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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항해 108 : 합리성과 근대 사회
1. 서론 - 도구적 합리성의 등장
현대 사회는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소의 비용과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합리성과 효율(效率)성의 사회이다. 이런 합리성 혹은 효율성의 원리는 경제와 정치 그리고 사회 각 계층과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 아직 불합리한 사회적 요소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점차 우리도 그런 고도의 효율적인 사회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어느덧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잃고 점차 돈과 조직의 노예가 되어가는 비인간화(非人間化)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삶에 있어서 돈의 가치는 대단하다. 그러나 돈은 그 자체로서 목적은 결코 아니다. 돈은 삶에 필요한 수단이다. 우리가 삶의 목표로서 원하는 것은 건강이요, 행복이요, 사랑이다. 혹은 자아실현(自我實現)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은 이런 가치를 실현시키는 수단과 방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진다. 이를 흔히 황금만능주의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도구적 합리성 혹은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한다.
또한 도구적인 합리성은 합리성 개념을 전제한다. 근대사회는 합리성 (rationality) 혹은 합리화 (rationalization) 이라는 개념 위에 정립되었다.
최근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보는 것처럼 대학입시 자체를 인생 최고의 가치로 보고 맹목적으로 인기학과에 가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 역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즉 나의 꿈과 장래의 비전, 그리고 자아실현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2. 막스 베버의 합리화 개념
막스 베버 (Max Weber 1864부터~1920까지)는 독일의 사회학자이다. 그는 근대화에 관한 탁월한 해석을 통해 합리화, 관료제, 카리스마적 지배, 자본주의 형성에 대한 개신교의 영향 등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근대화에 대해서 상세한 연구를 했다. 베버는 근대화의 본질을 합리화(合理化)에 있다고 파악했다. 합리화란 원래 모든 일을 순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합리적인 능력을 흔히 이성(理性)이라고 한다. 이렇게 합리성과 이성은 서로 통하는 원리이다. 그러나 합리성 개념은 근대사회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응용된다. 베버는 근대의 합리화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서 보았다. 자연과학에서 합리화는 자연을 법칙적으로 보고 또 그 법칙을 수학적으로 나타낸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물리학의 공식인 옴(Ohm)의 법칙을 보자. 전류는 전압 나누기 저항이다. I = E ÷ R. 이처럼 근대과학은 자연현상을 수학화함으로써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수학화한다는 것은 주어진 현상을 양화(量化) quantification 한다는 것이다. 양화를 계량화라고 하기도 한다.
이 양화 혹은 계산가능성이야말로 근대과학의 엄청난 발전의 핵심이다.
막스 베버는 합리화를 “모든 사물을 원칙적으로는 계산을 통해서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라고 설명한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근대 자연과학이 자연현상을 계량화함으로써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면 근대의 시민사회는 합리화를 통한 시장경제 그리고 관료제라는 두 가지 원칙을 실현함으로써 인간 사회를 그 전에 몰랐던 놀라운 발전과 변화로 몰아 넣었다. 합리화야 말로 근대의 사장과 국가를 형성한 근본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베버는 또한 “우리 시대의 숙명은 합리화, 지성화, 탈주술화로 특징지워진다”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지성화란 우리가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주위 환경을 대해서 고대인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지만 그 기술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또는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면서도 엔진이나 전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지성화를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어느 때라도 그것을 배울 수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특히나 막스 베버 이후 130년이나 흘러간 현대에는 인터넷, 유튜브 등의 전달수단의 발전으로 인하여 각종 지식에의 접근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벌써 130년 전에 합리화와 지성화를 선포한 막스 베버의 통찰력은 놀랍다! 서구의 역사 발전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세계의 탈주술화 (Entzauberung der Welt)란 인간은 더 이상 미개인들처럼 세상에 신비적인 힘이나 귀신 혹은 정령 등의 존재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미개인들은 정령이나 귀신 등의 힘을 빌기 위해서 주술적인 수단이나 제사, 공양 등에 의지했으나 이제는 기술적인 수단과 계산이 이를 대체한다.
그러나 현대인들도 아직 점(占)을 치거나 “파묘”(破墓)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귀신을 섬기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이는 아직 사람들이 완전히 탈주술화가 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본질을 찾고 그 법칙을 인식하여 현상에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탈주술화이다.
세계의 탈주술화란 초자연적인 힘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신화와 전설의 의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신화에 대한 근대인들의 무시는 최근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다.
