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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스크랩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Ⅰ
킴스특허 추천 0 조회 37 08.09.07 23: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상주Ⅰ
“경상도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빚어낸 삼백(三白)의 고을
▲ 상주 화북의 견훤산성에서 바라본 속리산 조망. 천황봉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생동감 넘친다.

쌀, 누에, 곶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하얗다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예부터 이 세 가지로 유명해 상주를 흔히 ‘삼백(三白)의 고을’이라고 불렀다. 우선 ‘삼백미’로 불리는 상주쌀은 경기미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질이 좋았고, 임금의 수랏상에도 오르던 진상품이었다. 게다가 생산량도 많아 한때 상주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은 강원도 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그것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 다음은 누에.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되었는데, 상주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한때는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양잠농가도 더불어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은척면 두곡리에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년쯤 된 늙은 토종 뽕나무가 있는 것도 이 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곶감의 명성은 아직도 대단하다. 상주는 시내 한가운데는 물론이요, 마을 길가에도 온통 감나무다. 그래서 가을엔 주민들이 감을 따는 광경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엔 어딜 가나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이 익어가는 건조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궁금증 하나. 요즘 곶감은 분명히 말간 빛이 도는 주황색인데 왜 ‘삼백’에 속할까? 사정은 이렇다. 타래에 그대로 건 곶감에서는 하얀 분가루가 생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만지작거려야만 분이 생겨난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곶감을 걸어놓고 손으로 만지며 모양을 만들었기에 하얀 분이 나와 곶감을 감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야 곶감을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 하얀 분이 나오지 않아도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


▲ 함창 읍내에 있는 전 고령가야 왕릉.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섯 가야 중 하나인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삼백의 고을’로 유명한 상주는 영남지방에선 확고한 권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선 영남의 행정명인 경상도(慶尙道)는 천년 신라의 고도 경주(慶州)와 상주 고을의 첫 글자를 하나씩 따서 지은 것이다. 또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은 삼한시대에 상주 벌판에 자리 잡았던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던 낙양(洛陽)에서 유래했는데, ‘낙양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면모를 갖추고 흐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하니 상주 사람들이 갖는 자부심을 이해할 만하다.


뿐만 아니다. 이곳 상주는 낙동강 주변으로 매우 기름지고 널찍한 들녘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곡창일 뿐만 아니라 천혜의 방어막인 백두대간을 두르고 금·쇠 같은 지하자원도 품고 있어 삼국시대에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화북면 속리산 자락에 있는 견훤산성과 모동면 백화산에 있는 금돌산성이 그 증거가 된다.


그래서 신라는 상주를 북방 경영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이곳을 제2의 도읍으로 일컬을 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이런 상주의 위상은 고려를 지나 조선까지 이어졌다. 세종 때에는 경상도 감영이 설치되기도 했던 상주의 전성시대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경상도 감영이 대구로 옮겨가면서 시들고 말았다. 물론 그 덕분에 현재의 상주는 도시로서의 이미지보다는 편안한 시골로서의 이미지가 아주 강하게 남았지만 말이다.


▲ 공갈못 노래비. 상주 고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채련요인 ‘상주 연밥 따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비록 감영을 대구로 옮기기는 했으나 조선 후기에도 상주의 영역은 매우 넓었다.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 상주의 범위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서쪽으론 백두대간을 넘었고, 동쪽으론 낙동강을 건넜다. 그래서 상주는 답사 동선을 잡기가 쉽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여정은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나들목을 나와 북부에서부터 남부로 내려가면서 둘러보는 것이다. 그 다음 서부의 백두대간쪽을 훑어본 다음 북서쪽의 늘재를 넘든지, 아니면 남서쪽의 충북 황간이나 영동으로 해서 경부고속도로로 빠져나가는 동선이 가장 자연스럽다.


상주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함창은 현재는 상주에 속한 한적한 읍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현령이 다스리던 독립된 현이었다. 읍내 남쪽 언덕엔 심상치 않은 모습의 고분이 보인다. 바로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무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조선 선조 25)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함창 현감 이국필이 ‘고령국 태조 가야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를 발견하여 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고 전한다.


▲ 최근 복원 작업을 하면서 넓게 확장된 공갈못 전경.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공검지는 삼한시대에 조성한 저수지다. 아직 변변한 이정표가 없으나 상주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소이므로 반드시 들러보는 게 좋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공검이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1195년(명종 25) 사록 최정빈이 옛터에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을 축조할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고 둑을 쌓았기 때문에 공갈못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인근 고을에는 공갈못을 못 보고 죽으면 저승에서도 쫓겨날 정도라는 이야기까지 있는 것을 보면 함창 공갈못의 명성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상주 사람들은 공검지라는 한자 지명보다 공갈못이라는 한글 지명을 더 선호한다.


