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ㅇ진원의 역사
진원는 선사시대부터 선조들이 마을 이루고,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국중에 구사오단국이라는 부족국가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구사오단국은 사오단국(斯烏旦國)으로 불리던 곳이다.
사오단국은 "삼족오가 아침해로 뜨는 나라"라는 뜻이다고 한다.
구사오단국에서 중요한 문자는 오烏자이다.
오자는 삼족오를 의미한다. 구舊자는 고古자와 같은 의미로 쓴 문자이다.
옛날에 있었던 나라라는 의미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실제로 있었던 나라는 사오단국斯烏旦國이 된다.
사斯는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로 변했듯이 신新과 같은 의미로 쓴 문자이다.
그러므로 새롭다는 뜻으로 본다. 따라서 새로 세운 오단국烏旦國이 된다.
오烏는 황도黃道를 따라 운행하는 해를 의미한다. 이 해를 마고시대에는 황궁黃穹이라고 하였다.
황궁은 마고가 낳은 딸 궁희穹姬의 직계 아들로 우리의 직계 조상이 된다.
황궁을 상징하는 새가 삼족오三足烏인데, 사오斯烏는 새로 세운 황궁의 소국으로 볼 수 있다.
단旦은 아침에 떠오르는 해로, 단군조선의 단檀이나 한국의 한桓과 같은 뜻이다.
한국의 제 한인과 배달나라의 천왕 한웅은 모두 한桓자를 썼다.
그러므로 구사오단국은 황궁· 한국· 배달나라· 단군조선의 맥을 이은 새로운 소국으로 볼 수 있다.
구사오단국에 관련된 설화로는 누에 이야기가 있다.
누에는 어느 예쁜 공주와 그를 사랑하던 말의 화신이라고 한다. 입은 말을 닮았고 몸은 공주의 고운 살결을 그대로 타고난 것이라고 전한다.
옛날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이라는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가 있었는데 이 평화롭던 작은 나라가 어느 해 가을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아 국운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전세의 불리함을 알게 된 왕은 깊은 밤인데도 잠을 이룰 수 없어서 근심스러운 용안으로 궁궐 뜰을 홀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부왕의 근심을 알게 된 공주가 왕 앞에 나타나
"소녀에게 묘안이 한가지 있사옵니다"라고 아뢰는 것이었다.
왕은 반가워 묘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주는 곧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금과 함께 부마로 삼겠다고 영을 내리시옵소서"하고 간청했다.
이 말에 왕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주는 무남독녀일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이 바르고 백옥같이 희고 고운 얼굴 모습은 갓 피어오르는 모란꽃 같이 아름다워 국왕은 물론 온 나라의 백성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으며 왕위를 물려받을 부마를 가볍게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가 불리해져 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된 공주의 간청에 왕도 마음이 움직여 날이 밝자 대신들을 불러 곧 어명을 내렸으며 이 소식은 온 대궐 안과 변방에까지 재빠르게 전해져 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궁궐 뒤뜰에서 우렁찬 말울음소리가 나오더니 이내 대궐 밖으로 달려가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오랜만에 승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비로소 공주와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데 날이 환히 밝은 아침에 말발굽소리가 대궐 안을 울려 왕이 뜰로 나가보니 명마 한 마리가 적장의 목을 물고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왕마마, 이 말이 적장의 목을 어떻게 베어왔는지는 모릅니다만 장수를 잃은 적군은 지리멸렬 전의를 잃고 달아나기에 바쁘옵니다.
바야흐로 승리는 우리의 것이옵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군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왕은 "오! 마공! 그대가 이 나라를 지켜 주었도다"라고 말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말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그후 궁궐에서는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겼으니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자를 부마로 삼겠다고 공약했으나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주는 "이 나라를 구한 것은 말이오니 소녀는 말과 혼인을 아니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홀로 살면서 말을 남편섬기듯 하겠습니다"하고 말하며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왕은 난처했다. 그래서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대노한 척 얼굴을 붉히며 "말의 목을 베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말을 죽인다고 해놓고 살려주는 조건으로 공주의 마음을 바꿔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조금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백성들과의 약속은 지키셔야 하옵니다. 어서 영을 거두시옵소서"라며 왕 앞으로 나아가 매달리듯 울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왕은 별수없이 냉혹하게 재차 명을 내렸다. "무엇들 하느냐? 당장 목을 베라 하지 않았느냐?" 왕도 가슴은 아팠지만 금지옥엽 키운 공주를 말에게 시집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의 마지막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공주는 급히 말의 시체가 있는 뒤뜰로 달려가 하염없이 통곡을 했다. 왕의 얼굴에도 두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왕은 말의 공을 생각해서 가죽이나마 잘 간직키 위해 깨끗이 손질하여 뒤뜰 나무 위에 걸어 말리게 했다. 공주는 날마다 말가죽을 매만지며 손질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뒤뜰에서 공주의 비명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가 보니 이것이 무슨 변괴란 말인가. 갑자기 돌풍이 일더니 말가죽이 공주의 몸을 감싸가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는 것이다. 왕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프기만 했다. 너무도 상심한 나머지 그날부터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럭저럭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 어느 화창한 날 공주의 몸을 싸가지고 날아갔던 말가죽이 어떤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다는 전갈이 들려왔다.
