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치다가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설명도 한번 읽어보면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전 원체 시에는 젬병이라서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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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5㎞ 남짓 떨어진 경남 산청군 삼장면 상내원리. 1963년 11월12일 새벽 어둠이 몇 발의 불길한 총성에 찢기며 진저리를 쳤다. 지리산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빨치산 2명 중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은 총상을 입고 생포된 것이었다. 신문들은 `망실공비(亡失共匪)'를 잡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정작 빨치산이 우리 역사로부터 망실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아마도 1955년 4월1일 지리산에 대한 입산통제가 해제된 때를 그 시점으로 잡을 수도 있으리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2년이 가깝도록 전투지역으로 취급받아온 지리산이 마침내 전란의 허울을 벗게 된 그 순간에도 남한 전역에는 59명의 빨치산이 남아 있는 것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남쪽 체제를 위협하지도 북의 혁명노선을 부추기지도 못하는 채 하루하루의 생존에 절대의 가치를 두고 있었다.
남쪽 체제에 대한 저항을 존재이유로 삼았으되 종내는 북의 권력자들로부터도 버림받은 빨치산은 한국 현대사가 낳은 가장 큰 모순과 비극의 담지자들이라 할 만하다. 당연히 그들은 수다한 시인·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했음직 하다. 한국문학에서 빨치산의 형상화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신동엽(1930~69)의 시 `진달래 산천'을 단순하게 빨치산 시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를지도 모른다. 제목에서나 12연 49행의 이 시 전체를 통틀어서도 명백히 빨치산을 가리키는 단어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암시적·간접적으로 심어 놓은 몇몇 시적 장치들을 뜯어 보면 이 시의 주인공을 빨치산으로 상정하는 데 그리 무리는 없어 보인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모서리엔/이름 모를 나비 하나/머물고 있었어요.//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당신은/잠이 들었죠.”
시의 첫 두 연은 자못 평화로운 봄 풍경이다. 비록 장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버려 던져져 있으므로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진달래꽃 피어 있고 나비 한 마리 앉아 있으며 사람은 잠들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를 구가할 수만은 없는 엄연한 전시라는 사실을 시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6, 7연이 알려준다.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발목을/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꽃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온종일/탄환을 퍼부었지요.”
이어지는 8, 9연은 잠의 평화와 그것을 깨뜨리는 전쟁의 심술 사이의 선연한 대비이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그늘 밑엔/얼굴 고운 사람 하나/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꽃다운 산골 비행기가/지나다/기관포 쏟아놓고 가버리더군요.”
마지막 연에서 평화와 전쟁 사이의 싸움은 결국 전쟁쪽의 승리로 돌아간다.
“잔디밭엔 담뱃갑 버려 던진 채/당신은 피/흘리고 있었어요.”
이 시를 굳이 빨치산 시로 읽을 만한 근거란 무엇일까? 4연과 5연을 보자.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남햇가,/두고 온 마을에선/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비록 명백한 진술은 아니지만, `기다림에 지쳐 산으로 간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야산대'로 알려진 초기 빨치산을 연상시킨다. 미군정의 남로당 불법화 방침에 쫓겨 산악지대로 숨어든 이들은 소규모의 무장대를 형성했으며, 이들 야산대가 여순사건 이후 입산한 군인 및 민간인들과 합쳐져 이룬 것이 구빨치산이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산을 내려왔던 이들은 인민군의 퇴각 이후 다시금 산으로 쫓겨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만 몰락과 망각의 운명이었다.
`진달래 산천'은 한 꽃다운 젊은이의 죽음을 통해 몰락의 길에 들어선 빨치산들의 비극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이 시는 경어체의 공손한 어투와 전쟁이라는 공손하지 못한 현실, `잠들다'와 `피흘리다', 꽃·나비와 장총·탄환·기관포, “얼굴 고운 사람”과 빨치산을 보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차가운 눈 등 여러 갈래의 대비를 시적 구성의 원리로 삼고 있다.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신동엽은 그해 3월24일 같은 지면에 `진달래 산천'을 발표한다. 1959년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이념공세 속에 조봉암의 사형집행으로 마감된 진보당 사건이 정국에 냉기를 끼얹고 있던 연도였다. 비록 간접적이고 우회적일망정 우리 문학사에서 빨치산의 존재에 거의 최초로 눈을 돌린 신
동엽의 선구적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 `망실공비'가 `회복'된 지 30여년, 지리산 입산통제가 해제된 뒤로부터는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는 전북 남원군 산내면,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지리산 지구 전적기념관'이 유일하다.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사살된 반선시설지구를 마주 보는 위치에 지난 79년 세워진 이 기념관에는 `북괴'제인 와이셔츠 팬티 수건 고무신 배낭 방한복 따위의 생활용품과 일제인 초단파송수신기 망원렌즈 카메라, 그리고 소련제인 권총 기관단총 소총 로케트탄 따위가 남쪽 군경의 전투 및 일상용품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또한 관련사진과 지리산 일대 작전 모형도 준비돼 있다.
지리산의 상징이자 한라산을 제하고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은 사시사철 배낭을 맨 등반객들로 북적인다. 6월 하순의 천왕봉 가는 길엔 이미 늦은 철쭉마저 모조리 져버린 채 녹음만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장터목 산장에서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지나야 하는 제석봉 일대는 오는 98년 말까지 자연휴식년에 들어가 있다. 제석봉의 명물 고사목들은새로 심은 9천주의 구상나무 치수(稚樹)들과 출무성한 야생풀들 속에서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제석봉의 완만한 구릉을 지나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한동안 타다 보면 어느덧 통천문(通天門)에 이른다. 깎아지른 벼랑 속으로 난 자그마한 통로다. 철사다리를 타고 문을 지난 뒤 아찔한 바위 벼랑을 힘겹게 오르면 드디어 천왕봉! 사면이 탁 트여 있는 일망무제의 이 바위 봉우리에서는 지리산의 숱한 연봉들과 그 위를 감도는 구름조차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그 운봉의 어디메쯤 속절없이 스러져간 빨치산들의 염원과 절망이 안쓰러이 떠돌고 있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