리오 토리, 기예르모 삼페리오, 호세 델라 콜리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같은 여러 작가들의 미니픽션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짧은 장르에 수많은 독자들이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간결함이 지니고 있는 힘으로 인해 글을 쓰고 읽고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미니픽션의 분량과 미니픽션에 대한 비평계의 반응을 가장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은 아우구스토 몬테로스의 「공룡」이다. “잠을 깨보니 공룡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라는 한 줄에 불과한 이 작품은 수많은 비평과 논문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글은 환 비요로의 「몬테로소, 오페라의 극작가」라는 글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현재 미니픽션의 글쓰기가 차지하고 있는 이런 공간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미니픽션의 창작과정이 신시내티 대학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창작된 미니픽션은 로베르타 앨런이 1997년이 출판한 『빠른 픽션: 5분 안에 소설 쓰기』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비평계는 신속성을 추구하는 문학 작품의 미학을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일련의 예는 미니픽션이 신속하게 씌어지고 읽혀지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미학은 그 어떤 대작과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상성
미니픽션은 사이버텍스트와 구분된다. 사이버텍스트가 미래의 글쓰기라면, 미니픽션은 21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장르이다.
그럼 사이버텍스트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터랙티브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산물이며, 그 앞에서 독자는 해석을 할 뿐만 아니라 글쓰기와 텍스트의 언어에도 참여한다. 그렇게 텍스트의 형식과 의미 앞에서 능동적인 공저자가 되는 것이다. 즉, 사이버 텍스트를 읽는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해석'뿐만 아니라, 텍스트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버텍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자족적이고 외부의 지시물이 없는 텍스트적 현실을 제시하는 것이다.
텍스트에서 사이버텍스로의 이전은 종이에 씌어진 인쇄활자를 읽는 것에서 컴퓨터 화면위의 인터랙티브 하이퍼텍스트에 개입하는 과정의 변화와 유사하다. 이런 새로운 매체의 창조는 인터랙티브 성격의 문학 창작연습이나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가상 단편소설 글쓰기와 같은 새로운 문학의 생산으로 이끈다.
문학 분야에서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은 에르고딕 텍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용어는 에르곤(작업)과 호도스(길)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독자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는 이런 글쓰기의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 미니픽션과 같은 에르고딕 텍스트의 독자들은 텍스트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글쓰기에도 참여한다. 우리가 콤팩트 단편 혹은 에르고딕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이피 파편적 글쓰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가상 독자를 생산하고, 각각의 독자는 텍스트에 개입하면서 구체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니픽션은 과거의 중심을 두는 전통서사 양식과 미래에 중점을 두는 현대식 서사를 통합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니픽션은 현재의 글쓰기이며 독서의 현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첫댓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미니픽션강의가 개설되였으면 좋겠습니다.
써클형식으로라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보다도 세계문학의 흐름에 따른, 중남미문학을 직접 읽고 배우도록 함이 바람직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