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는 가운데 서울에 저희가 알지 못하는 성지가 있는 것 같은데, 가외로 들이는 질문입니다. 흑석동 성지와 구 본부교회 성지 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서울의 성지는 구체적으로 어디인가요?
서울에 총 8개의 성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성지를 모두 아는 식구는 거의 없을 겁니다. 8개의 성지는 구진봉 성지, 인왕산 성지, 남산 중앙 성지, 흑석동 성지, 상도동 성지, 태릉 성지, 도봉산 성지, 구 본부교회 성지입니다. 아버님께서 학교 재학시절 기도하셨던 흑석동 성지와 상도동 성지는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그 외의 성지는 아는 사람이 없어 제가 알려줬습니다. 몇몇 아시는 분들이 계셨지만 몇 분은 돌아가시고 또 살아계신 분들도 못찾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당시에 후암동 교회장 하다가 성화사 문화부 편집실에 있었던 용진헌씨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함께 다니며 알려줬습니다.
성지 가운데 인왕산 성지를 정한 배경은 이렇습니다. 아버님께서 서대문 형무에서 옥고를 치르실 때 유리창으로 내다보면 지금의 구진봉 성지, 곧 바위만 보였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그 바위를 보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감하시자마자 그 성지에 제일 먼저 올라가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곳에 오르셔서 내려다보며 “하나님 아버지! 제가 뜻을 위해 일하다 저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생했습니다. 그 때 이 바위를 보고 제가 기도했습니다. 부디 저 안에 있는 죄인 한 명도 사망하지 않고 무사히 출감하게 해 주시고, 이 바위에 올라와서 기도하는 사람은 아버님과 같이 옥고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조건을 갖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왕산 성지의 흙도 다 가져다 놨습니다. 본부교회 성지 흙도 가져다 놨구요.
구진봉 성지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유효원 협회장님 3분이 가셔서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축복 받기 전에 약혼한 자리입니다.
혜진님 승화이후 파주원전을 처음 맡게 되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협회에서 아버님께서 파주에 오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파주에 오신다고 했지만 그 때는 파주가 어딘지 몰랐습니다. 적성면 어디 어디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아버님께서 오신다는데. 아버님 드리기 위해 집에서 떡, 호박 꼬자리, 콩 등을 맛있게 해 가지고 갔습니다. 그 이후 70년도 여기 다니면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봉산은 그 이전부터 관리했기 때문에 64년도부터 오늘까지 계속 관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전을 관리하시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겨울에 눈 쓰는 일이었습니다.(^^*) 겨울에 눈 오면 자기 집 앞마당 뒷마당과 길을 쓸듯이 파주에 이사오기 전 30리 바깥에서 걸어와서(―왕복 24km―) 파주원전의 눈을 쓸었습니다. 이곳(―현재 파주원전교회―)으로의 이사는 흥진님 승화하시고 1984년도에 왔습니다. 이사오기 전에는 말씀드렸듯이 30리 바깥 덕천리 교회장으로 있으면서 왔다갔다하면서 관리했습니다.
지금은 눈이 많이 안 오지만 옛날엔 많이 왔습니다. 눈을 쓸면 겨울에 그렇게 추워도 땀이 뻘뻘 쏟아집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 쓸고 나면 옷이 다 젖어 얼어 추워 떨게 됩니다. 그것이 제일 기억납니다.
그리고 일을 할 때 땀을 흘리는 것도 남들처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수건을 목에 걸고 런닝 차림으로 작업을 하는데, 땀이 뚝뚝 떨어집니다. 얼마나 땀이 많이 나면 땀을 닦은 수건을 비틀면 물처럼 나올 정도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부상을 당할 경우에도 저는 함부로 아프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 슬슬 작업을 하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데, 그러면 제가 치료해줍니다. 하지만 제가 일하다가 혹 낫에 다리가 찍혀 옷이 찢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옷이 얼마만큼 찢어졌는지 보면 ‘아! 얼마만큼 다리에 낫이 들어갔겠구나’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제가 만약 상처를 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몰려들고 그렇게 되면 작업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럴 경우 아무도 모르게 합니다. 바지를 장화 속에 집어넣고 일을 계속 합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누워버립니다.
