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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교회(출38:21~23)
교회가 왜 소중할까요? 여러 신학적인 설명과 이유가 있겠지만, 왕상 8:29절이 큰 이유라 생각해요.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말씀하시죠.
하나님께서 “내 이름이 성전에 있으리라” 하셨는데,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고, 존재가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눈이 주야로 주목하시는 곳이고, 향해서만 기도해도 들으시는 곳이 성전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다닌다는 것, 내 교회가 있다는 것,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횡재한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이런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교회를 잘 가꾸어야 해요. 꽃밭이 있어요. 그냥 두면, 잡초 밭 돼요. 교회도 그래요. 가꾸지 않으면 세상 밭이 돼요. 교회다워지도록 가꾸어야 해요.
살아보니까요... “무엇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무엇 다워지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남편 되는 것”은 쉬워요. 결혼하면 돼요. 그러나 “남편다워지는 것”은 너무 어려워요. “아버지 되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아버지다워지는 것”은 너무 어려워요. “교인 되는 것”은 쉬워요. 교회가면 다 환영해요. 그러나 “교인다워지는 것”은 굉장히 어렵죠. “목사 되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목사다워지는 것”은 어려워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교회 세우는 것”은 쉬워요. 몇 사람이 뜻 맞춰서 교회 간판만 걸면 돼요. 그러나 “교회다워지는 것”은 어려워요. ‘어떻게 교회다워질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해요. 내가 다니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서, 교회를 나와도 하나님의 존재를 못 만나고, 하나님의 주목을 못 받고, 기도응답이 되지 않으면 안타까운 일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교회다워질까?“ 마땅히 고민해야 해요.
저는 출애굽 공동체가 세웠던 성막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고 싶어요. 성막이 교회의 모형이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 생활을 할 초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어요.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한 후에, 왕국이 세워지고 나서 안정이 된 후에 명령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광야에서 성막 건축을 명하세요. 왜 그랬을까요?그만큼 중요하고 급박했기 때문이겠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성막을 짓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을 소개해요. 이다말, 브살렐, 오홀리압, 성막 건축 삼총사죠. 이들에게서 우리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데 필요한,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얻게 돼요.
첫째,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이것을 “하나님과 어깨동무하는 교회”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의 모든 것을 만들었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솜 씨 좋은 장인이었어요. 그런데 출 35:30~31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브살렐의 재능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혀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36:1에서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할 것이니라” 말씀하세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를 세울 때 일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거예요.
“함께”라는 말에 “어깨동무”가 생각나죠. 그들의 몸에, 그들의 마음에, 그들의 손과 어깨에, 하나님의 손을 얹어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어깨동무 해 주신 덕분이었죠. 31:3에서도 한 번 더 밝히죠. 이렇게 누누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강조하는 거예요.
이걸 인정할 때 “하나님 없이는 안됩니다” 라는 말이 나와요. “하나님과 어깨동무해야만 된다” 말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요. 하나님께 올인해요. 내 인생의 일부(짜투리)가 아니라 몽땅 올인해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안주하려는 만족감이나, ‘저 사람 보다야 아무래도 내가 낫지’ 비교하며 안심하지 않아요.
왕이었던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해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신하들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가 아니었어요. “주 앞에서”였어요. “권세를, 왕의 자리를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가 아니었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였어요. 하나님과의 어깨동무를 간절히 원했어요. 내가 왕이어도, 하나님 없이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다윗의 고백을 보면서 반성이 돼요. ‘주 앞에 있든 없든, 주의 성령이 내게 있든 없든,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된다고, 편안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요.
개척할 때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어깨동무 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았었는데, 14년이 되니까, 하나님의 어깨를 풀고, 혼자 먼저 가려고 하거나, 혼자 뺀질거리며 가려고 해요.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졌어요. 사람이 생기고, 경험이 생기고, 돈이 생기니까...
그래서 반성이 돼요. 여러분은 어때요? 뭐가 되기보다 주 앞에 있기를, 주의 성령이 머물기를 사모하나요? 뭐가 되고 나서도, 하나님과 어깨동무 하시나요? 아니면, 우리 어깨에 손 얹고 함께 가려는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진 않나요?
하나님과 어깨동무를 하기 위해서는 원칙을 지켜야 해요. 뜻을 같이하고 방향을 같이해야 하고 걸음걸이를 같이 해야 해요. 21절c를 볼까요.“...이다말이 모세의 명령대로 계산하였으며” 22절b를 볼까요. “...브살렐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었고”
이들은 하나님 말씀(뜻)대로 했어요. 그리고 백성들도 이들의 “하나님 말씀대로의 원칙”에 함께 했어요. 능력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고, 재능 있다고 자기 좋을 대로 하지 않았고, 임명받았다고 자기 취향대로, 자기의 경험대로만 하지 않았어요. 철저하게 말씀에 기초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어깨동무가 가능했어요.
노아도 그랬어요. 창 6:9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6:22에서는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말씀하세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이 어깨동무 해 주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준행하려는 사람임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던지세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반응을 해요.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 면 우는 시늉이라도 해요.
그런 사람에게 어깨동무 해 주시고 지켜 주세요. 노아 가족을 지켜 주시잖아요! 그렇게 비가 많이 오고, 그렇게 오래 와도 지켜 주시쟎아요! 그래서 노아의 방주가 생명선이 되었어요.
우리 교회가 노아 방주처럼 생명선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어깨동무 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노아처럼, 하나님 말씀에 춤을 추기도 하고 울기도 해야 해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 어깨동무 하는 성도가 되고,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관심이 머무는 곳, 기도가 응답되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해요.
