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의상,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울리면서 막이 오르고, 해설은 신녀장이 맡았다.
오페라를 보는 듯한 발군의 가창력과 화려한 의상이 준비된 뮤지컬임을 실감나게 한다.
극장 용은 어느 좌석에서나 잘 보이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좌석이 편안하고 앉으면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면서 편안한 공연관람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만족감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만들어진 공연장에서 애석하게도 클래식한 배우들이 목소리는 오히려 울림이 되어 그 내용 전달이 잘 안되는 단점이 있었다. 조금만 더 관객을 배려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선녀장의 클래식한 해설이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데다 소리까지 울림으로 되돌아 오니 첫 인상은 약간 구겨진 셈.
최리왕의 수행 무사들의 춤과 표정에 익살과 장난기 어린 코믹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차림새와 복장은 서양 영화의 해적을 연상시키는 아쉬움이 있다.
낙랑 공주의 사랑 독백 역시 지나치게 길어 관객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배우들의 목소리 톤들이 대체로 비슷하게 느껴져 그 캐릭터에 걸맞는 소리 공부가 다소 필요할 듯 싶었다.
아직은 열정이 보이지 않는 공연 초반부. 고민도 문제도 없는 부드러운 흐름, 열정이 담딘 춤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약 30분 동안은 ......
늘어지지 않게 좀 더 사건 전개가 스피디하였으면 좋으련만, 배우들의 목소리가 비슷한 데다 그 톤이 클래식 톤이다 보니 오페라의 지루함이 슬그머니 스며든 느낌이다.
멋진 무대장치는 화려한 고전 그 자체다. 공연 내내 바뀌는 배경 무대는 화려하고 찬란하며 위엄과 그 역사적 성격이 잘 드러나는 볼거리를 제공했다. 커다란 자명고, 둥근 원형의 공주 방, 고구려의 위엄을 상징하는 대전의 위엄과 권위 등등......
낙랑공주와 그 어머니의 설정에 다소 어색함이 있었다. 나이 차이가 보이지 않은 분장이 오히려 친구같은 외모를 지니게 한 것일까?
낙랑과 호동이 만나는 장면중 노랫속에 "하나님, 감사해요!"라는 노랫말이 왜 삽입된 것인지 다소 의아했다. 당시에도 하나님은 가슴 속에 머물렀던 것일까?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만남의 기쁨을 표현하는 음악은 좀 더 빠른 음악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는 배우의 캐릭터가 소화되면서 감정과 섞여 하나되어야만 했지만, 노래가 배우들에 붙지 않았다. 진실로 극중 캐릭터의 기쁨을 표현하기에는 아직 다소 부족한 내공이었을까?
고구려 왕비의 목욕신 장면은 왕비의 거만하고 신경질적이고, 독선적이며, 자아도취적이면서도 표독스러운 성격을 보여주기엔 충분하고 적절했다. 나중에 자결한 아들에게 보여주는 눈물과는 전혀 대조적인 모습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아들에게만큼한 한없이 나약하고 부드러운 어머님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으면 했다.
실권없는 고구려 왕과 사실상 실권을 쥔 왕비의 모습은 오늘날 여권 신장된 모습의 트영인 듯 현대적 코드가 담겼다고 생각된다.
왕의 고민하는 독백이 지나치게 단조롭고 긴 반면, 움직이며 춤 추는 배우는 모두 군사나 시녀 뿐이라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자명고를 찢으라는 위장된 호동의 편지에 고민하는 낙랑, 그 고민하고 갈등하는 심리를 노래로만 전달하지 말고 적절한 액션으로도 호소하였으면 좀 더 나은 감동과 볼거리가 관객에게 전달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전투 장면은 박진감있고, 활극적이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갑자기 사건 전개가 초스피드로 진행되었다. 자결한 낙랑을 끌어 않고 호소하는 호동의 호소력이 관객을 끌어 들이고 압도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듯 하다. 이 즈음에서는 관객인 내가 전율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낙랑을 뒤따라 자결한 아들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소리에 소름이 끼친다. 그 울부짖음이 결코 어머니의 것은 아닌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애인이나 누나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여겼다. 한국적 창작 뮤지컬이 추구해야 할 컨셉트와 가야할 길은?
