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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와 판각체의 시대
한(漢)은 물론 ‘한나라’를 뜻한다. 자(字)는 ‘문자’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이 단어는 몽골족이 중원을 지배했던 사실을 기록한 『원사(元史)』에 맨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자신들의 언어에 맞는 서역의 표음문자를 본 떠 몽골문자를 만들었다. 그 후 원나라의 이름으로 중원을 지배하면서 자신들의 문자와 한족의 문자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민족적 자부심이 강했던 그들은 피지배층인 한족의 문자를 ‘한자’로 구분해 불렀는데, 그 속에는 의도적인 멸시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훗날 역사는 결국 다시 한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여기서 잠시 한자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고 가기로 하자.
송나라를 이어 중원에 들어선 원나라와 명나라를 거치면서 한자는 발전의 맥이 꺾이고 만다. 돌이켜 보면 한자는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모색을 통해 살아남은 치열한 생물이었다.
갑골문에서 비롯된 상상의 세계와 시각적 미감은 한자가 성숙한 상형문자로 발전할 수 있는 양분으로 작용했다. 그 양분을 풍족하게 이용하면서 발전한 것이 주나라 때의 청동기문자였다. 그림과 부호의 혼돈, 성숙과 미성숙의 섞임이 어지러웠지만 한자는 청동의 견고한 질감과 그림에 기댄 주술의 힘으로 중원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주나라 때 이루어진 상형과 주술의 결합은 결국 한자가 상형문자로 남아 있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 후 한자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지역적 특성을 통해 다양성을 기른다. 이른바 6국의 분화는 결론적으로는 한자 글꼴의 조형미를 오히려 북돋우는 역할을 하고 만 셈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만난 진시황, 이제 한자는 문화 조정자로서의 역할 대신 정치적 통합자의 기능을 부여받게 되었다. 버거운 듯 보였던 상형의 글꼴들은 이제 진시황의 정치권력에 기대어 중국을 통일해내는 일등공신으로 다시 태어난다. 통일된 상형의 글꼴 한자가 있는 한 어떤 방언의 유혹에도 중원은 절대 쪼개지지 않을 것이다. 중국 문화 일통(一統)의 기초가 놓인 것이다.
중원의 통일로 거대한 문화적 지평을 확보한 한자는 한나라가 마련한 유교 이데올로기를 통해 걸쭉한 정신적 자양분을 빨아들인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전 중원을 지배하게 된 순간 한자는 자연스레 지배층의 뇌리에 자리하면서 정신적 통치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자가 지니는 조용한 오만은 이렇게 태어났다. 또 예서의 속화를 통해 마련된 글꼴 내부의 안정 역시 한자가 이제 여간한 충격으로는 흔들리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한나라를 겪은 한자는 위진남북조라는 문화의 뒤섞임 현상 속에서 단련을 받는다. 남방의 문화와 북방의 문화, 불교, 도교가 뒤엉긴 중원에서도 망가지지 않았는데, 내면적인 부수나 부호들은 흩어지지도 뒤섞이지도 않았다. 혼란의 시기는 오히려 남북문화의 독특한 예술적 감성을 글꼴에 담아주는 행운의 시기로 변하고 말았다.
혹독한 내련(內煉)의 역사를 통과한 한자는 당나라에 들어서면서 이세민이라는 사내를 만난다. 그는 황제이자 예술가였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정돈시켜야 하는지 아는 문화적 CEO이기도 했다. 한자와 당 태종 이세민의 만남은 진시황 이후 다시 한 번 갖게 된 의미 있는 조우였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해서라는 표준 글꼴을 디자인했다. 예뻤다. 그보다 아름답게 부수와 부호들을 담을 수는 있는 그릇은 없었다. 중원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의 지식인들까지 그 글꼴에 넋을 잃었고, 드디어 한자가 동아시아의 표준 글꼴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당나라를 마지막으로 한자 글꼴의 변환은 이제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송나라의 지식인들은 그 사실을 절감했다. 한자의 글꼴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해서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당나라 해서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필획과 점의 비틀기를 통한 의(意), 즉 개성의 표출 정도가 전부였다. 1억 가까이 불어난 인구와 서적을 원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한자 글꼴이 불러일으킬 시각적 흥미는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한자가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이제 글꼴의 변형은 더 이상 시도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지난 세월 역사 속의 한자의 모습이었다. 이제 어쩌면 한자 글꼴의 전성시대는 가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한자는 진정 말 그 자체의 대변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문자란 단지 언어의 껍질에 불과해야 했다. 소리로서의 언어와 정신으로서의 의미를 빼버리고 나면 문자란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초라해야 했다. 하지만 한자의 글꼴은 지나친 대접을 받아왔다. 주술과 예술, 그리고 심지어 정치 영역까지 넘나들며 권위를 키워왔다. 그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송나라의 몰락과 함께.
