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예수가 재림하시면 어떻게 될까? 그리스도의 재림을 염원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기뻐할까? 특히 신과 대면한다는 성직자들이 가장 기뻐할까?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예수가 이 세상에 재림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최후의 대작이고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 소설일뿐 아니라, 인류가 쓴 소설 중에도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기는 요즘 최고의 소설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로 나오기도 한다. )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기는 하지만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을 톨스토이의 소설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답게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것도 아들에 의한 아버지 살해라는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이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의 명제를 만들어낸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큰형 드미뜨리(미쨔)와 둘째 이반, 막내 알렉쎄이(알료샤) 등 세 형제와 사생아로 태어나 형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하인으로 키워진 스메르쟈꼬프가 나온다. 작가가 내세우는 주인공은 독실한 신앙을 고수하는 셋째 알료샤이지만 작품을 끌고가는 진짜 주인공은 둘째 이반이다. 이반은 무신론자이고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세상에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 어떤 일이든 허용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수전노에 변태적 성욕자인 아버지는 유산 상속을 미리 받으려는 미쨔의 요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미쨔가 사랑하는 여자를 돈으로 매수하려고 한다. 이에 분노한 미쨔는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마침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아버지의 집에 침입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회심하여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돌아선다. 그러나 그 날 누군가에 의해 아버지는 살해당한다. 다음날 미쨔를 밤 중에 봤었던 여러 증인들의 증언으로 미쨔가 범인으로 체포된다. 그러나 이 살인사건은 미쨔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혐오하는 이반의 은근한 사주(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논리로 사생아인 스메르쟈꼬프를 부추겼다.)로 자신의 탄생을 원망하며 아버지와 세상을 증오하고, 비열한 성격을 가지게 된 스메르쟈꼬프가 교묘하게 살인한 것이다. 고상한 성품을 지닌 조시마 장로의 제자로 교회 수도사인 알료샤는 아버지와 형들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주로 스메르쟈꼬프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된 이반은 스메르쟈꼬프에게 자수하라고 하지만 스메르쟈꼬프는 거부하고 자살하고 만다. (미쨔가 범인으로 오인되지 않았다면 이반이 스메르쟈꼬프에게 자수하라고 권유하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죄책감 때문에 이반이 섬망증(의식이 엷어지고 망상이나 착각이 일이나는 의식 장애)에 걸려서 미쨔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된 것이다. 결국 미쨔는 유죄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에 떠나게 된다. 이때 법정에서 불꽃튀는 논고와 변론을 주고 받는다. 날카로운 검사의 논고와 치밀한 변호사의 변론은 읽을 만하다.
이반은 자신의 무신론적 사상을 박력있게 펼치지만 알료샤의 반론은 힘이 없다. 이반이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상대는 알료샤이고, 알료샤는 형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준다. 이반은 "이 세상 사람들이 받는 모든 고통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버지들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 죄없는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어."라면서 아이들이 당한 고통의 예를 든다. 갓난 아기를 공중에 던진 다음에 총검으로 받아 아기의 몸을 총검으로 꿰뚫어서 죽인 터키 군인이라든가, 아기에게 갖은 수단으로 웃게하고 그 순간에 아기의 머리통에 총을 쏴 죽인 군인의 이야기, 자신의 딸을 채찍질 해서 온몸에 멍이 들게한 후에 밤중내내 엄동설한에 변소에 가두고 마침내 딸의 몸에 똥칠을 하고 딸에게 똥을 먹인 이야기, 엄마가 보는 앞에서 사냥개로 하여금 아이를 물어 뜯게하여 개먹이로 만든 장군의 이야기, 밤중 내내 자신의 어린 딸을 회초리로 때려 죽게 했지만 법정에서 무죄로 풀러난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이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최후의 날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를 용서하는 궁극의 조화가 이룩된다고 해도 저 어린 아이들의 눈물을 보상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반납하겠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를 찾아간다. 만약에 영화와는 다르게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훈훈한 이야기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이반은 엄마 전도연에게는 범인을 용서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설사 살해당한 어린 아들이 범인을 용서한다고 해도 이반 자신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장료가 너무 비싼 셈이어서 되도록 빨리 입장권을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반의 논리에 알료샤의 반론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분이 한 분 계시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렀으므로 그 분은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가 지은 서사시 <대심문관>을 들려준다.
<대심문관>은 소설속의 소설로 이반 또는 무신론자들의 사상을 압축한 것이다. 추기경인 대심문관의 진두 지휘로 마녀를 화형시키는 연기가 끊이지 않는 스페인의 어느 지방에 예수가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그에게 모여들었다. 예수는 여러 기적을 일으키고 그 옛날처럼 죽은 소녀를 살려낸다. 이를 지켜본 대심문관은 병사들을 시켜 예수를 감옥에 가두게 한다. 그리고 한 밤중에 몰래 혼자 찾아와 예수와 대화한다. 그렇지만 예수는 아무런 말씀이 없고 대심문관만 혼자서 예수를 힐난한다. "당신은 그 때 악마가 제의한 기적과 권위와 빵을 거부하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당신이 거부한 기적과 권위와 빵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자유를 회수하고 우리에게 복종하게 하고는 빵을 나눠주고 있다. 그들은 모두 만족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나타나서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는가? 내일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다." 예수는 대심문관의 말을 듣기만 하고 말이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심문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대심문관은 부르르 떨면서 감옥문을 열어주고 "어서 나가시오.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라고 말했고 예수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대심문관>에서 이반은 이중으로 기독교와 교회에 야유를 퍼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악마와 손을 잡은 교회에 대한 야유이고, 또 하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기독교의 선천적인 무능과 결함에 대한 야유이다. 예수는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지만, 역시 민중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보다는 빵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자유를 회수하고서라도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무신론적 사회주의의 입장을 표명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