소재와 의상 그리고 무대만이 한국적이어서는 아니된다. 한국인의 기질적 특징이 실려야 한다.
프랑스인의 뮤지컬에는 프랑스인만의 기질인 발랄한 지성적인 정신 즉, 에스프리(Esprit)가 담겨 있고, 아일랜드인의 아이리쉬댄싱 역시 그들만의 고유한 정신과 기질이 담겨 있다.
아직까지 창작뮤지컬을 통해 전율에 가까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엔 부족하다고나 할까?
백의민족 자손이라는 자부심에 비해, 당시의 염색 기술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은 다소간 비현실적이나 컬러풀한 것이 오늘날 영샹세대의 코드와는 잘 어울린다. 볼거리 제공에 있어서는 무대장치와 함께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들이 캐릭터에 대해 좀더 강한 감정이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극 전개 과정에서 꼬옥 필요한 비장감이 보이지 않는 점도, 지나친 사실적 묘사는 스토리를 아는 관객을 식상하게 할 수 있으므로, 좀 더 간결하면서도 추상적으로 무대가 꾸며질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구천을 떠도는 원령들의 재회를 표현하는 꿈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과감한 무용스타일을 차용하여 추상을 시원스럽게 극대화했다고 할 수 있다.
뮤지컬 "프린세스 낙랑"은 이윤택 감독이 경희궁에서 공연한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와 비교하여 볼 때,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첫째, 주연 배우들의 강한 캐릭터와 호소력이 필요한 시점에서 그것이 잘 발현되지 않고 죽어 버린다. 반면 후자의 경우 배우들에게 집중된 조명과 풍부한 감정이 실린 성향과 적절한 제스처와 모션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속으로 빨려들게끔 하였다.
둘째, 쩌렁쩌렁 울리는 무대이면서도 대사가 잘 전달되는 후자와는 달리 고음 처리에 익숙한 성악적 발성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그 소리들이 웅성거림으로 들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호소력 짙은 연기력이 수반되더라도 그 호소력의 실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관객을 주변인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사실 관객은 배우들과의 호흡을 통해 자신을 배우화하는데 익숙한데 이 날은 이것이 영 어색했다. 반면 후자의 그것은 경희궁의 기와 지붕 및 나무 기둥 그리고 바닥의 화강석들에 적절히 잘 스며들듯 반사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셋째, 배역이라는 것은 적어도 남의 것을 두른듯 보이면 아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왠지 캐릭터와 배우가 다소 격리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후자의 경우 그 배역들이 정점에 선 배우들의 모습이었고,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배필아닌 배필이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그들이 연인관계 이상이길 바라도록 유도하였다. 결국에는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개혁으로 풀어낸 뛰어난 연출의 힘도 있었지만......
넷째, 가장 한국적인 정서라는 한(恨)을 어떻게 외국인 정서에 다가설 것인가의 점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전자의 그것이 한을 주제로 한 것도 아니며, 가벼운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한 비극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제대로 된 한(恨)의 감정을 적절히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개혁으로 승화시킨 연결고리 역시 잘 찾아 보여주었다.
다섯째,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이 오히려 절제와 간결미가 돋보이는 후자의 것에 비해 볼거리는 제공하였을 지라도 우리 전통한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했다. 후자의 그것은 정말로 잘 소화된 우리 옷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의상의 절제미와 간결미 그리고 단아하고 기품이 서렸으며, 배우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소화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리랑이라 외치지 않더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아리랑이 저절로 떠오르게끔 하는 연출력이 조금은 아쉬웠다. 관객의 기대나 예상을 뒤엎는 즐거운 상상이 펼쳐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기저기 많은 비판적 시각에서 살펴보긴 했지만, 사실 뮤지컬 "프린세스 낙랑"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창작뮤지컬보다 성공적 요소가 많다.
아주 빼어난 음악적 감성과 음악의 표현성, 화려한 무대 의상과 무대장치, 빼어난 가창력, 사랑이라는 전통적 소재와 비극의 접목. 연극계에서 불멸로 통하는 세익스피어 코드를 갖추었기에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애정이 있기에 더 날선 비판을 서슴치 않음을 양해 주길 바란다.
<출연진>
<낙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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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삶! 꿈! 밝은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