여기는 아버님의 피와 흥진님, 대모님, 아버님의 할아버님의 피가 들어간 곳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았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파주원전 교회 내 기도실 전경
기도실 내에 있는 참부모님, 참가정 사진들
파주원전을 관리하시면서 많은 정성을 들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63년도부터 오늘날까지 45여 년 간 냉수마찰을 했습니다. 한 겨울에도 얼어붙은 냇가의 얼음을 깨고 냉수마찰을 하며 정성을 들였습니다. 냉수마찰을 하게 된 계기는 1963년 7월 24일 120가정 축복에 참석하기 위해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철야는 14~15년 정도 계속했습니다. 밤 12시에 흥진님 묘소에 올라 새벽 4시에 내려왔습니다. 5분만 늦게 일어나도 마음이 편치 않고 흥진님 보기가 미안하며 5분만 일찍 내려와도 마음이 좀 그래서 정확히 시간을 지켰습니다. 물론 5분, 10분 정도 차이 날 때는 있었죠. 지금은 나이도 나이고….
한 번은 제가 부상을 당해 철야 자체를 할 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길님 돌아가신 뒤 원전 앞에 나무가 많습니다. 나무가 많으면 그늘이 지게 되며 잔디는 죽고 잡풀이 많이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협회에서 신경 쓰지 말고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말했습니다. 협회에서 돈을 지원받아 인부를 사서 하게되면 쉽게 작업할 수 있습니다. 물론 편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저는 협회에서 돈을 지원받는 것은 아버님의 피를 빼서 쓰는 것이요, 아버님의 뼈를 갉아서 쓰는 것이요, 아버님의 살을 베어 쓰는 것이요, 아버님의 피와 땀과 정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를 많이 베어봐서 저는 나무 베는 데 있어 기술자입니다. 쓰러뜨리고자 하는 방향으로는 조금 많이 베고 반대방향에는 조금 적게 벤 뒤 쓰러뜨리고자 하는 방향에 무겁게 동아줄로 미리 다른 나무에 묶어 놓으면 쓰러뜨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런데 6개째 베는 나무는 쓰러뜨리고자 하는 방향이 아닌 반대방향, 제가 있는 정면으로 쓰러졌습니다. 피하려고 몇 걸음 뛰어가려는데 가시덩쿨과 칡덩쿨이 있어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면으로 맞았으면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나뭇가지에 맞아 뼈 3개가 금이 가고 부러졌습니다.
처음에는 입원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입원하면 철야는 누가 하겠습니까? 죽어도 여기서 죽기로 했는데… 그런데 집사람이 병원 의사에게 진단결과를 듣고 입원해야 된다고 했고, 아이들도 그렇게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했습니다. 한 달 정도 했습니다. 조그만 병원에 입원해서 엑스레이(X-ray)를 12일만에 찍었는데, 가슴에 물이 괴였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저보고 숨이 안 차는지 기침이 안나오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숨이 차고 기침이 나는 등 평소와 달랐습니다. 그 병원에서 치료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하다고 해서 그날 저녁 큰 병원으로 이동해서 밤 12시 넘어 바로 수술을 했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철야를 못했습니다.
