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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범선을 건조해 1613년 스페인에 사절을 보낸 센다이번주 다테 마사무네
일본 동북지방 센다이번의 초대 번주인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시를 건설한후 태평양을 넘어
"에스파냐와의 통상" 을 꾀했으니, 1613년 센다이 영내를 방문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
의 사절 세바스티안 의 협력을 받아서는 갤리온선인 "산 주앙 바우티스타호" 를 건조했습니다.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에야스의 승인을 얻은 마사무네는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
를 사절로 임명해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 등 180명이 탄 배는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 아카풀코
에 상륙한 후에 내륙을 걸어서 베라크루즈에 도착해 이번엔 스페인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넙니다.
다테 마사무네의 사절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스페인국왕 펠리페 3세를 만나 서신을 전한후
스페인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로마 교황도 알현 했는데 17세기에 일본인이 로마 교황
을 알현한 사실은 일본의 외교사에서도 특필되고 있는 큰 실적으로, 7년 후에 귀국하니
일본에는 "천주교 금지령" 이 내린지라....... 그의 이름은 과자 하세쿠라 야키로 남았습니다.
지금도 스페인 세비야 근교 코리아 델 리오 (Coria del Rio) 에는..... 그때 하세쿠라를 따라
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고 머무른 센다이 번사의 후예 800여명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일본”을 뜻하는 “자폰”을 성씨로 삼고 있다는데 일본에서 유럽에 사람을 보낸건
그 이전인 1540년대에 말래카에 거주하던 “베르나도” 로 알려진 일본인이 최초라고 합니다.
베르나도는 유럽에 가서 대학 공부를 하고는 교황 바오로와 이그나시오 로욜라를 만났으며...
1557년에 포르투갈 코임브라에서 죽었고, 1582년에 13세의 신학생 소년 4명 을 포함
12명이 나가사키를 출발해 인도와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 스페인을 경유해 3년후 로마
에 도착해 교황을 알현하고 3년간 유럽에서 공부한후 1590년 서양문물를 가지고 귀국합니다.
인도부왕의 사절 알렉산드로 발리랴노 신부와 일본사의 저자로 통역인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금박
을 두른 건물 주라쿠다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알할 때, 네명의 소년들도 함께 가서는
서양의 고 악기인 클라보, 아르파, 라우데, 라베키냐를 연주하며 성가를 노래하니 히데요시는
감탄해서 "너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구나." 라고 말하며 몇곡을 더 연주하게 합니다.
소년들의 이름은 이토(伊東) 만쇼, 지지와(チチ石) 미켈레, 하라(原) 마르티노, 나카우라
(中浦) 줄리아노로 열두세 살에 유럽으로 떠나 8년반 만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덴쇼 유럽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 이었으니 1582년에 오무라 스미타다
와 아리마 하루노부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교황 접견을 목적으로 파견 했었습니다.
1582년 2월에 규슈 오무라를 떠난 소년들은 마카오, 말라카, 고아를 거쳐 1584년 8월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한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2세를 만났으며 이후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베로나를 거치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로 부터 세례를 받았다는데
지지와는 엄마가 만든 주먹밥을 먹고 싶다고 울기도 했고, 하라는 천연두를 앓기도 했습니다.
황금의 나라 지팡구(일본)에서 온 소년들은 어딜 가든 환영을 받았으니 1585년 한 해에 유럽 전역에서
이들에 관한 서적이 무려 48권이 쏟아졌다는데.... 그러니까 유럽에 저팬의 바람이 크게 불었다는 뜻
입니다? 소년들은 일정 후에 구텐베르크식 활판 인쇄기와 유럽 지도와 그림을 일본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보다 앞서 일본 상인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중국의 영파와 동남아로 진출해 필리핀, 베트남의 호이안
, 캄보디아, 태국의 아유타야, 말레이시아의 말래카 등지에 "일본인촌" 을 건설하고 무역에 종사
했으며, 그 이전인 14세기에는 고려(조선)와 명나라 해안지대를 약탈하는 해적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15세" 인 1581년에 센고쿠 다이묘 소마씨를 치러 전투에 나서 승리하고 1584년 18세때
가독을 승계하니 오데모리성주 오우치 사다쓰나가 어린 다테 마사무네에 맞서자 마사무네는 오데모리성
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한 "학살과 파괴" 를 행하니 당시 호족의 대부분이 서로 인척
관계였던 오슈에서 이러한 몰살전술은 전례가 없었던 대사건이라 센고쿠 다이묘들을 "공포" 에 빠뜨립니다.
