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번칩니다.
야(除夜)의 종 33타 의미 考
*이 논은 현 육군 법사로 복무중인 김 갑영 법사님의 글이며 국방일보에 기고된 내용이지만 불자들이 알아야할 불교 정신문화 이기에 새해를 맞이하여 특별기고로 본지에 올립니다.
제야의 타종 행사는, 현재 우리 국민들 의식 속에 세시 풍속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왜 제야의 종을 33번 타종하는지,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 , 아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제야의 종과 보신각, 33번 타종의 의미를 서술함으로써
우리 국민들이 그 뜻을 가슴으로 새기며, 밝고 희망 찬 새해를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 보신각(普信閣)과 보신각 종(鐘)
보신각 종루(鐘樓)는,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이래 세 차례의 소실과 여덟
차례의 중건이 있었고, 종루라 불리워지다가 고종 32년(1895)에 보신각이란 사액을
내린데서 보신각이라 불리워졌다. 현재의 종각은 서울시가 1979년 8월에 동서 5칸
남북 4칸의 중층 누각으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신각 종은 조선 세조 14년(1468)에 주조했지만, 임진왜란 때, 종과 종각이 모두
소실 되었다. 임란 직후(1594) 종루가 재건 되면서 원각사 종을 대신해 걸었다.
원래 이종은 태조 2비 신덕 왕후의 능인 정능의 능사(陵寺)에 있었던 것을, 후에 능사가
폐사되자 원각사로 옮겨진 뒤, 원각사가 없어지자 남대문에 옮겨지고 , 다시 선조 30년
(1597)에 현 명동성당 부근인 명례동헌에 옮겨졌다.
그 후, 광해군 11년(1619)에 종루로 옮겨져 파루(오전 4시)에 33번, 인정(오후 10시)에
28번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는 일과,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데 쓰였다.
그러나 이 종은 천수를 다함에 따라, 새 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985년 8월 2일
옛 중앙 박물관 경내 새 종각에 영구 보존 되었다.
현재의 종은 서울시가 보신각 종 중수 위원회 후원으로 만들어서 원래의 보신각 종과
대체한 것으로 높이.3.78m 지름 2.23m 무게 20톤으로 우리 전통 양식과 현대 감각을
잘 조화시킨 종이다.
2.보신각과 33번 타종의 사상적 배경
1).사대문과 보신각(四大門과 普信閣)
태조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을 개국한 개국 공신들은 조선조의 건국이념으로
유교를 국시로 삼고 주역의 8쾌에 의한 형태로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는 바,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는 8대문을 조성 하였다.
조선조 개국파들이 내세운 정치적 이념인 유교는 5상 (五常:仁,義,禮,智,信)을 큰 줄기로
삼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4대문은 각각 그 방위에 따라 인,의,예,지를 상징하고 있으며
백성들이 인,의,예,지 4상을 갖추면, 마지막으로 믿음,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마음 가운데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4대문의 한 중앙인 종로에
信을 넣어 5상이 갖추어 지고, 거기에 종을 매달아 울림으로써, 종소리가 울려 나와
온 우주 시방 법계를 퍼져 나가듯,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5상의 마음이 우러 나오고
또 널리 선양되기를 기원함으로써 유교적 이상 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기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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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오늘날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주역의 이치로 볼 때, 동쪽은 만물의 싹을 틔우는 봄의 방향이니, 어찌 그 마음이
어질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어질 仁자를 써서 흥인지문 이라 하였는바, 굳이
흥인에 갈지(之)자를 써서 첨가 한 것은, 우리나라가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이
잦으므로 산맥을 뜻하는 갈지(之)자를 첨가함으로써 동쪽의 왜풍을 막아보자는
비보의 뜻이 담겨져 있다.
남쪽의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 남쪽은 방위상으로 여름을 뜻하고,
만물은 여름에 윤택하게 자란다. 만물은 응당 예의 법도에 맞게 자라야 마땅
하며, 예를 숭상하는 것은 인류의 근본이니 곧 남대문의 마음인 것이다.
서쪽의 서대문은 방위상으로는 가을 을 상징하며, 가을에는 잊지 않고 추수하니
의리가 있음이라! 의는 마땅히 돈독해야 하므로 돈의문(敦義門)이라 명명하였다.
북쪽의 북대문은, 방위상으로 겨울을 상징하며, 가을에 추수한 것을 겨울을 대비해
저장 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마음을 상징하고, 북방은 외적의 침입로이기도 하므로
엄숙해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숙정문(肅靖門) 또는 홍지문(弘智門)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위와 같이 동,서,남,북, 춘,하,추,동, 인,의,예,지를 움직이는 중앙의 주재자인
파워핸들(Power Handle)이 바로 종루(鐘樓)이다. 이는 사시운행(四時運行)의 때를
잊지 않으니, 신뢰가 그 바탕이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루는 고종 32년(1895)에 보신각(普信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 33타종의 의미
33번 타종은 인도의 우주관에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아침에 28번 (수미산을 중심으로 수직적 28천을 의미)
저녘에 33번 (도리천을 중심으로 수평적 33천을 의미) 타종하는데, 이 종소리를 듣고
범종의 울림 (옴:A-U-M 소리 울려 퍼지는 가운데)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즉,
무상한 삶의 진리를 인간과 하늘의 신들을 포함 한, 만유의 생명체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하는데 그 근본 정신이 담겨있다.