많은 사가들이 지적하듯이 송의 자유스러운 지적 분위기가 결국은 나라의 쇄락을 불러온 것처럼, 그 시기의 한자 역시 글꼴의 개성 표출과 함께 상형으로서의 내적 영향력을 잃어갔다. 한자 발전의 맥이 꺾인 것이다.
한자가 상형문자로서의 내적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잃어 가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와 명나라를 거치면서였다. 원나라는 몽골이라는 이민족이 세운 국가였기에 한자에 대한 소원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에 한족의 정신을 다시 세운 정치집단이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문화 자산을 중국인들에게 선사했던 정치적 실체였다. 그럼에도 상형으로서의 한자의 존재는 그 시대에 더욱 옅어지고 만다. 역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역설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잠시 하려 한다.
역사의 물줄기 앞에서 개인은 무의미하다. 하물며 소낙비처럼 한번씩 훑고 지나가는 중원의 정치적 소용돌이 앞에선 개인은 더욱더 무의미했다. 송나라의 개성, 개인의 독특한 삶의 색상이었던 의(意)의 세계 역시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녹아버린 달팽이처럼.
개성의 다양한 표출은 결국 송나라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다. 중원은 역시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피학에 익숙한 중국인들은 강력한 통치가 자신들을 이끌어줄 때를 늘 태평성대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송나라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황허 이북에는 당시 세계 최고의 기병들이 있었다. 몽골족들의 말은 갈기가 살아 있었고 어디론가 달려야 했다.
1271년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중국명: 忽必烈-호필열)은 중원을 통일하며,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으로 불렀다. 중국의 역사학자 중에는 이 역사의 등장을 일컬어 중국 역사 속의 삽입곡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낯선 사람들끼리의 만남이었다.
몽골족들은 일찍부터 중원을 탐했었다. 특히 송나라가 있던 강남은 생선과 쌀의 고향이었다. 생선은 달고 쌀은 차질었다. 뒤늦게 확인했지만 사마천의 말이 맞았다. 강남은 참으로 어미지향(魚米之鄕)이었다. 하지만 몽골족들에게 한자는 낯설기만 했다.
몽골은 원래 선비족과 실위(室韋)족에서 성장한 종족들로 돌궐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Mongol’로 불렀다. 문자가 없던 민족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표기할 수 없었지만 중국인들은 그 발음을 듣고 망흘록(忙忽勒)으로 표기했다. 당시의 중국어로 읽어보면 ‘망후러’ 비슷하게 발음이 되는데 유사음을 표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발음을 들은 거란인들은 한자를 사용해서 몽고리(蒙古里)라고 표기했다(인류의 언어를 통해 살펴보면, H음과 K음은 모두 목구멍 근처에서 나는 소리로 서로 섞여 사용된다). 그리고 여진족들은 이 표기를 다시 자신들의 언어에 맞게 바꾸면서 끝의 리(里)를 제거했고, 두 개의 한자만을 사용 몽고(蒙古)라고 썼다.
한국 사회가 한동안 사용한 ‘몽고’라는 발음은 바로 여진족들이 남긴 표기를 중국인들이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몽골어 발음에 근거해 다시 몽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 몽골인들에게 한자는 발음이 어렵고 쓰기도 힘든 문자였다. 문자가 없었던 몽골족들에게 한자는 정신적 혹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 복잡한 막대들을 이리저리 붓으로 옮겨놓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몽골족들이 보기에 한족들은 그 생산성 없는 문자를 붙들고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그들은 결론도 없는 허상을 붙들고 갑론을박하기를 즐기고 있지 않는가.
쿠빌라이 칸은 이 생산성 없는 한족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결정했다. 바로 민족차별정책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는 중원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다음과 같이 네 부류로 나눈 뒤 서열을 정해주었다.
1. 몽고인(蒙古人-몽골인)
2. 색목인(色目人-중앙아시아 거주 민족)
3. 한인(漢人-북방에 거주 하던 중국인, 거란족, 여진족 등)
4. 남인(南人-남방 중국인)
이렇게 되고 보니 황허 유역의 중국인들은 세 번째, 양쯔 강 유역의 중국인들은 최하층이었다. 골격이 크고 허우대가 좋은 북방 중국인들이 키가 작고 몸집이 작은 남방 중국인들보다 좋게 평가된 이유는 아마도 자신들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있어 실망스러운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은 이번에는 직업을 다음과 같은 열 단계로 나누었다.
