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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하사 주지 정산 스님
무도 걸었던 청년, 사회·불교 자주화에 헌신하며 위법망구 실천
허약한 체질에 복막염, 부모, “살아만 달라”
중국무술 입문하며, 건강회복 체력증진
불교무술 최고 양익 스님, 은사로 청련암서 출가
10·27법난 절에서 목도, 민주화 운동 필요성 절감
봉은사 사태 때 할복 시도, “당시엔 최선의 선택였다”
청련암서 지장기도 4년, 100일 10만 배 속 ‘하심’
개운사 주지 맡으며 매일 ‘금강경’ 독송
수행도량 훼손 케이블카, “시민과 함께 저지할 것”
마하사 주지 정산 스님은 “불교 자주화를 지향하며 종법과 제도를 개선했으나
불교 정신과 충돌하는 법도 있다”며 “사회법과 제도를 따라가기보다는
율장에 입각해 문제점들을 보완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의 황령산(荒嶺山·427m)은 도심을 감싸고 있다.
숲길 걷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청량한 바람을 선사하는가 하면
도심 야경을 보려는 사람들에게도 천연의 달빛과 문명의 빛이 빚은 멋진 풍경을 안겨준다.
황령산에서 금련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사찰 하나 앉아있다.
작지만 ‘위대한 사찰’ 마하사(摩訶寺)다.
대대적인 중창 불사(1965∼1970)를 진행하던 중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쓰인 상량문을 대웅전에서 발견했다.
아쉽게도 그 상량문은 현재 찾을 수 없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부산 최초의 사찰’이라는 자긍심을 갖는 건 무리 없다.
부산 최고(最古)의 산사지만 불교 내외적으로의 역할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불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성 독립군을 위한 천도재를 여는가 하면 명상 등을 적용한
체험형 웰니스프로그램 ‘마하 위크’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도량에 새로운 활기가 생긴 건 정산(丁山)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다.(2020)
춘천에서 태어났으나 서울에서 자라며 유년을 보냈다. 체질적으로 몸이 약했다.
장티푸스에 복막염까지 앓게 되면서 사선을 넘나들었다.
부모님의 소원이 “살아만 달라”였을 정도다.
체력을 키우지 않고는 생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서울 청량리의 한 체육관에서 중국 무술을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근육이 생기니 몸의 변화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파주 보광사 주지 종진 스님과 인연이 있어 절에서 봉사활동 하며 불연이 닿았다.
절 안의 풍경이나 고즈넉함에 조금씩 매료되어 갔는데 언뜻언뜻 들려오는 법담도 좋았다.
어느 날, 범어사 청련암에서 정진 중이었던 적운(현 골굴사 주지) 스님이 체육관을 찾았다.
두 사람만의 짧은 담소가 있었다. 그날 밤 청년은 버스에 몸을 싣고는 범어사로 향했다.
훗날 선무도로 알려진 ‘금강영관(金剛靈觀)’을 창안한 당대 불교 무술의 최고수
양익(兩翼·1934-2006) 스님과 마주했다.
“서울에서 사범을 한다고?”
“예.”
“깎아라!”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양익 스님은 제자를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단 6개월의 유발 행자 생활을 견뎌내야만 출가를 허락했다.
한 번 만나 보고 삭발하라고 한 건 파격이었다.
범어사 승가대학과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한 정산 스님은 범어사 기획실장,
조계종 중앙종회의원(14·15·16대), 불교문화사업단장을 맡았으며
개운사, 모은암, 동명불원, 청련암 주지를 역임했다.
시민들의 호응 받는 마하위크 현장.
양익 스님은 엄하기로 정평 났다.
그렇지만 첫 만남에서 제자로 받아들였을 정도이니 애정이 남달랐을 법하다.
“저라고 예외 없었습니다. 두 마디 이상 나눠 본 기억이 없을 정도입니다.
‘해라, 안돼, 하지마, 가거라’하면 끝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도님들에게는 한없이 자비스러우셨습니다.
무슨 얘기를 해도 끝까지 경청하셨습니다.”
범어사 강원에서 공부하면서도 청련암에서 무술을 익혔는데
이 또한 은사스님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다.
그런데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그 날 은사스님과 제자의 결이 틀어졌다.
인사를 드리려 청련암을 찾았는데 은사 스님이 마당에 서 있기에 그 자리서 삼배를 올렸다.