왕은 급히 거동하여 가보니 예의 말가죽이 늘어진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었는데 눈비에 시달렸음인지 썩어 있었다.
"공주의 몸도 말가죽처럼 썩었을테지, 어서 말가죽을 벗겨보아라" 왕은 비통한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명을 내렸다. 신하들이 말가죽을 벗기자 모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가죽 속에는 이상한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 신하가 왕 앞에 나서며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 벌레들은 공주마마의 화신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대는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하고 반문했다.
"이 벌레들을 자세히 살펴보시옵소서. 나뭇잎을 먹는 모습은 마치 말이 풀을 뜯는 모습과 같으니 입은 말의 입을 닮았으며 몸은 공주의 흐고 고운 살결을 닮았습니다." 왕은 꿈틀거리는 벌레를 들여다 보면서 공주의 영혼을 다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그후 궁궐로 돌아온 왕은 그 벌레들을 잘 키우라고 어명을 내렸다. 백성들은 어명을 받들어 이 벌레를 징그럽게 여기지 않고 잘 키워서 몇 년 후에는 나라 안 방방곡곡에 이 벌레가 퍼지게 되었다.
그 벌레가 바로 누에였으며 말가죽이 걸렸던 나무가 오늘날의 뽕나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에가 실을 뽑아내어 예쁘게 누에고치를 짓는 것은 공주의 뛰어난 자수(또는 직조) 솜씨를 본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방에서는 누에나 번데기를 먹으면 공주처럼 예뻐진다는 전설이 아낙네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 진원현(珍原縣)본래 백제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진원현으로 고쳐서 장성군(長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나주(羅州)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속향(古屬鄕)이 1이니, 마량(馬良)이다. 옛 이름은 장량(長良)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창평(昌平)에 이르기 6리, 서쪽으로 나주에 이르기 14리, 남쪽으로 무진(茂珍)에 이르기 8리, 북쪽으로 장성에 이르기 20리다.호수가 1백 44호요, 인구가 7백 4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1명이요, 영진군이 51명이요, 선군이 1백 6명이다.토성(土姓)이 2이니, 오(吳)·박(朴)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문(文)이요, 속성(續姓)이 3이니, 이(李) 보령(保寧). ·김(金) 장흥(長興). 김(金) 온 곳을 모른다. 이요, 모두 향리(鄕吏)이다. 마량(馬良)의 성이 1이니, 신(申)이다.땅이 메마르다. 간전(墾田)이 2천 3백 40결이요, 논이 9분의 5이다. 토의(土宜)가 오곡·뽕나무·삼·목화·모시이다. 토공(土貢)이 삵괭이가죽·잘·족제비털[黃毛]·칠(漆)·죽순·가뢰[斑猫]·자리·차[茶]·석류·비자요, 약재가 난향(蘭香)·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산골[自然銅]이요, 토산(土産)이 가는 대이다.. 기록 되여 있고,
불태산을 고산리 사람들은 베틀에 달린 보디 모양으로 생겼기에 보두산(보디산)이라부르고 있어서 누에의 설화와 일맥 상통 한다.
구사오단국은 백제의 세력의 확장에 따라 백제의 복속되여 13대 근초고왕 16년(AD361)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 되었고,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백제를 멸하여 신라경덕왕16년 지명이 진원으로 고쳐지고 후삼국을 거쳐 고려시대에 1018년 현종9년 나주목으로 예속되고,1172년 명종2년 나주에서 분리되어 감무(監務)가 파견
조선시대에는 장흥도호부 7현 ( 고흥(高興)·능성(綾城)·화순(和順)·동복(同福)·옥과(玉果)·진원(珍原)·창평(昌平))에 속하기도 했으며 1912년 진원면에는 내동면(22개마을)과 외동면(25개마을)으로 1914년 전국행정구역개편에 의하여 내동면과 외동면이 진원면으로
합병되어 9개리 제도가 생겨 현재에 이르고 한다.