제야에 울리는 33번 타종의 숫자적 의미는,
첫째 ; 33천 도리천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도리천의 천민(天民)들은 건강하고, 부지런
하며 무병장수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우리나라 국민들도 33천
도리천 천민들처럼,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그 첫째요,
둘째; 조선조 건국이념이었던, 유교의 5상 ( 興仁: 인을 일으키고, 崇禮: 예를 숭상하고
敦義: 의가 돈독하고, 弘智:지혜로우며, 普信:서로 신뢰하는)의 정신이 온 국민들 마음
속에서 종소리 울려나듯 울려 나오고, 퍼져 나가듯 널리 함께 공유 하자는 이념이
담겨 있는 게, 그 두 번째요
셋째: 우리나라를 세우신 국조 단군이 바로 33천 도리천 가운데 제석천황인 환인천제의
자손이니, 나라를 세울 때의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광명이세(光明以世: 빛으로써 세상을 밝게한다.)의 이념이 온 세계에 널리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는 것이 그 세 번째 의미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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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33번의 타종이 독립운동가 33인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말이고, 독립 운동가 33인은 동양의 숫자 철학으로 보면, 3이란
완성의 숫자를 의미하며, 3이 겹친 33인으로 민족 대표를 정한 것은, 우리 국민들을
대표 한다는 의미에서 완성의 숫자 3의 상징성을 극대화해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종소리는 영원히 변함이 없다. 그 소리는 모든 이념, 종교, 인종을 뛰어 넘는다.
그러한 크고 넓고 깊은 정신으로 우리만을 뛰어 넘어 , 이 우주 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실상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이고득락(離苦得樂)하며, 지혜장(智慧長) 보리생(菩提生)
하여 출삼계(出三界)하자는 대평화, 대통일, 대융합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3. 제야의 종 타종의 유래
이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가 되어 버린, 보신각 종. 타종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조 때 부터 타종 해온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오늘 날 보신각 종이 “제야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타종되기 시작한 것은 1953년 말의
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제야의 종’이란 것은, 제석(除夕) 혹은 대회일(大晦日)에 백팔 번뇌를 없앤다
하여 108번 타종했던 불교적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나, 대중적인 연례행사가 된 것은
그 연원이 그리 오래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조 때, 매일 인정에 28번, 파루에 33번씩 타종을 거듭했던
보신각종에 대해, 정오 및 자정에만 타종하도록 변경 된 것이 1895년 9월 29일이고
그나마 이러한 타종마져 완전히 폐지되어 포(砲)를 쏘는 것으로, 그 기능을 대행
하도록 한 것은 1908년 4월 1일 이었다.
옛 기록에 연종포(年終砲)라고 하여, 섣달 그믐 날에 궁중에서 대포를 쏘아, 크게
소리를 내어 악귀를 쫓아내는 정도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신각종이 제야의 종으로 대명사가 된 것은, 1926년 설립 된, 경성방송국과
연관되어 있다. 경성 방송국과 제야의 종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가?
“한국 방송 70년사”에는 이에 관한 증언이 수록 되어 있다.
“1928년 1월 1일, JODK(호출부호)로서는 처음 맞는 정초라 색다른 기획을 하고 싶었다.
마침 꾀꼬리를 키우는 사람이 있어서, 이날 낮 12시를 기하여 꾀꼬리 울음 소리를
들려주기로 했다. 아침 7시에 자동차로 꾀꼬리 사육장에 도착하여 3마리를 담요에
정중히 싼 후. 방송국으로 가져 왔다. 기획자들의 심산으로는 담요로 빛을 가리고
있다가 갑자기 담요를 치우면 꾀꼬리들이 아침인 줄 알고 울어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낮 11시 30분에 담요에 싸여있던 꾀꼬리를 스튜디오에 안고 들어와서 ‘지금부터 올해
첫 울음소리를 방송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아나운서 멘트를 넣자 마자 마이크 앞에서 담요를 제쳐 밝은 세상에 내 놓았다. 그러나 아뿔싸! 꾀꼬리는 묵묵부답,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낭패를 당한 직원들은 서둘러 휘파람도 불어보고 바이올린으로 홀려 보아도 끝내 예고시간
인 30분을 넘기고 말았다. 아나운서는 37분 경과 후. 하는 수 없이 사과 방송을 내고
꾀꼬리 울음 소리는 단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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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1929년 1월 1일 에는, 남산 기슭의 KBS-TV 옛 국사 자리에 있던 일본 절
본원사에서 범종을 빌려와 아예 제야의 종을 쳤다.
해마다 연말이면 제야의 종을 울리고 그것을 방송으로 중계하는 관행은 바로 그렇게 시작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일본 절 본원사는 동본원사 경성별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의 범종은 원래 경기도 양평의 상원사 터에 옮겨졌다가, 나중에 가짜 종이라 하여 국보지정에서 해제 된 내력을 지니고 있는 바로 그 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이 종은 조계사 대웅전 내에 보존 되어 있다.
1929년 말에는 일본 동경의 전초사 관음당에서 직접 제야의 종소리를 중계하는 방식으로 방송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이러한 관행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각처의 종을 릴레이식
으로 중계하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시작된 제야의 종 타종 중계는 이후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15년 가량 이어졌다.
그리고 해방 후, 사라졌다가 1953년 말부터 다시 타종하게 된 것이다.
이제, 제야의 종은 그 연원이야 어찌 됐던 간에,
우리 국민들에게 빼어 놓을 수 없는 연례 세시 풍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종소리는 그 자체가 평화롭고 편안함을 준다.
다사다난 했던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면서,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보신각종을
타종하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 민족이 세계를 향해, 홍익인간의 따뜻한 상생의
메시지를 새기는 경건한 의식인 것이다.
다툼과 미움, 파괴와 어리석음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의 지혜
와 사랑이 담긴 종소리가 우리 국민과 더불어 세계인에게 전달되어지길 기원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