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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창녀의 죽음 (1)
가로수 밑에서 눈에 덮인 희끄무레한 무터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의 형상을 닮은 그것은 소년을 섬뜩하게 했다. 그러나 그 또래의 호기심에 끌려
놈은 그것을 한번 툭 걷어차 보았다. 쌓인 눈이 그의 발등에 부딪치며 흩어졌다.
그것은 새벽의 눈빛 속에서 선명하게 굳어 있었다.
소년은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아!」하고 소리치면서 온 길을 되돌아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거리에는 한참 간격으로 질주하는 차량만 있을 뿐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인의 시체를 일단 흔히 있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변사체(變死體)로 보고, 간단하게 일건 서류를 작성했다.
그 가운데 신체상으로 나타난 것 중 중요한 것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① 연령 25세 정도.
② 사망 시간 7시간 전(6시50분 현재).
③ 음부(陰部)가 심히 헐어 있음.
④ 약물 중독으로 인한 사망으로 사료됨.
과장(課長) 옆에 다가서서 사건 서류를 잠깐 넘겨다본 오 형사(吳fIJ事)는
남은 담배꽁초에 불을 붙여 물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7시40분이었다
밤새 야근을 한 탓인지 그의 몸은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요즈음 들어서 그는 갑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피로는 항상 그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는 경찰서 뒤뜰로 천천히 걸어갔다.
뒤뜰에는 적어도 매일 한 구(具) 정도의 변사체가 운반되어 오곤 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는 거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버릇이 있었다.
시체가 들어와 간단한 조사와 검시가 끝나면 이윽고 그것은 시(市) 관리의 시체실로 옮겨져
며칠 동안 주인을 기다리다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곧장 화장터로 가든가 아니면
대학병원에 염가로 팔려 실험대 위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시체를 다루는 사람들의 솜씨는 언제나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들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 감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대개 이러한 일들은 아침 일찍 일어났고, 일이 끝나면 그들은 흡사 먼지를 털 듯이
요란스럽게 해장국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시체는 가마니에 덮인 채 뒤뜰의 담 밑에 버려져 있었다.
가마니 끝으로 빠져 나온 여자의 조그만 두 발을 보자 그는 그것들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두 발은 누가 양말이며 신발을 벗겨 가 버렸는지 모두 맨발이었다.
여기 들어오는 시체들은 언제 보아도 이렇게 하나같이 맨발이었다.
아마 시체를 나르는 인부들의 장난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눈이 아직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마니 위에는 벌써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신문팔이 소년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것은 두 시간쯤 전이었다.
그동안 검시의(檢屍醫)가 다녀갔고, 몇몇 동료가 화장실에 들렸다가 한 번씩 뒤뜰을 거쳐
나오면서 시체 주위에 침을 뱉고, 아침부터 기분을 잡쳤다는 투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기름 바른 머리에 금빛 로이드 안경을 끼고 바쁜 듯이 나타나는 검시의라는 작자는
종로 사창가에 산부인과 성병(性病) 전문의 병원을 차리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그자가
시체 1구당 5천원의 검시료를 받는 전문 검시의로 추천되었는지는 몰라도 벌써 오래 전부터
이 K경찰서에 출입하고있었다. 창녀를 상대로 해서 막대한 돈을 벌고 경찰서 간부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는 그 검시의를 오 형사는 매우 싫어했다.
결국 그런 의식을 가진 자들이 잘먹고 잘산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증오감마저 일곤 했다.
그는 가마니 끝을 들어올리고 죽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반쯤 덮은 숱이 많은 그녀의 머리칼은 죽은 사람 같지 않게 그 결이 곱고
부드러워 보였다.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가라앉은 얼굴은 머리칼에 덮인 탓인지
인형처럼 단순하고 작은 모습이었다. 콧등과 뺨 위에 뿌려져 있는 몇 개의 주근깨가
불현듯 그에게 서글픈 친근감을 안겨주었다. 온 얼굴에 흡사 해진 피부처럼 늘어붙은
값싼 화장기만 없었더라도 이러한 감정은 좀 덜했을 것이다.
화장은 눈 주위, 특히 눈두덩 위에 가장 많이 몰려 있어서, 얼른 보기엔 진보랏빛의
부스럼 딱지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잘못된 눈 수술을 가리기 위하여 거기에
유난히 정성을 들인 것이었다. 그 두터운 화장기 밑에는 양쪽 모두 성형수술의 부작용이
가져온 상처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마 소녀는 쌍꺼풀 수술을 했던 것 같았다.