“‘고생했다. 뭐 할래?’ 물으셨어요.
내심 ‘청련암에서 정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기대하셨던 겁니다.
당시 저는 대학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 말은 꺼내지 못하고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만 했습니다.
은사스님은 ‘중 노릇 하는데 무슨 대학?
절에 있기 싫으니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하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동국대 등의 일반 대학에 진학하면 환속한다는 우려가 있었다.
“더 말씀드려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뜻을 굽힐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 밤 서울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올랐습니다.”
한의학도의 꿈은 펼치지 못했다.
“천축사에 머무르며 입시학원에 다녔습니다.
학원비 마련하느라 체육관에서 사범 일을 보았는데 결국 공양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대중 생활을 하다가 혼자 밥을 먹으니 소화도 잘 안되었는데
규칙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탈장 수술을 받았습니다.”(1985)
건강을 다시 챙겼을 때 당시 중앙포교연구회의 핵심 멤버였던
원종(전 중앙승가대 총장) 스님을 만났다.
“중앙승가대에서 ‘불교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자는 제안에 입학을 결정했습니다.”(1986)
정산 스님은 1980년 10·27법난을 목도 했다.
다행히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은사스님과 함께 몸을 피해
큰 화를 입지는 않았지만 신군부 독재 정권이 ‘사회 정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한국불교를 탄압한 국가폭력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비롯한 조계종 대표 스님들이 강제 연행되어 조사받았습니다.
폭언, 폭행 등 인권유린이 자행된다는 얘기를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수사 중간 발표를 통해 200억원을 부정 축재한 비리 집단으로 낙인을 찍어 놓고는
최종 수사 결과는 발표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민 눈에 불교가 어떻게 비추어졌겠습니까.”
마하사 전경.
1970년대 후반 일어난 민중불교 활동은
1980년대 초 불교개혁·사회변혁을 주창한 ‘사원화 운동’으로 발현됐다.
1979년 중앙승가학원으로 설립된 중앙승가대학도 시대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학인스님들이 민중불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불교 내의 개혁 목소리도 높였는데 중앙승가대(개운사)에서 열린
‘전국 청년승가 육화(六和) 대회’가 대표적이다.(1981)
전직 승려라고 사칭한 명진홍 목사가 “불교 법당은 귀신의 종합청사”라는
비방 벽보를 부착한 사건이 발생하자 중앙승가대 학인스님들은
동국대 석림회와 함께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운문사, 봉녕사 등
전국 강원 학인 500명을 규합해 전국승가학인 연맹을 발족했다.(19 82)
1년 후엔 성연, 진우, 원종, 현관 스님이 승가대 학인스님들의
‘의식화 교육’을 위해 ‘중앙포교연구회’를 결성했다.(1983)
정산 스님이 원종 스님의 중앙승가대 입학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인 건
10·27법난과 명진홍 목사의 훼불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원종 스님이 중앙포교연구회를 이끌던 1986년 정산 스님은
청화, 석용, 진원, 동화 스님과 함께 1년 동안 의식화 과정의 하나인
‘심화그룹 스터디’를 진행했다.
“스터디를 마친 스님들은 1학년 포교연구회 그룹을 지도하고,
1학년 스님들은 같은 학번 동기 스님들과 스터디를 진행했습니다.”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 기치를 내건 ‘9·7 해인사 승려대회(1986)’가 개최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중앙승가대였는데 중앙포교연구회의 역할이 컸다.
그사이 재가자 중심의 사회운동을 표방한 민중불교운동연합(1985),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가 창립됐고 이어서 대승불교승가회(1988)가 출범했다.
인권과 통일, 노동, 환경에 역점을 두고 활동한 대승불교승가회는 주목을 받았으나
그해 6월 발생한 ‘봉은사 사태’로 와해 수순을 밟을 정도의 치명타를 입었다.
봉은사 사태는 종권을 둘러싼 당시 총무원 측과 봉은사 측이 벌인 갈등으로
10여 명의 스님이 크게 다친 사건이었다. 당시 3학년이었던 정산 스님도 연루됐었다.
“중앙승가대 1·2학년 학인 스님들이 봉은사로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들어간다고 해도
고학년인 3·4학년 스님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당성과 대의적인 명분을 주어야 우리도 앞장설 수 있지요.”
