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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1권 / 묘갈명(墓碣銘)
성호 이 선생 묘갈명(星湖李先生墓碣銘)
선생은 휘가 익(瀷)이고 자는 자신(子新)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광주(廣州) 첨성리(瞻星里)에서 은거하며 도를 닦았으니, 호를 성호(星湖)라고 스스로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다. 선생은 태어난 지 2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선생의 모친은 선생이 깡마르고 툭하면 병치레하는 것을 걱정해서 일찍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게 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둘째 형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을 모시고 배우면서 전심으로 학업에 몰두하였는데,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여러 책을 두루 보았다. 둘째 형이 세상의 참화를 입게 되자 세상사에 미련을 버려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셋째 형 옥동(玉洞) 이서(李漵)와 사촌 형 소은(素隱) 이진(李𤂪) 두 분과 어울려 지냈다.
개연(慨然)히 도학을 추구하는 마음을 품고 방 한 칸에 단정히 앉아서 경전 및 송(宋)나라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우리나라 퇴계(退溪)의 글을 늘 읽고 생각하여 파죽지세로 세세히 이해하였다. 대개 선생이 도에 들어가는 방도로는 오직 경(敬)을 위주로 하였으니, 일찍이 말하기를 “발하기 전에는 정(靜)한 때의 경이 있고, 발하고 난 뒤에는 동(動)한 때의 경이 있다.
그러나 동한 때의 경 역시 다만 정한 때의 공부에 바탕을 둔다. 만약에 정한 때 경을 주로 하지 못한다면 동한 때 어떻게 경을 지켜서 바르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서 〈경재잠도(敬齋箴圖)〉와 〈경재잠설(敬齋箴說)〉을 지었는데 “동한 때와 정한 때가 어긋남이 없고 내면과 외면이 서로 바르게 되어야 한다.[動靜不違 表裏交正]”라는 구절을 절도로 삼았다.
공이 학문을 증진한 방법으로 말하자면, 실천은 반드시 아는 것이 우선이므로 치지(致知)를 역행(力行)의 뿌리로 삼았고, 아는 것은 장차 실천하기 위해서이므로 역행을 치지의 열매라 여겼다. 후대의 학자들이 문구 같은 여줄가리에만 전념하고 실제적인 공부에는 대부분 착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늘 말하기를 “그 말을 배웠다 해도 마음으로 반드시 깨닫는 것은 아니고, 마음으로는 비록 깨달았다 해도 몸으로 반드시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몸에 체득한 뒤에야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정한 때는 보존하고 동한 때는 살피며, 진정으로 알고 힘써 실천하여 공부에 편중하지 않는 것이 이러하였다. 조정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연로한 뒤에는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었다. 아, 선생께서는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을 했던 나이보다 배를 더 누리고도 몇 년을 더 사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에 대해 하나라도 궁구하지 않은 이치가 없었고 마땅히 해야 할 직분에 대해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일이 없었다. 행(行)은 천지신명에 통할 만했는데 그 근원은 계구(戒懼)와 근독(謹獨)에서 나왔고, 도(道)는 하늘과 사람을 관통할 만했는데 그 기초는 조금조금 노력을 쌓은 데서 비롯되었다.
땅이 만물을 실어 주고 바다가 다른 강물을 포용하듯이 범위가 넓었고 가느다란 누에 실과 소털처럼 분석을 치밀하게 하였으니, 선생의 학문을 세상에 펼치게 했더라면, 군주는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되고 백성은 요순의 백성이 되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선생은 당시 액운을 겪어 참되고 바른 포부를 조금도 펼칠 수 없었으니, 후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법에 엄격했던 가행(家行)이고, 전수할 수 있는 것은 종이 위에 기록되어 있는 지론(至論)뿐이다. 가행으로 말하자면, 늘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애통해하여, 아버지를 언급할 때면 늘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고 노쇠하여서도 그러하였다.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갑년이 되던 해에 추복(追服)하려다가 이윽고 말하기를 “퇴옹(退翁 이황(李滉))도 나처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추복을 하지 않으셨다. 퇴옹은 내 스승이니 어찌 감히 지나치게 할 수 있으랴.” 하고서, 여생을 마치도록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며 지냈는데,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상중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평소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사당에 배알하고, 서실로 물러나 앉아 옷차림을 반드시 가다듬었고, 사우(士友)들과 만나면 배읍(拜揖)을 반드시 공손하게 하며 “절은 예의 시작이니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런 까닭에 사차(私次)에서 묵는 문인과 자제는 들어갈 때 반드시 절하고서 뵙고, 나올 때 반드시 절하고서 인사를 드렸다.