ㅇ불태산
호남정맥이 추월산에서 내장산으로 내닫다가 도장봉 부근에서 남쪽으로 가지 친 지맥이 도마산, 투구봉, 병풍산을 일구고, 병풍산에 이르면 두 갈래를 친다. 북쪽은 송대봉과 장군봉으로 가고, 남쪽은 마운데미, 천봉, 불태산을 이루고 어등산까지 뻗어가다가 황룡강과 영산강에 가로막혀 여맥을 다한다.
물줄기는 서쪽은 장성호와 황룡강, 동쪽은 담양호를 통하여 영산강에 합수되어 목포 앞바다에서 서해에 살을 섞는다.
불태산 주변에는 송강 정철과 석탄 이기남이 강학했던 정이암터를 비롯한 상청사, 하청사, 인월사 등 80여 개 절터와 유서 깊은 문화유적들이 많다. 불태산은 장성에 합쳐지기 이전인 옛 진원현의 진산(鎭山)으로
마치 금방 무슨 일이라도 날 듯 용이 달리는 형상을 취한다.
그래서 옛날 어떤 사람이 불태산에 절을 지어 상하연(上下淵)이라 일컫고
그 꿈틀거리는 산세(山勢)를 다스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유명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도 이 불태산에 와서는 "저 산 남쪽 기슭에 올라가니, 산 깊어 고요해 맑은 시내에 집을 지었다"고
탄복하였다. 그러고는 마치 세간(世間)의 얽매임을 벗어 던진 듯
"만상(萬象)의 맑음이 고요히 내 마음에 박혀있다"고 너무나 자신 있게 읊었다. 특히 나옹대사가 창건한 나옹암터에는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 불심이 가득했던 옛 영화를 말해 준다.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하청사는 매월당 김시습과 하서 김인후의 시에 등장하고, 인월사엔 매월당이 남긴 시 한 편이 현재까지 전해온다.
황산벌 마지막 백제의 애틋한 의기바위의 전설도 장군굴에 얽힌 견훤의 탄생설화, 욕심많은 천석군의 학전봉 형제의 우애의 본보기가 되는 황금재의 전설을 전해준다.
ㅇ진원리(珍原里)
본래 장성군 내동면과 외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면의 월송리, 고산리, 흥동리, 광안리, 회룡리, 중흥리, 연동리, 묘동리, 덕촌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옛 진원현 소재지였으므로 진원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내동면에 고산촌, 창촌리, 주동리, 남학리, 외동면에 월송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흥동리, 광안리, 회룡리, 중흥리, 연동리, 묘동리가 새로 생겨나고, 창촌리는 흥동리에 주동리는 중흥리에 합병되고, 남학리는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진원 1리는 고산(창촌, 담대, 직동, 중동, 광안)이고, 진원 2리는 연동, 묘동이다.
ㅇ고산(高山)
고산은 부족국가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삼한시대의 구사오단국 백제의 구사진혜현 진원현의 소재지 마을이다. 전대의 성씨 입향은 알 수 없고 조선초기에 최씨와 박씨가 살았다하나 상고할 수 없다. 현재는 500여년 전에 진원박씨가 들어 왔고, 400여년 전에 황주변씨·광산이씨·행주기씨·탐진최씨가 차례로 들어왔으며, 1900년대에 전주이씨·광산김씨·서산정씨·옥천조씨·홍주송씨·밀양박씨가 들어왔다. 일제시에 연안차씨·고령신씨·수원백씨·장수황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이씨 11호, 진원박씨 9호, 행주기씨, 연안차씨, 옥천조씨 6호, 밀양박씨·황주변씨·홍주송씨 5호, 창영조씨·전주이씨 3호, 김해김씨 2호, 영천이씨·진주정씨·인동장씨·달성서씨·제주양씨·장수황씨·고령신씨·울산김씨·탐진최씨·금성나씨·하동정씨 등이 92호에 254인이 살고 있다.
마을은 본래 12개 마을로 주동, 중동, 광안, 창촌, 상고, 하고, 월송, 흥동, 담대, 회룡, 연동, 묘동 등을 총칭하여 고산이라 한다..
문화유적으로 진원성, 고산서원, 선정비군 등이 있다.
ㅇ 연동(硯洞)
마을형성은 서산정씨·연안차씨·전주이씨 3호, 광산이씨·황주변씨 2호, 김해김씨·진원박씨·평산신씨·창영조씨 등이 18호에 54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은 달 형국이라 하며, 본래 마을 이름은 덕촌이라 하였는데 1900년대에 연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ㅇ 묘동(畝洞)
묘동은 150여년 전에 광산이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광산이씨 집성촌으로 타성은 근래에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이씨 13호, 광산김씨·진원박씨·금성나씨·연안차씨 등이 17호에 52인이 살고 있다.
