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량(李資諒)의 초명(初名)은 이자훈(李資訓)이며, 외척으로서 좌우위녹사 참군사(左右衛錄事 叅軍事)에 보임되었다. 예종(睿宗) 때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女眞)을 정벌한 공이 있어서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부시랑 추밀원지주사(刑部侍郞 樞密院知奏事)가 되었다.
사신의 명을 받들어 송(宋)에 갔는데, 휘종(徽宗)이 예모전(睿謨殿)에 행차하여 〈사신〉 일행을 불러서 잔치를 베풀고, 시를 지어 보이며 그 시에 화답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자량이 즉시 지어서 올렸는데 이르기를, “녹명(鹿鳴)의 경사스런 모임에 현량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시니, 신선 세계의 음악은 성대하게 깊숙한 방에서 나오네. 천상의 어사화(御賜花)는 머리 위에 아름답고, 접시 위에 놓인 귤은 소매 속에서도 향기롭다. 황하(黃河)는 다시 천년의 상서로움을 알리고, 푸른빛의 맛좋은 술은 만수무강을 비는 잔에 살짝 넘쳐흐르네. 오늘 배신(陪臣)이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였으니, 〈『시경(詩經)』〉 천보(天保)편을 노래하며 영영 잊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이에〉 휘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을 더했다.
귀국하려는데 몰래 타이르며 말하기를, “당신의 나라는 여진(女眞)과 국경을 접하였다고 들었소. 다음해 내조(來朝)할 때는 〈여진인〉 몇 사람을 설득하여 함께 오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자량이 아뢰어 말하기를, “여진은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오랑캐[夷獠]들 중에서도 가장 욕심 많고 추악하니 상국과 통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송의 총애 받는 신하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여진 땅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많이 생산되며, 고려(高麗)가 평소 더불어 교역하므로 우리와 이익을 나누지 않으려고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고려를 자식처럼 사랑하시는데도 지금 덕을 배반함이 이와 같으니, 직접 일개 사신을 보내어 여진을 부르시는 것이 옳으며 고려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송나라가 여진과〉 통교하다 정강(靖康)의 화(禍)가 이르게 되었다.
〈이자량은〉 후에 추밀원부사 태자빈객(樞密院副使 太子賓客)으로 옮겼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형부상서 추밀원사(刑部尙書 樞密院使)에 임명되었다. 병이 깊어지자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시켰다. 죽으니 3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이자량은 독서를 좋아하여 항상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을 탐구하였고, 자신의 공적과 명성을 〈드러내기〉 좋아하였다.
이자인(李資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2명의 딸을 낳았고 아들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