규문 안은 정숙하여 비록 후손이나 친족이라도 연유 없이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 않았고, 늘 《주역》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의 “집안사람들이 비록 원망하지만 집을 다스리는 도리에서는 잘못이 아니다.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함은 집안 예절을 잃은 것이다.[家人嗃嗃 未失也 婦子譆譆 失家節也]”라는 구절을 외웠다.
형제와 자질(子姪)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성심으로 아끼고 교육하였다. 비록 먼 친족이라도 굶주리면 구휼해 주고 병들면 약을 주고 죽으면 부조해 주며, 시집이나 장가를 갈 시기를 놓친 사람이 있으면 혼수품을 마련하여 인륜을 저버리지 않게 하였다.
선대의 무덤에 대수가 멀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분이 있으면 각각 묘전(墓田)을 두어서 10월에 제사를 지냈다. 8대조인 경헌공(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의 사당을 종자(宗子)의 집에 세우고 해마다 종인(宗人)을 데리고 한 차례 제사를 지냈다.
글을 지어서 그 뜻을 밝히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공자(公子)나 훈신(勳臣) 말고 종가의 맏아들을 세워서 대를 잇게 한다는 글이 없다. 그러므로 서성(庶姓)의 대족(大族)들은 흩어져 계통이 없다. 그러나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근거하면 ‘별자는 조가 되고 별자를 계승한 사람은 종이 된다.[別子爲祖 繼別爲宗]’라고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注)에 ‘비록 별자가 아니라 해도 처음에 작위를 받은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있다.[雖非別子 始爵者亦然]’라고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이성으로서 대부가 된 사람 역시 태조가 될 수 있다.[異姓爲大夫者 亦得爲太祖]’라고 하였으니, 이는 서성도 맏아들을 세워서 대를 잇게 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하였다.
지론으로 말하자면, 모두 깊은 연구를 통해 스스로 터득하여 이전 사람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이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대해 논하기를, “〈하도〉의 수는 기우(奇耦)를 〈선천도(先天圖)〉로 삼고 배합하는 것을 〈후천도(後天圖)〉로 삼고 생성하는 것을 〈낙서〉로 삼는다.
〈낙서〉가 부연되어 〈홍범(洪範)〉이 만들어졌다. 《서경》 〈홍범〉에서 두 번째 오사(五事)의 숙(肅), 예(乂), 철(哲), 모(謀), 성(聖)이 여덟 번째 서징(庶徵)에 서로 나타나 있고 〈낙서〉 중에 2와 8은 자리가 바뀌었으니, 기자(箕子)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삼대(三代)의 정전제(井田制)에 대해 논하기를, “50무(畝)에서 70무로 바뀌고 70무에서 100무로 바뀐 것은 마치 토지 구획을 바꾼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대 학자들이 의심하였으나 분석이 어렵지 않다.”하고, 곧 1정(井)은 9전(田)이고 1전은 4구(區)이고 구는 사방 50보(步)의 제도임을 변증하여 하(夏)나라 때는 1부(夫)가 1구를 받고 은(殷)나라 때는 1부가 2구를 더 받고 주(周)나라 때는 1부가 4구를 더 받은 것을 밝혀내었다.
그러고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정전이 50무에서 바뀌어 70무와 100무에 이른 것은 당연하다. 맹자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삼대의 정삭(正朔)에 대해 논하기를, “시(時)와 월(月)을 바꾼 것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분분하여 절충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시경》, 《서경》, 《주역》에서 고찰해 보니 분명히 시와 월을 바꾸지 않았고, 《춘추(春秋)》와 《맹자》 및 맹헌자(孟獻子)의 말을 고찰해 보니 분명히 시와 월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시와 월을 바꾼 것은 주나라가 동천한 이후 말세의 잘못이다. 동천하기 전에 시와 월을 바꾸었다는 글을 찾아낼 수 있는 자가 있는가?”하였다.
〈왕풍(王風)〉에 대해 논하기를, “정현을 비롯한 학자들은 모두 주나라가 동천한 이후에 왕실이 미약해져서 제후들과 동격 취급을 받았기에 아(雅)가 되지 않고 풍(風)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풍과 아는 각자 체재가 있으니 주나라의 흥망성쇠와는 관련이 없다.
주나라가 한창 융성할 때도 풍이 있었으니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이 이런 내용이고, 제후들이 미약했을 때도 아가 있었으니 〈억(抑)〉이 이런 작품이다. 왕도 정치의 은택이 고갈되자 변아(變雅)가 만들어졌는데, 주나라 평왕(平王)이 비록 미약했지만 어찌 변아의 끝에 낄 수 없었겠는가.
