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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족보 국가문화유산의 지정에 관하여.....
백민 이양재(식민역사문화청산전국회의 공동대표
입력 2025.07.28 00:00
지난 7월 21일,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가 급격히 출범하였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급격하게 치른 출범식을 뒤로하고 22일 귀가하였다. 이후 23일 오전에 있었던 “추진위원회 집행위 모임에서 갑작스런 내부 소동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내부 소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러한 삐끄덕거림을 뒤로하고 이제 차분한 심정으로 책상에 앉아 ‘신 잡동산이’ 원고를 쓴다. 개가 짓고 비가 와 홍수가 져도 우리 학술위가 할 일은 연구하고 글을 쓰는 것이기에, 학술위는 이 내부 소동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천명(闡明)하며 이제 글을 쓴다. 이번 출범식에 특별히 협력해 주신 몇 분에게 특별한 인사를 올린다.]
“고맙습니다, 출범식에 귀중한 특별 자료를 제공해 주신 ‘청송심씨문중의 특별한 소장가 한 분’과 현장에 참석하신 각 문중의 모든 분에게 공개 인사를 올립니다. “눈물이 나도록 진정 고맙습니다.””
0. 한국족보의 시작점을 탐색하며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꼭 200년이 되던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정유재란이 1597년 8월에 일어났다. 7년에 걸친 전쟁은 1598년 12월까지 지속된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7년 전쟁 기간에는 족보 간행이 없었다.
임진왜란으로부터의 7년 전쟁은 조선의 역사를 앞뒤로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중국에서도 임진왜란의 여파로 명이 망하고 청이 건국한다. 일본의 약탈이 극심했던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의 고본(古本)과 이후의 고본(古本)이 판식(版式)과 책의 크기, 지질(紙質) 등에서 서로 달라 아주 쉽게 구분된다.
한글 번역본(언해본)에서도 임진왜란 이전의 고본에는 방점(傍點)이 있고, 이후의 고본에는 방점이 없으므로 다르다. 임진왜란 이전의 문화를 주도한 세력은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교체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우리 문화를 주도한 많은 인물이 일본으로 잡혀갔으므로 발생한 현상이다.
16세기의 마지막 해는 1600년이다. 이제 필자는 조선이 건국한 1392년부터 1600년 시기에 편찬한 현전하는 옛 족보와 편찬은 하였으나 실전한 문중의 족보 명단을 여기에 공개하여 각 문중의 옛 족보 탐색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2025년 7월 21일 현재, 1600년 이전에 족보 편찬을 시도한 문중은 모두 서른여섯 문중이나 된다.
이 가운데 열두 문중의 옛 족도나 세보 실물이 현전하고 있고, 그 열두 문중 가운데 아홉 문중의 족보는 단순한 계도(系圖) 수준을 넘어서서 제대로 편성(編成)한 족보다운 족보이다.
1. 열두 문중의 옛 계보 현전본
우리나라에서 계보서의 시작은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검교군기감을 역임한 김관의(金寬毅)가 고려 왕실에 관해 서술한 [왕대종록(王代宗錄)]으로 본다.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었다’라고 하는데 현전하지 않고,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왕실의 혼인·생자(生子)·즉위 등에 관한 내용으로 [왕대종록]이 편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왕실 이외에도 여러 정황을 보았을 때 늦어도 12세기부터는 사회 지배층 사이에서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기록의 필요성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필요성에 의하여 계도(系圖)나 족도(族圖), 세계(世系) 및 가승(家乘) 등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초의 개국공신이었던 권행(權幸)은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고, 역시 개국공신이었던 류차달(柳車達)은 문화류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대대로 호족(豪族)이었으므로 일찍이 계도나 족도를 편성할 수 있었고, 고려말 호족들의 그러한 혈연 기록을 조선초기에 집대성하여 세보(世譜)를 창보(創譜)할 수 있었다.
필자가 ‘신 잡동산이’ 7월 14일자 연재에서 다룬 “[이존록]과 [선산(일선)김씨족보]에 관하여”1)에서 소개한 [이존록]에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1480년 편찬한 ‘보도’가 있는데, 이 ‘보도’는 점필재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고려로부터 전승해 내려온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정리한 기록이다.