마을 뒷산이 풍수설에 말발굽에 해당한다 하고, 뒷산에 고양이 명당이 있어 처음에는 묘(猫)자를 썼는데 뒤에 묘(畝)자로 바꾸었다 한다.
문화유적으로 진원리 5층석탑과 입석이 있다
ㅇ장군굴
진원면 진원리 고산마을에 신라 말기 무렵 한 부잣집 가정에 처녀가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하므로 그 연유를 따져 물은 즉 처녀 말이 "밤이면 이목구비가 준수한 청년이 나타나서 그만 동침을 하고 말았다"고 하는지라 이에 놀란 부모들은 그럴듯한 집안이면 정혼을 하고자 지켜보기로 하고는 청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 과연 밤이 깊어지자 청년이 나타나 딸과 사랑의 운우를 나누고 새벽이 되자 문을 열고 나오므로 붙잡아 물어 보려하였으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므로 이는 청년이 분명 사람이 아닌 어떤 화신이라고 단정하고 딸에게 다음날 또 나타나면 도포자락에 명주실 한 꾸리를 꿰어 바늘을 매라고 일렀다.
그날 밤 처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바늘을 겉옷 자락에 꿰어놓고 이튿날 아침에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장군굴 속에 커다란 거미의 발에 명주실이 달린 바늘이 박혀있었다.
그 후로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처녀는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출산하게 되는데 점점 자라면서 하는 짓이 거무와 같아 거무(일명 불태산) 정기를 받은 거무의 화신이라고 모두 말하였다.
이 아이가 성장하여 신라의 비장(裨將)이 되었고 드디어는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되었는데 원래 진훤이하는 이름이 '견훤'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ㅇ신거무장
장성군 남면에 신가래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신거무장이라는 장터의 흔적이 있다. 지금의 장터는 이전하여 광주 광산구 비아동에 비아장이 되었는데 여기 신거무장이 하나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 장은 오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흥청거리지만 오전 12시만 되어도 모든 사람들이 가버리고 빈 장터만이 쓸쓸히 있을 뿐이다.
이 장터는 불태산과 인연이 깊다고 한다. 불태산은 하청사라는 절이 있어서 불태산이라고도 하고 베틀에 달린 보디 모양으로 생겼기에 보두산이라고도 부른다. 보디 물린 양쪽 끝의 위로는 8정승이 태어났다는 담양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아래로는 이조판서 서수원공을 태어나게 한 진원고을이 아담하게 들어앉아 있다.
이 불태산에 진원현 고산리 동네 머리에서 살던 어느 노부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성을 드렸다. 100일 치성 후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경사를 즐거워하는 부모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눈이 흐렸는가 아니면 귀신에 홀렸는가? 눈을 비비고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한 번 보았지만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자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유는 사람다운 아기가 아니라 괴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사람 형태지만 위에는 독기 서린 거무 모양이니 입을 벌린 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거무 같은 이가 바로 전설의 주인공인 신거무이다.
비상하고 괴상한 신거무는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힘이 세어 장수라는 별칭을 받았으며, 또한 아이들은 신거무와 놀지도 않았으니 신거무는 외톨박이가 됨에 그는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난폭해 지기 시작했다.
젊은 청년이 되어서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행패가 심해졌다. 두 사람만 모이면 이야기하는 게 그에 대한 것이었지만, 막상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과도 같이 생각하는 그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소름끼치는 일은 현감이 부임해 오기만 하면 그 날 저녁에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이에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감히 현감으로 내려올 사람이 없었다. 신거무가 그렇게 무서운 악마와 같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지게 되었다.
중종때 낙향해 있던 송정승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진원현에 신거무라는 괴물이 있어 백성들의 피해가 많다하니 저를 진원현감으로 보내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때 정승의 아들이면 과거를 치르지 않더라도 현감 정도는 자연히 할 수 있었다.
″필시 가면 신거무한테 죽을 것인데 너는 우리 집 가문을 이을 독자가 아니냐? 안된다.″하고 완강히 반대하니 아들이 말하기를 ″젊은이로서 자기의 일만 생각해 가지고 대의를 희생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아버님...″하고 말하니 이제까지 아들에게 대의를 가르쳐 온 그인지라 아무말도 못하고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그 일이 있는지 며칠 후 정승의 아들은 현감이 되어 부임해 갔다. 죽은 아들이다 단념하고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신거무도 죽고 현감도 죽었다네″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승은 그 날 오전에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벗과 더불어 대청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상여 놀리는 소리가 나더니 벌써 대문 앞에 와 서있었다. 그래도 정승은 침착하게 바둑만 뚝 뚝 두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안절부절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통곡을 했다.