계찰(季札)이 주나라의 음악 연주를 구경할 때 왕(王) 지역은 위(衛)나라 부근에 있었다. 패(邶), 용(鄘), 위(衛), 왕은 모두 동도(東都) 지역이고, 동도는 왕도(王都)이니, 천자가 제후에게 조회를 받는 곳인데 후대에야 옮겨 살았다. 무릇 대도시는 모두 시(詩)를 가지고 민속을 관찰하였으니, 앞에는 빈(豳)과 주(周)에 풍이 있고 뒤에는 왕성(王城)에 풍이 있었다. 〈왕풍〉이라 한 것은 왕성의 풍을 말하는 것이지 평왕 때문에 지은 것이 아니다.”하였다.
삼경(三經)과 사서(四書) 및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에 대해서는 글자마다 그 의미를 찾고 구절마다 그 요지를 찾아서 모두 질서(疾書)를 지었으니, 대개 장횡거(張橫渠)의 “묘리를 터득하면 빨리 썼다.”라는 취지를 취한 것이다.
질서의 순서는 《맹자》부터 시작했는데 “세대로 말하자면 뒤 세대이고, 의미로 말하자면 내용이 상세하다. 뒤 세대이니 가깝고, 상세하니 뜻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인의 뜻을 찾으려면 반드시 《맹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예(禮)의 근원에 대해서는 삼례(三禮)를 기본으로 하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및 역대 학자들의 학설에 두루 통달하여 《가례(家禮)》와 절충하였으므로 《가례질서(家禮疾書)》를 지었다. 〈산절한 관의[刪節冠儀]〉, 〈신부 맞이 의식[娶婦儀]〉과 〈딸 출가 의식[嫁女儀]〉, 《상위록(喪威錄)》, 《묘묘향사의(廟墓享祀儀)》 같은 여러 편으로 말하자면 저술하여 일가의 법으로 삼은 것이다.
퇴계를 존경하고 흠모함이 주자를 흠모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아서 유집(遺集) 및 문인들이 기록한 것에 보이는 언행을 《근사록》의 체례처럼 편집하고 책 이름을 《도동록(道東錄)》이라 하였다. 또 예에 대해 논설한 글을 뽑아 분류하고 엮어서 책 이름을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이라 하였다.
퇴계 이후로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에 대한 학설이, 주자가 해석한 “도심(道心)은 의리에서 발동하고,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에서 발동한다.”라는 내용과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실린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라는 내용과 어긋나는 것을 근심하여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찬술해서 주자의 뜻을 드러내고 퇴계의 학설을 보조하였다. 비록 전원에 살면서도 이 세상 일을 자기 걱정거리로 생각하여 《곽우록(藿憂錄)》과 《사설(僿說)》 등의 책을 찬술하였다.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기를, “백대 동안 훌륭한 치세가 없는 것은 세 가지 재앙 때문이다.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억압하는 것은 진(秦)나라 영정(嬴政 진 시황(秦始皇))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한(漢)나라가 개혁하지 못했으며, 사람을 등용함에 문벌을 중시한 것은 위(魏)나라 조아만(曹阿瞞 조조(曹操)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진(晉)나라가 개혁하지 못했으며, 문장으로 과거 시험을 본 것은 양광(楊廣 수 양제(隋煬帝))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당(唐)나라가 개혁하지 못하였다.
세 가지 재앙이 제거되지 않으면 치세를 말할 수 없는데, 세 가지 중에 과거가 더 해롭다. 그래도 차선책을 말한다면 당나라의 양관(楊綰)이 논한 효렴과(孝廉科)나 우리나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말한 현량과(賢良科)가 아마도 그 차선책일 것이다. 정암 선생은 이미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는데 한 사람도 거행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선가?”하였다.
우리나라 역사가 소루하고 어긋난 것을 근심하여 문인인 안정복(安鼎福)에게 글을 쓰라 부탁하고는 글의 범례를 주어서 마침내 믿을 만한 역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완성하였다. 저술한 시문에 찬집한 여러 글을 아우르면 모두 수백여 권이다.
요약하자면, 학문은 수사를 빼고 실용적인 것에 힘썼고, 예를 논한 것은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랐고, 경세제민은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 주는 것을 주장했는데, 모두 근본을 탐구하고 요점을 끌어냄에 각각 조리가 있어서 이를 거행할 만하였으니, 아, 참으로 성대하다.
이씨(李氏)는 본래 계보가 여주(驪州)에서 나왔다. 비조는 고려의 인용교위(仁勇校尉)인 이인덕(李仁德)이다. 8대조는 휘가 계손(繼孫)으로 병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경헌(敬憲)이니, 일찍이 함경도 관찰사를 맡아서 유교의 교화가 크게 드러나자, 북쪽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서 선사(先師)의 예로 제사 지냈다.