3. 베버의 관료제 개념
베버는 관료제 (bureaucracy)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본 관료제의 특징은 간단히 말해서 법과 규칙에 근거한 위계질서의 조직을 말한다. 이는 국가조직같은 행정조직 기업과 같은 민간조직에 모두 응용된다.
이 근대의 관료제의 역사적 의미는 종래의 가신(家臣)제도와 비교할 때 현격한 격차를 드러낸다. 봉건제도 하의 가신제도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인격적 (personal)이라는 것이다. 이 때 인격적이란 단지 개인적 혹은 사적(私的)이라는 말이다. 오늘날의 전문적, 직업적 공무원 제도와 비교하면 중세의 가신제도가 얼마나 임의적인지를 알 수 있다.
관료제도 하의 관료(공무원)들의 모든 활동 하나 하나는 철저하게 법과 규칙에 의거한다. 그리고 공무원들의 권한과 책임 역시 법에 의해 한정된다.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할 때도 법에 의해서 주어진 규정과 권한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처럼 관료(공무원)는 비당파적으로 행정을 하여야 하며 “분노도 편파도 없이” 그 직무를 처리 하여야 한다. 그는 정치인과 달이 주어진 책무 외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관리들의 태도가 반드시 이렇지만은 않다. 소위 갑질이나 불법적 혹은 비윤리적인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아직 관료주의 문화가 제대로 정착이 안 된 것이다.
관료제화 현상은 군대, 자치단체, 교회 그리고 사기업체 등에서도 등장하며 보편적인 관료제화 라는 무미건조한 사태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베버는 기술하였다. 베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관료제가 근대 사회의 양대 지주라고 한다. 그러나 베버 사후 공산주의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시장 경제를 부정하고 국가 경제를 운영하였고 아직도 북한은 이런 상태이다. 시장 경제의 부정은 근대 사회의 부정인 것이다.
“근대 국가에서 지배가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 의회의 연설 속에서도 아니고 군주의 선언 속에서도 아니고, 일상생활에서의 행정의 집행 속에서이기 때문에 그 지배는 불가피하게 관료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으며 (· · ·) 중세 이래의 자본주의에로의 진전이 경제의 근대화의 명백한 척도인 것과 마찬 가지로 관료주의에로의 진전이 국가의 근대화의 명백한 척도이다”. (막스 베버)
이는 근대 사회와 국가의 힘이 정치나 의회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제도, 즉 관료제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베버가 입법기관보다 행정과 관료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그 당시 독일의 의회제도가 제대로 작동이 안 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도 볼 수 있다. 의회제도는 독재사회나 군주국이 아니라 민주국에서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4. 루카치의 사물화 개념
구(舊) 소련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orthodox marxism)는 마르크스의 사상 중에서 노동자가 자본가와 투쟁해서 노동자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중심 교리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 대비되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westerm marxism)은 마르크스의 청년기의 저작 “경제 철학 수고” 에 나타난 소외 개념을 마르크스의 중심 사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서구 마르크시즘의 대표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이다. 이런 인간의 소외를 자본주의의 핵심적 모순으로 보는 서구 마르크시즘은 루카치(Georg Lukacs)의 “역사와 계급의식” (1923년)에서 나오는 물화(物化) 혹은 사물화 (reification)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물화(事物化)의 뜻은 자본주의 내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그 고유한 주체성을 상실하고 물질화, 타락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는 인간의 가치는 물질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연봉이 5천만원이고 너는 1억 원 이라면 너는 나보다 2배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사회에서는 인간의 특기나 개성, 인격, 도덕성 등은 모두 돈으로 환산되어야 한다. 이런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가 루카치가 말하는 사물화 (reification)현상들이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의 상품물신화 개념을 수용한다. 마르크스의 상품물신화란 말은 상품을 숭배하거나 찬미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 경제하에서는 상품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간주된다는 것이다. 상품 특히 공산품은 본래 무생물이고 따라서 생명이 없다. 그러나 시장경제 하의 사람들은 모두 상품 자체가 현금 가치를 가지고 있는 생생한 존재라고 본다. 상품은 원래 그 상품을 만든 노동자의 피와 땀이 서린 작품이다. 즉 상품은 생산자들의 상호관계를 표현한다. 즉 농부와 어부가 서로의 생산물을 교환할 때 일정한 교환의 비율이 생긴다. 그 비율의 사회적 표현이 값이다. 이처럼 가격은 원래 생산자들 사이의 필요성을 반영하는 하나의 표시였다. 그러나 교환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하에서는 상품속에 숨어 있는 생산자들은 보이지 않고 상품 자체가 스스로의 값을 가지고 다른 상품과 교환, 거래되는 인상을 준다. 아니 그게 현실이다. 누군가 “경제는 유통이다” 라는 말을 했다. 이런 유통과 교환 가운데 생산자는 더 이상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물론 그도 이익을 취하겠지만, 하여간에 시장에서는 생산자는 사라지고 물건과 물건의 교환만이 판을 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물신화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사람보다는 상품이 더 중요한 사회를 말한다.