1. 관(官-중앙의 고위 관리)
2. 리(吏-지방의 하위 관리)
3. 승(僧-불교 승려)
4. 도(道-도교 도사)
5. 의(醫-의사)
6. 공(工-고급 기술자)
7. 장(匠-하급 기술자)
8. 창(娼-몸 파는 여성)
9. 유(儒-유교 지식인)
10. 개(丐-거지)
한나라 이후 유교 지식인들은 언제나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정치적, 문화적 핵심에 있던 이들이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내면에는 두터운 자긍심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런 이들이 하루아침에 몸 파는 여성보다 못한 지위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인종적 모멸감과 지적 낭패감은 바람결에 콧속을 파고드는 몽골인들의 젖비린내보다 더욱 역겨운 것이었다. 다른 종족들과의 충돌이야 역사 속에 늘 부침하던 것이라 위안한다 하더라도 이들의 지위와 함께 추락해버린 한자에 대한 충격은 작지 않았다.
새로 중원의 판세를 장악한 쿠빌라이 칸은 40여 년간 단 한 차례의 과거도 치루지 않았다. 아마도 치룰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일지도 모른다. 몽골인들은 한자를 몰랐고 때문에 그들에게는 과거 시험에 필요한 유교 경전은 그야말로 애물단지였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 몽골인들에게 그것은 차라리 용서할 수 없는 시간낭비처럼 보였다. 그 시간에 차라리 말을 달리며 늑대를 사냥하는 일이 훨씬 나아 보였다.
한자가 중원의 지적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받침대는 과거 제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대가 사라졌으니 배우 역시 짐을 꾸려야 했다.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중원에는 어쩌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다언어 사회가 펼쳐졌다. 즉 몽골족들은 몽골어를, 일부 종족은 돌궐어와 페르시아어를, 그리고 한족, 거란족, 여진족의 지식인들은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쿠빌라이 칸이 중원을 통일하기 직전, 그는 이미 중원의 언어와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던 몽골족들을 위해 라마불교의 승려이던 파스파(八思巴-팔사파)에게 새로운 몽골문자를 만들도록 했다.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던 당항, 거란, 여진의 세 문화가 사라져버린 이유가 어설프게 한자를 받아들인 데 있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문헌에 없으니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쿠빌라이 칸은 한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칭기즈칸이 만들었던 간단한 몽골 문자를 보완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1269년, 칸은 41개의 자모음으로 된 파스파 표음문자를 ‘몽고국서(蒙古國書)’라 이름하며 일찌감치 공식문자로 선포해 놓았다.
몽골족이 들어오기 전까지 중원의 유일한 문자는 한자였다. 문화적 독점 문자라고나 할까? 그런 한자가 이제는 주류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한자가 만들어진 이후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이 한자를 파스파 문자로 대체하려 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원나라가 들어서고 중원에서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자 의사소통 문제가 대두되었다. 즉 서로 다른 민족들끼리 언어와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과거 진시황이 맞닥뜨렸던 6국 문자의 차이와는 또 다른 차원의 난제였다. 이민족의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표현해야 하는 전혀 다른 체계를 지닌 우랄알타이어 계열의 표음문자가 정면으로 한자와 충돌하게 된 것이다.
중원을 통일한 영웅들이 만난 첫 번째 숨은 과제는 사실 언제나 한자였다. 집권자의 의지를 전달해야 할 매체였던 한자가 기왕이면 좀더 권위 있고 보기 좋은 글꼴을 갖추는 것이 나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진나라 진시황의 고민이 그랬고, 한나라 유방의 고민도 따지고 보면 그랬다.
당 태종이 심혈을 기울여 해결한 문제도 한자의 글꼴이었다. 성공한 시대의 영웅들은 모두 한자의 글꼴을 개혁하는 데 성공했다. 북방 세력에 밀려 글꼴 한번 국가적 차원에서 제대로 다루어보지 못한 송나라는 개인들의 개성과 함께 몰락해 버렸다. 중원을 통치하려는 정치세력들에게 있어서 한자는 그만큼 중요한 존재였다.