증조는 휘가 상의(尙毅)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이니, 바로 목릉(穆陵 선조)의 명신이었다. 할아버지는 휘가 지안(志安)으로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며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함께 총산(蔥山) 정언옹(鄭彦𧦱) 문하에서 교류하며 도의로 서로 추중하였다.
아버지는 휘가 하진(夏鎭)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으며, 숙종 때 힘을 다해 청의(淸議)를 붙들어서 사류(士類)의 존경을 받았다. 전비(前妣)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유수를 지낸 이후산(李後山)의 따님이며, 후비(後妣)는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권대후(權大後)의 따님이니, 선생은 권 부인의 소생이다.
선생은 숙종 신유년(1681, 숙종7)에 태어나서 영종 계미년(1763, 영조39)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83세이다. 속광(屬纊)하자마자 찬장에 있는 음식을 올리고, 성빈(成殯)하기 전에는 아침저녁으로 음식 올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염(斂)할 때는 종이 이불을 쓰고 종이에다 명정(銘旌)을 썼으며, 관에는 옻칠을 하지 않고 송진을 발랐으니, 모두 선생이 평소에 정해 둔 것이다.
문하 제자들은 모두 조복(弔服) 차림에 가마(加麻)하고서 기년까지 있었고, 단문(袒免) 이외의 족인들은 포건(布巾)과 포대(布帶)를 하고 장례를 지낸 뒤에 벗었다. 장지는 집 북쪽의 임좌(壬坐) 언덕에 있다. 선생은 처음에 고령 신씨(高靈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정언 신필청(申必淸)의 따님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
다시 사천 목씨(泗川睦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진사 목천건(睦天健)의 따님이다. 두 부인은 선생의 묘에 합장되었다. 아들 맹휴(孟休)는 문과 장원을 했는데 관직이 정랑에 그쳤고, 가학을 전할 수 있었는데 일찍 죽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딸은 위솔(衛率) 이극성(李克誠)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참판 채팽윤(蔡彭胤)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구환(九煥)은 성균관 생원이다. 이극성은 윤하(潤夏)를 양자로 두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경기 관찰사가 되어 군현을 순행할 때 길을 우회하여 첨성리 댁에 있는 선생을 찾아가 뵌 적이 있었다.
선생은 당시 연세가 81세로 처마가 낮은 허름한 집에서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눈에서는 광채가 번쩍거려 쏘아보는 듯하고 듬성듬성한 수염은 허리띠까지 내려와 있었다. 절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숙연해져 존경심이 일어났는데, 다가갔더니 온화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었다.
경전의 뜻을 강론하고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여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사가 사람을 몰아대니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적막한 물가에 와서 선생을 섬길 수 없는 것을 스스로 아쉽게 생각했다. 이제 36년이 지나 선생의 종손(從孫)인 처사 이삼환(李森煥) 군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저 늙은이일 뿐이니 어찌 도학의 기상을 가진 분을 잘 표현할 수 있으랴. 다만 우리나라의 도학은 본래 이어져 온 계통이 있으니, 퇴계는 우리나라의 부자(夫子)로 그의 도통을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전하였고, 한강 정구는 그의 도통을 미수 허목에게 전하였다.
선생은 미수를 사숙한 분으로, 미수를 배우고 퇴계의 실마리를 이었으니, 후대의 학자들은 사문(斯文)이 적통끼리 계승하여 속일 수 없음을 안 뒤에야 지향점을 헷갈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선생에 대한 명을 지어도 되겠느냐고 하니, 처사군이 “그 말씀이 요점만 있어서 번거롭지 않으니, 선생을 잘 아시는군요.”라고 하였다. 마침내 옷을 여미고서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도를 품고도 은택을 펴지 못하니 / 抱道而莫能致澤
당대의 불행이나 / 一世之不幸
책을 써서 충분히 은혜를 베푸시니 / 著書而亦足嘉惠
백대의 행운이라 / 百世之幸
하늘의 뜻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 天之意無乃在是歟
당대는 짧으나 백대는 영원하지 / 一世短而百世永
선생의 명을 써서 우리 당을 면려하니 / 銘先生而勉吾黨
어찌 선생의 글을 읽지 않는가 / 盍與讀先生書
도통의 전수는 자기에게 달렸지 남에게 달렸겠는가 / 傳統由己而由人乎
<끝>
[註解]
[주01] 둘째 …… 되자 : 이잠은 1680년(숙종6)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운산(雲山)에 유배되자 과거를 포
기하고 방랑 생활을 하였고, 1706년 김춘택(金春澤)이 세자 책봉을 방해하자, 이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국
문을 받고 죽었다. 《肅宗實錄 8年 6月 26日, 32年 9月 17日ㆍ20日》
[주02] 동한 때와 …… 한다[動靜不違 表裏交正] : 주희(朱熹)가 지은 〈경재잠(敬齋箴)〉의 일부 구절로, 《회암집(晦庵集)》 권85에 실
려 있다. 여기서 주희는 이 글을 지은 취지에 대해 “장경부(張敬夫)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서 그가 남겨 놓은 뜻을 정리하여
〈경재잠〉을 짓고는 서재의 벽에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라고 하였다.