루카치는 사람들 간의 관계 (relation of persons)가 사물들 간의 관계 (relation of things)로 위장, 은폐되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사물화라고 불렀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 그래서 이로부터 일종의 유령적 대상성 (gespenstige Geganstandlichkeit)이 성립되며 이것이 대상성의 근본적 지반인 인간들의 관계를 겉보기에는 합리적인 듯이 보이는 엄격한 자기법칙성으로서 은폐한다는 사실을 사물화 (Verdinglichung)라고 한다.
여기서 유령적 대상성은 시장에서 결정된 상품의 가격이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엄격한 자기법칙성이란 달리 말해 시장의 법칙, 곧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물화는 결국 시장의 가격체계 이외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도, 인간의 노동력도, 예술적 기교도 모든 것이 값이라는 한 가지 기호로 해석이 된다. 즉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이다. 이 말은 황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 보다는 물질, 곧 경제가 모든 존재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루카치는 사물화가 합리화라고 한다. 즉 막스 베버가 말하는 합리화 역시 인간의 관계를 기계적, 수학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합리화나 사물화나 둘 다 비인격적인 것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단지 그 비인격적인 지배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장점은 있다.
어려워 보이는 루카치의 사물화의 실제적인 예를 들자면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볼 수 있는 “돈이야 사랑이냐?” 하는 논리를 들 수 있다. 즉 돈을 얻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도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또는 미국의 폭력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논리 즉 돈을 벌기 위하여 마약을 팔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 등이다. 영화에서 흔히 듣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즉 사람을 죽이면서도 “아무런 감정은 없다. 단지 사업이다” 라는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물 관계로 타락하는 많은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5.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도구적 합리성 비판
① 오디세이아 신화
소위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불리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사상은 양자의 공저(共著)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타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란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마르크시즘의 일종으로 네오 마르크시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계몽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계몽주의 사상은 간단히 말해서 과학적인 지식만을 이성적인 것으로 높게 평가한다. 그 반면 전통적인 가치관인 종교를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상이다. 종교는 미신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천년 이상 서양의 정신을 지배해온 기독교 신앙이 많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계몽주의를 비판한다. 이들의 유명한 이야기가 오디세이아 신화의 비판이다. 호머가 쓴 오디세이아 는 그리이스의 장군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다시 고국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18세기 근대 계몽 이성의 도구적 사용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이성이 신화와 자연에서 인간을 해방시켰음에도 인류가 왜 다시 야만의 상태로 전락했느냐는 것이다. 이성은 간 데 없고 왜 그것이 태어난 자리에서 피냄새가 나느냐는 물음이다. 이런 물음을 붙잡고 두 철학자는 고대의 폭력과 파시스트의 폭력이 공유한 신화를 해체하고자 했다. 이성의 도구적 전락과 착취, 타자화의 문제 등을 파고든 것이다. (한겨레 신문)
호머의 위대한 서사시 오디세이아 중에서 그 주인공인 “오디세우스” 는 바다에서 몸의 반은 물고기이고 반은 사람인 바다의 요정 사이렌 (혹은 세이렌)을 만난다. 사이렌은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들으면 유혹에 이끌려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이야기 중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유혹을 뿌리치면서도 그 음악은 듣고 싶어하여 자신을 돛대에 묶게 하고 바다의 요정 사이렌의 노래를 듣는다.
저자는 이런 오디세우스의 행동을 계몽주의에 비유한다. 즉 자신을 묶는 것을 자신의 자연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것으로 본다. 또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에게 귀를 밀랍으로 봉하고는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갈 것을 명령한다. 선원들 역시 자신의 자연적 감성을 억압당하고 노젓는 일만 강요 당한다.