‘봉은사를 중앙승가대학의 운영사찰로 지정한다’는 총무원의 제안을
중앙승가대가 무조건 받아들일 건 아니었다는 얘기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학교의 발전 방향과 지원은 종단 차원에서 깊이 고민한 후
중장기적 마스터플랜 속에서 진행되어야 할 문제였다.
따라서 총무원의 제안에 대한 신뢰성과 당위성은 당시엔 떨어졌다.
정산 스님은 두 명의 스님과 함께 봉은사로 향했다.
품 안에는 칼이 있었다. 할복할 작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실행 직전에 경찰에 체포돼 극단적인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두고 ‘후회하지 않는냐?’ 묻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그때마다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답합니다.”
훗날 전국승가회와 대승불교승가회의 회원 등 진보 성향의 스님들은
대승 차원에서 힘을 합쳐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출범시켰다.(1992)
정산 스님은 현재 실천승가회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실천승가회를 비롯한 교계 단체들은 불교 민주화를 지향하며
종법과 제도를 개선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불교 정신과 충돌하는 법도 있습니다.
사회법과 제도를 따라가기보다는 율장에 입각해 문제점들을 보완해 가야 한다고 봅니다.”
1988년 봉은사 사건 직후 청련암을 찾아 은사스님을 친견했다.
한의학을 공부하겠다며 야간열차에 오른 후 처음이었다.
“심신도 쉴 겸 광주 문빈정사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차비는 있느냐?’ 하시더니 천원 지폐로 30만원을 주셨습니다.
참 따듯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서울 가지 말라 한 건 힘든 길 굳이 걷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1996년 범어사로 들어가 청련암에서 4년 동안 지장기도에 매진했다.
“민주투사 이미지가 강한 저였는데 왠지 허전했습니다.
첫 정진으로 시작한 ‘두문불출 100일기도·10만배’를 회향하고 보니
빈자리에 무엇인가 들어차는 듯했습니다.
옛 선지식들의 말씀대로 ‘스님은 수행해야 한다’라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때 제 아집과 아상을 조금씩 내려놓았습니다. 제 인생의 분기점이었습니다.”
원행(전 조계종 36대 총무원장) 스님의 추천으로 2000년 개운사 주지를 맡았다.
첫 주지 소임이었는데 은사스님은 쉬이 허락했을까?
“허락하시면서 당부하셨습니다. 예불 빼먹지 마라. 모연금 받아 불사하지 마라.
주지를 위한 사조직 만들지 마라. 사표 쓰라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
절 살림을 직접 맡아보니 예불 약속만도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상(相)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 결과라 생각하고는 매일 ‘금강경’을 독송했습니다.
마하사에서도 이어가고 있는데 안거 기간에는 불자들과 함께 매일 독송합니다.”
황령산지키기 범시민운동본부 출범.
황령산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산 정상에 전망대와 호텔,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는 거다.
2021년 부산시와 민간사업자가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본격화됐는데
2023년 부산시는 ‘조건부 승인’했다.
“기후위기시대에 사는 우리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산을 파헤치는 건 그에 역행하는 겁니다.
산 중턱에는 2007년 건설한 후 얼마 안 돼 문 닫은 스키돔이
16년째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호텔을 짓겠다는 건 억지를 넘어 폭력입니다.
황령산 자락의 땅 330만㎡(10만평)는 마하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도량에 서서 둘러보는 땅 모두가 삼보정재입니다. 도량 훼손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황령산은 시민들의 쉼터이기도 합니다. 마하사는 시민들과 함께 개발계획을 저지할 겁니다.”
마하사에서 퍼져 나간 범종 소리는 해탈의 기쁨을 느낄 만큼 아름다워
예로부터 ‘수영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출가 후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길을 걸어 온 정산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한
‘그 해탈의 소리’를 지켜낼 것이다. 시민들도 그리 믿고 있을 터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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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 스님은
양익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84년 구족계 수계. 범어사·중앙승가대 졸업.
개운사, 모은암, 동명불원, 청련암 주지, 중앙승가대 동문회 사무처장,
조계종 중앙종회의원(14·15·16대), 불교문화사업단장, 범어사 기획실장 역임.
현재 부산그린트러스트 이사장이자 황련사 한주이며 마하사 주지다.
2024년 4월 17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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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진리)을 구하기 위해 몸 돌보는 것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