생활 중에 훈독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심
아버님께서는 89세이심에도 훈독회를 하십니다. 우리 식구들 가운데 아버님처럼 훈독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불과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철야하고 내려와 5시부터 이곳(기도실)에서 집사람과 함께 경배한 뒤 1시간 정도 훈독회를 합니다. 그리고 훈독을 마친 책은 끝에 몇 번 읽었는지 표시를 해둡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가방에 훈독할 책을 넣어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 탈 때에도 항상 훈독합니다. <천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 얼마되지 않을 겁니다. 훈독회 책(-평화신경을 말함-)은 작으니까 가지고 다니지만 <천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목사들은 항상 찬송가와 성경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 심정으로 저는 항상 <천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지하철에서 너무 졸려 눈을 감기더라도 <천성경>을 꼭 안고 다닙니다. 그래서 간 혹 사람들이 <천성경>에 대해 묻곤 하며, 그래서 종종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식구들 아버님의 말씀을 항상 아기처럼 모시고 다녀야 합니다. 젖먹이 아기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집에 두고 다닙니까? 언제 젖달라고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아기를 업고 다니듯 우리의 생명의 젖이 되는 아버님 말씀을 꼭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협회 총무국 갈 때나 어디든 저는 <천성경>을 등에 매고 다닙니다. 아버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옆으로 들어오는 말은 사탄의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말씀은 100%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아버님의 심정을 상속받을 있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으로만 100% 완전무장하게 되면 100% 건강합니다. 종종 사람들이 저더러 몇 살이기에 그렇게 건강한지 묻습니다. 이 곳 원전이 산도 좋고, 물도 좋고, 공기도 좋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버님의 말씀을 늘 훈독하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정성은 어떤 것인가요?
아버님을 뵐 때면 항상 부족하고 책임 못 했잖아요 우리가. 그러니까 초창기때에는 항상 아버님 앞에 갈 때 1주일 금식을 했습니다. 제 경우는 금식이 아니라 단식입니다.(편집자주-교회장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은 음식은 물론 물도 먹지 않음을 의미-)
1956년에 입교한 이래 본부교회에 다녔습니다. 제일 먼저 일어나 아버님께 경배드리고 계단청소, 화장실 청소 등을 했습니다. 부모님 앞에 모심의 생활을 했습니다. 신발을 벗어놓으시면 신발을 닦아드리고. 그런데 당시 아버님께서는 신발도 기워 신으셨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저는 제가 신발을 닦아 드렸기 때문에 알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누가 알아요. 요즘은 신발 깁는 사람이 없지만 옛날에는 서대문, 동대문, 남대문, 의정부, 금천 등지에 신발 깁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워낙 신발을 기워 신었기 때문에 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물이 들어오고 그렇더라도 신발을 사 신지 않으셨습니다. 아버님의 그 노정, 저는 아버님의 어렵게 사시며 절약하셨던 그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또 어떠십니까? 대모님 승화하셨을 때 여기 원전에 오셔서 아버님께서 간증하라고 하셔서 간증하시며 우시는데, 우리 같으면 휴지를 2장 3장을 한꺼번에 쓰는데 한 장 가지고 쓰셨습니다. 어머님의 그 절약하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또 자녀님들도 그렇게 절약하십니다. 언젠가 저희 집에 와서 진지를 잡수시고 커피를 드렸는데, 그 커피 두었던 자리에 커피가 묻었습니다. 제가 냅킨 가지고 닦으니까, 자녀님이 그 때 3살인지 4살인지 정확하기 기억은 나지 않지만 “냅킨 한 장에 얼마죠?”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괜찮아요”라고 말씀드리니 “얼마죠?”라고 다시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다시 “괜찮아요”라고 말씀드리는 다시 “얼마죠?” 하고 3번 물으셨습니다. 그게 ‘걸레로 닦았으면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휴지로 닦으니 휴지 한 장이 없어졌다. 종이가 얼마냐? 왜 종이를 썼냐?’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한 면모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녀분들 역시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러한 절약하는 습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참아버님에 대해 참가정에 대해 모르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거나 정성을 들이게 되면 예감ㆍ직감이 옵니다.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버님께서 본부교회에서 말씀하실 때 “너희들 남북통일하는 것 좋아 나빠?”하셔서 “좋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 나도 좋아”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북사람이 쌀이 없어 굶어 죽는데 너희들은 하루 3끼 다 먹지?”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네”하고 했너니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1끼는 이북사람들을 주고 하루 2끼만 먹어. 그러한 절약, 그러한 위하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북통일 안돼. 나는 그런 노정 다 걸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듣고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20~30년 조식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적도 있었습니다.