오우치 사다쓰나의 몰락을 지켜본 니혼마쓰성의 사타케 요시쓰구는 화해를 신청하니 받아
들이는데 다음해인 1585년 요시쓰구는 배반해 마사무네의 아버지 데루무네를 납치
하여 인질로 내세우자 그는 냉혹하게도 "아버지를 포함하여 요시쓰구 일행을 몰살"
시켜 버리는데, 부친이 죽은후 마사무네는 아버지를 애도한다며 니혼마쓰성을 포위합니다.
사타케 요시시게가 규합한 오슈의 아시나· 소마· 이와키· 유키· 니카이도 등 3만 반다테 연합군과 아다치
군의 히토토리(人取橋) 다리에서 사투를 벌이니 숫적으로는 5분지 1 전력이던 다테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중신의 분전으로 모토미야성으로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고, 사타케 가문이 호조씨와의 싸움
으로 퇴각하자 다른 가문들도 철수하니 마사무네는 최종 승자라 독안룡(獨眼龍) 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마사무네는1588년에 고오리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메고히메의 친정인 다무라 집안의 협력을 얻어
후쿠시마현 중부 까지 지배하는데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와 도호쿠의다이묘들에게
개인 전투 금지를 내렸지만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해 그해 북쪽 오자키 집안의 내분에 개입해
1만 군사로 침공을 감행하지만 완강한 저항과 구로카와 하루우지의 배반, 폭설 때문에 패배합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남쪽에 아시나· 니카이도 집안이 침공해 왔으며 백부 모가미 요시미쓰
와도 일촉즉발의 사태까지 갔지만 화해가 성립되었으며 1589년에는 도호쿠(동북)의
패권을 놓고 아이즈의 아시나 요시히로와 사타케 요시노부의 연합군과 싸우는데 아시나
집안은 간파쿠 히데요시 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이는 히데요시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습니다.
아시나 요시히로는 1만 5천, 마사무네는 2만 1천을 이끌고 구로카와성을 함락시키고는
아시나 집안을 멸망시킨 마사무네는 아이즈 지방 을 지배하에 두고 군사를 스카강
으로 진군시켜 니카이도 집안도 멸망시켰는데 이 싸움을 전후해 시라카와 요시지카 ·
이시카와 아키미쓰 · 이와키 쓰네타카가 차례로 마사무네에게 복속하니 후쿠시마현
과 아이즈 및 야마가타 현의 남부, 센다이가 속한 미야기 현의 남부 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 무렵 일본 중앙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사업을 이어받아
한창 진행 중에 있었고 오다와라(이즈)의 호조 집안을 멸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자
뒤늦게 참가하니 히데요시는 고심 끝에 용서하고는 마사무네가 점령한 영토중에
아이즈(후쿠시마 서부) 를 제외한 나머지 영지는 모두 인정해 주니 72만석 이었습니다.