[주03] 맹자가 …… 나이 : 맹자의 제자 공손추(公孫丑)가 일찍이 맹자에게 묻기를 “부자께서 제(齊)나라의 경상 지위에 오르시어 도를 행
할 수 있게 된다면 이로 말미암아 패자나 왕자가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마음이 동요하시겠습니까?” 하
자, 맹자가 이르기를 “아니다. 나는 40세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노라.[否! 我四十不動心.]”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주04] 계구(戒懼)와 근독(謹獨) : 계신 공구(戒愼恐懼)와 신기독(愼其獨)에서 나온 말로, 《중용장구》 제1장에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
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고 한다면 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아도 조심하는 것이요, 들리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숨어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
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하였다.
[주05] 예기(禮記) …… 하였고 : 별자는 고대 종법제(宗法制)에서 제후(諸侯)의 적장자를 제외한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이익(李瀷)이
인용한 내용은 《예기》 〈왕제〉가 아니라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나온다.
[주06] 정현(鄭玄)의 …… 하였으니 : 이익이 “별자는 조가 되고 별자를 계승한 사람은 종이 된다.”라는 말의 근거로 든 정현의 주와 공영
달의 소는 《예기》 〈왕제〉의 “천자는 7묘니, 3소, 3목과 태조의 묘를 합쳐서 7묘이다. 제후는 5묘이니, 2소, 2목과 태조의 묘를 합
쳐서 5묘이다.
대부는 3묘이니, 1소, 1목과 태조의 묘를 합쳐서 3묘이다. 사는 1묘이다. 서인은 정침에서 제사 지낸다.[天子七廟, 三昭三穆與大
祖之廟而七.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大祖之廟而五. 大夫三廟, 一昭一穆與大祖之廟而三. 士一廟. 庶人祭於寢.]”라는 내용에 있
다.
[주07] 서경 …… 있고 : 《서경》 〈홍범〉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아홉 가지 항목을 말하였는데, 그 아홉 가지 항목은 오행(五行),
오사,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 오복(五福)이다. 그중에서 두 번째 오사와 여덟 번째 서
징은 서로 상호 관련이 있다. 오사는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로, 다섯 가지 덕(德)인 공(恭), 종(從), 명(明), 총(聰),
예(睿)에 대응한다.
이 다섯 가지 덕은 또 다섯 가지 용(用)인 숙, 예, 철, 모, 성에 대응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 징조로 나타나는 것이 서징이다. 서징은
비[雨], 볕[暘], 더위[燠], 추위[寒], 바람[風]으로 ‘아름다운 징조[休徵]’와 ‘불길한 징조[咎徵]’로 나뉜다. ‘엄숙하니 때맞춰 비가
내린다.[肅時雨若]’, ‘조리(條理)가 있으니 때맞춰 날이 갠다.[乂時暘若]’, ‘지혜로우니 때맞춰 날이 따뜻해진다.[哲時燠若]’, ‘일
을 헤아리니 때맞춰 날이 추워진다.[謀時寒若]’, ‘성스러우니 때맞춰 바람이 분다.[聖時風若]’라는 것은 아름다운 징조이다.
‘군주가 잘난 척하고 안하무인이면 늘 비가 온다.[狂恒雨若]’, ‘참람된 짓을 하면 늘 볕이 난다.[僭恒暘若]’, ‘게으르면 늘 덥다.[豫
恒燠若]’, ‘성급하면 늘 춥다.[急恒寒若]’, ‘무지몽매하면 늘 바람이 분다.[蒙恒風若]’라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書經集傳 洪
範》
[주08] 50무(畝)에서 …… 것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하후씨(夏后氏)는 50무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나라 사람은 70무에
조법(助法)을 썼고, 주나라 사람은 100무에 철법(徹法)을 썼으니, 사실은 모두 10분의 1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주09] 맹헌자(孟獻子)의 말 : 《예기》 〈잡기(雜記)〉에서 “맹헌자가 ‘1월 일지(日至)에 상제에게 제사할 수 있고, 7월 일지에 시조(始祖)
에게 제사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7월 체(禘) 제사는 맹헌자가 한 것이다.”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주10] 주나라가 …… 내용이고 : 주(周)는 나라 이름이고, 남(南)은 남쪽 제후 나라를 가리킨다. 소(召)는 지명으로 소공(召公) 석(奭)의
채읍이다.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는 “문왕이 주공에게는 주나라 안에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소공에게는 제후들에게 정사를
펴도록 하자, 덕화(德化)가 국내에서 크게 이루어지고, 남방 제후국과 강(江), 타(沱), 여(汝), 한(漢)의 사이에 있는 나라가 모두
따라서 교화되니,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주남〉과 〈소남〉에는 바로 이 당시의 상황을 노래한 시가 수록되
어 있다.
