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뜻을 알아보라
누가복음 12:49-59
노래에 대한 이야기.
지난 주에 음악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제가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니 우스웠지요?
사실은 독일교회에서 많이 불리는 아주 유명한 곡입니다. 같은 노래인데 지난주의 느낌과 이 이야기를 들은 뒤의 느낌이 어떠신지요? 우리가 뭔가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주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모든 영역이 그런 것 같습니다. 얼마 ‘강북스타일’이 음원차트 1위에 오르니까, 많은 음악인들이 자조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게 음악이냐?’고, 그러자 누군가 일갈을 가했지요. 그러면 걸 그룹이 1등하는 것은 괜찮냐고? 사진도 그렇습니다. 별 볼일 없는 사진 같은데 유명한 사람이 찍었다고 하면 다들 ‘와!’하면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모든 영역이 그렇지요. 그런 점에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같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설교를 40여 편 교정을 보았고, 타이핑도 사흘 정도 어깨에 담이 결릴 정도로 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설교성향이 눈에 들어왔고, 그분의 목회여정이 읽혀졌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모습도 상상이 갔고,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도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들풀교회 인터넷에 오래 전에 올렸던 설교문 중에서 ‘대형교회 목사들의 문제’에 대해서 쓴 글이 권리침해를 했다는 신고 때문에 차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의신청을 하면 다시 게시되겠지만, 귀찮아서 그냥 두었습니다. 또 하나는, 외식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에 대해 비판한 설교문을 읽은 분이, 자신을 두고 한 말이라면서 불편해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쓴 설교문이었는데 그 분이 그렇게 느꼈다니, 그냥 가타부타 하기 싫어서 삭제를 했습니다. 이렇게 설교에 대한 세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설교가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일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다른 과거의 언어를 오늘의 시대와 상황에 맞는 언어로 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설교자는 성경에 대한 연구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이 시대의 상황에도 민감해야만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믿어라”가 아니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 설교는 때론 이 세상에 불을 지르는 설교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을 오늘 읽었습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는 말씀을 통해서, 불 지르는 역할을 담당해야했던 예수님의 고뇌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불 지르는 일을 감당하지 않았더라면’하는 고뇌가 묻어 있습니다. 이런 고뇌는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이런 고뇌와 얼마나 큰 간격이 있을까요?
어떤 불을 질렀습니까?
새파란 30세의 젊은이가 당시 교권주의에 정면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정면으로 거슬렀습니다. ‘불을 지른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불 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한다는 것은 ‘불 지르는 일’이요, ‘분열을 일으키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둘째, 평화냐, 분열이냐?
평화의 주님께서 분열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선뜻 이해가 가시는지요?
우리 일상에서는 어떨 때 오늘 말씀에 나오는 대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들과 아버지가, 어머니와 딸이, 딸과 어머니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맞서게 됩니까? 그래요? 선거철이면 갈라지죠? 왜 그렇습니까? 지지하는 사람이나 정당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누가 되어도 일정의 한계가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하거나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거철이면 가족 간에 분열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어떠할까요?
어떤 때, 가족간에 이런 분열이 일어날까요?
세상의 가치관과 신앙의 가치관이 상충될 때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복은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세상적인 복입니다. 믿음의 척도는 무엇입니까?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헌금액수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생활, 봉사 등등입니다. 교회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지만, 교인들의 모든 역량을 지교회에 쏟아 붓게 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믿음, 신앙, 기도, 봉사, 헌신 등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론은 지교회를 위해서입니다. 교인들을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꽁꽁 붙잡아 둡니다.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도 모자라 각종 성경공부, 무슨무슨 선교회 모임 등등 세상이나 가정 혹은 개인을 위해 살아갈 수 없게 합니다.
오로지 교회에 온전히 모든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들을 바쳐야만,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다. 즉, 세상적인 성공을 할 것이다. 아직도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도 헌신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골자입니다. 과연, 이것이 교회이며, 과연 이런 것을 강요하는 것이 설교일 수 있겠는가 싶은 것입니다.
셋째, 이 시대의 징조를 알아보아라.
위선자들은 하늘의 징조를 푸는 일에는 능통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징조를 풀이하는 일에는 젬병입니다. 우린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땅,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징조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서 하늘의 징조를 말하는 것은 허공에 붕 뜬 이야기가 됩니다. 온갖 현란한 수사와 웅변술과 뜨거움은 있는데 공허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게 뭔지 모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나를 사랑하는 것에 서투릅니다. 이웃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온갖 현란한 말로 사람들을 농락하는 이들은 자기 구미에 맞게 성경을 취사선택하여 교인들을 세뇌시킵니다. 세상과 구분되어야 한다면서, 교인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시대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 혹은 권력자들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자신들의 일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약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들은 정치를 하는 것이라 몰아붙이며 종교의 중립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징조를 보는 일, 그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과 다를 수밖에 없기에 ‘불을 지르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예로, 들풀교회가 추구하는 낮고, 느리고, 작고, 못생긴 것들에 대한 것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릅니다. 그것을 추구하다보니 세상적인 것들이 가진 한계를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 혹은 ‘저것’이 ‘옳다’ 혹은 ‘그르다’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시대의 사조 혹은 문제들 속에서 신앙인들이 어떤 입장을 갖는 것이 신앙적인 행동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 세상은 불의한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불을 지르는 일’을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이비 신앙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들풀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징조와 이 시대의 징조, 모두를 보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 이 시대의 뜻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현상만 보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대이니 신앙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읽어야 합니다.
1. 맘몬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상 속에서 소박하게 살기, 작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2.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간의 존엄성, 자신의 존엄성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기
3. 시대의 가치를 자기의 가치로 여기지 말고 살아가기
4. 이 모든 일들을 해나갈 때에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하기
5. 우리의 삶이 신앙적인 삶이 되어 교회 안에서와 밖에서의 생활이 다르지 않을 것
6. 이 모든 과정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절망하지 않기
7.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양식 추구하기
8. 서로서로 이런 일들을 하는데 증거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관계되기(교인 간에)
*
이 시대의 뜻을 아는 사람,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대충 살지 않습니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의 유희에 빠져 살아가지 마시고, 한 주 한 주 숨고르며 살아갑시오. 귀로 듣는 즐거움을 넘어서 삶으로 사는 즐거움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