이처럼 계몽이란 자연에 대한 지배를 말하며, 또 그런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오디세우스의 이런 행동을 아주 위대하게 평가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성이 신화와 자연에서 인간을 해방시켰음에도 인류가 다시 야만의 상태로 전락했다” 는 방식으로 이해를 한다.
② 신화적 사유와 미메시스
이런 한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물화(物化)된 자본주의적 사회 혹은 나찌스와 같은 폭력적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데 철학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베버의 합리성을 비판하고 또 루카치의 물화 현상을 비판한다. 이를 위한 도구가 예술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화와 정령숭배(애니미즘)의 긍정적인 요소를 부각한다. 계몽이 자연대상을 도구적, 수단적으로 파악하는 데 비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애니미즘을 대상에 순응하고 동화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이들은 이런 대상에 순응하는 원시적 사고방식을 미메시스 (mimesis)라고 본다.
미메시스란 흉내 혹은 모방을 말한다. 미메시스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자연대상을 구체적으로 흉내낸다. 그들은 예술의 본질을 모방 (미메세스)라고 본다. 이는 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美學)을 본받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 (詩學)에서 시(詩)를 일종의 모방(imitation)이라고 본다.
지금도 예술의 본질이 모방이냐? 창조냐? 하는 문제는 숙제로 남아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현실을 기본적으로 위에서 말한 사물화의 측면에서 보고 있다. 사물화란 달리 말하면 이성의 지배이다. 그런데 역사적 현실에서 이성은 간 데 없고 왜 그것이 태어난 자리에서 피냄새가 나느냐는 것이다.
즉 합리화 혹은 물화(物化) 때문에 폭력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사물화된 현실을 각인(刻印)시키고 비판하는 것이 모방 (미메세스) 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과학문명에 대해서 비판적인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예술을 통해서 사회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들은 창조적 예술 혹은 예술의 자율성은 실은 현실의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화적 사유, 즉 미메시스를 선택한다. 미메시스는 대상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이는 대상의 특이성과 개체성을 존중한다. 이를 통해서 합리화와 물화된 현실을 치유하기를 원한다.
근대의 과학적 이성 혹은 개념적 이성은 자연에서 주술적이고 신비한 힘을 제거하고 그것을 기술적 수단과 계산에 의해서 지배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근대의 과학적 이성으 가령 케플러의 “물질이 있는 곳에 기하학이 있다”와 같은 자연에 대한 수학적인 파악에서 나타난다. 이런 사고방식은 물질의 개체성은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런 근대적, 과학적 이성을 도구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도구적 합리성은 대상을 추상적, 양적으로 파악한다. 즉 대상의 고유한 질(質) 혹은 성질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다. 이들의 도구적 합리성 개념은 막스 베버의 지성화 개념과 일치한다. 즉 세계는 양적 관계, 수적 관계로 법칙화되며, 그런 면에서 인간 역시 주체성과 개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양화한다. 다시 말해서 물질화, 자본화된다. 루카치의 말처럼 인격적 관계는 사물적 관계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근대과학적 이성, 계몽적 이성, 도구적 이성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 인간을 소외시키고 비인간화하며 자연을 파괴한다. 이런 것이 근대적 이성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보들레르의 시, 카프카의 소설,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진정한 현대 예술이라 주장한다. 말하자면, 보들레르의 시는 사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경험에 대한 미메시스, 카프카 문학은 전체주의적 지배 체제에 대한 미메시스, 베케트의 극은 '세계의 물화'에 대한 미메시스라는 것이다. (인용)
6. 푸코의 근대 권력비판
근대적 이성 혹은 합리성 비판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이론가가 푸코이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 1929에서 1984)의 문명비판과 근대 합리성의 비판이라는 주제는 아도르노와 유사하지만 그의 분석은 구체적이며 역사적이다. 즉 푸코는 근대적 이성 혹은 합리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감옥이나 병원 혹은 학교 등의 역사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베이컨이나 로크 혹은 루소 등의 근대 사상가들과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를 닦았다. 그들은 또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인류의 진보와 물적인 풍요를 약속했다.
푸코는 또한 미드나 라캉처럼 개인의 자아정체성과 주체성의 형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미드는 자아정체성(self-identity)이 타자와 사회의 규범을 매개로 해서 후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탐구했고 라캉 역시 거울단계(mirror stage)이론을 통해서 어린이의 자아형성이 상상계와 상징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짐을 밝혔다.
