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인민들의 생활력은 칭찬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전쟁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의 GHQ 작전보고서에서 ‘북한은 더 이상 타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생산시설과 항만, 철도, 작은 저수지와 보에 이르기까지 폭격을 맞았다. 미군측 작전참모의 표현대로 ‘거의 석기시대로 돌아갈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땅을 자력으로 복구하고 그나마 ‘자급자족’하는 체계를 만든 것은 모두 북한의 인민들의 힘이었으며 이를 서방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폄하할 수는 없었다. 북한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이나 ‘수령 중심의 독재’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며, 평화통일을 위한 교류의 단계를 심화해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아량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을 조금이라도 좋게 표현하면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에 걸린다는 걸 알면서도 대동강변의 들판과 숲과 언덕들이 개발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여서 더욱 좋았다. (223)
‘신천학살’은 남한에서만 모르고 있을 뿐 전쟁 당시에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었고, 사회주의권 나라들은 물론이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법화된 서구에서도 조사단을 보내도 떠들썩했던 참사였다. 파블로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때 벌어진 나치와 파시스트의 만행을 <게르니카>라는 유명한 그림으로 고발했던 것처럼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묘사했던 것이 바로 신천학살이었다. (...)
미제학살 박물관을 만들어놓고 있는 북한의 공식 입장은, 미군이 진주하여 황해도 신천에서 양민을 대량 학살했는데 그 절반 이상이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해설원이 박물관을 세우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 시기 미제 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규모적인 인간 살육 만행을 감행함으로써 이십세기 식인종으로서의 야수적 본성을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내놓았습니다. 흡혈귀 신천지구 주둔 미군 사령관 해리슨 놈의 명령에 따라 감행된 신천 대중학살은 그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히틀러 도배들이 감행한 아우슈비츠의 유혈적 참화를 훨씬 능가하였습니다. 미제 침략자들은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잿가루 속에 파묻으라고 지껄이면서 오십이 일 동안에 신천군 주민의 사분지 일에 해당하는 삼만 오천삼백팔십삼 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전시물은 사진이었고 당시의 외신 보도나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잡다한 종류의 신발 무더기가 있었는데 우선 여자의 흰 고무신이 보였다. 그것은 두 짝이었고 하나는 중동이가 끊어져 있고 색깔도 누렇게 퇴색되어 있었다. 찌그러진 구두, 녹슨 못이 튀어나온 구두 뒤축들, 아이들의 작은 검정 고무신, 끈이 끊어진 낡은 검정 운동화 한 짝, 그리고 동그랗게 무슨 팔찌처럼 엉켜 있는 수많은 전화선과 굵은 철삿줄 등 누군가의 손발을 묶었던 것들은 그래서 더욱 사라진 몸의 부재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것들은 아마도 구덩이 속에서 유골들의 잔해와 함께 파냈을 것이다. 그것들을 보며 나는 같은 야만의 시대에 남쪽의 도처에서 이루어진 이승만 정부에 의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떠올렸는데, 세월이 흐른 뒤 시대가 바뀌면서 살아남은 유족들과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발굴된 학살자의 잔해를 사진으로 보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 신천학살에 처절한 분단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을 잘 규명해내는 것이 진정한 ‘북한 기행문’이라고 생각했다.
(...) 북을 떠나 일본에 가서 주위에 신천학살에 관해 물었는데 몇몇 학자는 그 사건이 ‘기독교인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참극’이라고 말해주었고 나중에 자료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거처를 미국으로 옮겼을 때 알게 된 신천 출신의 재미동포들 몇 사람에게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끼리’ 저지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석방된 뒤에 신천학살을 소설로 쓴 『손님』이 발표되자 그 교포 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내가 들었던 증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번복했으며 나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국내에서도 좌우가 동시에 나의 관점을 비난했다. 나는 증언을 번복한 그 교포의 가족이 아직도 북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의 피치 못할 사정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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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당시 이북에서 개신교도들은 도시 소시민 또는 중산층이었고 지방에서는 대개 중농 이상의 지주층이거나 적어도 자작농이었다. 사찰과 교회가 소유한 땅도 많았다. 북한 정권은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며 토지개혁을 실행해나갔다. 대지주와 기업가들은 전쟁 전에 남쪽으로 이주해 갔고 신천에서는 중농과 자작농이 많았다. 신천에서 머슴이나 일꾼이던 소작농들이 토지개혁의 주체가 되면서 갈등이 커졌다. 이들 마을의 하위계층들은 평양에 올라가 단기교육을 받고 귀향하여 토지 몰수에 앞장섰고 마을 유지들이었던 개신교인들과 적이 되었다. 미군정에 이어서 친일파를 사회의 주요 역량으로 끌어안은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기득권을 빼앗기고 내려온 계층의 청년들이 극우단체를 형성했다. 이들이 허술한 38선을 통해 고향에 드나들며 구질서를 회복하려는 활동을 하는 가운데 전쟁이 터진다. 1950년 9월 말에 서울이 수복되고 미군이 북진한다.
미군이 북진해오자 신천, 재령 등지의 기독교 청년들과 우익 청년들이 봉기했다. 처음에는 재령에서 북한군과 당원들이 기독교 인사들을 처형하고 후퇴했는데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치안 공백 지역이었던 신천에서 일어난 우익 청년들은 미처 후퇴하지 못한 공산주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보복적 살육을 시작했다. (...) 미군이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기보다는 묵인 방관하거나 무기와 탄약 지원까지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북한이 신천학살을 미군의 주도적 만행으로 치부하고 단죄하는 것은 우선 작전지휘권이 미군에 있었고, 북한 전역을 융단폭격으로 폐허화하고 이백만 명 이상을 살상했으며 핵무기 사용까지도 고려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할 것이다.
(...)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우익측이 주장하던 ‘어중이떠중이 머슴 건달 떠돌이’의 모임이라는 인민위원회가 북한에서 능률적인 행정기관이었다는 미국 정보기관의 보고를 예로 들고 있다. 북한 전역에서 하층민과 항일투사 다수가 인민위원회를 주도했다는 사실과 함께 미군정과 남한 정부의 주요 역량이 친일파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출발은 남과 북이 대조적이었다. (...)
나는 오 년간의 투옥 기간을 거치고 석방된 후 『손님』이라는 소설로 신천학살을 그려냈다. (...)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은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막아내고자 했던 근세의 조선 민중들이 이를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냈던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을 주인의 반대말인 ‘손님’으로 규정했다. 『손님』은 저러한 악몽의 오십여 일을 드러내는 한 판의 해원(解冤)굿이다. (24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