[주11] 변아(變雅) : 《시경》 〈소아(小雅)〉의 일부분으로, 〈시전대전서(詩傳大全序)〉에서는 “왕도가 쇠퇴하여 예의가 무너지고 정교가
잘못되자 나라마다 정사가 달라지고 집마다 풍속이 달라져서 변풍(變風)과 변아가 생겼다.”라고 하여 변아가 주나라 혼란기에 생
겨난 것으로 보았다.
[주12] 묘리를 …… 썼다 : 주희가 장재(張載)에 대해 쓴 〈횡거선생찬(橫渠先生贊)〉의 “일찍이 손오(孫吳) 병법을 좋아했고, 말년에는
불로(佛老) 사상으로 도피했네. 용감하게 그 자리를 거두고 한번 변하자 도에 이르렀네.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며 묘리를 터
득하면 빨리 썼네. 〈정완(訂頑)〉의 가르침, 우리에게 인(仁)의 길을 보여 주었네.”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13] 신부 맞이 의식[娶婦儀] : 《성호전집》 권48에 나온다. 여기서는 신부를 맞이하는 단계를 고묘(告廟), 청기(請期), 납폐(納幣), 지
(贄), 신부가 시부모를 뵙는 의식[婦見舅姑], 신부가 시부모에게 음식을 올리는 의식[婦饋舅姑], 신부에게 음식을 먹이는 의식[饗
婦], 묘현(廟見)으로 구분하였다.[주-D014] 상위록(喪威錄) : 《상위일록(喪威日錄)》을 가리킨다. 이익이 1746년(영조22) 무렵
부인상을 치르면서 상례와 제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책이다.
[주15] 도동록(道東錄) : 현재 전해지는 《이자수어(李子粹語)》가 바로 이 책이다. 이익이 제자인 안정복(安鼎福) 및 윤동규(尹東奎) 등
과 상의하여 이황의 글과 그 문인들의 글 중에서 요긴한 부분을 뽑아서 종류별로 엮은 책으로, 이후에 내용을 더 증보하여 1753년
에 완성하면서 이름을 《이자수어》로 고쳤다. 《順菴集 卷18 李子粹語序》
[주16]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 이익이 이황의 편지 중에서 예(禮)와 관련된 부분을 모으고 유형별로 편집한 책이다. 《星湖全集 卷49
李先生禮說類編序》
[주17] 도심(道心)은 …… 발동한다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를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내용에서 집전(集傳)에 “형기에서 발동하는 것을 가리켜
서 말하면 인심이고, 의리에서 발동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면 도심이다.[指其發於形氣者而言則謂之人心, 指其發於義理者而言
則謂之道心.]”라고 하였다.
[주18] 사람을 …… 시작되었는데 : 이는 위진(魏晉) 시대 인재 등용법인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말한다. 위나라의 진군(陳群)이 발의
하여 시행되었는데, 이는 각 지역에 중정(中正)을 설치하고 감식안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 인재를 선별하여 그 등급을 나누게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권력가들의 세력을 넓히는 정치도구로 전락하였다. 청(淸)나라의 조익(趙翼)이 쓴 《이십이
사차기(二十二史箚記)》에서는 “상위 등급에는 한문이 없고 하위 등급에는 세족이 없다.[上品無寒門, 下品無世族.]”라는 말로
이 제도의 폐단을 설명하였다.
