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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루(按海樓). '바다를 살피는 루'라는 뜻입니다. 강화외성 6관문 중의 하나입니다. 동시에 이곳은 광성보의 관문입니다. 광성보는 숙종 때 설치되었습니다. 영조 때 문루를 세우고 안해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성보에는 만호(종4품)가 임명되었고 화도돈대와 오두돈대, 그리고 광성돈대와 광성포대가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보 가운데서는 그 규모가 아주 큰 편입니다. 광성보는 방어의 요충지로서 병자호란 당시에는 강화유수겸 주사대장인 장신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이 이곳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잠입하였고 신미양요 때는 중군 어재윤 장군이 이곳에 방어진을 구축하였습니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성문과 문루는 신미양요 때 미군의 포격으로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1976년부터 시작된 강화전적지정화사업으로 복원되었습니다. 홍예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문을 나서면 광장이 나옵니다. 이곳은 아마 광성보의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었거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것이 김포의 덕포진입니다.
이곳의 조류는 그 유속이 빨라 아주 위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손돌목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837년 1월 21일 주사대장 장신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저녁 늦게 검찰사 김경징의 명을 받고 갑곶나루로 출동을 하는데 조류 때문에 22일 새벽에도 닿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637년 1월 22일 새벽, 청군은 드디어 통진나루에서 갑곶나루로 배를 띄우고 도해작전을 시작합니다. 갑곶나루를 지키고 있던 황선신 장군등이 나서서 청군을 막지만 중과부적이었고 때를 놓쳐 늦게 도착한 장신의 군대는 청군의 기세에 눌려 가리산 쪽으로 도망을 가서 강화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병인양요 때는 천총(정3품 무관직) 양헌수 장군이 저기 덕포진에서 야밤에 배를 타고 이곳 광성보와 덕진진, 그리고 초지진으로 군사를 나누어 잠입시켜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였습니다.
↑여기가 광성돈대입니다. 1971년(신미년) 6월 1일,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아시아 함대가 서울로 가는 해역을 탐사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그 때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최초의 무력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곳 광성돈대에 배치된 포대와 손돌목돈대 아래에 위치한 광성포대는 오후 2시경 미 해군 전함이 손돌목에 진입하자 광성보의 포격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 포함(砲艦) 모노케시호도 광성보를 향하여 8인치 대포로 응전하였습니다. 조선군은 15분 동안 200여 발의 포탄을 발사하였다니 실로 엄청난 양의 포탄을 쏟아 부운 셈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군 화포의 위력은 형편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광성보는 미군의 포격으로 삽시간에 무력화되고 조선군은 진지에서 철수하였지만 미군은 경미한 부상자 2명만 발생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함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아 계속 정찰을 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에 모노케시호가 손돌목에서 좌초되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손돌목포격사건'이라고 합니다.
↑광성돈대 내부. 6월 10일 오후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음날 새벽에 덕진진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정오 경에 광성보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날 정오부터 1시까지 진무영 중군(종 2품 무관직.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미국 킴벌리 중령이 이끄는 상륙부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이곳 광성보에서 전개됩니다.
↑그 당시 사용되었던 조선군의 대포. 오른쪽부터 대포, 소포, 불랑기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포는 사거리 700m의 조선군이 보유한 가장 큰 포입니다만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우선 조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이는 적에게는 위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소포는 가장 발달한 포라고 하지만 사거리가 400m밖에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적의 함선에 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랑기포는 포르투칼에서 들여온 화포로 자포와 모포로 분리되어 사격 준비 시간이 짧아졌지만 역시 사거리가 길지 않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군의 화포는 포환으로 되어 있어서 목표물에 명중을 하여도 타격만 할 뿐 서양의 포탄처럼 폭발하면서 강력한 힘으로 사람을 살상하거나 건물을 파괴하는 위력이 없었습니다.
↑광성돈대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은 길이 아주 잘 닦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땅이 내려 앉아 소나무 뿌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소나무 뿌리가 드러나면 토양 속에 양분을 섭취하기가 어려워 소나무의 생장에 그만큼 장애가 오고 병충해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 길 옆의 수목이 울창하여 더위를 잊고 걸었습니다.