푸코 역시 근대적 개인과 주체성의 문제를 거론한다. 근대적 주체성은 중세의 노예적 지성과 달리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기 결정 등의 속성이 있다. 물론 이런 원리는 지금도 타당한 인간의 본성이고 앞으로도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인간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인격의 존엄성을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생존 경쟁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들은 자신의 본성과 자유를 미련없이 포기하고 사회 조직에 적응한다.
경제와 시장이라는 합리적 기구들은 개인의 삶을 지배한다. 푸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조직들을 권력기구로 본다. 이들은 개인을 그의 법규와 규칙을 통해서 순치(馴致)시킨다. 푸코는 민주주의와 법치(法治)라는 근대적 권력의 합리성을 비판한다. 푸코는 법치, 즉 법과 계약에 의해서 인간이 자율성을 결정하는 민주주의 원리는 한갓 형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작동돠는 권력은 소위 규율권력이라고 하는데 그런 규율권력이 개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여 결국 무기력하고 순응적인 인간들을 양산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푸코의 인간학은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나 타자지향적 인간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푸코의 근본 통찰은 합리적인 근대의 민주주의적인 통치와 법치주의 등이 사실은 불합리한 권력, 즉 규율권력에 의해 대체된다고 한다. 이 규율권력은 다른 말로 미시권력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의 신체를 길들이는 잘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이 규율 혹은 규율권력은 교묘하게 인간을 조종하고 감시한다. 왜냐하면 규율 (discipline)은 문자 그대로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규율은 지식이다.그리고 규율은 다른 많은 지식의 체계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심리학이나 교육학 혹은 정신의학 등은 대중의 미시적 통치를 위해서 필요한 학문들이다.
모든 학문과 지식의 종류들이 인간의 지배를 위해서 만들어지거나 또는 그를 위해서 봉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학문과 지식의 체계들이 인간의 미시적 지배를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독재자 빅 브라더가 텔레스크린을 통해서 모든 국민들의 사생활을 끊임없이 엿본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러나 푸코의 감시의 사회는 미시권력 즉, 규율권력을 통해서 그런 텔레스크린을 인간의 정신에 내면화시키는 고도의 효율적인 사회이다. 물론 외부적인 감시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식과 훈련 혹은 교육을 통해서 길들이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말했지만 푸코는 “힘이 아는 것이다” 혹은 “권력이 지식이다” 라고 한다. 권력이 물리력이나 폭력 같은 불합리한 강제가 아니라 지식과 규범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6-1. 감시와 처벌
푸코의 역작 “감시와 처벌” (1975)은 근대의 형벌제도의 역사에 대한 책인데, 여기서 그는 권력합리성이 어떻게 개인들을 규정하고 형성하는지를 감옥의 역사를 통해서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다.
근대적 권력은 더 이상 절대군주의 면모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는 독재자나 폭군들이 민중을 억압하고 유린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근대의 합리적 권력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푸코는 감옥, 군대, 병원 그리고 학교 등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개인을 지배하고 만드는 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미시권력(micro-pouvoir)이라고 하는 인간의 육체를 길들이는 규율(discipline)이다. 규울은 흔히 학교나 공장 혹은 작업장 같은 곳에서 필요한 자체 내부의 규칙, 규정을 말한다. 규율은 육체에 작용한다. 학교라면 교칙이 곧 규율이다. 예를 들어 학교의 시간표를 보면 아침 8시 자율학습, 9시 1교시, · · · 12시 점심식사, 이런 방식으로 시간계획에 따라서 학생들을 훈육한다. 이런 학칙과 시간표는 학생들의 육체에 작용한다. 그런 가운데 학생들은 사회적 조직인으로 훈련이 되는 것이다. 이는 물론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겠지만 문제는 이런 미시권력을 통해서 개인의 사회화가 일어나고 개인의 자율적 시간관리는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성장하면서 수없이 듣는 훈련, 훈육 같은 개념은 푸코가 볼 때는 권력의 규율장치인 셈이다. 이처럼 권력은 개인을 억누르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학습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개인을 육성한다.
이와 같이 규율권력은 개인을 권력의 피라미드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기술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세부적 규제, 연습, 훈련, 시간사용, 평가, 시험 기록 등을 이용한다. 이런 미시권력을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는 효율적으로 길들여진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개인이고 주체성이다. 푸코는 근대가 약속한 자유의 이상은 한갓 환상이라는 것을 밝힌다.