[주19] 양관(楊綰)이 논한 효렴과(孝廉科) : 양관은 당나라 대종(代宗) 때 사람이다. 당시 예부 시랑으로 상소하여 명경과(明經科)와 진사
과(進士科) 및 도거과(道擧科)를 정지하고, 효렴과를 시행하자고 청하였다. 《資治通鑑 卷222 代宗睿文孝武皇帝上之上》
[주20] 정암(靜菴) …… 현량과(賢良科) : 이 제도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사림을 등용하려는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1519년(중종14) 4월 10일에 120인의 후보자들을 근정전(勤政殿)에 모아 놓고 시험을 쳐서 28인을 선발하였다. 《燃藜室記
述 卷8 賢良科罷復》
[주21] 안정복(安鼎福)에게 …… 완성하였다 : 《동사강목》은 단군 조선에서 고려 말기까지를 다룬 강목체 역사서이다. 안정복이 《동
사강목》을 편찬하기 위해서 이익과 편지로 토론한 내용이 《순암집(順菴集)》 권10 〈동사문답(東史問答)〉에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정기 이유찬 정문채 (공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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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星湖李先生墓碣銘
先生諱瀷。字子新。姓李氏。隱居修道於廣州之瞻星里。自號曰星湖。以是也。先生生二歲而孤。母夫人憂其淸羸善病。不使早就傅。稍長。從仲兄剡溪公學。專心劬業。聰穎絶人。博覽羣書。及仲兄罹世禍。無意於世。棄擧子業。從第三兄玉洞, 從父兄素隱二公遊。慨然有求道之志。危坐一室。取經傳及有宋程朱我東退溪書。俯讀仰思。刃迎縷解。葢其入道之門。惟敬是 主。嘗曰 。未發。有靜時敬。已發。有動時敬。然動時之敬。亦只本於靜時工夫。若靜不能主敬。動如何持守得正。作敬齋箴圖若說。以動靜不違表裏交正爲節度焉。若其進學之方。行必以知爲先。故以致知爲力行之本。知之將以行之。故以力行爲致知之實。病後之學者或專意言句之末而其於實工。多未肯下手。每曰學其言而心未必喩。心雖喩而身未必行。要須體之於己。然後心可喩而身可行。其靜存動察。眞知力行。用工之無所偏倚。有如是者。朝廷聞其名。除繕工監假監役。不就。旣篤老。授僉知中樞府事 。葢優老之典也。嗚呼。先生之壽。視孟子不動心之年。加倍而尙有餘籌。凡於性分之所固有。無一理之不究。職分之所當然。無一事之不備。行可以通神明而其原出於戒懼謹獨。道可以貫天人而其基始於銖累寸積。地載海涵。範圍之大也。蠶絲牛毛。分數之密也。以之使展布於世。則君而爲堯舜之君。民而爲堯舜之民。理在不疑。乃先生阨於時。眞正抱負。不克施一二。後生之所得以見者。惟家行之嚴於禮律也。所可以傳者。獨至論之載諸紙上者。其以家行言之。常以不識先考顔範爲至痛。語及未嘗不泫然垂涕。至衰老亦然。 後當先考不諱之歲欲追服。已而曰。退翁亦如吾幼孤。然莫之行焉。退翁吾師也。豈敢過也。終其年齋素。以居哀慕。無異持縗。平居。晨起謁廟。退坐書室。衣帶必飭。士友相見。拜揖必恭曰。拜爲禮始。何憚而不爲。以故門人子弟經宿私次者。入必拜見。出必拜辭。閨門斬斬如也。雖子姓親族。不許無故入內。常誦易之家人曰。家人嗃嗃未失也。婦子譆譆失家節也。其於兄弟子姪。恩愛敎育。一出於誠。雖族踈者。飢則周。病則藥。死而賻襚之。嫁娶有失時者。辦其具。俾不廢倫。先塋有代遠不能祭者。各置墓田。用歲十月行事。創 八世祖敬憲公廟於宗子家。歲率宗人一祭。著說而明其義曰。國朝公子勳臣之外。無立宗之文。故庶姓大族。散無統屬。然據王制別子爲祖繼別爲宗註曰。雖非別子。始爵者亦然。䟽云。異姓爲大夫者。亦得爲太祖。此爲庶姓立宗之證也。其以至論言之。類皆深造自得。發前未發者耳。論河洛則曰。河圖之數。其以奇耦者爲先天圖。其以配合者爲後天圖。其以生成者爲洛書。