다음은 오래 전부터 상주 고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채련요(採蓮謠)인 ‘상주 연밥 따는 노래’의 일부다.


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줄밥 내 따주께 이내 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가오


연꽃도 모두 스러지고 연밥이 익은 어느 가을, 공갈못에서 연밥을 놓고 수작 거는 사내와 이를 받아넘기는 여인의 여유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민요다. 김소희 명창 등이 불러서 유명해진 이 민요에는 유서 깊은 상주 고을의 자연과 향토색이 물씬 풍겨 나온다.


인근 고을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민요의 특성인데, ‘상주 연밥 따는 노래’의 정겨운 가락은 영남지역은 물론 백두대간 너머 충청도 보은, 옥천은 물론 전북 내륙 지역까지 전파되어 그곳에서 모내기할 때도 곧잘 불리곤 했다. 이 채련요가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까닭은 곧잘 고을 간에 문화적 장벽이 되곤 하는 백두대간 분수령이 상주 고을을 지나면서 몸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갈못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널따란 공갈못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조선 고종 때 못의 일부를 논으로 만들면서 축소되었고, 1959년 공검지 서남쪽에 오태저수지가 완공된 이후 다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성만 듣고 찾아간 이들은 너무 협소한 연못을 보고는 공갈못이란 이름의 유래를 ‘공갈을 치는 연못’으로 해석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상주시에서는 공갈못 복원작업에 힘쓰고 있다. 이번에 가보니 주변의 논을 모두 연못을 바꿔 제법 공갈못의 영역이 넓어져 있었다. 물론 전남 무안의 백련지 정도는 아니었으나 우선 아쉬운 대로 이 정도면 옛 명성을 그려보는 데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전국에 연꽃으로 유명한 곳이 많지만, 역사나 전설 등 여러 콘텐츠를 볼 때 상주의 공갈못이 으뜸이 아니었던가. 아직 연뿌리가 넓게 퍼지진 않았지만, 연이란 식물이 워낙 번식력이 좋으니 곧 넓혀진 공갈못을 뒤덮은 연꽃, 그리고 연밥 따는 처자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벌써부터 은근히 가슴이 설렌다.

▲ 임진왜란 때 왜군과 100여 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

공검지를 벗어나면 길은 상주의 으뜸 명소 옥주봉 경천대(擎天臺)로 이어진다. 그런데 경천대 가는 길의 즐거움도 보통이 아니다. 공검지에서 3번 국도를 타고가다 경천대로 들어서려면 널따란 평야지대를 지나게 되는데, 영남의 한 고을이 아니라 마치 호남평야 한가운데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또 가는 길목에 충의사, 사벌왕릉, 화달리 삼층석탑 등 의미 있는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으니 이만한 코스가 어디에 있을까 싶다.


충의사는 조선의 무장 정기룡(鄭起龍·1562-1622)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과 10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명장. 특히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토왜대장이 되어 6만 왜적을 대파하고, 상주·합천·의령 등의 여러 성을 탈환했고, 경주·울산을 수복하는 등 부족한 군사와 무기로 용맹을 떨친 그를 흔히 ‘육지의 이순신’이라고도 불렀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올랐고,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 [좌]‘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불리던 정기룡 장군 영정. [우]충의사 유물전시관에는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서 사용하던 칼 등이 보관되어 있다.

옥대·신패·유서·교서·교지 등 장군이 남긴 유물은 보물(제669호)로 지정되어 충의사 유물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곳에는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매헌실기’의 판목 58점과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서 사용하던 칼 등이 남아있다.


충의사를 나와 사벌왕릉과 화달리 삼층석탑을 보고나면 곧 경천대다. 낙동강 물길이 크게 휘도는 곳에 자리한 경천대는 정기룡 장군이 무예를 닦으며 심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다. 대 아래쪽 동쪽 층계엔 장군이 용소에서 얻은 용마에게 먹이를 주었다는 말구유가 있다. 하지만 사각형 구멍이 파여 있는 이 석물은 크기나 놓인 위치 등으로 미루어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했던 석재로 여겨진다.