지방의 일개 영주(다이묘)가 어떻게 배까지 건조해 수만리 떨어진 유럽에
사신 을 파견하나? 이는 센고쿠 시대 부터 일본 전국에 200여명
이 넘는 센고쿠 다이묘(영주)들은...... 사실상 "국왕" 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이묘의 신분은 자식으로 "세습" 되며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는 가신과 무사들을 거느리니 영주
는 자기 영지에서 세금을 징수해 가신과 무사들에게 연봉을 지급하며 백성에게 사법권을
행사해 재판을 하고 이웃나라와 외교로 동맹을 맺으며 군대를 양성해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니
일본에서 忠(충) 이라고 하면.... 천황(일왕) 이나 막부 쇼군이 아닌 "다이묘" 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에도 막부 시대에 들어와서도 일본 260개 번에서 백성들이 이웃 번으로 장사나
여행을 가자면 사전에 번주(영주, 다이묘) 에게 허락을 받아 여권인 통행증 을 지참
하는데... 이웃번과의 경계에 "관소" 를 설치하고 통해증 검사와 물품에 "관세" 를 거둡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1635년 에도(도쿄)에서 3대 쇼군 이에미쓰의 문병을 받은 사흘후 5월 24일
70세로 죽으니 사체는 목관에 안치되었고 수은· 석회· 소금을 채운 다음 상여에 실려
생전의 다이묘 행차처럼 떠받들어져 6월 3일에 센다이에 돌아오는데 막부는 에도에서
7일간 사람들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으니 고산케(御三家) 를 제외하면 특이한 예였습니다.
센다이에 다테 마사무네의 묘소를 쓸때 함께 죽어 무덤에 같이 묻힌 "순사자" 는 가신 15명에
배신 5명 합하여 스무명이나 되었으니.... 저승에 함께 따라 가서라도 주군을 모시겠다는
갸륵한(?) 忠(충) 이라! 5명 젊은 시녀들은 몰라도 15명 나이 든 가신들은 기꺼이 죽었다
라고 여겨지는데.... 그가 묻힌 묘소는 즈이호덴(瑞鳳寺 서봉사) 이라고 하며 매우 화려합니다.
1614년 히데요시의 아들이 머문 오사카성 전투 에 출정해 오사카 성 바깥쪽 해자 매립
공사의 임무를 받게 되었고 쇼군 히데타다로 부터 이요국 우와군에 영지를
하사받습니다. 이듬해 오사카 도묘지 전투 에서는 고토 모토쓰구 등과 싸웠으며
고토 부대를 괴멸시켰으나....... 사나다 노부시게 의 반격을 받고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선봉장이던 미즈노 가쓰나리는 마사무네에게 사나다 재공격을 세 번이나 요청
했지만 마사무네는 탄약 부족과 군사의 부상 등을 이유로 거절합니다. 때문에
노부시게 는 오사카 성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간토의 무사가 100만
이라고 하나 사내라 부를수 있는 자는 단 한명도 없더이다" 라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오사카성은 함락되었고 전투가 끝난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논공행상으로
마사무네에게는 난카이도 이요국의 10만 석이 더 주어졌는데 마사무네 는 서장자인 다테 히데무네
에게 이를 주어 센다이 번에서 분가해서 독립시켰고 이를 계기로 히데무네는 "우와지마번" 의 초대
번주가 되는데 같은 봉건제라도 유럽에서는 서자는 전혀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하는데 비하면 놀랍네요?
다테 마사무네는 “시대를 늦게 태어난 센고쿠 무장”이라 불리는데 만약 다테 마사무네가 세상
에 조금만 더 빨리 태어났거나 히데요시의 호조씨 정벌 이 좀 더 늦었더라면 "마사무네가
일본 천하에 도전" 했을 것이니 역사의 흐름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도요토미 정권 시대부터 마사무네는 "천하를 찬탈" 하고자 은밀히 책략을 꾸몄다는 데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히데요시의 진에 가담하는 것을 미룬 것은... 새로 차지
한 아시나 집안 영토에 대한 내부단속 때문이라고 마사무네 자신은 변명하고 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사타케 집안에 맞서 동맹 관계인 호조씨 집안과 손잡고 히데요시를 쓰러뜨리려
했는데 히데요시는 다테 집안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 오슈에 행차 합니다. 또한 마사무네는
다테 집안을 중심으로 오슈 지역 다이묘들의 연합군을 조직하고 호조씨와 제휴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도요토미 집안 내부의 “불온분자” 들이 봉기 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가 지은 “일본사”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마사무네
에게 말하기를 "네가 날 배반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죽어 마땅한
몸이긴 하지만 나고야에 와서 조선까지 건너가 애쓴 일도 있으니 목숨은 살려
주겠지만 오슈 로 돌아갈 수 없으며 내 곁에 잡아둘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다테 마사무네는 와가 다다지카를 선동해 난베 토시나오의 영토
를 침략하려고 했는지라...... 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갓타군만 더해 주었으니
동군에 참가했던 무장들 중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의 논공행상이 가장 적은 것입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 는 로마와 군사동맹 교섭중 국왕 펠리페 3세에게 "마사무네는 세력
이 있고 또 용맹하여 뭇 사람들 모두가 황제 가 되리라 인정하는 사람 입니다.
