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신학적 의미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죄의 사회성(sociality) 문제다. 죄는 개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화(socialization)하려는 성향이 있다. 죄는 본성상 사회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사례들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죄의 파괴력을 배제한 채, 개인적 차원에서만 죄를 해석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해석이든 적합한 것이 아니다.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는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면서 사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면서, 이 사회화한 죄의 심각성을 절실히 경험했다. 아무리 개인의 영혼이 거듭난다 하더라도 구조화된 악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죄가 사회화하는 것처럼 복음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이른바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다.
사회복음의 강점은 “악의 사회화”에 대항한 “복음의 사회화”를 요청했다는 점에 있다. 라우쉔부쉬에 따르면, 복음은 단순히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 이 사회적 죄가 “생태학적 죄”(ecological sin)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구원의 본질과 범위도 사회적 차원과 생태학적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악의 왕국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는 것이 사회구원이요, 생태계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가 성령의 도움으로 추구해야 할 하나의 책임이며 동시에 사명이기도 하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그림6]과 같다:
[그림6] 죄와 복음의 사회화 현상
개인 죄 | → | 죄의 사회화 | → | 악의 왕국 |
↕ ↕ ↕ |
개인 복음 | → | 복음의 사회화 | → | 하나님 나라 |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을 너무 좁게 해석해서 개인의 영혼 구령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고 사회문제와 생태계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사회와 격리된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사회와 정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복음은 “모든 피조물”(all creature)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막 16:15). 따라서 복음은 개인과 사회, 그리고 창조세계 모두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오는 세상에서 완성되겠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물론 라우쉔부쉬의 사회복음은 1930년대 초 미국의 경제공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주창된 것이고, 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날드 슈바이처의 설명에 따르면, 그 비판은 대체로 사회복음운동이 “이성과 선한 의지를 통해서 인간조건이 점차로 진보해 간다는 문화적 낙관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이 되었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문화에 적응하면서 사회주의와 손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가 비도덕적 사회」에서 두 가지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첫째는 “역사를 진보로 규정하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판했고, 둘째는 “사랑과 이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환상을 고발”했다. 그리고 니버는 “기술의 진보가 도덕의 진보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공황은 오히려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운동의 역사관이 환상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복음운동을 비판하고 제기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더 건강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니버는 사회복음주의와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신 하나님의 “초월성”과 “죄의 보편성”을 강조했는데, 이런 니버의 태도는 역으로 “인간성이 본래 갖고 있는 이기심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논함으로써 ‘상호성과 공동체가 갖고 있는 힘’을 무시”했다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므로 니버의 약점은 인간의 자유가 “죄된 성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타인을 돌보고 더 큰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서로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에 있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24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