이 ‘보도’의 가장 웃 조상으로 김흥술(金興述)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김종직의 아들까지 16대를 기록하고 있다. 김종직으로부터 13대라면 약 350~400년간의 직계 기록을 확보했다는 것인데, 1431년에 태어난 김종직으로부터 350년 전이라면 1081년이고, 후대에 이를 기록하였다고 해도 김관의가 [왕대종록]을 편찬한 고려 의종 년간(1146~1170)이 된다. 김종직으로부터 260~280년 전이다.
필자는 “[이존록]의 ‘선공보도’는 서기 1200년경 무신정권시대(1170년~1270년) 초기에 이미 사회 지배층에서 족벌이 형성되고, 계도를 기록할 수 있었음을 논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족벌의 형성은 보도나 족도를 만들게 한 것이다.
조선초의 세보 편찬은 고려중기로부터 누적되어 온 계도와 족도가 집합되어 작성된 것이다. 현전하는 고려말의 계도나 족도 원본은 없다. 조선 초기의 족도는 1401년의 것으로 주장하는2) [해주오씨족도]를 오 모씨가 소장하고 있고, 또한 1454년부터 1456년 사이에 작성한 것으로 고증된 [안동권씨족도]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 [안동권씨족도(安東權氏族圖)], 1454년에서 1456년 사이에 제작, 1축(61.3×219.8cm), 견본묵서(絹本墨書), 국립민속박물관 소
장(민속19635).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1476년(병신보), 초간보, 3권3책, 목판본,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현전하는 최고본 족보로 흔히
성화보라고 부른다.3)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이 필요하다.
2. [이존록(彛尊錄)], 1528년, 2권1책, 재판본, 목판본, 선산김씨(일선계) 김종직이 1480년에 편찬한 계보를 수록한 책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1528년 재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존록]은 세보나 족보라기 보다는 계도가 들어가 있는 책이다. 1497년 초판본
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3.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1545년(을사보), 초간보, 1책, 목판본, 청송심씨 심재문 소장. 현전하는 최고본 족보 가운데 한 책이
다. 현전하는 계보류 고서 가운데 족보(族譜)라는 명칭을 사용한 첫 번째 족보이다.4) 금년으로부터 꼭 480년 전에 간행한 이 을사보는
글자체가 아름답고 정밀하며 판식도 고려 대장경의 판각 례를 따르고 있는 선본이다.
한편, 청송심씨문중의 1649년 을축보와 1713년 계사보를 통하여 1562년 임술보와 1578년 무인보의 간행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청송
심씨문중에서 임술보와 무인보를 간행하면서 1545년 을사보 판목의 활용 및 이동에 관하여 상세히 알 수 있다.
청송심씨문중의 이러한 시도는 서지학적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다. 계보의 편집도 매우 정확하고 우수하며, [안동권씨세보](성
화보)와 [문화류씨세보](가정보) 등과 함께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이 필요하다.
4. [대종보(大宗譜, 迎日鄭氏 감무공파)], 1545년경, 1책(36장), 초고본, 개인 소장. 정세필(鄭世弼, 1494~1566)이 1553년(계축보)에
편찬한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지주사공파 초간보보다 먼저 나온 감무공파의 초찬보이다. 보물급 문화유산으로 국가문화유산
지정이 필요하다.
5. [성주이씨세보(星州李氏世譜)], 1545년(을사보), 족도(族圖) 1책, 필사본, 이문건(1494~1567)이 1545년에 유배지 성주에서 직계
만 수록한 족도.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성주이씨묵재공파종중 소장. 성주이씨문중에서는 [성주이씨세보(星州李氏世譜)]를 1464년
(갑신보)에 초간보를 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1464년 세보는 현전하지 않으며, 보학계에서는 가승(家乘) 초고로 추정한다.
6. [의성김씨세보(義城金氏世譜)], 1553년(계축보), 1책(99장), 초고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이 필요
하다.
7.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1565년(을축보), 재간보, 유영(柳穎) 서, 10권10책, 목판본, 안동 수졸당(守拙堂) 소장. [문화류씨세
보(文化柳氏世譜)]는 영락 년간이던 1423년(계묘보)에 초간보를 내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는다.5) 1565년 을축보가 매매되었다는
소문이 25년 전에 대구 고서점가에 돈 바가 있어 현재 소장처 확인이 필요하다.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이 필요하다.
