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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世 이규홍(李圭弘)
[생졸년] 1881년(고종 18)∼1928년 / 향년48歲
이규홍(李圭弘)의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본관은 경주(慶州)로,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후예로 1881년(고종 18년) 6월에 전북(全北) 익산군(益山郡) 관동리(冠洞里)에서 출생하였다. 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益山) 출신으로, 중추원의관 이기영(李琪榮)의 아들이다.
총 18면의 필사본. 표제 아래에 ‘무진정월초’(戊辰正月抄)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의병투쟁 당시에 남긴 일기를 대본으로 1928년에 초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홍이 박이환(朴駬桓), 문형모(文亨謨)와 함께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燦)을 만나 의병에 동참할 것을 맹약하는 1906년 초부터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한 뒤 의병을 해산하는 이듬해 4월까지 약 1년 4개월간에 걸친 기록이다.
그 가운데서도 이규홍이 박이환, 문형모 등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의한 뒤 의병장에 추대되어 1907년 11월 전북 진안군 용담(龍潭)에서 거의(擧義)한 이후 익산, 여산, 진안, 고산 등지를 전전하며 전투를 벌인 내용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편 일기 말미에는 1918년 11월 상해 망명 이후 1920년 북간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에서 김좌진(金佐鎭)을 만나고 이어 1924년 일경에 체포되기까지의 이규홍의 말년 행적이 간결히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록이 드문 전라북도 동북부지방의 의병 동향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원본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93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의병편(義兵篇)』에 그 전문이 영인 수록되어 있다. <끝>
▲이규홍선생이 쓴 오하일기 유필
▲이규홍선생 간찰
익산 출신의 李圭弘은 유학을 가학으로 수학하였으며,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관리 출신이다.
1906년 문형모, 박이환과 함께 임병찬의 문인이 되어 태인의병에 참여하였다. 고종의 강제 퇴위 소식을 듣고 1907년 12월 익산의병을 일으켰다.
부친 이기영은 장자의 의병 봉기에 적극 동참하여 가산을 팔아 무기 구입을 위한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익산의병은 진안의 주천면 대불리에서 천제를 지내고 완주의 가금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비봉면 내월리 불당동에 무기 제작소를 설치하여 무기를 수리하고 화약을 제조하였다.
1908년 1월에는 익산의 주재소와 세무서를 습격하였다. 이어서 여산 주재소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진안의 개화동 일대에서 일본군 용담분견대와 대접전을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큰 희생을 입었다. 의병장 이규홍은 참모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1908년 5월 대전의 식장산에서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유지명을 비롯하여 김흥여, 김성찬, 정판성, 김봉우 등 일부 의병진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규홍은 그후 거주지를 옮기면서 항일투쟁을 모색하다가 1912년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여 익산 대표로 활동하였다. 1916년 대전의 송창재 송덕재 집에 찾아가 은신하였으나 다음 해 11월 대전경찰대의 급습을 받고 오도산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탈출에 성공한 이규홍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과 김좌진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그는 가산을 팔아 거사를 계획하다가 1924년 2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9년 옥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규홍은 양반의 후예로 유학을 업으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나라의 위기에 적극적인 의병투쟁의 길을 택했으며, 국망 후에도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부친과 동생은 가산을 의병 군자금으로 바쳤다. 비록 나라가 망해 목표했던 일제의 구축과 국권회복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慷慨한 선비’였던 그의 투쟁적 삶은 크게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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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투사 이규홍(李圭弘)
[생물연대] 1881(고종18)∼1929
[출생지] 전북 익산군 관동리
[전적지] 동구 이사동 오도산
구한말의 항일투사. 자(字)는 원오(元五), 호(號)는 오하(梧下), 본관은 경주(慶州)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후예로 1881년(고종 18년) 6월에 전북(全北) 익산군(益山郡) 관동리(冠洞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철혈(鐵血)의 강개(慷慨)한 대지(大志)를 품고 1905년에 일본강점(日本强占)의 모략(謀略)에 휘말려 보호조약(保護條約)이라는 미명(美名)으로 체결(締結)되자 분연(憤然)히 몸을 일으키어 최익현(崔益鉉), 임병인(林柄璘), 양공(兩公)의 의거(義擧)에 호응하여 1907년 2월에 사재(私財)를 기울여 동향인(同鄕人)인 박이환(朴桓), 문형모(文亨模)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서로 혈맹(血盟)하기를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義다운 싸움으로서 적의 大戰에 대항하리라 하고 동년(同年)에 기병(起兵)하여 고산(高山)에 진(陣)을 치고 진안, 장수, 무주, 용담 등지의 장산(壯山) 골짜기를 누비면서 게릴라전을 벌리어 왜적(倭賊)을 사살하였다.
1909년 형세가 곤궁하고 세력이 탕진하여 공주(公州)에 가서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公)은 그 후로 적(賊)의 눈을 피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동지(同志)인 이충복(李忠馥)의 안내로 1909년 산내면 사한리(沙寒里), 지금 대전 동구 이사동에 사는 송창재(宋昌在), 송덕재(宋德在)를 방문(訪問)하니 흔연환영(欣然歡迎)하여 수년간을 두 사람의 집에 은신하다가 적수(敵首)에게 발각되자 본래 힘이 장사이고 몸이 날램으로 수차에 습격을 잘 피하다가 사한리(沙寒里) 뒤에 오도산정(吾道山頂)에 축석(築石)을 하고 육박전(肉薄戰)으로 오는 왜관헌(倭官憲)과 맞겨뤄 바위를 굴려 내리고 돌을 들어 쳐서 전력을 다하여 싸우니 왜관헌(倭官憲)은 패퇴(敗退)하고 공(公)은 얼굴에 총상(銃傷)을 입었다.