▲ 만산동에 있는 임난 북천 전적지. 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왜군 선봉 주력부대가 내륙에서 최초로 본격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천대에서 내다보는 조망은 참 좋다. 상주 사람들이 ‘낙동강 천삼백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자랑하는 명소답게 낙동강 고운 모래밭 위로 솟은 절벽이 일품이다. 또 기암절벽 아래 강물이 크게 휘돌아 흐르고 그 물돌이 너머로 펼쳐진 널찍한 회상들판은 최고의 장관이다. 백마강(금강)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부여들판, 섬진강 오산의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구례들판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명품 풍경이다. 이곳 경치 역시 들판의 벼가 누릇누릇 익어갈 무렵이 으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상주 사람들이 오죽하면 하늘이 만들었다고 하여 ‘자천대’라고 자랑했겠는가.


경천대를 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면 상주 시내로 들어서게 된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동류하는 북천을 건너면 상주 시가지. 하지만 이 작은 냇가를 건너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곳은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왜군 선봉주력부대가 내륙에서 최초로 본격 전투를 벌인 임난 북천 전적지이기 때문이다.



때는 현해탄 건너 섬나라 일본이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592년 임진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13일, 아침에 대마도를 출발한 왜군 선봉은 물밀 듯이 부산 앞 바다에 들이닥쳤다. 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은 19일엔 언양성을 넘어뜨리고, 22일 영천성을 거쳐 별다른 저항도 없이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그사이 조선은 18일에 유성룡을 도체찰사,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백두대간의 조령·죽령·추풍령에 방어선을 편성하였지만, 조선의 앞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이때 왜군을 막기 위해 남진한 조선군은 23일 상주에 도착했으나 이때 병력은 고작 60여 명 정도였다. 상주 판관 권길과 호장 박걸이 밤새워 소집한 잔병과 장정은 8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군은 무려 17,000명. 이때 이미 의병을 일으켜 상주에 있던 김준신 의병장 등은 상주성 사수를 주장하였으나 이일은 성을 버리고 북천에서 적을 막기로 한다.


드디어 운명의 25일, 조선군은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정예군 17,000여 명에 대항한다. 어이없게도 이일은 포진도 하기 전에 적의 급습을 받자 도주하고 만다. 하지만 종사관 윤섬, 이경류 등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등을 비롯한 800여 장병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북천은 이들의 피로 붉게 변했다. 나중에 이곳을 철환산(鐵丸山)이라 했으며, 이들이 빠져 죽은 연못을 학사담(學士潭)이라 불렀다.
 


왜군의 북진을 늦추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몸을 던졌던 호국 영령에게 묵념하고 북천을 건넌다. 이어 25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곶감마을로 잘 알려진 남장동이 오른쪽으로 나온다. 전국 곶감의 60%를 생산하는 상주는 무려 7,600여 농가가 연간 4,500톤의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곳 남장동이 으뜸이다.


감은 종류에 따라 반시, 고등시, 둥시로 나눠지는데, 떫은 맛이 없어 홍시를 만드는 반시와 고등시는 경남 일원과 전북 완주·남원 등지에서 많이 자라고, 떫은 맛이 나는 둥시는 상주 지방에서 많이 난다. 하지만 상주 둥시는 곶감이 되면서 떫은 맛이 없어지고 당도가 두 배로 증가하여 여느 고을의 곶감을 앞지르고 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도 둥시라 하면 상주 감을 가리킬 만큼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길손이 상주를 찾은 9월 중순엔 2층 구조로 지어진 곶감 건조장이 텅 비어 있었다. 부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감 껍질을 깎고 곶감타래에 거는 생동감 넘치는 광경은 10월 초순부터 11월 중순까지만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한두 달 정도 건조장에 걸어놓고 건조시키는데, 이때가 되면 껍질이 벗겨져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곶감들이 말간 주황색으로 익어가고 있는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 남장사 보광전에는 조선 초기의 철불좌상과 나무로 조각한 목각탱이 모셔져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곶감 마을을 지나면 남장사(南長寺)다. 퉁방울눈으로 성난 표정을 표현하려 했으나 소박함과 천진스러움이 엿보이는 석장승의 안내를 받고, 목수가 예술적인 솜씨를 한껏 발휘한 일주문을 차례로 지나는 맛이 참 좋다.