그는 가마니를 더 젖혀 보았다. 소녀는 빨간 털 셔츠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녀의 몸은 얼굴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큰 편이었으나 몹시 말라 있었다.
늙은이처럼 앙상한 손이 배 위에 놓여있었는데 흰 눈 때문인지 다섯 개의 긴 손톱에 칠해진
매니큐어 빛이 유난히 빨갛게 돋아 보였다. 그것은 죽은 후에 칠해진 것처럼 매우 생경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죽은 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최후의 감정, 끝없이 굴러 떨어져 버린
고독과 주검의 찌꺼기 같기도 했다.
그가 가마니를 막 덮었을 때 검은 가죽잠바의 청년 하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 보세요?」
청년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구두 끝으로 가마니를 휙 젖혔다.
청년은 서(暑)에서 필요할 때마다 부르고 있는 카메라맨이었다.
「하, 요건 제법 예쁜데…… 자살입니까?」
「아직 몰라.」
오 형사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청년은 더 묻지 않고 카메라를 시체의 얼굴 위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는 시체를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오늘 오전 중으로 뽑아 줄 수 있겠어?」
「그렇게는 안됩니다. 일이 밀려서요…….」
청년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엄살 떨지 말고 빨리 좀 뽑도록 해. 급한 거니까…… 열한시에 내가 그 쪽으로 가지.」
뒤뜰을 돌아 나오면서 오 형사는 죽은 소녀와 친해져 보고 싶은 막연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이 마침 비번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해 볼 수 있는 시간도 좀 있었다.
수사과의 말단 형사로서 언제나 일선 수사에 임하고 있는 그에게는 종종 가슴을 치게 하는
살인사건들이 걸려들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그는 사건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서 들개처럼
그것을 갈가리 물어뜯어 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죽은 사람을 어느 누구
보다도 충실히 이해하려 들었고, 그러는 동안 어느새 그와 피살자는 하나의 두터운 묵계 속에서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곤 했다.
오 형사는 경찰서를 나오는 길로 곧장 해장국집으로 갔다.
작년 봄에 아내를 잃은 그는 현재 잠자리와 먹는 것이 퍽 불안정했다.
때문에 그를 딱하게 여긴 주위 사람들이 재혼을 권하기도 했지만, 그는 아직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는 죽은 아내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첫아이를 낳다가 핏덩이와 함께 죽은 아내인 만큼 가엾고 불쌍한 생각이 좀체로 가셔지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방안에는 아직도 아내의향기와 목소리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35세의 사나이가 홀로 자취를 한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정말 고적(孤寂)하고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해장국집에서 대강 식사를 마친 그는 경찰서로 돌아와 죽은 여자에 대한 서류를
다시 한 번 자세히 검토했다.
음부가 심히 헐어 있고 손톱에 짙은 매니큐어를 했다는 점,
그리고 약물중독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 등이 그에게 수사범위를 어느정도 좁혀 주는것 같았다
전혀 엉뚱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 차림만으로 변사체의 신분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는 그 여자를 술집 작부 쪽보다는 창녀 쪽으로 더 생각해 보고 싶었다.
사창가에서 창녀의 시체가 발견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인(死因)이라는 것이 거의가 타살이 아니면 자살이었다.
창녀들이 자신의 신세와 성병에 견디다 못해 젊은 목숨을 끊어 버린다든가,
사창가의 기생충들, 이를테면 포주나 펨프(뚜쟁이), 또는 깡패들에게 얻어맞아 죽는 것 따위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사창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그 산부인과와 성병 전문의
병원이었다.
금테 로이드 안경의 그 검시의는 오 형사를 보자,
「어이구, 웬일이십니까? 여길 다 오시구…….」
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커피와 담배를 권했다.
그러나 그 안경 뒤에는 조그맣고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 불청객의 속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려는 듯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바로 잘못 틈을 보이다가 의외로 많은 돈을 뜯길지도 모른다는, 그 구역질나는
경계의식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오 형사는 검시의를 만나러 온 것을 후회했다.
「다름이 아니라…….」
입을 열면서 보니 검시의는 몸을 꼿꼿이 하고 있었다.