洛書演而洪範作。其二五事之肅乂哲謀。聖。互見於八庶徵而洛書中二八交換。箕子豈欺我哉。論三代井地。則曰自五十而變爲七十。自七十而 變爲百畒者。若易其經界者。故先儒疑之。然不難析也。乃辨其一井九田。一田四區。區方五十步之制。以明夏時一夫受一區。殷時一夫增受二區。周時一夫增受四區。故夏殷周之自五十變而至七十百畒者然也。孟子豈欺我哉。論三代正朔。則曰改時改月。諸說紛然。難以折衷。而考之詩,書,易。分明不改時月。考之春秋孟子及孟獻子之言。分明改時月。然則改時月。東遷以後之末失也。有能於東遷以前得改時月之文者哉。論王風。則曰鄭玄諸儒。皆以爲東遷以後。王室卑弱。與諸侯等。故不爲雅而爲風。然風雅自有 體裁。不繫興衰。周業方隆。亦有風。二南是也。諸侯之微而亦有雅。抑詩是也。王澤竭而變雅作。平王縱卑弱。獨不得廁變雅之末乎。季札觀周王在衛下。邶鄘衛王。皆東都也。東都者。王城也。爲天子朝諸侯之所。後乃遷居。凡大都會。莫不有詩以觀民風。前焉則豳周有風。後焉則王城有風 。王風云者。謂王城之風。非爲平王設也。於三經四書及小學近思錄心經。字求其訓。句索其旨。皆有疾書。葢取橫渠妙契之義也。其序自孟子始曰。以世則後。以義則詳。後則近詳則著。故求聖人之旨。必自孟子始。其於禮原本三禮。旁通 杜佑通典及歷代諸儒之說而折衷於家禮。故又有家禮疾書。至若刪節冠儀,嫁娶儀,喪威錄,廟墓享祀儀諸編。著爲一家之法。尊慕退溪。無異朱子。則言行之見於遺集。及門人所記者。編輯如近思之例。名曰道東錄。又取論禮書。分類編摩。名曰李先生禮說。患退翁以後。四七理氣之說。與朱子所解道心發於義理。人心發於形氣。語類所載四理七氣。有所牴牾。撰四七新編。發揮朱子之旨。羽翼退陶之說。雖處𤱶畒。未嘗不以斯世爲己憂。撰藿憂錄僿說等編。嘗慨然歎曰。百世無善治。由於三孼。尊君抑臣。自嬴政始。漢 不能革。用人尙閥。自魏瞞始。晉不能革。文辭科試。自楊廣始。唐不能革。三孼不去。不足以言治。三者之中。科擧尤害。若曰彼善於此。則唐之楊綰所論孝廉科。國朝之趙靜菴先生賢良科。抑其次也。靜菴旣配聖廟而無一人擧而行之。何也。患東史踈舛。則托門人安鼎福。授以義例。卒成信史一帙。所著詩文並撰輯諸書。合爲數百餘卷。要之學問則去文而務實。論禮則棄奢而從儉。經濟則損上而益下。皆探本挈要。各有條理。可擧而措之。嗚呼盛矣。李本系出黃驪。鼻祖曰高麗仁勇校尉仁德。八世祖諱繼孫。兵曹判書諡敬憲。嘗爲北路觀察使。儒化丕彰。北人建院。祀以先師之禮。曾祖諱尙毅。議政府左贊成。諡翼獻 。實爲 穆陵名臣。祖諱志安。司憲府持平。與眉叟許文正。遊鄭蔥山門。道義相推詡。考諱夏鎭。司憲府大司憲。在肅宗時。力扶淸議。爲士流所重。前妣贈貞夫人龍仁李氏。留守後山之女。後妣貞夫人安東權氏。大後之女。先生權夫人出也。先生以肅宗辛酉生。卒于英宗癸未。享年八十三。纔屬纊。卽設餘閣之奠。殯前不廢朝夕饋。斂用紙衾。紙書銘旌。棺不漆。塗以松脂。皆先生平日所定也。門弟子皆吊服加麻以至期。族人在袒免之外者。布巾布帶。葬而除之。葬在家北壬坐之原。先生初娶高靈申氏 。正言必淸之女。不育。再娶泗川睦氏。進士天健之女。二夫人祔先生墓。一男孟休文科狀元。官止正郞。克傳家學早卒未究 。一女適衛率李克誠。正郞娶參判蔡彭胤女。生一男。九煥國子生員。衛率系子潤夏。曾玄以下不錄。濟恭嘗按節畿輔。行部郡縣 。迂其路。歷拜先生於瞻星里第。先生時年八十一。端坐矮簷敝屋下。眼彩炯然欲射。踈髯下垂至帶。未拜。已肅然起敬。卽之則樂易寬廣。談說經傳。揚扢古今。得聞所不聞。竊自恨世故驅人。不得以一瓣心香。事之於寂寞之濱。今於三紀之後。先生之從孫處士君森煥。袖家狀托銘於濟恭。濟恭直老耄耳。安能善形容有道氣像。但念吾道自有統緖。退溪我東夫子也。以其道而傳之寒岡。寒岡以其道而傳之眉叟。先生私淑於眉叟者。學眉叟而以接夫退溪之緖。後之學者知斯文之嫡嫡相承有不誣者。然後庶可以不迷趣向。以是而銘先生可乎。處士君曰。之言也要而不煩。知先生矣。遂斂袵而爲之銘曰。
抱道而莫能致澤。一世之不幸。著書而亦足嘉惠。百世之幸。天之意無乃在是歟。一世短而百世永。銘先 生而勉吾黨。盍與讀先生書。傳統由己而由人乎。<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