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여호수아 제 3 강 '하나님의 뒤집기'
본문: 수 2:1-13
1-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3-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4-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 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6-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8-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와서 그들에게 이르러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12,13-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여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Point: 믿음은 하나님의 뒤집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Introduction: 이만기라는 씨름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90년 은퇴할 때까지 천하장사 10회 우승, 백두장사 19회 우승, 한라장사 7회 우승, 기타 씨름대회 11회 우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가진 선수입니다. 씨름선수로서는 그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그의 여러 탁월한 씨름기술 중에도 빛나는 것은 그의 뒤집기였습니다. 뒤집기는 탄탄한 하체와 강인한 허리가 있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기술입니다. 그의 뒤집기는 당시 많은 스포츠팬들을 감탄하게 했습니다. 뒤집기는 일종의 급격한 역전입니다. 불리한 상황에 들어갔다가 강한 허리와 하체로 일거에 뒤업는 것입니다. 놀랄만한 반전입니다.
삶에도 이런 현상들이 있습니다. 상황이 점점 불리한 형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런 시기에 급격한 반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뒤집기하는 상황이 생겨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뒤집기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하시어 상황을 일거에 뒤집는 모습을 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경우에 드러납니다. 뒤집어시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 이것이 믿음의 한 중요한 내용일 수 있습니다.
Point 1: 만만치 않은 세상
본문을 봅시다.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꾼을 가나안땅으로 보냅니다. 특별히 여리고성쪽을 살피게 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다시피 여호수아 자신도 한때 그런 역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갈렙만이 긍정적인 리포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을 되살려 뛰어나고 담대한 이들을 뽑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을 파송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탐활동을 하다가 라합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아마도 라합은 당시 아모리족속의 이방신전의 여사제였던 것 같습니다. 여사제는 당시 기생의 역할을 했습니다. 또 그는 요즘 여관과도 같은 시설을 운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절을 봅시다.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집니까? 정보가 새어나간 것입니다. 그들이 조심해서 가만히 이땅에 들어와 정탐을 하고 이제 라합의 집에 거하는 그 정보가 여리고사람들에게 포착된 것입니다. 이 여리고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극도의 긴장을 하고서 전투태세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정보망을 총동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탐꾼의 활동이 노출된 것입니다.
이제 이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특수부대가 이들을 급습할 것입니다. 그러면 체포될 것이고 그들의 목숨은 뻔합니다. 잘되어봐야 공개적인 능지처참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기를 높히기 위해 더 처참하게 죽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역으로 정보가 다 노출된 형편입니다. 자, 진군하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위기의 위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창녀의 집에 거하는가? 그들의 의도가 불순했던 것이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몇가지 해석을 합니다. 우선은 은폐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음란한 도시특성으로 볼 때 그곳에서 많은 얘기를 듣고 정탐의 사역을 하기에 적당했을 수 있습니다. 또 2장 15절과 연결시켜보면 이 라합의 집에 성벽근처에 있습니다. 이 말은 도주하기에 용이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두 정탐꾼은 라합의 집에 거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제대로 활동하기도 전에 도리어 이들의 행동들이 노출됩니다. 그들의 정보가 새어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믿음의 삶 앞에 놓인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응이 안됩니다. 현실부적응의 경우입니다. 발을 내딛기가 겁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파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 요구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입니다. 마지막은 그 세상의 파도를 타고 넘는 것입니다. 넘어가 버리고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을 관철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아시다시피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더욱이 믿음의 사람에게는 더 그러합니다. 우리의 죄의 실체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 죄에 역사하는 악한 마귀의 실재성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삶이 영적전투의 상황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은 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오늘 본문의 두 정탐꾼처럼 소명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앞에 전개되는 상황은 우리의 예측같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정탐꾼이 만나는 상황처럼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정탐꾼으로 나갔던 상황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훌륭히 정탐사역을 했고 또 그와 갈렙이 선포한 담대한 메시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결과를 생각하며 여리고성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제대로 정탐을 한 것도 아닌데 벌써 자신들의 상황이 적의 정보망에 걸려든 것입니다. 이제 잡히는 일만 남았습니다. 자신이 유숙했던 집의 사람들은 적을 발견한 대가로 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첫발걸음을 내딛은 자신들은 그 처음 시도에서 좌절을 겪게 될 것이고 공동체 전체가 낙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승리를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승리의 환호성이 아닙니다. 축가도 아닙니다. 대학신입생을 기다리는 것은 커다란 술잔이며 선배들의 교묘한 압박의 권유입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그 정도가 심한 것같습니다. 방송에서까지 문제삼을 정도입니다. 토하게 하고 또 먹입니다. 그것이 전통이며 동료의 유대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빠지면 괜히 왕따가 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참여할려니 기독인의 양심이 방망이질을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한 사람이 이런 글을 이메일로 보내왔습니다.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거짓말이나 이기심에 대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너무 화가 나고 견디기 짜증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나도 계속 죽여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만만치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충만했던 성도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영입니까? 축가입니까? 천만에요. 핍박이며 박해입니다. 분명 진리를 따르는 데 다가오는 현실은 너무도 냉혹합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이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불받은 김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선교여행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굉장히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심한 말라리아로 죽을 고생을 하고 모든 선교의 의욕이 사라졌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밤빌리아라는 곳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게 됩니다. 이 일 때문에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논쟁까지 하게 되는 것을 사도행전 15장에서 보게 됩니다.