"아 당신은 아들이 죽어서 왔는데도 바둑만 두고 앉았소"
울음 섞인 말로 울먹인다. 정승은 허허 비명에 가까운 웃음을 짓고 난 뒤
″여보 부인 그만 눈물 닦고 장롱에서 명주 베를 좀 가져다주구려″
하니 부인이 가져다주었다. 그때는 이미 상여가 마당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가져온 명주 베에 정승이 침을 뱉으니 핏덩이가 붉게 적셨다. 그런 뒤 정승이 부인더러
″당신도 여기다 뱉어 보구려.″
해서 부인이 침을 뱉으니 가래침도 안 나왔다. 이러는 동안 상여 소리가 크게 나자 정승은 머슴더러 회초리를 가져오라 하여 상여를 내려놓고 관을 내놓으라고 명한 뒤 내놓은 관머리를 회초리로 때리면서
″너 왜 애비의 말을 거역하고 훌륭한 신거무를 함부로 죽였느냐?″
고 호통을 치면서 마구 관머리를 때렸다. 정승의 눈에 신거무가 시퍼런 칼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광경을 본 신거무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정승에게 절을 하고
″덕 높은 정승을 뵈어서 아주 기쁘다″
면서 ″오늘 마음먹고 오기는 대감댁 식구를 몰살하려고 왔는데 정숙한 태도를 보고 이대로 돌아가겠노라″
하고 돌아가 버렸다.
정승은 아들의 장사를 치르고 그날 밤잠을 자니 꿈에 신거무의 혼령이 나타나서
″나의 소원이 하나 있으니 들어주시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신가래라는 마을에 장과 다리를 만들어 달라″
하고 훌훌히 가 버렸다. 꿈을 깬 다음날 나라에 곧 알려 그 소원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언제나 장날이면 늦게 돌아가는 사람을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에 나왔다가 일찍 돌아가는데 지금도 사람이 모였다가 갑자기 흩어지는 것을 가리켜 신거무장 파하듯 한다고 비유했다.
신거무장의 전설은 도학자들의 입에서 남자로서의 묵직한 장의를 용감하게 실천하는 이야기로 내려오고 있다.
ㅇ못재
광주에서 장성으로 넘어오는 해발 120m의 고개를 우리는 「못재」라고 부르는데, 이 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먼 옛날에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서 한 청년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항상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다녔고, 끼니도 잇지 못할 형편이었으나 어머님에 대한 봉양은 누구 못지않게 극진했다.
자기는 굶더라도 어머니에게는 식사를 드렸고, 또 먼 길을 걸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나무를 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느 날 한 낮에 나무 한 짐 해 가지고 오는데 깊은 골짜기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청년은 속으로 놀라면서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지나가고 있는데 고운 목소리로 여인이 불렀다.
발을 멈추니 다가와 하는 말이
″내일이면 당신의 어머니는 죽을 것이오!″
라고 처음 만난 처녀가 이런 불미스런 말을 하니 청년은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며 다그쳐 물었다.
″뭐라고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럼 사실을 안 이상 무슨 방지하는 방법도 알고 있겠구려″ 하고 애원하는 것이다.
오직 어머니를 위해서 생을 이어가는 청년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처녀는 청년의 애원과 효도에 감동해서 말하기를
″호랑이가 내일 정오에 당신의 어머니를 해하러 갈 것이요. 그것을 방지하는 방법은 마당에 흰죽 한 동이를 쑤어놓고 꼭 옆에 어머니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세워놓는 거요.
그러나 만약에 그 허수아비를 가져가지 않으면 어머니를 데려 갈 것이요. 그 허수아비를 가져간다면 어머니는 편하리다″
하고 여인은 사르르 사라졌다.
집에 돌아온 청년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머니의 죽음이 내일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의 얼굴은 근심과 고통에 쌓여 하룻밤 사이에 핼쑥해졌다.
다음날 막연한 희망을 걸고 처녀가 하라는 대로 준비해놨다.
정오가 되자 아닌게 아니라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만 마당을 몇 바퀴 돌더니 죽통 옆으로 한 발 두 발 옮겨 어느새 죽통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문구멍으로 마음 조이고 바라보던 청년이 한시름 놓으니 호랑이가 어느새 허수아비를 물고 집을 나갔다. 청년은 얼마나 기쁜지 어머니를 얼싸안고 울며 사실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도
″너의 효성이 지극하여 신령님이 도와 주었구나″
하며 흡족한 웃음을 지으셨다. 그후로 모자는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총각의 효성이 맹수를 감복시켰기 때문이라며 총각 이름을 「목호」(牧虎)로 부르고 이 고개를 「목호재」라 불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목호재(牧虎재)」가 「모고재」로 변했다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옴에 지금은 못재라 한다.