사실 한자는 중원에 있는 모든 지식인들의 최대 관심사였고, 각 글꼴들의 필획은 아주 구체적인 화젯거리였다. 지식인들의 관심을 한자의 글꼴만큼 집중적이고도 근본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모을 수 있는 소재는 사실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역대 황실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늘 국가 최고의 지낭(智囊: 지혜 주머니, Think tank)들을 투입해왔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한자 글꼴에 대한 문제를 언제나 한자 안에서 해결해왔다는 것이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한족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이민족이었다. 그는 한자 밖에서 한자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모든 문자를 발음에 근거해 (파스파 문자로) 바꿔 써라(譯寫一切文字-역사일체문자).”
쿠빌라이 칸이 한자 폐기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 그 명령은 한자를 버리라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즉 중국어의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파스파 표음문자로 표기하라는 것이었다. 중국 한자 역사상 최초로 제기된 한자의 표음화 정책이었다.
이 일이 제대로만 된다면 중원에서 한자가 사라지고 자음과 모음으로 된 표음문자만 남을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를 목도하고 있는 우리들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쿠빌라이 칸의 욕심이었다.
한자는 죽지 않았다. 문화의 힘은 언제나 정치의 그것보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법. 쿠빌라이 칸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몽골족의 문화적 역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죽자 원나라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죽고 난 뒤 39년 동안 무려 아홉 명의 황제가 부침을 하면서 원나라는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이 와중인 1315년, 인종 황제는 수십 년 만에 과거제도를 부활시킨다. 한족 지식인들의 도움 없이 중원을 통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행정은 역시 칼로만 될 일이 아니었다. 글을 다룰 수 있어야 사람을 다룰 수 있음을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기회는 몽골족에게 가지 않고 한자에게 왔다. 한자가 다시 한 번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당시 한족이 할 수 있는 벼슬은 하층 계급에 국한되어 있었다. 때문에 어설픈 글쟁이들은 쉽게 탐관오리가 되었고 생각이 깊은 지식인들은 염세적인 작가로 변신하였다. 원나라 때의 문학작품들이 신통치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원(馬致遠) 등의 작가들이 있지만 그들의 작품에는 우울과 허탈, 그리고 무력감에서 피어오른 염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의 용어를 섞어서 쓴 곡(曲), 즉 희곡작품들이 민초들의 삶과 어우러져 발전할 뿐 과거 전통 문인들이 보여주던 깊은 글맛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글꼴은 전반적으로 송나라 때의 것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림 1]에서 보듯이 전체적으로 활력을 잃고 있다. 글꼴의 균형은 물론 중심조차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이전 당나라, 송나라 때와의 글꼴과 비교하기 힘들만큼 허술한 모습이다. 물론 글꼴의 예술적 발전을 서예를 통해 발견하기도 힘들었던 시기가 원나라였다.
원나라는 동전 대신 지폐를 사용했다. 속도가 무게와 관계있음을 말 위에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역량은 문화적 활력의 기초 위에서 펼쳐지는 법, 글꼴의 초라함만큼이나 경제정책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림 1]에서 보듯이 국가기관에서 발행하는 지폐에 쓰인 한자의 모습이 자못 초라하기까지 하다.
가운데 한 줄로 내려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강남의 문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끼를 발휘하고 싶어 했다. 조맹부, 전형적인 강남의 문인.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원나라 정부가 결국엔 강남의 지식인들의 머리를 빌려 쓰게 되고 말 것’이라며 아들을 준비시켰다. 탁월한 혜안이었다. 결국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각고의 노력으로 준비, 마침내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얻게 된다. 출세에 대한 의지, 타고난 총명함, 그리고 서예 실력으로 그는 몽골족 천하에서도 살아남았다. 훗날 중국인들은 그를 한족의 자존심을 세운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글쎄. 어쨌든 그는 전서, 예서, 행서, 초서, 해서 모두에 뛰어났다.
[그림 2]에서 보듯이 그는 행서를 쓰면서도 일반적으로 맥을 중시하며 필획을 생략하는 행서의 기법과 달리 해서의 필획을 성실하게 소화해 쓰고 있다. 붓의 리듬감에서 왕희지류의 운필을 느끼게 하지만 강남의 지역 특성과 이민족 치하에서의 처세가 만들어낸 섬세함이 글꼴 곳곳에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조맹부 글씨의 특징이다. 전반적으로 여성적인 감성과 문인 특유의 섬세함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조맹부의 글씨가 높은 평가를 받는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술적 독창성보다는 역사성에 있다고 하겠다. 즉 한족의 서예 문화를 원나라가 펼쳐놓은 이민족 문화의 한복판을 아슬아슬하게 거치며 후대인 명나라로 이어주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글꼴들을 원나라 한자의 보편적 모습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