상주 둘레의 남장사·북장사·갑장사·승장사를 흔히 ‘상주 4장사’라고 불렀는데, 이 중에서 현재 남장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불교가 성했던 이곳 상주에서도 현재 가장 사랑 받고 있는 절집이기도 하다. 삼층석탑을 거느린 극락보전이 있지만, 중심 건물은 보광전이다. 조선 초기의 철불좌상(보물 제990호), 그리고 보광전과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목각탱도 불교 예술의 걸작으로 인정받아 각각 보물 제922호와 제9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장사는 진감국사가 830년(흥덕왕 5)인 57세 때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장백사(長栢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진감국사는 중국 종남산에서 범패(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 불교음악)를 배워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서 그의 행적은 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쌍계사 진감국사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832년 이곳에 무량전을 짓고 범패를 보급하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많이 모였다 한다. 결국 남장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범패가 보급된 절집이라 할 수 있다. 규모가 크지 않음에도 범종각엔 종과 함께 사찰의 사물(四物)을 이루는 목어·법고·운판이 걸려있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좌]남장사 보광전 앞에는 특이하게도 파초를 심어두었다. [우]절 입구에서 사악한 기운의 접근을 막고 있는 남장사 석장승.

남장사를 나와 노음산 서쪽으로 휘돌아 북장사를 들른 다음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 종가 병암고택을 찾는다. 우복은 조선 중기의 예학자로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그리고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정기룡 장군과 더불어 조선 중기 상주의 3대 인물로 꼽히는 분이다. 정기룡 장군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우복은 문신 최고의 영예직인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한 대학자였다.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영남학파에 속하게 된 우복이지만, 이기설 논쟁에서는 기호학파의 율곡을 편들기도 한 소신 있는 인물로 꼽힌다.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던 그는 조정에서는 나라의 기강과 백성의 생활안정을 강조했으며, 지방관이 되어서는 향인들의 교화에도 힘썼다. 종택은 대산루 남쪽 언덕에 자리 잡아 우산팔경(愚山八景)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지로서 현재 장군의 16대손이 살고 있다.


▲ 경천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회상 들판. 맑은 가을날에 보면 감탄사 절로 나오는 장관을 이룬다.

이젠 백두대간 주변의 상주를 짚어볼 차례가 되었다. 상주의 지형은 제법 복잡하다. 백두대간이 서부로 지나지만 이 산줄기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을 끼고 있거나 그 서쪽의 공성·모동·모서·외남·화동·화서·화남·화북면 이렇게 적지 않은 8개 면이 모두 상주 고을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백두대간 분수령을 경계로 도계(道界)나 군계(郡界)를 나누던 관습은 적어도 이곳에선 통하지 않는다. 분수령이 이 지역에서 면계(面界)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까닭은 분수령의 산세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중화지구대’라 불리는 이 구간은 아마도 백두대간 전 구간 중에서 분수령의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일 성싶다. 마루금은 겨우 해발 200~400m 내외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야산지대를 이룬다. 그러나 백두대간 분수령으로선 낮아도 농사터로는 고원지대다. 이곳은 평지와 평균기온이 3~5℃ 차이가 나는 까닭에 당도 높은 과일을 생산하는 과수농업이 아주 발달해 있다.


▲ [좌]우담 채득기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경천대 무정. 낙동강 조망이 좋다. [우]사벌왕릉 옆에 있는 화달리 삼층석탑.
화동면과 내서면을 오가는 백두대간 신의터재에서 멀지 않은 판곡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의사 제단비가 있다. 김준신 의병장은 앞서 들렀던 북천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 정예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분이다. 당시 김준신 의병장은 중과부적으로서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부하들과 함께 왜군 수백 명을 죽이고 장열하게 전사했다.
 
왜군은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예기치도 않은 곳에서 타격을 입게 되자 분풀이를 하기 위해 김준신 의병장 가족이 살고 있는 화동면 판곡리로 몰려갔다. 그러나 어찌 무기도 없는 민간인이 왜군 정규군을 당하겠는가. 마을사람들은 힘을 합쳐 저항했지만 남자들은 거의 학살당했고, 부녀자들은 왜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 마을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연못 이름이 낙화담(落花潭)이다.
▲ 화북 장암리에 있는 견훤산성. 산세를 따라 암벽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에 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임진왜란 당시 1,600여 평에 이르렀다는 낙화담은 세월이 흐르면서 메워져 이제는 불과 60~70평 남짓한 연못으로 변해 버렸다. 못 가운데 조성한 작은 섬엔 수백 년 묵은 노송 한 그루가 옛 이야기 들려줄 듯 서있다. 그 옆엔 노산 이은상이 김준신 의병장의 행적을 기려 쓴 낙화담의적천양시(落花潭義蹟闡揚詩)가 새겨져 있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았네 / 절사곡(節士谷) 피 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라…중략…설악(雪岳) 높은 본대로 이르는 말 /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정기룡 장군을 비롯해 우복 정경세, 김준신 의병장…. 이렇듯 환란의 시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 분이 모두 한 해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주에서 태어났으니 참 특별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상선(상주와 선산)에 있다’고 적은 것은 이 분들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 백두대간 국수봉에서 내려다본 중화지구대.

