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을미·을사·정미' 항일의병 국난 때마다 일어서다입력 2023.11.01. 16:47이관우 기자
⑥고광순
구한말 남도 의병 상징적 인물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 후손
창평서 거병…'축예지계' 장기전 전략
日군과 전투 벌인 연곡사 계곡서 전사
고광순 의병부대의 ‘불원복’ 태극기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⑥고광순
인터넷에 고광순 의병장을 검색하면 '불원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태극기가 있다. 그는 집안과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로 분기탱천해 태극도안 위에 '불원복(不遠復,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이라는 세 글자를 새기고 이를 군기(軍旗)로 사용했다.
고광순(1848~1907)은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에 모두 참여한 남도 의병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호남의 대표적 명문가인 장흥 고씨다. 호는 녹천(鹿川)으로, 어려서 백부 경주의 집안으로 입양되며 임진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인후의 11세 사손(嗣孫)이 됐다.
어릴 때부터 인근에 있는 상월정에서 유학 공부에 맹진했던 그는 과거에 응시하러 상경했다가 뇌물을 요구하는 시험관의 농간으로 낙방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강한 결기를 짐작하게 한다.
고광순 의병장 초상화
189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이 거의(擧義) 격문을 전라도 유생들에게 보내자, 고광순은 곧장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고 장성 의병에 참여했다. 상소문에, "신의 선조 충렬(忠烈) 신 경명과 효열(孝烈) 종후와 의열(毅烈) 신 인후 3부자는 임진란에 순절을 하여…신은 의열의 사손입니다"라 하여 임진 의병장 고경명의 후예임을 밝혔다. 그가 임진 의병장 후손이라는 높은 책무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고광순이 참여한 장성 의병은 나주로 이동해 그곳 의병부대와 연합의진을 결성했으나,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으로 의진은 해산됐다.
의진이 해산됐지만, 일본의 침략을 예상했던 고광순은 영·호남을 돌아다니며 뜻있는 이들을 규합했다. 그의 예상대로 1905년 말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침탈 위기에 처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의병봉기가 잇달았다.
전라도에서는 장성의 기우만과 담양 추월산 용추사에서 만나 봉기를 논의했던 태인 의병 최익현이 순창에서 체포됨으로써 주춤거렸다.
하지만 고광순은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백낙구 등과 만나 거병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남원의 양한규, 능주의 양회일 등과도 거병을 계획했다.
충의사 호국충혼탑
고광순은 족조(族祖) 고제량과 상의해 고향 창평에서 문중 사람을 중심으로 거병했다. 1906년 12월(음)이었다.
고광순이 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됐다. 막내아우 광훈, 집안 동생 광수·광채·광문 그리고 박찬덕·윤영기·박기덕 등 여러 사람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40명 규모였으나 인근 지역의 포수 등이 합류해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다른 지역의 의병과도 합진을 논의한 고광순 의병부대는 빠른 유격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공략했다.
일본군은 녹천의 본가에 불을 지르고, 아들 재환을 살해했다. 2월 말 남원의 양한규와 함께 남원성을 공격하려 출동했으나, 양한규가 고광순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패퇴해 결국 퇴각했다.
4월 고광순은 능주 양회일 의병부대와 담양 이항선, 장성 기삼연 의병부대 및 윤영기 등과 함께 화순을 점령하고 능주·동복 일대를 공격했다. 광주에서 출동한 관군과 도마치(화순 남면 유마리) 전투에서 격전을 치렀다.
이렇게 고광순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자 많은 의병이 합류했다. 이에 8월 창평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고광순을 도독으로 삼고, 박성덕·고제량이 각각 도총과 선봉, 신덕균과 윤영기 등을 참모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동복읍을 공격해 점령하고, 다시 남원·곡성 등지를 지나며 민심을 다독거렸다.
이렇게 다른 의병부대와 손을 잡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고광순은 의병 전쟁 전략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일본군과 단기전 승부를 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진지를 구축해 장기 항전 체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곧 축예지계(蓄銳之計, 일정 기간 훈련을 하여 예기를 기른 뒤 전쟁에 임함)의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전북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던 김동신과 만나 이를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지리산 화개동(피아골)을 의병 항전기지로 생각한 그는 지리산 연곡사를 중간기지로 삼아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다음의 기록이 이를 말한다.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 기지로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하여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銳氣)를 기르는 계책을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불원복(不遠復) 3자를 썼다."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으려는 고광순의 방략은 당시 의병장 유인석이 의병부대를 백두산으로 이동시켜 항전기지를 구축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자는 주장과 구별된다.
구례 연곡사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고광순의 이러한 방략에 동의한 의병들이 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에서 많이 모였다. 1907년 9월 무렵이었다.
이렇게 지리산을 근거로 무장전쟁을 준비하면서 고광순은 인근에 주둔한 일본군을 급습해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다.
일본 수비대는 고광순이 지리산에 장기 항전을 위한 기지 건설에 나선 것을 알고, 광주 주둔군과 진해 주둔군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다.
쌍계사에 본부를 둔 일본군 본부는 연곡사를 포위 공격했다.
고광순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내던진 것은, 큰 종기에 침질 한 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며 결사 항전에 나섰다. 그는 훗날을 위해 상당수 부대는 후퇴시키고, 본인을 따르는 결사대 50명과 더불어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는 전투를 했다.
고제량도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고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며 후퇴하지 않고 고광순 곁에 있었다.
고광순, 고제량을 포함해 30명의 대한제국 의병은 연곡사 계곡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군은 연곡사와 문수암을 소각한 후 철수했다.
고광순 순국 이후 막내아우 광훈, 집안 동생인 광문과 광수 등은 남은 의병들과 부대를 재정비해 지리산 인근 및 무등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활동했다. 바로 고광순의 축예지계 전략을 실천한 것이다.
고광순 의병장이 순절한 연곡사에는 그의 순절비가 세워져 그날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고향 창평에 그를 배향한 '포의사(褒義祠)'가 있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고광순 의병장 사당 포의사 전경
'남도 의병' 현장을 찾아서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위치한 포의사는 고광순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그가 한말 당시 의병 활동을 전개하며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초 건립된 사당은 왜병들이 소각했고, 현 건물은 1970년 9월 담양군에서 건립한 것이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맛배 지붕이고 3문 형식의 소슬대문이 있다.
고광순은 1895년 을미의병기에 기우만의 장성 의병에 참가했고, 을사의병기에는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담양군 창평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해 활약했다.
장흥 고씨 집안은 '삼부자(三父子) 불천위(不遷位; 위패를 옮기지 않음)' 집안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과 종후, 인후 3부자는 의병이 돼 순절했고 일제가 다시 침략하자 고광순은 의병장이 돼 순국했으며 고광수는 천석이 넘는 전 재산을 의병활동에 지원한 충절의 집안이다.
고광순은 일본을 '가국지수(家國之讐, 집안과 나라의 원수)로 지칭했다. 또 한말 의병이 일어난 전기(을미의병), 중기(을사의병), 후기(정미의병)를 모두 거친 남도 의병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현재 한말의병대장녹천고광순의사기념사업회가 포의사를 20년 넘게 관리하고 있다.
고재청 기념사업회장은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추모제를 지내지 못했는데 내년부터는 추모제를 재개할 것"이라면서 "다음부터는 기존 고광순 의병장에 더해 담양 출신 서훈을 받은 의병 22명도 함께 추모제를 지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자체 등의 많은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