8. [강릉김씨족보(江陵金氏族譜)], 1565년(을축보), 초간보, 1책(99장), 목판본, 동해시 송정동 강릉김씨가 소장.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이 필요하다.
9.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1576년(병자보), 초간보, 1책(66장), 목판본(淸州 菩薩寺),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이 필요하다.
10.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1578년(어성보), 초간보, 3권2책, 목판본, 개인① 소장.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이 필요하다.
11. [안동김씨성보(安東金氏姓譜)]-구 안동. 1580년(경진보), 초간보, 김억령(金億齡) 서, 김제현(金齊賢) 발, 1책, 목판본, 한국족보박
물관(대전) 소장. 대전시 지방문화유산.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승격이 필요하다.
12. [진성이씨족보(眞城李氏族譜)]. 1600년(경자보), 이영조(李詠道) 편, 초간보, 3권3책, 도산서원 목판본, 진성이씨문중 소장, 계명대
학교 동산도서관 소장(2책, 1책 결). 대구시 지방문화유산. 현전이 확인된 고 족보 가운데 16세기의 마지막 해에 발행된 족보이다.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승격이 필요하다.
위에서 열거한 12종의 옛 족보 가운데 1번 [안동권씨세보]와 3번 [청송심씨족보], 4번 [대종보], 10번 [고령신씨세보]는 지난 21일 출
범식에서 공개 전시되어 많은 관람자의 시선을 끌었다. 이번 3시간여의 번개 전시는 형태를 제대로 갖춘 현전하는 임진왜란 이전 족보
9종 가운데 4종을 포함한 21종의 고 족보가 공개 전시되는 유일무이했던 전시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1600년 이전에 간행되거나 필사된 옛 족보는 후기 신라시대 불경만큼이나 희소하며 모두가 유일본이고, 이렇게
잠시나마 전시한 것은 서지학 연구사에 최초의 일이다.
2. 스물네 문중의 1392~1600년 계보 목록
아래에 열거한 22종의 옛 족보는 대개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전한 족보이다. 아래 목록의 족보 가운데 현전본이 새로이 발견되었으면
한다.
1. [경주김씨족도(慶州金氏族圖)], 1395년, 김충한(金沖漢) 지, 가계도(家系圖)로 추정, 실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경주김씨족보
벽상공신 내 사령 공 파)] 1758년(무인보) 족보에만 김충한의 1395년 서문이 들어 있다. 1758년 무인보는 김 덕장이 서문(1758)을 썼
으며, 1책(127장)으로 목판본이다. 1395년에 김충한이 쓴 서문은 가계도의 서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401년에 작성한 것으로 주장하는 [해주오씨족도]에 경주김씨가계(慶州金氏家系)가 포함되어 있어, [해주오씨족도]가 공개될
때 [경주김씨족보 벽상공신내사령공파)] 1758년(무인보)에 나오는 김충한의 가계도와 교차 대비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경주김씨문중의 최고본 족보는 1684년(갑자)에 김만일(金萬一)이 서문을 쓴 [계림김씨세보(鷄林金氏世譜)] 갑자보 1책(84장, 목판
본)과 1685년에 이민서(李敏敍)-김익창(金益昌)-김정태(金鼎台) 등이 서문을 쓴 [경주김씨족보(慶州金氏族譜)] 을축보 1책(필사본)
이다.
2. [고씨족보(高氏族譜)], 1450년(경오보), 실전. - 제주고씨문중에서는 1535년 을미보를 말하지만, 이 족보도 실전하였고, 개성고씨문중
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1640년(기해)에 高仁繼(1564~1647)의 서문이 들어가 있는 세보를 편찬하였지만, 이 역시 실전하였다.
그렇다면 이 경오보 역시 계도 수준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고씨족보는 본관을 막론하고 매우 희소하여, 현전하는 18세기에 간행한 고씨족보는, [제주고씨족보] 1725년본 4권4책과 [개성
고씨족보] 1796년 병진보 5권5책(목활자본)본, [장택고씨족보] 1790년 경술보 12권4책(목활자본)본 등 세 종이 있다.
