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의 천주교 입장
정조임금(1752~1800) 조선시대 제 22대 왕이다. 재위기간은 1776-1800으로 천주교와도 관련이 깊다. 정조 임금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이었는가? 정조는 조선의 왕들 중 또한 당대 최고 수준의 학식과 교양을 갖춘 손 꼽히는 학자 군주였던 만큼, 당대 중국을 통해 유입되던 서양의 기술과 학문과 종교(서학)에 대해 깊은 관심과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역 서학 서적을 직접 책을 읽고 파악하고 있었다. 정조가 서학 서적을 접하고 다룬 방식은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1. 천주실의등 주요 서책 탐독:
정조는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나 천문 *지리 등 서양과학 서적들을 직간접으로 널리 읽었다. 천주교 사상에 대해 "불교의 윤회설이나 보응설과 다를 바 없다"고 평하며 학문적으로는 유교보다 격이 낮다고 보았습니다. 정조 본인이 철저한 성리학 신봉자였기에 천주교를 종교로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정조의 신하 정약용이 성균관 유생 시절 정조의 <중용>에 대한 질문에 답을 올렸을 때, 정조는 정약용의 답변 배후에 <천주실의> 상제上帝 개념과 보유론保有論(유교를 보완하는 서적)적 시각이 깔려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로 서학 교리에 정통했다.
2. "사고(史庫)에 이미 수십 권이 있다":
신하들이 천주교를 믿는 남인 학자들을 공격하며 서학 서적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들을 논박했다. "서양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이미 수백 년이 되었다. 왕실 사고(史庫)나 홍문관(옥당)의 옛 장서 중에도 소장된 것이 몇십 권이 넘으며, 나 또한 연전에 특별히 명령하여 구해보게 한 적이 있다." 라고 하였다.
3. 과학은 수용, 종교는 배척:
정조는 서학을 두 가지로 명확히 분리하여 대응했다. 과학 기술(서기): 천문학, 역법(달력), 지도, 정약용이 활용한 《기기도설》 등의 과학 기술은 조선에 이롭다고 보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장려했다.
정조는 주자학(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천주교 사상은 이단이나 유교 질서를 흔드는 사학으로 규정하고 비판했지만, 초기에는 처벌보다 유교적 교화를 통해 바로잡으려고 묵인하며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정약용 등 남인 실학자들이 천주교와 연루되었을 때도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 정조는 "우리의 정학(성리학)이 올바르게 바로 서면 천주교 같은 사학(이단)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을 강변하였다.
그러나 1791년 진산 윤지충 사건이 발생하여 전통적 윤리와 국가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사회 저변으로 인식되며 비판이 거세지자 경계를 강화하였다. 1795년 직접 사학邪學으로 천명하고 이를 경계할 것을 지시했다. 다만 이때도 극단적인 대규모 학살보다 자중을 유도하는 수준의 통제였다. 1800년 정조 사후 1801년 정적을 무너뜨리기 위한 구실로 대규모 박해가 시작되었다.
4.문체반정과 천주교 서적 규제:
정조는 서학 서적이 유포되는 근본 원인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가볍고 참신한 문체(패관소품체)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조는 전통적이고 바른 문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주도했다. 궁중 도서관인 규장각 등을 통해 중국에서 들여오는 천주교 서적 수입과 유통을 엄격히 규제하여 사상적 오염을 막고자 하였다. 다만 사회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서적들인 기기도설(정약용이 수원화성을 쌓을 때 참고한 책)은 규장각에 보관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장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