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일은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태중(台仲)이며, 호는 청대(淸臺)이다. 1679년(숙종 5) 산북면 서중리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달의(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사람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하여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하여 간행하고, 이듬해 상소하여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하였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하여 경연에 참석하여 소신을 진술하였다.
1741년 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 시정, 이듬해 사헌부 헌납, 사간원 사성,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 판결사, 홍문관 부제학, 한성좌윤,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李滉)을 사숙하여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청대집』 18권,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
채헌(蔡瀗)
청대 권상일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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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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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일(權相一) , 1679년 ~ 1759년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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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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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중(台仲)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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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淸臺) |
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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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僖靖)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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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북면 서중리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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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북면 서중리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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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면 과곡리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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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숙종36) 증광문과 병과 급제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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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간, 홍문관부제학, 대사헌 |
외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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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현령, 영암군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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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일 |
권상일(權相一)은 본관은 안동이요,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이다. 1679년(숙종 5) 산북면 서중리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달의(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에 병조좌랑을 지냈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하여 영문에 보고하였고,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하여 간행하였다. 이듬해 상소하여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하였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하여 경연에 참석하여 소신을 진술하였다. 그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창립하여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의 선치를 하였다.
1741년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해 사헌부헌납, 사간원사성, 사헌부집의,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 판결사, 홍문관부제학, 한성좌윤,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을 사숙하여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청대집』 18권, 『초학지남 (初學指南)』, 『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 『소대비고(昭代備考)』, 『가범(家範)』, 『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
가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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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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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미(權以彌) |
생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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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심(權深) |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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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달의(達意)의 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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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
안동권씨는 고려에서 시조 권행에게 안동부(安東府)를 식읍으로 내렸기 때문에 후손들은 안동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안동권씨는 크게 두 가지의 자랑할 거리를 내세우는데 그중 하나는 고려 때 권보의 당대에 보와 다섯 아들, 그리고 세 사위 등 9명이 봉군되어 ‘당대구봉군(當代九封君)’으로 이름을 떨치니 역사상 전무후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안동권씨에서 비롯하였다는 ‘사시(四始)’로, 『성화보(成化譜)』라는 안동권씨의 족보, 나이 많은 문신이 임금과 함께 들어가는 기로소에 태종 때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권희(權僖)와 영의정을 지낸 권중화(權仲和) 등이 처음 입소하였다는 것, 태조 때 권근(權近)이 대제학으로 초대 문형(文衡)이 되었다는 것, 유망한 문관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만 전념하게 하는 첫 호당(湖堂)에 권채(權採)가 뽑혔다는 것이다.
한편 중세에 와서 권우(權宇)는 왕자의 사부로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퇴계의 문하에 유학하여 학행으로 세상에 명성이 높았는데 이가 권상일의 5대조가 된다. 그리고 증조가 되는 권익린(權益隣)은 생원으로 여헌 장현광에게 유학하였으며, 조부 권이미(權以彌)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부친 권심(權深)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이달의(李達意)의 딸이다. |
학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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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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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암서원 |
학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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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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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爲己)의 학문 |
권상일은 어릴 때 주로 조부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9세 때 조부가 그에게 ‘명(明)’자 운을 주어 시험한 적이 있다. 이에 권상일은 대뜸 “장천고월만리명(長天古月萬里明)”이라고 응수함에 조부가 다시 ‘창(窓)’자 운을 주었더니 곧바로 “적적고재반개창(寂寂高齋半開窓)”이라 대답하는 놀라운 글재주를 보여주었다. 이에 조부는 너무 영리하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염려하여 글을 가르치기를 꺼렸다 한다.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얼마나 영민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인바, 그 총명함과 열의는 이미 소년 시절에 독서와 몸을 수양하는 데 관계된 옛사람의 훈계를 모아 『학지록(學知錄)』이라는 책을 엮어 심신을 닦는 교본으로 활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학문은 곧 위기(爲己)의 학문으로 이학(理學)의 규명에 투철한 것이었다. 그는 이(理)를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實體)라 여겨 이(理)에 근거하여 기(氣)가 화생(化生)한다는 이생기(理生氣) 내지는 먼저 이(理)가 존재한 이후에 기(氣)가 생성될 수 있다는 이선기후(理先氣後)를 근본으로 하는 이기생성론(理氣生成論)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상정(李象靖)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 이의 주재성(主宰性)과 제약성(制約性)만 강조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이단(異端)의 설에 가깝다고 하면서 비판하였다. 또한 이황이 수정하기 전의 사칠설(四七說)을 조술하여 이와 기를 완전히 이물(二物)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 되고, 기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된다고 하였다.
또 성(性)은 그 자체에 지각이 있어 본연의 성은 기와의 교섭(交涉) 없이 자체의 지각에 의하여 자체의 발동에 따르고, 기질의 성은 또한 이와의 교섭 없이 자성(自性)의 지각에 의하여 자체의 발동을 바로 따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정(情)을 발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본연의 성이 따라서 성립된 정(情)은 곧 이발(理發)에 해당하는 것이며, 또 기질의 성에 따라 성립된 정은 기발(氣發)이 되는 것으로, 두 개의 정은 그 성질에서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여 이와 기를 완전히 분리하였다. 그리하여 사단(四端)은 이의 발(發)이고, 칠정(七情)은 기의 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영남 주리파(主理波)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치우친 만큼 그의 생활도한 이의 원리를 좇는 엄격함을 고수하였다. 글을 읽을 때에도 외우기보다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힘썼으며, 문장에도 수식보다는 이치와 논리가 바로 서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 과거제도에 대해서도 심술을 괴롭힌다 하여 매우 회의적이어서, 서당에 있을 때에는 경서만을 일관되게 강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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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일의 저서 |
권상일의 저서로는 『청대집』 18권, 『초학지남(初學指南)』, 『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 『소대비고(昭代備考)』, 『가범(家範)』, 『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그중 『청대집』은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18권 9책의 목판본이다. 서문은 정종로(鄭宗魯)가 썼으며, 발문은 권상일의 문인인 조석철(趙錫喆)이 썼다.
구성은 책(冊)1, 2는 권1~4로 시(詩)를 수록하였으며, 책3은 권5~6으로 소(疏)와 서(書)로 구성되었고, 책4는 권7~8로 서(書), 책5는 권9~10으로 서(書)․잡저․제문이 실렸으며, 책6은 권11~12로 서(序)․기(記)․발(跋)․갈명(碣銘)이 실렸다. 책7은 권13~14로 묘표 묘지, 행장이 들어 있으며, 책8은 권15~16으로 서록(書錄)이 실렸고, 책9에는 연보, 유사 및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이 밖에 그는 이미 소년 시절에 옛사람의 심신 수련과 관련된 훈계를 모아 『학지록(學知錄)』이라는 책을 엮어 스스로 수련에 활용한 사실이 있으며, 1756년(영조 32)에는 춘추관수찬으로 실록 편찬에 많은 힘을 쏟기도 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