3. [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 1451년(신미보), 초간보, 권책수 미상, 실전. - 진양하씨문중은 임진왜란 이후 1606년 [진양하씨세보]
병오보 2권2책(목판본, 합천 해인사본)을 간행한다. 병오보는 서지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족보이다. 병오보 이후에 간행한 1719년 기해
보 1책(목판본, 진주 청곡사), 1770년 경자보 3권3책(목판본, 진주 오동서재)이 현전한다.
4. [남양홍씨세보(南陽洪氏世譜)](당홍). 1454년(갑술보), 초찬보, 홍일동(洪逸童, ?~1464) 서, 권책수 미상, 실전. - 이후 남양홍씨문중
에서는 1603년(계묘)에 편찬한 [남양홍씨세보] 원고본 1책이 군위남양홍씨가문에서 소장되어 있어 경상북도 국가유산자료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1603년 계묘보는 간행된 바 없다. 이후 1658년(무술)에 [남양홍씨족보(南陽洪氏族譜)] 무술보 7권4책(목판본)이
간행되는데, 이 무술보가 당홍의 실질적인 초간보이다.
5. [전의이씨세보(全義李氏世譜)], 1476년(병신보), 초간보, 권책수 미상, 실전. - 전의이씨문중에서는 1575년(을해)에 을해보를, 1634
년(신미)에 신미보를 편찬하였다고 하지만, 모두 현전 여부가 불확실하다. 다만, 1754년(갑술) 갑술보 10권10책(운각인서체철활자본)
이 현전한다. 이만배(李萬培) 서(1750), 이정작(李庭綽)-이덕용(李德容) 발, 사간보.
6. [여흥민씨족보(驪興閔氏族譜)], 1478년(무술보), 초찬보, 민규(閔奎) 서, 권책수 미상(系圖 추정), 실전. - 여흥민씨문중의 1622년 임
술보와 1671년 신해보는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확인된 려흥민씨문중의 최고본 족보는 1713년 계사보 8권8책이다.
7. [함양군삼성보(咸陽郡三姓譜)]- 여씨(呂氏) 오씨(吳氏) 박씨(朴氏), 초찬보, 1481년(신축), 실전. - 함양군에 거주하는 함양을 본관으
로 한 함양여씨와 함양오씨 함양박씨의 지역 연합보로 판단되는데 현전하지는 않는다. 함양여씨문중은 1704년에 초간 갑신보를 내었으
나 그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으며, 함양오씨문중은 1778년 무술보 6권6책(목판본)을 - 함양박씨는 1678년에 무오보 5권2책(목판본)을
간행한 것이 각기 현전한다.
8. [남원양씨세보(南原梁氏世譜)]. 1482(갑진보), 초간보, 실전. - 남원양씨문중에서 1589년 계축보 3권3책을 간행하였으나 이 역시 소
장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686년 [양씨대족보(梁氏大族譜)] 병인보 11권2책(목판본)과 1695년 [남원양씨족보(南原梁氏世
譜)] 을해보 9권5책(목판본), 1755년 [양씨대족보(梁氏大族譜)] 을해보 14권4책(목판본) 등은 현전한다.
9. [창녕성씨세보(昌寧成氏世譜)], 1493년(계축보), 초찬보, 권책수 미상, 실전. - 창녕성씨문중에서 간행한 1616년 [창녕성씨세보] 병진
보 1책(觀龍寺 목판본)과 1709년 기축보 4권4책(흥해군 목판본)은 현전한다.
10. [하음봉씨세보(河陰奉氏世譜)], 1493년(계축보), 초찬보, 실전. - 1627년 정묘보, 1656년 병신보, 1705년 을유보, 1764년 갑신보
등도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중의 종원 누군가가 보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1. [충주박씨세계(忠州朴氏世系)], 1514년(갑술보), 초찬보, 실전. - 충주박씨문중에서 발행한 18세기까지의 족보는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
12. [한양조씨세보(漢陽趙氏世譜)], 1524년(갑신보), 초간보, 조원기(趙元紀) 서, 조세정(趙世禎) 발, 초간보, 소장처 미상. - 한양조씨
문중의 현전 최고본 족보는 1652년 [한양조씨세보] 신유보 2권3책(목활자본)이다.