지금도 여기에는 「목호」의 효자비가 오랜 세월동안 풍상을 겪으면서 삼거리 전남제재소 정문 옆에 묵묵히 서 있다.
못재는 구불 구불한 길이라서 눈 많이 내리는 날에는 가끔 교통이 두절되는 일이 잦다.
ㅇ황금재
진원면 선동마을에서 삼성산을 넘어 장성읍 구산마을로 넘아가는 고갯길을 "황금재"라 부르고 있는데 지금은 묵어있는 산길이지만, 옛날에는 진원일대에서 성산관아로 가는 큰 길이었다. 이 황금재는 의좋은 형제의 전설이 있어 물질만능의 현 세태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옛날 이 고개 아래에 마음씨 착한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형제가 함께 고갯길을 넘게 되었는데 동생의 논에 번쩍거리는 물체가 보여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누런 황금덩이였다.
동생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금덩이를 주워 보이나 형도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한참 길을 걷다가 갑자기 동생이 품속에 간직했던 금덩이를 꺼내어 숲속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형은 깜짝 놀라며 그 이유를 묻자, 동생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형님의 사랑을 잊어보거나 형을 미워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 금덩이를 품에 넣자 형님이 미워지니 이것은 진정 좋지 못한 물건인 것 같아서 버렸습니다"하는 것이었다. 형은 동생의 말에 감동하여 "네 말이 옳구나.
이 금덩이는 우리에게 욕심을 불러 자칫 우애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동생의 등을 어루만지며 부지런히 일해서 잘 살자고 하였다. 형제는 다정하게 다시 길을 걸어가다가 얼마 후, 소금장수(또는 포수)를 만나게 되었다.
형제는 그 소금장수에게 황금덩이를 버린 곳을 가르쳐 주며 주워 가라고 하였다.
소금장수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 곳에 가 보았더니 이것이 왠 일인가? 황금은 커녕 누런 구렁이가 또아리를 감고 자기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날 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형제가 그 곳에 당도하여 보니 구렁이는 보이지 않고 이상하게도 그 황금덩이가 똑 같이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형제는 "모든 물체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더니, 이 황금의 주인은 바로 우리 형제들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황금을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돌아와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형제의 우애를 후세에 사표로 삼게 하기 위하여 이 재를 황금재라 하고, 의좋은 형제를 칭송했다고 한다.
ㅇ의기바위
장성에서 담양 방면으로 24번 도로를 타고 가다 불태산(고산마을 뒤편)을 쳐다 보던 하단쪽에 하얀 바위 3개가 보이는데 서쪽 바위가 단오바위(고쟁이바위)이고, 가운데 P자형을 하고 있는 바위가 의기바위이다.
이 중 동쪽바위는 문턱바위로 3개 바위의 서기가 빛광(光)자를 연출하고 있어 광산과 광주의 빛광(光)자가 이 바위에서 연유했다는 설도 있다.
이 바위 위에는 사람 발자국, 말 발자국, 한쌍의 남녀가 앉았던 자리와 누웠던 자리가 있는데 그 흔적들에는 백제 의자왕때의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구사진혜현의 구진골(진원리)에 사는 한 청년의 구국심에 불타 무술연마를 갈구하며 애절한 소원을 빌었다.
불태산 산신령은 그 정성에 감동하여 큰 호골과 작은 호골을 오가며 주로 그 중간에 있는 장군굴에서 무술을 전수 하였다. 그 장군굴에는 옥샘에 금보깨(그릇뚜껑)가 항상 띄워져 있었고, 큰 내(川)가 흘러 담양 추월산에 이르는데, 그 내에는 천년묵은 「이무기」가 지키고 있어 그 위로 걸쳐 있는 외나무 다리를 무사히 건너야만 무술을 전부 전수받게 된다고 전해오고 있다.
청년은 이 외나무 다리를 무사히 건너기 위해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러던 중 이 고을에 사는 절세의 명기 '부용'과 달콤한 사랑에 빠져 수개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낭군바위(의기바위) 위에서 부용을 끌어안고 잠이 든 사이 하늘에서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이놈! 사비성 함락이 촌각에 이르렀는데 술과 계집으로 허송세월인고! 지금 당장 황산벌로 달려가 나라를 구하지 못할고!"