↑광성보는 조경이 잘 되어 있어서 꼭 공원과 같은 느낌입니다. 특별히 여기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갑곶나루는 청나라와 프랑스군이 침략하여 전투를 벌인 곳이고 이곳은 미군이 침략하여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전투의 격렬함이나 희생 정도를 따지면 이곳도 갑곶만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무명용사추모비나 쌍충각 외에 이곳이 격전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물이나 기념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최근에 강화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학생들이 이곳으로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옵니다. 답사를 할 적에 꼭 한두 학교 수학여행 팀을 만났습니다. 문화재 해설사들이 목청을 높여도 아이들의 시선은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곤 하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모르면 해설조차 재미가 없는 법.(미리 공부 많이 하세요.)
↑신미양요 애국 무명용사비. 광성보전투에서 전사한 수많은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한 비. ↑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슐레이 대령
슐레이 대령은 당시 상륙부대를 지휘하였던 킴벌리 중령의 부관이었습니다. 참전 당시 슐레이는 소령이었습니다.
↑애국무명용사비 옆에 서 있는 쌍충비각
↑진무영 중군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충의를 기리는 비각입니다. 어재연 장군은 신미양요 당시 강화 진무영의 중군으로 미군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부하 600여명과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히 전사합니다.
중군은 종2품직으로 지금으로 치면 사단장이나 군단장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계급으로 따지면 소장이나 중장에 해당합니다. 사단장이나 군단장이 부하 장졸들과 함께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한 일은 우리 전쟁사에서 드문 일입니다. 이 전투에 나라의 명운이 달렸다는 사명감이 책임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전장에 나와 있던 동생 어재순도 싸움에 나서자 장군은 '나는 군인이고 너는 백성이니 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말하지만 동생은 '나라를 위하는 충성에 군인과 백성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싸우다가 형제가 같이 전사하였습니다.
↑쌍충비각 아래로 순절묘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광성보전투에서 전사한 이름없는 용사들의 묘입니다. 당시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미군들은 거의 맨주먹에 가까은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6월 11일 오후 1시경에 손돌목돈대를 점령한 미군은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를 내리고 대신 미합중국 국기를 내겁니다. 그리고는 철군하여 초지진에서 하루 숙영하고 다음날 철군합니다.
애초에 로저스 미국 아시아 함대 제독은 함대를 끌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갈 계획이었지만 웬일인지 그 다음날 6월 12일 군사를 거두어 철군을 하였습니다.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는 그의 의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신미양요를 "승리하고도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전투에서는 승리를 하였으나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는 임무에서는 실패한 전쟁으로 평가합니다.
↑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는 광성보 구역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돈대입니다. 광성보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용두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앞 바다 손돌목의 이름을 따서 붙였습니다.
손돌은 고려 때 사공으로 건너편 땅 통진에서 임금(고려 고종이라고도 하고 희종이라고도 한다.)을 강화도로 건너주려다 의심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으면서도, 바가지를 띄우고 따라가면 물길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바가지가흘러 가는 대로 배를 몰아 왕은 무사히 염하를 건넜습니다. 사람들은 손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여 제사를 지내주며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했습니다.
이곳 광성진 맞은 편 덕포진에 가면 지금도 손돌의 무덤이 있어 이 설화를 신빙성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손돌이 죽은 10월 20일(음력)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합니다.
↑손돌목돈대 내부. 여기에 어재연 장군은 자신의 장수기를 걸고 미군을 맞아 결사 항전을 합니다. 이때 전투 장면을 미국 참전 군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로 응전하였다. 창과 검을 들고 미군을 향하여 돌진했으며 탄약이 없는 병사는 맨손으로 성벽에 올라가서 돌을 던지고 또한 흙을 쥐어 눈에 뿌렸다. 그리고 손에 무기를 쥐지 않은 병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일보일보 전진하면서 분전을 전개하였다. 부상자는 자살하였다. 이 장렬한 백병전을 통하여 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다.”