「수고스럽겠지만 검시를 다시 한 번 해 주셨으면 하고요.」
「아니, 왜, 어떻게 됐습니까?」
검시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친구가 진정으로 그러는 건지,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일부러 뚱딴지같은 수작을 거는 건지 얼른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투였다.
「어떻게 된 게 아니고…… 검시를 좀 자세히 해 주셨으면 하고요.」
오 형사의 조용하고 분명한 말씨에 상대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벗어 가운 자락에 닦으며,
「어떻게 더 자세히 하라는 건가요? 뱃속에 들은 것까지 다 조사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할 수 있다면 그런 것까지도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허 참. 그 정도의 검시가 필요하다면 연구소(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보시지 그래요.」
「네, 그게 가장 무난하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해 볼 수 있는데 까지는 해 봐야지요.」
「저로서는 검시를 부탁받을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잘 아시겠지만 시체를 한 번씩 만지고 나면 하루 종일 밥맛이 떨어집니다. 보기는 쉬운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많이 받고 한다면 또 몰라도…….」
더 이상 부탁해 본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거듭 오 형사는 난처함을 느꼈다.
그는 조금 생각해 보다가 별로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물었다.
「무리한 부탁이라면 그만두겠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오셨을 때 검시 결과에 대해서 혹시
기록에서 빼먹거나 묵살해 버린 점이 없었는지,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런 건 없었습니다.」
검시의는 살찐 턱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잘라 말했다.
「음독 같다고 했는데…… 무슨 약을 먹었나요?」
「세코날입니다. 그런데 그 시체로부터 뭐 이상한 거라도 발견했나요? 다른 땐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엔 유난히 관심을 보이시니…….」
사나이는 비꼬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직업이 그런 거니까요. 타살된 흔적은 조금도 없었나요?」
「없었어요. 음독자살이라니까요. 신중히 생각해 보는 건 좋지만, 그 때문에 쓸데없이 헛수고를
한다면 우스운 일이죠.」
오 형사는 뜨거워 오는 숨결을 삼키면서 또 물었다.
「그 여자에게 성병 같은 것은 없었나요?」
이 질문에 검시의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거기가 다 헐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남자 관계가 많았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성병이 있을 가능성도 있군요.」
「혹시 과거에…… 그 죽은 여자를 본 적은 없나요?」
「제가요?」
검시의는 놀라서 큰소리로 물었다.
「네, 바로…….」
「원,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제가 어떻게 그런 여자를 알 수가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 말은 이 병원에서 성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니까 혹시 환자로서 그
죽은 여자가 이곳을 찾아온 적이 없나 해서 그렇게 물어 본 것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 여기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여자라면 신분을 알아내기가 쉬우니까요. 그리고 이 근방에서 이 병원에
제일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니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보기와는 달리 단골 손님들 외에는 별로 손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의 얼굴은 모두 기억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런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잘 알겠는데…… 무슨 성형수술을 한 자리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눈에 수술을 했더군요.」
「왜 그런 것은 검시 기록에서 뺐죠?」
「별로 쓸데없는 것들이라 그랬습니다.」
「아니죠.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건데요. 기록이란건 자세할수록 도움이 되는 것이거든요. 앞으론
검시하실 때 이 점을 유의해주셔야 겠어요.」
오 형사가 일어서려고 하자 검시의는 재빨리 봉투하나를 그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싫습니다.」
그는 검시의의 손을 완강히 뿌리치면서 봉투를 도로 내놓았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돈이 든 봉투를 슬그머니 찔러 주는 것이 유행으로 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경찰직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일곤 했다.
눈이 그쳤다가 오후에 들어서면서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함박눈 때문인지 사람들은 갑자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듯이 보였다 그들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점심으로 국수 한 그릇을 들고 난 오 형사는 종로 3가 일대에서 성형(成形)과 성병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들을 찾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다.
사진관에서 찾은 변시체의 사진은 모두 다섯 장이었는데, 제대로 선명하게 나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얼굴을 정면으로 찍은 것이라 해도 시체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사진만 가지고
신원을 찾는다는 것은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시체의 사진을 본 의사들은 터무니
없는 짓 하지도 말라는 듯이 고개를 설설 내둘렀다. 장난기가 있는 어느 성병 전문의 의사는
이런 말까지 했다.
「우린 말입니다…… 환자들의 얼굴보다는 하복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밑을
보면 누군지 알 수가 있어도 위에 붙은 얼굴을 보고는 좀체로 기억을 못해요. 미안합니다.」
망할 자식들 같으니라구. 오 형사는 홧김에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내친 걸음을 되돌리기가
거북스러웠다.