아버님께서 언젠가 의정부 교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기 오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손들어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기 오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손들어봐” 그 때 어머님만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셨습니다. 어머님만 아버님의 심정을 아셨던 것이죠. “내가 여기 오게 되면 내 고향이 가까워 옵니다. 고향이. 한 걸음 북 쪽으로 가면 한 걸음 고향이 가까워 오고, 두 걸음 가면 두 걸음 내 고향이 가까워 옵니다. 이곳에 와서 방향만 북쪽으로 향해도 내 고향이 생각이 나”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셨겠습니까? 우리는 참아버님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참부모님의 그러한 심정을 알기 위해 우리는 늘 정성들이는 마음으로 말씀을 훈독해야 합니다. 훈독회를 하다가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면 그 은혜에 얼마나 감사한지 눈물, 콧물, 침이 뚝뚝 책에 떨어져 책이 안보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눈물 닦으랴, 콧물 닦으랴, 책 닦으랴 정신이 없습니다. (손수건을 보이시며) 이것이 흥건히 젖어야 됩니다. 이 손수건이 젖을 정도로 훈독회 해야 됩니다. 진정으로 아버님의 말씀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정말 그 말씀이 맛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됩니다. 24시간 계속 훈독회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어디 쉬워요? 진짜 심정이 좋으면 24시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70세인데 (책장을 넘기며) 세상적으로 볼 때 제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작은 글씨들이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다 보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 “아버님을 닮아야 한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호랑이면 너희도 호랑이 새끼가 되어야 돼. 왜 고양이 새끼가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니 아버님 보고 눈물이 안 나오겠습니까? 철야기도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냉수마찰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금식기도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훈독회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죠. <천성경> 몇 번 읽었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평화훈경(平和訓經)>(平和神經)을 몇 번 읽었냐고 물으면 우물쭈물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외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용 전체를 외우는 몇이나 됩니까? 외우지 못하면 밥을 먹어서도 잠을 자서도 안 됩니다. 하루 3끼 밥 먹을 것 다 먹고 잠 다 자면서 훈독회는 왜 안합니까? 아버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벌써 89세이신데…
공금에 대한 생각
협회에서 돈을 타서 오면 언제나 “이 10원 한 장이 아버님의 피, 아버님의 땀, 아버님의 살, 아버님의 뼈”라고 기도합니다. 성냥 하나를 사고 라이터 하나를 사더라도, 차를 타더라도 그 차비를 다 기록합니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쓴 내역을 다 계산해서 협회에 제출하니깐 “전체 계산한 내역이 맞지 않다. 동그라미 하나 빠지지 않았어요?”라고 전화 왔습니다. 제가 계산을 잘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남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남을 속이는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 무식한 사람은 속일 줄도 모릅니다. 우리 식구들도 적어도 공금에 대해서 그래야 됩니다.
아버님께서 교회장님 건강이 염려되어 금식을 그만하라고 하셨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본부교회 식구들이 너무 금식을 하니깐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셨으며, 모세도, 그리고 아버님도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통일교회 초창기에 40일 금식 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는 아호 형제가 40일 금식을 2번 했지만, 한국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40일 금식 한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을 때 한국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러셨습니다. “한국이 적구만. 우리 40일 금식 다해야 된다구.”
아버님께 받은 사인에 대해 설명하심.
초창기에 40일 금식은 못하더라도 20일 금식을 2번, 1주일 금식을 7번, 하루 1끼씩 먹고 120일 간 금식했으며, 또 하루에 2끼 먹구 1끼 조식금식해서 120일, 그리고 40일 금식 등 조건적으로 이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아마 요즈음 식구들은 이런 내용을 잘 모를거에요. 그러한 신앙적인 조건을 가져야 됩니다. 야곱노정, 모세노정, 예수노정, 재림주 노정. 재림 노정이 우리의 본보기 노정이 아닙니까? 그 본보기 노정을 가야 합니다. 초창기에는 그 노정을 걸었습니다. 저도 그러한 조건으로 1주일 금식을 대략 20번 이상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금식하지 말라구” 하셔서 그 뒤로…… 금식을 했어도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장님의 금식은 일반적인 금식이 아닌 물도 입에 대지 않는 금식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렇죠. 물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을 다했습니다.