13.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 1529년(기축보), 초간보, 실전. - 양천허씨문중은 1671년 신해보, 1742년 임술보를 간행하였는데,
신해보는 필사본이 현전하며, 임술보는 소장처 미상이다. 1808년 무진보 10권10책(목판본)은 양천허씨대종회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14. [파평윤씨성보(坡平尹氏姓譜)], 1539년(기해보), 초간보, 윤개(尹漑) 찬, 실전. - 1585년 을유보도 현전하지 않는다. 파평윤씨문중
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간행한 1613년 [파평윤씨성보] 계축보 3권1책(목판본), 1634년 [파평윤씨성보] 갑술보 6편1책(목판본), 1682
년 [파평윤씨세보] 임술보 7책(목판본), 1770년 경인보 19책이 현전한다.
15. [진천송씨세보(鎭川宋氏世譜)], 1541년(신축보), 초간보, 실전. - 진천송씨문중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1673년 계축보 2권2책(목판
본), 1737년 정사보, 1784년 기유보 등을 간행하였지만, 모두 소장처 미확인 상태이다.
16. [순흥안씨세보(順興安氏世譜)], 1546년(병오보), 목판본, 초간보, 실전. - 순흥안씨문중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간행한 1614년 [순흥
안씨세보] 갑인보 2권2책(목판본), 1659년 [순흥안씨세보] 기해보 6권3책(목판본), 1765년 을유보 5권5책(목판본), 1796년 병진보
19권19책(목활자본) 등이 모두 현전한다.
17. [옥천전씨족보(沃川全氏族譜)], 1554년(갑인보), 초간보, 전팽령(全彭齡) 서, 소장처 미상. - 1635년 을해보는 소장처 미상이고,
1718년 무술보 2권2책(목판본)은 현전한다.
18. [광릉세보(廣陵世譜)], 1562년경, 초간보, 이준경(李浚慶) 찬, 1책, 활자본, 실전. - 광릉세보는 광주이씨문중의 초간보이다. 초간보
는 임진왜란으로 실전하여 1610년(경술)에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를 편찬하여 1613년(신축)에 경상도 의
성에서 간행한다. 이후 간행한 1724년 갑신보 3권3책(목판본, 함경감영), 1796년 병진보 7권7책(목판본) 등이 모두 현전한다.
19. [남양홍씨세보(南陽洪氏世譜)](토홍). 1576년(병자보), 초간보, 홍섬(洪暹) 서, 권책수 미상, 실전. - 남양홍씨 토홍문중에서 임진왜
란 이후 간행한 1687년 정묘보는 소장처 미상이지만, 1779년 기해보 6권3책(목활자본)은 현전한다.
20. [부안김씨족보(扶安金氏族譜)], 1584년(갑신보), 초간보, 1책, 실전. - 부안김씨는 부령김씨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이후 편성한
1741년 신유보 1책(필사본)과 1774년 갑오보 2권2책(목활자본)이 현전한다.
21. [동래정씨족보(東萊鄭氏族譜)], 1585년(을유보), 초찬보, 정유길 서, 권책수 미상, 실전. - 동래정씨문중은 1665년 [동래정씨족보]
을미보 2권2책(초고본, 이민구 서, 정양필 발)과 1716년 병신보 6권6책(慶州府, 목판본) 등이 현전한다.
22. [영성정씨족보(靈城丁氏族譜)], 1588년(기해보), 초간보, 정경달(丁景達) 서, 1책, 소장처 미상. - 영성정씨는 영광정씨라고도 한다.
영성정씨문중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발행한 1641년 [영성정씨족보] 신사보 1책(목판본), 1702년 임오보 3권3책(목판본)이 현전한다.