보세요. 믿음의 삶 앞에 놓인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몇 주 후 중국으로 떠나는 두 지체에게도 이것은 현실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중국의 현재상황은 종교인과 소수민족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는 쪽인 듯 합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올 지 모릅니다.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Point 2: 하나님의 뒤집기
그러나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뒤집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세상이 우리를 엄습하는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뒤집기가 시작되는 것을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됩니다. 4절을 봅시다.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 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여기 4절의 우리말 번역은 '그 여인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영어 번역을 보면 'But the woman had taken--' '그러나 그 여인이' 이렇게 나옵니다. But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뭔줄 아세요? 바로 하나님의 but, 그러나를 믿는 것입니다. 상황은 이렇고 환경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But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러나가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그러나가 무엇입니까?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물 라합. 하나님께서 바로 기생라합을 사용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녀가 이스라엘의 편을 듭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줍니다. 그리고 추격대를 딴 곳으로 보내버립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도움이 온 것입니다.
다시 초대교회상황으로 가봅시다. 사도행전 8장을 보세요.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들 외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약화됩니까? 아닙니다. But입니다. 그러나 그 핍박으로 인한 흩어짐으로 복음이 더욱 전파됩니다.
또 보세요. 바울 전의 사울이 교회를 극심하게 핍박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이 뭡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바울로 뒤집어 엎어십니다. 그래서 그를 놀라운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의 But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러나'가 너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분의 그러나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뒤집어 집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놀라운 하나님을 보세요. 사람이 없으면 동물마저 뒤집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세요. 하나님은 까마귀를 뒤집어서 엘리야를 먹입니다. 사사기 15장을 보세요. 삼손과 같이 뒤집어진 여우 삼백마리가 블레셋의 곡식을 초토화시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동물도 뒤집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But을 믿으십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but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자 체험이기도 합니다.
시편 73편의 기자도 그런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악인의 형통함에 압도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거의 실족할 뻔 합니다. 악인의 만사 O.K.의 삶에 깊은 좌절을 같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소로 나아갈 때 그 삶들의 결국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국을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처리하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But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이렇게 찬송합니다.
사실 이 하나님의 But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성격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But을 선언하셨기에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을 보세요. 1-2장을 거쳐 3장 20절까지 쭉 나열되는 것이 뭡니까? 사람의 상황입니다. 그 밑바닥까지 낱낱이 폭로합니다. 죄의 강력한 파워에 갇혀있고 그 값을 치루어야만하는 사람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3장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But now a righteousness from God' But! 성경학자들은 이 But을 Gre---at But이라고도 합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뒤집기십니다. 절망을 일거에 소망으로 바꾸어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을 위해 상황을 뒤집어 버리십니다. 전혀 아닌 것 같지만 But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믿는 여러분이시길 바랍니다.