둘째. 교회다운 교회에는 어깨동무의 성도들이 있다.
24절 이하에 보면, 성막을 건축할 때 소요된 물질에 대한 양을 기록해요. 금이 1,268kg 이나 되었고, 은은 3,400kg, 놋이 2,407kg이었어요. 어마어마한 양이었죠. 이만큼 모으려면, 웬만큼 광고하고 강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양이예요.
그런데 출 36:5~6절을 보면, 모세가 예물을 그만 드리라고 해요. 요즘으로 말하면 헌금과 헌신을 그만하라고 호소했어요. 너무 많이 가져와서 남았기 때문이에요.
애굽에서 노예로 있다가 광야로 나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 중에 20세 이상 된 사람들 603,550명이 모두 조금씩 드렸기 때문이었어요(26절) 한 명이나 몇 명이 감당하지 않았어요. 603,550명이 어깨동무해서 오병이어를 드린 기적, 십시일반(十匙一飯)의 기적이었어요.
억지로 하지도 않았어요. 35:21을 보세요.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자원해서 드렸어요. 한 마음으로 어깨동무 한 거였어요.
그랬더니 넉넉한 교회가 되었어요. “너무 많으니까 헌금 그만해라, 차고 넘치니까 교사 그만해라, 찬양대 그만해라, 청소 그만해라”의 교회가 되었어요. 백짓장도 맞들면 가벼운 거였고, 티끌모아 태산이었던 거였어요.
성막이 이렇게 자원해서 지었기 때문에, 이 성막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통합될 수 있었어요. 반대로 솔로몬 성전은 강제 징발된 세금과 노동력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 성전으로 민족을 분열시키고 말았어요. 똑같은 일이어도 자원해서 한 것은 통합을 낳았고, 강제로 한 것은 분열을 낳았어요. 같은 일이어도 자원은 기쁨을 낳았고, 강제는 원망을 낳았어요.
최성현, 「쌀 한 알」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한 가족과 세 명의 젊은이가 경북 청송군에서 한집 살림을 시작하기로 했다. 어떤 이가 원주의 장일순 선생님께, 어떻게 해야 그들이 뜻을 이뤄가며 화목하게 잘 살 수 있을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 같은 건달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웃으며 운을 떼고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는 얘기를 할 수 있겠지. 여럿이 모였다면 깃발이 있을 것 아냐, 어떻게 가겠다는? 그 깃발 아래 모였으니 깃발을 중심으로 해야 할 테지만, 깃발을 너무 앞세울 때는 함께 가는 사람 가운데, 늦게 일어난다거나 일을 게으르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무라기 쉽지. 미워하는 마음이 일기 쉬어.
그럴 때는 말이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어깨동무를 해서 일으켜 세워, 같이 가는 마음이 중요해.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다 보면 일이 이뤄질 것 아냐? 크든 작든 공이 생긴단 말이야. 그때 그건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됐다 하지 말고, 같이 가는 사람들 공이다, 이렇게 공을 남에게 넘기라는 거지. 이 두 가지를 지키면 되지 않을까 싶네.”』
참 평이하면서도 분명한 가르침이예요. 성막을 지을 때 그랬어요. 그래서 이들은 성막을 지을 때, 하나하나의 헌신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백성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드렸는데, 금을 가져 온 사람도 있었고, 은을 가져온 사람, 놋을 가져 온 사람도 있었고, 실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나무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헌신과 기여의 경중이 가려지지는 않았어요. 많이 냈다고 동판에 큰 글자로 새겨 벽에 거는 일도 없었고, 적게 냈다고 무시당하는 일도 없었어요. 많이 내도 우쭐거리거나 음성이 높아지지 않았고, 적게 내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각자가 기여한 바가 다르고, 봉사한 것이 달랐지만, 모든 사람의 헌신들 하나하나 다 소중히 여겨졌어요. 이것이 바로 “어깨동무의 성도들”이 있는 교회 모습이에요.
노찾사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서로 일으키고, 서로 기대는 거예요. 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나만 하고, 너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힘들면 당신이 하고, 당신이 힘들면 내가 해요. 믿음의 길을 함께 가는 여러분! 어깨동무해서 서로 기대며 넘어주고 건너 주면서, 천국까지 함께 가기를 축원드려요.
말씀을 마쳐요. 삼상 17:34~35을 볼까요.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다윗이, “내가 했다. 내가 했다”말해요.
그런데, 37절을 봐요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종합적으로 해석을 할 때는 “여호와께서 하셨다”고 말해요.
표면적으로는 내가 했어요. 내가 열심히 했어요. 이것은 “어깨동무한 나를 포함한 성도들의 열심”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하셨다고 말해요. 이것은 “어깨동무한 하나님의 열심”이라 할 수 있어요.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과 어깨동무하고 사람과 어깨동무 할 때, 제대로 된 인생이 될 수 있어요. 교회도, 하나님과 어깨동무하고, 사람과 어깨동무 할 때, 제대로 된 교회,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어요.
바울이 엡 2:21, 22에서 말씀하시죠.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땅의 교회들은, 교회다운 교회로 지어져 가는 중이에요. 함께 지어져 가는 중이에요. 공사 중이고, 리모델링 중이에요. 부족함이 많아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잘 지으려면, 하나님과 어깨동무해야 해요. 성도들과 어깨동무해야 해요.교회가 어깨동무 교회가 되어야 교회다운 교회 될 수 있어요. 우리 교회가 어깨 동무 교회가 되어서 복된 교회,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