청년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꼴이 후회스러운지, 즉시 부용을 뿌리치고 당장 사비성으로 달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부용이 한사코 부여잡자, "내가 보고 싶거든 지금부터 남기는 사랑의 흔적을 보며 기다리거라, 난 꼭 돌아오리라." 라고 말하고는 말 위에 부용을 태우고 바위를 이러저리 왔다 갔다 하고 나서 부용을 안아 내려 바위에 걸터 앉아도 보고, 누워보기도 하면서 마지막 정을 나누었는데 지나는 자리마다 흔적이 뚜렷하게 새겨지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후일을 약속한 청년은 질풍같이 말을 달려 사비성에 다달아 계백장군 휘하 오천 결사대의 선봉장으로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과 수백명을 죽이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우는 국운은 어찌하지를 못하고 끝내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니... 꼭 살아오리라던 약속 대신 전사라는 비보를 들은 부용은 '일편단심 서방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던 이몸, 서방님 없는 이 세상 살아서 무엇하랴.'라고 통곡하며 함께 운우를 나누던 낭군바위에 올라 열두폭 치마를 뒤집어 쓰고 수십길 낭떠러지에 몸을 날리고 말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청년의 혼령은 부용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고향으로 날아와 장군굴과 낭군바위를 오가며 '부용', '부용' 하며 애절하게 우짖는 소리에 사람들은 청년의 넋이 부용을 못잊어 우짖는 것이라며 청년과 부용이 노닐던 낭군바위를 의기(義妓)바위라 하여 넋을 위로하였고, 청년이 무술을 연마하던 동굴을 장군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ㅇ학전봉
진원면사무소를 지나 진원농협 미곡처리장 뒷편에 있는 학정봉은 진원성이 자리한 대질봉에서 뻗은 아름다운 야산으로 진원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매우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먼 옛날 고산리에 구두쇠로 이름난 최씨라는 천석군 부자가 살았는데, 이웃의 배고픈 사정은 전혀 모른 체하고 높은 이자로 치부를 하는 바람에 온 마을 주민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던 어느날, 하청사 동자승이 최부자 댁에 쌀 시주를 청하였으나 최부자는 하인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빼앗아 동자승을 몇 번 내리치면서 "아나 쌀", "아나 시주"하더니 그만 동자승의 오른쪽 눈을 찔러 버렸다. 동자승은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최부자는 하인들을 시켜 기절한 동자승을 대문 밖으로 끌어내고 대문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얼마 뒤 최부자가 양지쪽에서 학정봉에 모신 선영의 묘를 바라보고 있자 상자를 거느린 스님 한 분이 지나가면서 "거참 묘자리 한 번 좋다. 천석은 족히 받았겠구만, 허나 다섯자만 내려 임좌병행(壬坐竝行)으로 썼더라면 만석을 받았을텐데 아쉽구나, 아쉬워"란 말을 남기고는 구름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욕심많은 최부자는 산신령의 계시로 믿고 "그래, 만석이야, 만석! 내려 써야지! 그럼 내려 쓰고 말고, 신령님의 계시인데"
최부자는 서둘러 길일을 택하여 인근 고을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 이장을 하였다. 묘를 거의 다 파들어 갔을 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세 마리의 학이 관 속에서 날아올라 묘를 몇 바퀴 돌더니, 한 마리는 서남쪽으로 날아가 밭에 앉았고, 또 한 마리는 동남쪽으로 날아 나뭇가지에 앉았다. 그 학이 앉은 자리가 명당이라 하여 밭에 앉은 곳은 학전, 나무에 앉은 곳은 학림, 산곡에 앉은 곳은 학동이라는 마을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뒤 최부자는 망하고 새로 생겨난 마을에는 부자가 많이 나왔다고 하여 학이 솟아오른 그 정상을 학정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ㅇ청계정
진원면 산동 부락 앞을 지나노라면 아담한 정자 하나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선조대에 진원박씨 위남공의 후손이며 김하서 선생의 제자인 청계 박원순선생이 세운 것이다.
선생은 학문과 도를 깊이 터득했으며 또한 도량이 크고 항상 대담한 용기를 갖고 바른 길을 걸은 분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라 정세는 부정한 것이 득세하여 기품이 곧은 선생이라 벼슬길을 저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산동 어귀에 정자를 지어 소일하니 이것이 바로 청계정이다. 선생은 손수 은행나무를 심고 앞에는 크나큰 방죽을 파 구곡수를 끌어들여 홍교를 놓고 화단엔 백일홍을 심어 정원을 만들어 하나의 별장을 이루었으며 거기에서 항상 벗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고향의 풍속을 바르게 하는데 힘썼다.