Point 3: 뒤집기의 콘텐츠: 라합의 믿음
이제 하나님께서 뒤집기의 도구로 사용하신 라합의 믿음을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10-11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왜 라합이 그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나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무슨 이유로 민족의 반역을 무릎쓰며 그들을 구해주었나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왜입니까? 10절과 11절을 자세히 보세요. 반복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뭡니까? '들었음이라. 듣자. have heard, heard'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보세요. 라합이 도대체 어떻게 들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와서 하나님을 자세히 소개해 주었습니까? 구원의 비밀을 명확하게 들었습니까? 아니면 베델성서반이나 포인트성경공부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들은 것입니다. 그냥 뜬소문을, 풍문을 들은 것입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하는 '애굽에서 벌어진 일'을 그녀는 들었습니다. 홍해의 일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아모리족의 시혼과 옥이라는 두왕과 벌인 전투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집을 오가며 하는 얘기를 그냥 주어들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라합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거는 거의 도박에 가까운 일을 지금 벌인 것입니다.
그러면 라합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아주 작은 것이라도 말씀이기에 믿은 것입니다. 그저 소문과 같이 들렸지만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에 대한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백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라.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신중에 으뜸이신 하나님인 것이 틀림없다. 나도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고 싶다.' 바로 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 때문에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에 감동하십니다. 그래서 그녀를 통해 상황을 뒤집어시는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보세요. 라합은 작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택합니다. 이 라합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word-oriented person, 말씀중심의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이 풍성했던 것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말씀을 아주 적은 말씀이지만 그것을 붙들고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요즘 주식이 다시 많이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서 주식을 투자하고들 있습니다. 단기시세차익을 노리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투자방식은 알짜배기 부자들의 투자가 아닙니다. 진짜부자들의 주식투자는 우량주식에 대량투자하여 장기간 묶어놓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치있는 회사의 주식은 꼭 보상을 해줍니다. 저에게는 라합의 믿음이 이런 장기적주식투자를 하는 사람의 모습과 겹쳐저 보였습니다. 라합은 눈앞의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에게는 진실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가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말씀에 자신의 삶을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종이 죽게 된 한 백부장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예수님께 뭐라고 말합니까? '주님 황송하오니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러자 주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놀라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지 못했다.' 큰 칭찬을 하십니다. 그의 믿음의 시작이 뭡니까? 7장 3절을 보세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소문으로 들은 말씀에 인생을 건 것입니다. 라합같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놀라게 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장으로 가 봅시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갑니다. 가서 회개하는 큰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이제 요한은 자신의 마지막사명 주님을 소개하는 일을 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러나 그 분은 초라하고 평범한 목수입니다. 주목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한은 다시 한번 더 외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이 요한의 반복되는 너무도 중요한 메시지에 반응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수만의 사람이 모여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에 반응한 사람은 단지 두 사람 안드레와 요한뿐입니다. 그들만이 주님께로 갔고 그들은 메시야를 발견했고 최초의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진리는 말씀에 있습니다. 진리는 자리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 말씀의 부스러기마저도 붙든 사람들은 칭찬받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상황을 뒤집어시며 능력의 역사를 행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말씀이 부족합니까?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난 더 말씀을 많이 공부해야해.' 그러나 여러분 칭찬받은 라합과 백부장의 믿음을 보십시오. 여러분과 그들 누가 말씀이 풍성합니까? 중요한 것은 말씀이 진짜 현실인 것을 믿고 붙드는 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좀 충격적입니다. 보세요. 우리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믿음의 사람인 우리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그 동사를 보십시오. 미래형이 아니고 다 과거형입니다. '일으키셨고 앉히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놀라움이 뭡니까? 우리는 이미 그 분과 함께 하늘의 보좌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게 진짜 믿음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냐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을 내 믿음의 현실로 받아들이느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현실이 내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에 따라 우리의 믿음은 굉장한 차이를 나타납니다. 주님을 놀라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현실이 여러분 것이 아닐 때 세상은 여러분을 압도해 버릴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감당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품은 사람이 현재의 십자가를 감당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청년 여러분, 히티 그린이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1916년에 돌아가셨는데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구두쇠할머니입니다. 데우면 아깝다고 차가운 수프를 줄곧 먹은 분입니다. 또 다리를 절단했는데 그 이유가 놔두면 혹시 나을까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저금통장에 남은 잔액이 얼마인줄 아세요? 1억불입니다. 1억원이 아니고 1억불입니다. 웃기는 삶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할머니를 비웃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생활에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합을 보며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라합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부요를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뒤집기가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의 말씀이 생명입니다. 그 생명 붙드는 능력의 사람되게 저희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사람이길 소망하오니 이끌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