하루일과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원전 관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과이지요. 원전에 잣나무가 50만 여주 되는데 제가 직접 관리합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원전에 참배하시러 오시는 분들 가시는 분들 안내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장은 4~5년, 새마을 지도자는 11년 정도 했습니다. 집사람도 부인회장을 하고 있어 둘 다 바쁘게 지냅니다.
마지막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참자녀님이나 원로식구들이 승화하여 원전에 오셨을 경우 어떤 느낌이신지…?
가슴 아픈 것은 모두 똑같은 심정이죠. 하나님께서 소망과 기쁨의 대상으로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것을 알았지만 원리법도가 있어서 간섭 못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훈독책자에 나와 있듯이 우주 만상을 창조해 놓고 아들, 딸이 죽을 때 그 마음이야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이스라엘 민족들이 또 죽게 했습니다. 그것 역시 아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성경에 천지(天地)가 어두워졌고 지진과 폭풍우가 불었습니다. 두 번 아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을 과연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 아픔을 과연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지만, 하나님의 가슴에는 두 개의 아픔의 응어리가 있지만 참부모님은 7개의 아픔의 응어리가 있습니다. 왜? 혜진님, 희진님, 흥진님, 영진님, 신예님, 신길님, 효진님, 일곱 분의 참가정의 자녀, 손주, 손녀님께서 승화하셨습니다. 1세, 2세, 3세. 참부모님께서는 일곱 번 가슴 아프셨습니다. 참부모님의 가슴에는 7개의 아픔의 응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픔의 응어리를 풀어드려야 됩니다. 참부모님의 그 아픔을 생각하시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지 않으래야 들이지 않을 수 없고 죽기를 각오하고 일을 안 할래야 안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렇죠. 아버님 생각하고, 또 효진님, 흥진님 생각하니깐 진짜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미안감을 느끼고. 양심은 하나님께도 참부모님께도 누구에게도 다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제 스스로 하는 것이죠.
지금은 교회장님께서 계셔서 원전관리가 되지만 안계셨을 경우에 대해서 많은 식구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고기는 물을 떠나면 죽습니다. 저는 누가 오든 안 오든, 1명이 오든 2명이 오든 여기를 떠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있을 겁니다. 이제 많이 늙었는데 어딜 가겠습니까? (^^*) 혜진님 승화 때부터 오늘날까지 관리해 온, 제가 직접 나무를 심고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집, 땅을 팔아 집짓고 지금까지 생활해 온 이곳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면 추후의 원전관리를 안심하고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
누군가 이곳으로 온다면 빨리 와서 집 지어 함께 일하면 됩니다. 그런데 밥 먹고 잠만 잘 거면 오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곳으로 오려면 진짜 죽을 각오를 하고 와야 합니다. 철야기도도 함께 하고… 이곳에 오려거든 정말 죽으러 오겠다는 심정으로 와야 됩니다. 땀도 제일 많이 흘리고 쐐기도 제일 많이 쐬고 몸도 늘 아프고 그런 정신으로 왔으면 합니다.
오랫동안 원전(산)을 관리하시면서 나무에 대해서는 인간문화재라고 할 만큼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제 자랑 같지만 저는 조림왕이라고 자부합니다.(^^*) 아버님께도 그렇게 보고 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세계의 왕이시고 저는 잣나무의 조림왕입니다. (^^*) 상도 많이 탔습니다. 75년에는 산림청장으로부터 표창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미국을 가든, 자르딘을 가든, 중국을 가든, 하와이를 가든, 알래스카를 가든 어디를 가더라도 논밭이 아닌 산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제가 얼마나 잣나무를 잘 심는지 여기처럼 이렇게 많이 잣나무를 가꾼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여기에 오시면 기뻐하십니다. 잣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잣을 따다가 하나님의 날, 참부모의 날 등 협회명절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첫댓글 눈물 없이 못보네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