따라서 근대인이 내세운 주체성은 실은 규율권력에 길들여진 개인이다. 이들은 다시 생산기계로, 생산의 원료로 혹은 생산물로서 근대세계를 구성하는 벽돌로 소비된다.
6-2. 판옵티콘의 세계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감옥의 역사와 형벌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법과 제도 그리고 규율 등이 어떻게 지배와 감시를 육체화하고 내변화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 하나 알 필요가 있는 것이 소위 판옵티콘(Panoptikon)이라는 일망(一望) 감시의 감옥시설이다. 이 판옵티콘이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Bentham)이 설계한 원형의 감옥시설이다. 그 원리는 이렇다 :
“주위는 원형의 건물이 에워싸고 있고, 그 중심에는 탑이 하나 있다. 탑에는 원형 건물 안쪽으로 향해 있는 여러 개의 큰 창문들이 뚫려 있다. 주위의 건물은 독방으로 나누어져 있고, 독방 하나하나는 건물의 앞면에서부터 뒷면까지 내부의 공간을 모두 차지한다. 독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안쪽을 향하여 탑의 창문에 대응하는 위치에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에 면해 있어서 이를 통하여 빛이 독방의 구석구석 스며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탑 속에는 감시원을 한 명 배치하고, 각 독방 안에는 광인이나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 등 누구든지 한 사람씩 감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309쪽)
벤담이 설계한 판옵티콘은 감시자와 죄수의 거의 1대1의 대응을 보여준다. 그런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바로 이 시설이다. 죄수는 감시자가 24시간 자신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다”. (312쪽)
판옵티콘이 암시하는 것은 권력의 비인격성(非人格性)과 자동성(自動性)이다. 감시자의 자리에 누가 오든지 상관이 없다. 이런 기계적인 구조와 메커니즘이 개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통해서 “죄인에게는 선행을, 광인에게는 안정을, 노동자에게는 노동을, 학생에게는 열정을, 병자에게는 처방의 엄수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그들을 사회가 바라는 대로 시키기 위하여 강제나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푸코는 현대의 지식정보사회를 일망 감시(판옵티콘) 사회라고 규정한다.
“현대 사회는 거창한 구경거리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이다. 여러 가지 이미지의 허울 속에서 우리들의 신체는 심층적인 공격의 대상이 된다. 대대적인 교환의 추상화한 체계 뒤에는 유용한 힘을 얻기 위한 정밀하고 구체적인 훈역이 계속되며, 정보 소통의 경로는 지식의 축적과 집중화의 지주가 되고, 기호들의 작용은 권력이 어느 곳이 닻을 내려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 · ·)
우리는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 스스로가 이끌 어 가는 권력의 효과에 포위된 채 일망 감시장치 속에 있다. (334쪽)
6-3. 법과 규율
근대 시민사회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며 또 국민의 동의에 의해서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푸코의 규율의 영역이라는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근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규율은 법의 하위의 체계이다. 그러나 법은 규율의 권력을 통해서 비로소 작동된다.
법은 인간을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본다. 오늘날 인간의 기본권은 헌법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푸코의 규율권력은 이런 법의 지배를 비웃고 있다. 규율은 법보다 하위에 있지만 사실상 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푸코의 주장에 우리는 100%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의 사회의 각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규율의 지배를 무시할 수 없다. 덧붙여 오늘날 각종 감시장치 – 예를 들어 CCTV- 들은 푸코가 말하는 감시사회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7. 하버마스 – 이성과 합리성의 새로운 정초
우리는 위에서 근대, 현대 사회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거의 부정적으로만 봐왔다. 이는 현대 사회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주지 못하고 그 반대로 구속과 불행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해방과 자유의 실현을 목적으로 추진된 계몽의 기획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리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록 서구 사회가 합리성과 과학, 기술의 덕택으로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고 있지만, 그 같은 풍요의 이면에는 수많은 근대화의 병리가 자리 잡고 있다.
비인간적이고 소외된 삶의 확산과 전(全)지구적인 생태학적 위기의 증대 등이 그것이다. 이는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 성숙하고 자율적인 인간의 추구라는 계몽의 이념과 배치되는 것이다. 계몽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화의 과업은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도구적 합리성의 비판이나 푸코의 규율권력 비판이 보여주는 것처럼 새로운 억압체계 속에 인간을 감금함으로써, 진보와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보를 초래하였으며 자유의 실현 대신에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의 지배, 관료적으로 조직된 행정의 지배를 야기했을 뿐이다.