종로 3가 일대에서 성형과 성병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병원들은 상당수 되었다.
그러나 모두 훑어보았지만 조그만 단서 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기분만 잡치고 보니 그는 여간 허탈감이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양장점 앞을 지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진열장 유리에비친 자신의 몰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열장 안에 걸려 있는 몹시 비싸 보이는 여자용 밤색 털 오버 속에는 부쩍 마른
사내 하나가 눈송이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잔뜩 움츠리고 서 있었다.
턱 주위를 거무스레하게 감싸고 있는 수염과 앙상하게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불안하게 치떠 있는 두 개의 큰 눈동자가 영락없이 사흘 굶은 실업자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눈이 아프고 하루 낮을 꼬박 잠으로 보내야만 겨우 피로가
풀리곤 하는데 그는 아직 낮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지나 있었다
저녁 출근까지는 이제 겨우 두 시간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므로 변두리에 위치한
집에까지 가서 낮잠을 잘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본서(本署)로 향했다.
연말 연시로 접어들면서 각종 범죄 사건이 우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서 안은
흡사 장터처럼 붐비고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 형사는 그 검은 제복, 검은 잠바, 검은 구두의 혼잡을 뚫고 숙직실로 들어갔다.
텅 빈 방안에는 낡은 담요 몇 장과 때묻은 베개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 맞은편 벽에는 새해 달력이 하나 걸려 있었다.
달력에 눈요기로 박아놓은 수영복 차림의 아름다운 여배우 사진이 침침한 실내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오 형사는 여자의 육체를 생각하면서 달력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잠이 들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갑자기 담요를 걷어차고, 휙 돌아눕고, 한숨을 깊이 내쉬고,
허리를 꺾어 깊이 웅크리고, 마침내 소리를 지르기까지 하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봐, 이봐, 무슨 잠을 그렇게 자는 거야?」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바람에 오 형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창문은 어두웠다. 시계를 보니 여섯시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면서 헛소리를 하는 거 보니까 너도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구나.」
살이 쪄서 헛배까지 나오기 시작한 동료 김 형사가 그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헛소리를?」 오 형사는 괜히 놀란 체하며 물었다.
「그래, 화장실에 가는데 여기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아. 여자가 애기 낳는 소리 같은 거
말이야. 그래서 들어와 보니까 네가 혼자서 고생하고 있지 않겠나.」
「뭐라고 헛소리를 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뭐라더라…… 아, 살기 싫다, 그러던가…… 하하.」
경찰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래서 결국 그 뜻을 이루어 만족스러운 상태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김 형사는 이상할 정도로 몸을 흔들면서 웃었다.
「그만 웃고 담배나 하나 줘.」
오 형사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숙면을 못한 탓인지 머리는 더욱 무겁기만 했다.
「이봐, 내가 살 테니까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김 형사가 담배를 내주면서 말했다.
오 형사는 수사과에 들어가 출근부에 도장을 찍은 다음 김 형사를 따라 나섰다.
경찰서 정문을 나오기 전에 그는 잠깐 뒤뜰로 돌아가 보았다.
눈은 그쳐 있었지만 발목이 푹 빠질 정도로 쌓여 있었다.
여자의 시체는 아직 담 밑에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이젠 손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눈을 헤치고 여자의 발끝이라도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 이 친구, 재수 없게 그건 왜 쳐다보고 있는 거야?」
김 형사가 뒤에서 어깨를 잡아 제쳤기 때문에 그는 몸을 돌이켰다.
그들은 경찰서 뒤쪽에 있는 한식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경찰 동기생이었는데, 오 형사는 김 형사를 가까운 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으면서도
곧잘 어울려 다녔다. 그것은 이를테면 일상생활의 잔 부스러기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 형사는 만족하게 웃으면서 돈 걱정은 하지말고 충분히 먹으라고 했지만. 오 형사는 식사를
반쯤 하다가 그만두었다.
첫댓글 요것도 꽤 재밌을것같네여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기대만큼 재밌을지 걱정이네요..^^
자주 들어 읽고 갑니다 예전에 많이 읽던 작가글 ㅎ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읽어본지가 강산이 두어번 바낀탓에 내용이 가물가물 하옵니다.
다시한번 읽어 보겠읍니다..
그러시군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