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이야기
성삼문은 사육신중 한사람이다.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병사하자
그 아들 단종(端宗)이 열두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던 3정승을 죽이거나 귀양보내고
자기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내 쫒은 후 죽인다.
그후 정권을 장악한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수양대군의 기세에 몰린 단종이 재위 3년만에 왕위를 넘겨주자 수양대군은 임금이 된다.
이 같은 수양의 행위에 대해 집현전학사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등이 단종 복위와 반역파 숙청을 도모한다.
세조 6년,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잔치가 궁궐에서 열리게 되자
성삼문등은 이 기회에 일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같이 거사를 하기로 약속한 김질(金礩)의 고발로 세조에게 잡혀 극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일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떨어져 영월에 귀양가서 죽는 비운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삼문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요동에 귀양와 있던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13번이나 만나러 다닐 정도로 열성적 학자였다.
그도 단종복위에 앞장섰으나 발각돼 39세를 마지막으로 처형됐다.
성삼문이 거사실패로 잡혀 고문을 받을때 세조가 묻는다.
거취를 분명히 하라고, 그러자 성삼문은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라고 답해버린다. 세조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를 알게 됐다.
또 세조가 성삼문을 직접 심문할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
세조가 다시 묻는다.
“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보라”고 했다.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즉위 첫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이런 태도에 화가 난 세조는 쇠를 불에 달궈 단근질로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으나
“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고 성삼문 말한다.
국문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 또 한수의 시를 읊는다.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이밤은 어느집에서 쉬어 갈수 있을까
돌아보니 어린 딸이 울면서 따라온다.
성삼문은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살겠구나” 하고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당시 역적들은 삼족을 멸하거나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노비를 삼았다.
성삼문은 이날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처형됐다.
[출처]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이야기|작성자 화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