계몽과 근대화의 성과에 대해서 막스 베버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다른 대안없이 체념적으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해 왔다. 앞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루카치나 아도르노 그리고 푸코의 경우 이들의 문제의식은 좋으나 결론이 없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막스 베버는 자신이 발견한 근대의 관료주의를 “강철같은 외피”에 비교했다. 강철같은 외피 속에 사는 사람은 “정신없는 전문가”요 “심정없는 향락인”이라고 근대인을 비꼬았다.
이런 선배들의 체념적이고 회의적인 결론에 대항해서 하버마스는 하나의 새로운 이성, 합리적 대안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이성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세상은 다 썩었다” 혹은 “모두 미쳤어”라고 인식하거나 외쳐봤자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푸코와 동조하여 “근대인들은 규율권력의 노예가 되어 자율성과 주체성을 상실했다” 라는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문제는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So what?”이라는 물음에 대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하버마스(J. Habermas, 1929~)의 사상은 근대화의 숱한 부작용과 모순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치유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새 희망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근대 비판가들이 전반적으로 이성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비이성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이성과 계몽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하버마스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이성, 계몽, 합리성 등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본다. 달리 말하면 하버마스는 “이성이 전부 타락한 것이 아니다” 라는 부분적인 부정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성과 계몽 역시 전부 나쁜 것이 아니다. 즉 이성은 어느 부분 타락했고 또 합리성의 어느 부분이 비인간적이고 소외를 초래한다는 식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그는 인간성(이성)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 일부가 타락했다고 본다. 쉽게 말하면 도구적 이성은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이성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도구적 이성 혹은 도구적 합리성이 전체가 되어 버린 것이 근대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도구적 이성의 자리를 잡아주고 상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하버마스는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분리 및 상호보완을 주장한다. 베버, 아도르노 그리고 푸코의 잘못은 본래 포괄적인 합리성 개념을 오직 도구적 합리성으로만 본 것이다. 즉 그들은 하버마스가 본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더 중요한 차원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7-1. 체계와 생활세계
하버마스에 의하면 생활세계(Lebenswelt, life-world)란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삶이 영위되는 공동세계이다. 여기서는 언어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나와 너를 이어주는 언어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communicative rationality) 의 수단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에 의존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인간관계가 주위 여건에 따라서 때로 굴절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상호평등하며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체계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각종 시스템을 말한다. 예전에는 생활세계가 체계와 분리되지 않았었다. 달리 말하면 일과 놀이가 하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생존의 체계와 문화적인 세계는 점점 분리되고 전자가 후자를 완전히 잠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하버마스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부른다. 즉 물질적, 경제적, 산업적인 요소가 인간의 개성, 인격 그리고 사회성을 완전히 지배, 조종하는 경우이다. (물질만능주의)
하버마스는 근대의 (생존) 체계는 물질적 생산을 담당하는 경제와 그것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 조직된 행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체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바로 막스 베버가 말한 “합리화”이고 “관료제”이다. 이 부분은 의사소통보다는 계산과 명령을 통해서 집행된다. 예를 들어 시장 경제를 보자. 여기서는 오직 최소비용과 최대효과라는 계산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따라서 체계의 영역에서는 진정한 대화 혹은 인격적인 대화는 불필요하다. 대화 대신 계산과 예측 그리고 결정이 중요하다. 성과는 다시 수치에 의해서 표현된다. 체계는 따라서 냉정한 합리성의 세계이며 생존경쟁의 정글이다. 여기서는 삶의 가치나 의미는 묻지 않는다. 즉 삶의 목적은 명백하다고 전제된다. 돈 혹은 명예 등이 자본주의적 여러 가치들이다.
7-2.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하버마스가 구분한 인간의 삶의 두 영역 즉, 체계와 생활세계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상호작용하는 두 개의 영역이다. 하버마스는 체계를 지배하는 합리성을 도구적 합리성 혹은 목적합리성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인간 생활의 물질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합리성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시장과 경제적 삶을 규정하는 합리성이다. 이런 합리성은 다시 말해서 수단적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합리성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주어진 목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합리성이다.