1392년부터 1600년까지의 옛 족보 편찬을 조사 정리하는 가운데 의외로 7년의 임진왜란 전쟁기간에 남평문씨문중과 청주정씨문중에
서 족보 편성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찾게 되었다. 두 문중이 임진왜란 와중에서도 족보를 편성하였다는 점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23. [남평문씨족보(南平文氏族譜)], 1594~1596년경, 이노(李魯) 서(序), 초고본으로 추정, 실전. - 남평문씨문중에서 1683년 이후에 간
행한 종보(從譜) 1책(목활자본)에 1594년부터 1596년 사이에 이노(李魯)가 쓴 서문이 들어 있다. 1594년부터 1596년 사이에는 임
진왜란이 소강상태로 들어가 있던 시기였지만. 이 족보는 임진왜란에서 사망한 종인(宗人)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편성한 계보로서 간행
하지 않은 초고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진왜란 이후 남평문씨문중에서는 1683년 이후에 1책(목활자본, 從譜)을, 1731년 신해보 3권3책(목판본, 長興 月川書院), 1735년
을묘보 2권2책(목판본, 진주 오대사), 1736년 병진보 3권3책(목판본, 해인사), 정조(正祖, 재위 1777~1800)조에 1책(필사본)을 편
찬하거나 간행한 것이 현전한다.
24. [청주정씨가승(淸州鄭氏家乘)], 1595년(을미년), 초보(抄譜), 실전. - 청주정씨문중의 계보는 족보나 세보라기보다는 한 일족을 담은
[청주정씨가승(淸州鄭氏家乘)]이다. 1595년 을미보 역시 간행되었다기보다는 간략한 초보(抄譜)로 판단된다. 즉 을미보는 초찬보로
본다, 임진왜란 이후에 편성된 청주정씨의 세보는 1827년 정해보 6권6책(목활자본, 성주 회연서원)이 현전하지만, 1827년 정해보는
1595년 을미보 이후 네 번째 편성한 족보로 확인된다.
3. 조선시대 족보의 편찬 간행에 관하여
족보나 문집은 예나 지금이나 간행 부수를 한정하여 발행한다. 유통업이 발달한 현대에도 다른 출판물과는 달리 족보는 출판 후 서점 판매가 없고, 판매가 완료된 후에는 구매하기가 어렵다. 조선시대에 거질(巨帙)의 출판물을 목판본으로 만들 때 많은 경비가 들었다. 그러므로 족보를 편찬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발행하는 때도 있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목판본으로 판각하여 만들기보다는 재활용이 가능한 목활자를 만들어 활판(活版)으로 조판(組版)하여 간행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출판을 위하여 등짐장수(負商)처럼 목활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대규모 집성 마을을 찾아다니며 문집과 족보를 인쇄해 주는 이동 출판업이 생성되기도 하였다.
조선말기까지 족보는 인출할 경우 많은 경비가 들어, 그것을 분담하여야 하므로 대체로 적게는 10부 정도 많으면 50부 발행하는 것이 전부였다. 거질(巨帙)일수록 분질가(分帙家)가 높아져 발행 부수가 적었다. 거질의 경우 자기 친척들이 들어가 있는 중요 부분만 발췌 제본한 족보도 현전하고 있다.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 초간본은 1562년 재간본(임술보)과 1578년 삼간본(무인보)을 편찬하면서 초판본 판목의 앞부분을 재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간행한 족보는 대체로 종가(宗家)에 보관하거나 신분이 높은 관리, 또는 부잣집이어야 한 부를 모실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소부수 출판에는 목활자가 유용함을 널리 인지하여 족보를 출판하는 공정(工程)에서 목판이 차츰 목활자로 교체된다. 그리고 수요가 10부 미만이면 인쇄하지 않고, 필사 복제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필사도 하나의 복제 수단이었으므로, 여러 부의 필사본 제작도 출판 행위로 볼 수 있다. 인쇄한 초간보는 없고, 원고로 보이는 초찬보가 상당수 남아있는 이유가 필사 출판이었던 것이다.
족보는 초간보를 발행한 후, 재간보를 발행하면 초간보의 생명은 끝나는 것으로 여겼다. 초간보에 없던 새로 출생한 자녀들이 기록되어 들어가니, 초간보는 벽장(壁欌)이나 다락방, 또는 사당(祠堂, 家廟)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쥐가 쏠고, 좀이 먹으며, 누수로 젖었다. 그러나 가문(家門) 의식이 높은 가(家)에서는 족보를 가장 중요한 장소에 소중히 모셨다. 족보는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신다고 하였다. 족보의 내용을 보면 가문이 보이고, 족보의 보존 상태를 보면 집안의 처지가 보인다.