김준신 의병장 유적지를 벗어나 화령(化嶺)으로 간다.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화령은 한때 제법 번잡하던 고개였다. 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 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선다. 고려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장으로 역할을 해온 화령장은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70~80년대엔 “다른 지방에서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장날이면 사람 어깨가 부딪혀서 걷기 어려울 정도로 인파가 붐볐다지만, 지금은 점심 무렵이면 어느덧 파장 분위기가 풍겨 나오는 시골장이 되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부터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 김준신 장군의 가족들이 자결했다는 낙화담.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보다 훨씬 넓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다.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화령장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17연대 전 장병은 1계급 특진하였다. 화서면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화령지구전적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화령에서 북으로 방향을 잡고 지방도를 타고 갈령을 넘으면 화북이다. 이곳은 속리산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형의 한 중간에 자리한 산속의 이상향이다. 이곳은 어디서든 속리산의 불꽃같은 암봉들을 감상할 수 있다. 흔히 속리산이라 하면 유명한 법주사 때문에 보은을 떠올리지만, 주봉인 천황봉과 오래 전부터 속리산의 상징으로 군림해온 문장대는 상주에 주소를 두고 있다. 즉, 주봉인 천황봉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요, 문장대는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다. 산행 거리도 상주 쪽에서 오르는 게 훨씬 가깝다.

▲ 중화지구대를 지나는 백두대간 분수령 일부 구간에는 논과 밭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청화산(靑華山·984m)은 늘재의 잠룡(潛龍)이 승천하는 형국이라는 명산이다. 부드러운 능선과 날카로운 암릉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 정상 부근의 바위에서 사방으로 탁 트인 주변 산하를 바라보면 정말로 행복하다. 특히 품위가 넘치는 천황봉의 위용과 문장대까지 울퉁불퉁 이어진 바위들의 기세가 제법 당당하다. 이 땅의 산하를 사랑한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 역시 청화산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다.


‘청화산은 내선유동과 외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으로는 용유동을 가까이 두고 있는데,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은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福地)다.’


▲ 곶감을 널어놓은 풍경. 상주에서는 가을과 겨울 사이에 이런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극찬이니 이중환이 스스로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중환과 청화산의 인연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 어딘가에 이중환과 관계된 유적이 남아있을 거란 기대를 갖고 그 흔적을 찾고 있다.

또 도장산은 앞의 두 산에 비해 유명세는 떨어지지만 역시 속리산 천황봉·문장대, 청화산 등의 조망이 눈앞에 거칠 것 없이 펼쳐지니, 이러한 세 산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에선 비록 풍수를 보는 눈이 트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도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 길손이 경험해보니 역시 사계 중에 가을 무렵, 추석 전후가 절정이었던 것 같다.


풍수가들은 이렇듯 ‘속리산 천황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삼각형 산줄기의 형세가 마치 속세를 떠난 유·불·선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국’이라 말한다. 그 삼각형 한가운데 자리한 화북의 용유동(龍遊洞)은 민초들이 절박하면서도 질박한 꿈을 모아 이뤄낸 이상향이다. 용유동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신비한 마을.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 하여 우복동(牛腹洞)이라고 부른다.


▲ 화령장 지구 전적비. 화령은 6·25전쟁 때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우복동의 지세를 보면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바위병풍에 첩첩이 막혀있다. 또 북쪽은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은 갈령을 넘어야 멀리 상주로 갈 수 있는데다가,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관문인 동쪽의 문경 가는 길은 가파른 벼랑이 연이어 있는 쌍룡계곡이 막고 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나 이처럼 예전엔 접근조차 어려운 깊디깊은 산골이었다. 결국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하여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이 영원한 이상향으로 여겨온 십승지(十勝地)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복동 믿음의 중심지인 용유동 길가엔 ‘洞天’이라 쓰인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누운 바위 표면에 새겨진 멋들어진 글씨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친필이라 전한다. 우복동의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 우복동천(牛腹洞天)일 것인데,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가 없으니 양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동천이라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화북에서 돌불꽃 이룬 속리산, 신비로운 청화산과 도장산, 그리고 민초들의 이상향인 우복동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은 다름 아닌 장암리에 있는 견훤산성이다. 산성 입구에서 20여 분만 걷는다면 아마 평생 다시 만나기 어려운 풍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다시 그립다.



/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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