여기에 비해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란 대화를 통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다시 정초하는 합리성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현대로 올수록 대중들은 정치에서 소외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술적, 경제적, 행정적 생활이 너무나 전문화되기 때문에 대중들은 스스로 사태를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고 지도자나 전문가들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면에서 대중들의 정치 참여는 점차 줄어든다.
그리고 인간적 생활은 점차 생활세계를 떠나 체계 즉 물질적, 생산적 체계의 도구가 되어간다. 예를 들면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사랑마저도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그리고 인격적 교류를 위해서 우리는 생활세계를 다시 복원시켜야 한다. 이 생활세계에도 이성과 합리성이 있다. 이런 생활세계적, 인격적 합리성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고 부른다. 물론 삶의 세계에는 감정과 정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생활세계적 이성이란 감정과 정서를 포함한 인간적 합리성이다. 이 때 감정과 정서라고 해도 그것이 불합리해서는 안 된다. 즉, 내 기분되로 타인에게 화를 낸다든지, 빼린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중요한 기능은 대화를 통해서 사회적 규범을 정초하는 것이다. 대화 참여자들은 주제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동원하여 자기 주장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이를 상호 언어를 통해서 확인하고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생활세계적 합리성 혹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서 그간 전문가들에게 일임되었던 공동체적 결정을 민중들의 자치로 다시 부활시킬 수 있다.
8. 리처의 맥도날드화
조지 리처(George Ritzer)는 “사회의 맥도날드화” (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에서 합리화와 그것이 가져오는 불합리성에 대한 막스 베버의 이론을 이용하여 미국 사회의 소비자 문화를 분석하고 있다. 리처는 패스트푸드는 물론이고 의료, 교육, 여가, 스포츠, 영화, 기업, 노동, 섹스, 쇼핑, 마케팅, 출생,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합리화 현상과 그것이 가져오는 불합리성을 지적, 분석하고 있다.
리처는 맥도날드화의 특성으로 효율성 (efficiency), 계산 가능성 (calculability), 예측가능성 (predictability), 통제 (control)를 들고 있다.
① 효율성 : 바쁘고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가장 빠른 서비스로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원리를 말한다.
② 계산 가능성 : 판매되는 제품과 제공되는 서비스를 고객들이 계산하여 득이 된다고 믿게 하는 것을 말한다.
③ 예측 가능성 : 그들의 제품과 서비스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할 것이라는 확신을 제공한다.
④ 통제 : 규격화된 메뉴, 제한된 소스 종류, 줄서기하는 주문 카운터, 딱딱하고 불편한 의지, 빨리 먹고 나가야 하는 분위기, 지정된 퇴식구와 쓰레기통 등 고도의 통제 구도 하에서 고객들은 서비스를 받게 된다.
이에 반해 리처는 맥도날드화의 부정적인 측면 즉 합리성의 불합리성 (irrationality of rationality)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 합리성의 불합리성은 맥도날드화의 다섯 번째 특성으로 본다. 맥도날드의 합리적 체계는 다른 면에서 볼 때 불합리하다. 이는 도구적 합리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리처가 지적하는 맥도날드의 불합리성은 다음과 같다.
①고객과 종업원의 비인간화, 가정의 붕괴, 다양성의 쇠퇴
②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거대한 공장과 같은 분위기에 놓여 있다며 고등교육조차 육류처리를 닮아감을 지적하고 있다.
리처는 소비는 물론 소비자와 소비자 문화의 동질화에 대해 말하며, 이를 막기 위한 이성적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① 때에 따라서는 맥도날드화한 비인간적인 체계의 규칙을 위반해야 한다.
② 맥도날드화된 체계를 일상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용하지 않도롤 해야 한다. 최근의 연구로 알려진 것처럼 패스트푸드는 비만과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8-1. 안티패스트푸드 운동
맥도날드를 비롯한 각종 패스트푸드 (fast food)들이 현대의 식문화(食文化)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패스트푸드의 범람은 고유한 먹거리 문화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고 세계의 문화를 획일화하는 위험성이 있다. 그 외에도 지나치게 편리함과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패스트푸드 문화는 화학적, 인공적 감미료를 많이 사용하여 고객의 입맛을 자극하고 지방질과 당분을 많이 투입하여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가 나왔다. 특히 어린이들이 맥도날드를 자주 먹어 습관화가 되면 이는 비만과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된다. 또 맥도날드는 종업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한다는 비난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안티 패스트푸드 운동 혹은 안티 맥도날드 운동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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