여러 문중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한 족보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고 주장한다. 50년전 족보를 처음 수집할 때는 그런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족보를 연구하다 보면, 그런 주장은 사실임을 자연히 알게 된다. 족보는 애당초 적은 부수를 발행하였기 때문에 전란 중에 한 부라도 남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족보의 발행 부수는 사찰의 불경 발행 부수보다 적었고, 조선사회는 신분 사회였으나, 실제로 남아있는 옛 족보의 수량은 매우 적다. 특히 신분 사회가 무너진 갑오동학농민혁명(1894년)과 갑오경장6) 이전의 족보는 더욱 희소하다.
4. 맺음말 ; 옛 족보도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야
이상의 탐색으로 보았을 때 제대로 족보답게 편성한 우리나라의 최고본 족보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 3권3책(목판본)이다. 그 뒤를 이어 1545년 [청송심씨족보] 1책(목판본)이 현전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족보를 간행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목판본으로 간행한 현전하는 족보는 ‘①1476년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와 ②1545년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③1565년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와 ④[강릉김씨족보(江陵金氏族譜)], ⑤1576년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⑥1578년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⑦1580년 [안동김씨성보(安東金氏姓譜)]-구 안동’ 등의 7종에 불과하다.
필사본으로는 ①[대종보(大宗譜)]와 ②1553년 [의성김씨세보(義城金氏世譜)] 등 2종이 있다.
이상의 7종의 목판본과 2종의 필사본 족보는 모두 유일본이며, 그 희소성은 삼국시대나 후기 신라시대 불경의 현전본보다도 적다. 임진왜란 이전의 이 족보 9종은 반드시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이후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제대로 족보답게 편성하여 간행한 첫 족보는 이영도(李詠道)가 도산서원에서 편찬한 1600년 [진성이씨족보(眞城李氏族譜)] 경자보인데, 이 족보는 복본으로 현전한다.
조선중기의 족보까지만 해도 각 문중의 상호 인척 관계는 족보상에서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족보학에서는 조선후기의 족보도 초간보는 대체로 신뢰하여야 한다고 본다. 초간보와 재간보는 후일 족보에 나타나는 위계(僞系)를 분별해 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5년 7월 21일 현재까지 우리나라 국가유산청에서 옛 족보를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한 것은 한 점도 없다. ‘시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모두 15점([표1])에 불과하고, 족보 판목이 지방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모두 16종(표2)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는 다른 나라들의 계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수록 범위가 광대(廣大)하면서도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서만이 이렇게 시작이 분명한 각 씨족의 옛 족보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는 세계적으로 우수하다. 매우 우수하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전에 간행된 각 문중의 옛 족보는 대부분 그 내용이 상호 검증된다. 우리나라의 정확한 옛 족보가 지닌 효용 가치는 조선시대의 사회제도 연구뿐만 아니라, 문화인류학이나 역사학, 유전학, 문중 심리학 등의 연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세계적인 옛 족보의 의미와 가치가 폄훼되어, 국가유산(문화재)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경제 수탈뿐만 아니라 식민지 역사관을 퍼트렸고, 우리 말 사용을 금지했으며, 신사참배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다.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이란 인물은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자결하였다.7)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성을 지킨다는 것은 본관을 지킨다는 것이며, 씨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의미이고, 조상을 기억하여 일본 놈이 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반항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리나라의 옛 족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우리 각자가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가문의 전통적이며 정통적인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의미이다.
편성할 때부터 한정판으로 계획된 우리나라의 옛 족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18세기 중반 이전에 편찬된 각 문중의 중요한 옛 족보를 국가문화유산이나 지방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위의 [표1]과 [표2]를 보면 서울 강원 부산 광주 제주에는 족보도 판목도 한 점 지정되어 있지 않다. 국가유산청이 나서고, 어느 지자체가 먼저 주도적으로 호응해 나설 것인가? 우리나라의 옛 족보를 국가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업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안동권씨세보], 1476년, 목판본, 3권3책,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청송심씨족보』 을사보 첫 장 앞면, 1545년, 목판본, 청송심문 개인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대종보]- 영일정씨 감무공파 족보, 초고본, 1545년경. [사진 제공 – 이양재]
[고령신씨족보](어성보), 1578년(무인보), 초간보, 목판본, 3권2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