바로 이 해가 1911년이니 공은 그 뒤로 사한리(沙寒里)를 떠나서 전전(轉轉)하다가 1918년 5월에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망명동지(亡命同志)들과 접선하고 1919년 3월에 조국의 만세봉화가 방방곡곡에 높이 들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으나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독립의 기회가 헛되이 돌아가자 지하(地下)에 잠복하여 수년동안을 피신하다가 1924년 2월에 왜관헌(倭官憲)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이나 왜경에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우수(右手)가 절상(折傷)되어 보석으로 출감(出監) 1929년 6월에 형독(刑毒)으로 졸(卒)하였다.
대전 동구 이사동 오도산(吾道山)은 왜적(倭賊)과 싸운 접전지로서 지금도 이사동(二沙洞) 위 사한리에 전적비(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오하(梧下) 이열사(李烈士)의 행적비(行跡碑)가 전북(全北) 익산군(益山郡)에 세워졌지만 공(公)의 주요 행적(行跡) 사한리에 있는 것이다. 《자료 : 梧下日記, 大田市史》《權寧遠》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에 있는 이규홍선생 오도산격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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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아카이브, 오하일기(梧下日記)
2021.03.02 14:39
김성중 갈럼 / 익산성장포럼 대표 . 전 익산경찰서장
오하(梧下)는 이규홍의 호다. 오하일기는 조선 말기 의병장 이규홍의 의병투쟁을 기록한 일기이다.
총 18면의 필사본으로 표제 아래에 ‘무진정월초’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의병투쟁 당시에 남긴 일기를 대본으로 1928년에 초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홍이 의병을 모의한 뒤 의병장에 추대되어 1907년 11월 전북 진안군 용담에서 거의한 이후 익산, 여산, 진안, 고산 등지를 전전하며 전투를 벌인 내용이다. 일기 끝부분에는 1918년 11월 상해 망명 이후 1920년 북간도 대한군정서에서 김좌진을 만나고 이어 1924년 체포되기까지의 이규홍의 말년 행적이 간결히 기술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록이 드문 전라북도 동북부지방의 의병 활동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익산에 살던 이규홍 의병장이 익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한 것은 역사적으로 녹아 있는 익산 정신의 발현이었다고 확신한다. 익산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동네이다. 만경강 유역을 중심으로 펼쳐있는 광활한 평야는 물산이 풍부하여 삼기의 기세배 놀이의 전통 등에서 보듯이 기예의 고장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여산의 작지 마을에서 매년 7월 15일 근방의 두 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수박희로 승부를 겨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익산에서 매년 충청도와 전라도의 무술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며 ‘수박’이라는 무술이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전래 되었다는 문헌상의 고백이다.
이와 같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익산에서 구한말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의병이 일어난 것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까지도 익산 의병 활동이 우리 역사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오하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다른 지역의 의병 활동과 구별되는 익산 의병만의 특징이 있다는 점은 우리가 더욱 유념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익산 의병은 순수한 민간인들이 개인재산을 팔아서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익산 의병이 창의한 것은 1907년 10
월 팔봉동 석암리 관동부락 앞 야산에서 257명의 젊은이들이 함깨 했다. 이규홍 의병장은 집에 비축된 곡식과 500두락의 전답을 팔
아 의병을 모았다.
의병은 전주에서 해산된 100명을 중심으로 익산, 여산, 완주 일대의 포수들과 뜻있는 민간인들이 참여하였다. 오하일기에는 모집된
의병이 257명, 서양 총 100자루, 한식 총 200자루, 연환(鉛丸)이 20여 두, 화약이 10여 두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익산 의병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5개월간 전투를 지속하였다는 점이다. 첫 전투는 완주군 화산면 가금제, 2차는 진안 용담에서, 3
차는 금산군 남이면 백령재에서 혹한 속 전투를 하였다. 세 차례 전투에서 왜병 129명을 사살했고 아군도 85명이 전사했는데 이때가
1908년 정월 초순이었다. 이규홍 의병장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는 4,000원 현상금(당시 소 한 마리 10원)으로 압박하였다고 전해진
다.
셋째, 익산 의병은 한국 의병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상해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는 점이다. 국내 은신에 한계를 느낀 이규홍은
1918년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고종 황제 밀서를 가지고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로 임정에 1,300원을,
1920년 3월경 만주 간도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나 군자금 3,000원을 지원하였다.
이규홍 의병장의 부친인 이기영과 아우인 이규연이 전 재산을 아낌없이 장남인 이규홍 의병장에게 후원한 덕분이었다.
의병이란 충의(忠義) 정신으로 외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항쟁한 민간인 군대를 말한다.
1907년 11월 6일 익산 관동 출병식에서 이규홍 의병장은 “왜군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써 싸운다. 의는 힘을 이긴다”라고
외쳤다. 정의가 불의를 결국에는 이긴다는 역사 인식의 결단이었다. 한반도는 분단 72년을 맞이하고 있고 지금도 대륙세력과 해양세
력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과 우리 시민들이 이 땅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 정신의 모델을 의병 정신인 애국과 희생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오하일기’는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익산열린신문 ikopen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