미국 측 기록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350여 명이 전사를 하였으나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측 기록에는 전사 53명, 부상 24명 포로 14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포연이 채 사라지지 않은 손돌목돈대. 성 둘레에 참호를 판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 이곳에서 적의 함포공격과 야포공격을 견디어 냈을 것입니다. 미군은 광성보 앞바다에서 함포로 지원 사격을 하고 동시에 상륙 군인들이 가지고 간 야포를 대모산 쪽에 배치하여 협공을 하였다고 합니다.(사진자료: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함락 직후의 손돌목돈대 내부. 최후의 방어전을 펼치던 어재연 장군과 조선군들은 모두 이곳에서 전사하였습니다.(사진자료: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6월 11일 정오 무렵부터 미군들의 광성보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손돌목과 대모산에서 이곳을 향하여 한 시간 이상 포격을 가하여 진지를 완전히 무력화시킨 다음 이 손돌목돈대를 향하여 돌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15분 동안 처절한 육탄전이 벌어지고 난 후 미군은 이곳에 어제연 장군의 장수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전투에서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조선군 진영을 초토화시키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퇴각을 하였고 미국 내 여론은 이 전쟁을 패배로 규정하였습니다. 미국과 협상 중이던 청나라도 이 전투를 미국의 실패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미국을 퇴각시킨 것은 바로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 온몸으로 저항한 민초들의 애국심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군들은 이 전투를 치르고 전율이 흐를 만큼 숙연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손돌목돈대에 바라다본 손돌목. 이곳은 해협의 폭이 좁고 조수가 급하여 천혜의 요새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모래톱이 있어서 배가 길을 잘못 들면 미군의 포함 모노케시호처럼 좌초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종묘의 신주와 세자빈과 원손을 호종하는 책임자였던 검찰사 김경징이 강화의 지형을 믿고 방어를 게을리하였다가 함락된 일도 있습니다.
↑손돌 목에서 본 광성포대. 그 옆 덕진진의 남장포대와 함께 막강한 화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신미양요 때 이곳은 미군들로부터 집중적으로 포격을 받아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미군은 상륙을 하면서 7문의 곡사포를 끌고 오는데 이 포들을 대모산 쪽에 배치하고 광성포대의 후방과 손돌목돈대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보다도 앞선 7월 1일 저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는 미 함대를 보고 조선의 전 포대가 10여 분 동안 200여 발의 포탄을 쏟아 올렸는데도 유유히 떠 있는 함대를 보고 조선 포대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뒤 이어 5분에 걸친 모노케시호의 함포 사격에 아군의 포대가 풍비박산나는 것을 보고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영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 것을 생각하면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비장한 느낌이 듭니다.
↑용두돈대를 공격하는 미 해군.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년)이 끝난 직후여서 무기의 성능이 뛰어나고 병사들도 참전 경험이 많았습니다. 미군은 조선 화포의 사거리 밖에서 함포 사격으로 방어 진지를 초토화하고 난 후 상륙하는 전술을 운용하였습니다.
신미양요 당시 이 광성보에는 143문의 포와 1,000여 명의 군사들이 집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군이 가진 포와 화승총은 미국의 함포와 8인치 곡사포 그리고 레밍턴 소총 앞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신미양요 기록화/강화군청)
↑물길이 빠르게 돌아나갑니다. 물길을 따라 가면 덕진진과 초지진이 나옵니다. 신미양요 전투 때 미군은 돌격을 감행하여 손돌목 돈대를 점령하자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서 아래쪽 광성포대와 용두돈대를 향하여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주력부대가 이미 궤멸된 상황에서 이를 당할 수 없음을 안 병사들은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전사를 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죽습니다. 미군의 기록에 의하면 100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았다 합니다.
↑용두돈대. 용머리처럼 길게 나왔다고 용두돈대로 불립니다. 광성보 구역에 있지만 기록에는 덕진진에 배속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광성포대 방향에서 본 용두돈대. 미군들이 이 앞 손돌목에서 집중적으로 용두돈대를 향하여 함포 사격을 하였다고 하니 이곳은 당시에 폐허가 되었다 할 것입니다.
↑용두돈대에 설치된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정부는 1977년부터 강화지역의 주요 전적지를 복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사전 조사 없이 진행된 복구 사업은 많은 문제를 남깁니다.
↑기념비 주변에 당시의 화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이떻게 이렇게 처참한 격전지가 그토록 빠르게 흔적이 지워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처럼 보입니다.
↑쉼터. 여기서 점심을 먹을 예정입니다.
↑용두돈대를 지나 덕진진으로 가는 오솔길입니다. 산에 들어서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길을 가다가 노부부가 부지런히 무엇을 따길래 지나가면서 보니 산복숭아였습니다. 이제 막 열매가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덕진진으로 가는 해안길. 강화나들길 2코스'호국돈대의 길'입니다.
↑용두돈대를 내려서서 바닷가에서 본 덕진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