선생이 별세 하자 여기에 하나의 이변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선생이 별세하시자마자 그렇게 많이 핀 은행잎이 하나도 피지 않고 항상 샘솟는 방죽의 물도 말라버렸다. 이에 사람들의 호기심과 의혹 속에서 세월이 흘러 어느새 선생의 3년상을 마쳤다. 그런데 그때부터 모든 것이 선생의 선조 때의 그대로 은행잎도 피고 방죽도 옛날로 돌아왔다.
이것만 보아도 선생은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자연물을 몹시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의 기품이 곧고 청백했기 때문에 자연의 나무와 물까지도 그렇게 감화되지 않았는가 한다.
현재는 정자안에 비바람 속에서도 노사선생과 관서 선생의 글이 담긴 현판이 빛을 내고 있는데 정자 앞 방죽은 이제 메워져 논이 되어버렸다.
ㅇ진원리 5층석탑
이 탑은 원래 진원리 뒷산 탑동이라는 곳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불법반출해 가려 한 것을 주민들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고 현위치에 옮겨진 것이라 한다.
지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으며 그 위로 기단부 면석이 이어지고 있다. 면석은 중앙의 탱주와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는데, 그면은 벽판석이고 다른 2면은 따로 만들어 끼워놓았다. 갑석은 2매 판석인데 상·하 수평이며 하면의 부연(副椽)이나 상면의 각형 괴임대를 생략하였다.
몸체부는 몸체와 지붕돌이 각 1석씩인데 현재는 4층 이상의 몸체와 지붕돌이 유실되고 없다. 1층 몸체는 각면에 모서리 기둥이 표출되었으며 2층부터는 체감을 보여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너비와 높이가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평박한 편으로 물 흐르는 면은 급경사이며 처마는 중앙에서 수평을 이루고 전각(轉角)에 가까워지면서 경쾌한 반전을 이루었다.
층급 받침은 각층마다 3단이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이 석탑은 옮기면서 각부재가 뒤틀리는 등 제대로 결구되지 않아 몸체부가 곧고 반듯하지 못하다.
또 갑석의 상·하면에서 일부 조각이 생략되었으며 탑 전체가 가늘고 긴편으로 안정감이 없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ㅇ진원성
진원성은 진원현의 현성으로 고려초기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대동지지』의 성지조에 【진원 고읍 성 남십리 불태산 동록주 1,400척,정3, 계2】라 기록되어 병진성과 동일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려 명종(재위1170∼1197)때의 문인인 김극기가 지은 시에 진원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이전에 현성으로 쌓아서 정유재란으로 폐허되기 이전까지 고을을 다스린 성으로 보인다.
이 성은 표고 40m쯤의 대체로 낮고 평평한 분지형의 두 개의 작은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성한 퇴뫼식 산성으로 남아있는 유구를 통해 볼 때 성벽은 내탁법에 의해 수축하였고 성벽 안쪽은 내벽을 축성할 당시 삭토하여 내벽 이 형성 되었는데 배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의 길이는 800m로 추정되며 가장 양호한 동벽의 높이는 3m내외로 6·25때에 진원지서의 방호벽을 구축 할 때 거의 훼손되었고, 그후에도 새마을 사업등에도 성곽돌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난중일기 병신년 9월 (1596년 9월)
9월 17일 [양력 11월 6일]<경술> 맑다.
체찰사와 부찰사는 입암산성(입암산성:정주시 입암면 임암산 해발 655m)으로 가고, 나는 혼
자 진원현(장성군 진원)에 이르러 진원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종사관도 왔다.
저물어서 관청 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못보았던 감회를 풀고 도로 작은 정자로 나가 진원현감 및 여러 조카들과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했다.
ㅇ입석(선돌)
선돌 형태의 자연석이 은유적 남근으로 신앙되어 경계표ㆍ금표ㆍ마을신의 기능을 하는 것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묘동
ㅇ고산서원
이 서원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 선생이 조선(朝鮮) 고종(高宗) 15년(1878)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이름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인데 후손들이 1924년에 중건하여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고 편액을 건 곳이다. 기정진 선생은 조선(朝鮮) 말기(末期)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으로, 사당에 주향(主享)되었으며, 이최선(李最善), 기우만(奇宇萬), 조의곤(曺毅坤), 김록휴(金錄休), 조성가(趙性家), 정재규(鄭載圭) 선생 등 5위의 신위(神位)가 배향(配享)되어 있다. 현재 경내에는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동재(東齋)인 거경재(居敬齋), 서재(西齋)인 집의재(集義齋)가 강학공간(講學空間)을 이루고, 내삼문(內三門), 사당(祠堂)인 고산사(高山祠)가 제향공간(祭享空間)을 이루고 있고, 선생의 문집(文集)·목판(木板) 등 이 장판각(藏板閣)에 보관되어 있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