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진 문장이 있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을 영화에서 들은 후로 간혹 호의를 당연히 여기는 사람에게 무례하다며 써 왔다. 그런데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오히려 무례하다고?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p27) 우리가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채 선한 의도로 권력을 갖지 못한 이에게 부지불식간에 차별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권력서열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대 놓고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조직사회는 물론이고 친구사이에도 은근히 형성되어 있는 서열관계가 있어 서열이 높은 친구의 의견대로 놀고는 한다. 심지어 강아지도 자신을 집안 식구들중에 서열을 정한 뒤 자기보다 서열이 낮다고 생각되는 식구 말은 안 듣는다는데 말 다했지.
나 어렸을 적에 장두석, 이봉원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입술을 두껍게 칠하고 곱슬머리의 가발을 쓰며 '시커먼스'를 외치며 하는 개그가 있었다. 모습이 어찌나 웃겼던지 그춤을 따라하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인종차별인지도 모른채.
감수성은 진보한다. 그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불편하다. 지금은 인지하지 못한 것들이 좀 더 생각해 보면 선량하게 나와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완전한 평등이라는 게 가능할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웃과 주변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면 나의 감수성도 조금 예민해 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