일본에서 계승권을 얻는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력(武力) 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선교사 제로니모 데 안제리스 도 편지에서“덴카도노(이에야스)는 다테 마사무네가 에스파냐
국왕에게 보낸 사절 에 대해 알았고 마사무네가 모반 을 일으킬 계획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니 모반을 위해 에스파냐 국왕과 손잡을 목적으로 대사를 파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전형적인 "정서불안형 인물" 이었으니, 오슈의 패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받드는 이시디 미쓰나리의 서군에 맞선
세키가하라 전투때 우에스기군을 견제하라는 이에야스의 의도대로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봉지(封地) 를 획득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약속했던 100만석
은 다테 마사무네의 행동과 상쇄되어 취소되었으며...... 마에다 도시마스에게서
그런 점으로 훈계를 듣고도 이렇게 천방지축 으로 횡행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정유재란 포로 강항 이 지은 “간양록” 에서는 친동생을 죽인 점 등을 거론하면서 다테 마사무네 를 왜장
중에서 가장 "음흉하고 사악한 자" 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어머니가 선대부터 동맹인 호조씨
편에 참가를 망설이는 아들 다테 마사무네를 독살하려고 하자 마사무네는 차마 어머니를 죽이지는
못하고 그 대신에 어머니가 사랑했던 동생 코지로를 죽였는데, 강항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한 듯 합니다.
다테 마사무네 의 별칭인 “독안룡”이란 원래 당나라의 무장이자 후당(後唐) 의 태조가 된 이극용
(李克用) 의 별명이라고 합니다. 자치통감에는 "여러 장군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 하였다.
극용은 외눈이었고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그를 독안룡 이라 불렀다." 고 적혀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 를 처음으로 “독안룡”이라고 부른 것은 1901년에 발행된 책자에 적힌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 가 최초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사무네가 원래는 “외눈의 행자” 라 불린 만해(滿海)
스님의 환생 이라는 일화는 이미 다테 마사무네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습니다.
도호쿠 지방의 얘기에 “센다이님(마사무네) 의 신비스러운 힘으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농민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른쪽 눈을 잃은 원인은 사실 천연두 였지만 마사무네
본인은 어릴 때 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가 떨어졌을 때 나뭇가지가 오른쪽 눈에 박혔다고 떠벌였습니다.
그는 정실 메고히메 말고도 일곱명의 측실 을 더 두었고 이로하히메 등 10남 4녀를 얻었으며
정실 메고히메와의 사이에 얻은 차남 다다무네 를 적자이자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측실 이이자카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맏아들 히데무네는 어디까지나 서자로 간주
했으며, 또 도요토미 집안과의 관계도 있었으므로 본가를 잇게 하지 못하게 했다고도 합니다.
"낭색" 으로 시동인 다다노 사쿠쥬로 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으며 마찬가지로 낭색 관계였던 가타쿠라
가게쓰나의 아들 시게쓰나 에 대해서는 오사카 전투 전날 밤의 일로 다음날의 선봉에 서기를
바랐던 시게쓰나 를 달래며... 시게쓰나의 뺨에 입맞춤 했다는 기술이 “가타쿠라대대기” 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