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비전교회 유백선 목사님 2019. 4. 14. 종려주일예배 설교말씀 예수, 십자가, 죄 사함
누가복음 23:32-38
2004년에 “더 패션 오프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했던 배우 짐 카비젤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찢어지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십자가에 달릴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적다.’ 그때 하나님께 대답했다. ‘네.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내가 맡은 역할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매우 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목적은 더 좋은 문화생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세상적인 성공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를 구속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군중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할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마 21:9) 왜 호산나를 외쳤을까요?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는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행복을 기대했습니다. 영적인 억눌림에서 자유를, 마음의 죄책감에서 자유를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대망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커진 것입니다. 게다가 대제사장 가야바가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8:14) 그 말에 유대 군중들이 여기저기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요 19:6) 수많은 군중들이 외치자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선고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라.”(요 19:16) 빌라도는 총독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선고했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맞이하고, 찬송하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늘 기적과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않겠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29) 예수님께서 왜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표적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앗수르의 수도)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마 12:4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기 원하십니다. 자신의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기 원하십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 유쾌한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행 3:19, 8:22) 유쾌한 날이 오기를 원하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믿음을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히 6:1)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나무에 달린(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3)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혜를 구하는 헬라(그리스) 사람들은 십자가를 가장 혐오스럽고, 미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고전 1:22-23) 그래서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2:8)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눅 23장 26절 이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며 지켜보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때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가 지겠다고 나섰을까요? 십자가의 무게, 십자가의 고통을 몸으로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 은혜를 받았던 여자들은 가슴을 치고, 슬퍼하며 울면서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오늘 나(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위해서 얼마나 울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존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공평함으로 완성됩니다. 만약에 탕자의 아버지가 공평했다면 탕자를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는 너의 몫을 다 탕진했으니까 네가 알아서 살아라.’ 나를 위해서,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얼마나 울면서 회개하고 기도합니까? 내 자녀들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얼마나 울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셨던 그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두 행악자도 좌편과 우편에 세워졌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시면서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본문 3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여기서 “사하다(아페스/αφες/aphes)”는 말은 “보내다, 울부짖다, 용서하다, 버리다, 곁에 두다, 떠나다, 면제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했을까요? 죄 사함을 얻어야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시 32:1) 예수님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마지막 만찬(성찬식)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잔을 가지시고 감사기도하시고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6-28)
여러분! 예수님께서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통)이 왜 나(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나(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입니다.(엡 2:4-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나(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나(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너희 죄가 그(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은 것이다.”(요일 2: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구원을 얻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질병이 치유됩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서는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운 채로 예수님께 데려왔던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 죄 사함을 받아야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누가복음 8장 51절에서 회장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집에 들어가서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람들(베드로, 요한, 야고보, 아이의 부모)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하다”는 말은 마귀가 “떠나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4장 11절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마귀가 세 가지 유혹(시험)을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때 마귀가 예수님을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을 들었습니다. 마귀가 떠나야 유혹에서 벗어납니다. 마귀가 떠나야 죄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마귀는 세속화된 유대 종교인들에게 시기심을 갖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이 사탄의 전략적인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소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엡 2:16) 십자가로 죄 사함을 주셔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야 거룩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 됩니다.(행 26:17-18)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식과 이론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복음이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요, 에너지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은혜를 알았던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역사학자 필립 샤프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글 한 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위인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펜을 움직였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이 그의 십자가였다. 그의 모든 영향력의 비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희생함으로 인류역사에 불멸의 영향력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지금까지 인류가 진군했던 모든 군대와 지금까지 세워진 모든 나라, 의회, 모든 왕을 합해도 그의 거룩한 영향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여러분! 당시에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았습니까? 첫 번째는 백성들이 서서 구경하였습니다. 본문 3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여기서 “구경하다(데오레오/θεωρεω/theoreo)”는 말은 “식별하다, 인지하다, 고려하다, 쳐다보다, 눈으로 인지하다, 눈으로 즐기다”는 뜻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백성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구경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경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예수가 아닌가? 죽은 사람도 살려낸 예수가 왜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일까? 물위를 걸었다는 예수가 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일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은 십자가 복음이 없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받고, 좋은 것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다 틀렸구만...’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은 ‘내가 예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예수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씁니다. 사람들의 눈치보고, 변명하고, 앞장서서 예수를 비난합니다.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은 복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나(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믿고, 살아갑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교인이 얼마나 있을까요? 만약에 교회에 구경꾼만 있다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오면 다 사라집니다. 교회가 구경꾼들이 많아지면 이벤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구경꾼이 많아지면 열심히 교회행사에 치중합니다. 물량주의와 결과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구경꾼이 많아지면 교회의 이미지를 위해서 세상에 아첨하는 것입니다. 구경꾼들은 복음보다 정의와 인권을 더 외칩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으면 경건의 모양만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알고, 십자가 복음으로 교제해야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아야 구경꾼에서 복음의 일꾼이 됩니다. 애틀란타 제일침례교회 교단의 총회장 찰스 스탠리 목사님이 기독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미국 기독교인들이 방관자로 서 있지 말고, 하나님의 군대로 서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이곳에서도 영향력을 미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지금 나(우리)는 구경꾼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복음의 일꾼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고 있습니까?
두 번째는 관리들이 비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비웃다(에크?테리조/εκμυκτηριζω/ekmykterizo)”는 말은 “심하게 조롱하다, 경멸하다, 조소하다”는 뜻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늘 비웃었습니다. 관리들도 예수님을 비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요, 그리스도라면 자신도 구원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때 관리들은 비웃고, 비아냥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웃는 관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이나, 정부 관리들이 영원한 변화를 만들 수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요, 변화의 주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 고통, 상실감, 좌절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왜 침묵하셨을까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는 결정적인 하나님 사랑의 계시이다. 그러니 너의 능력을 제한하고, 생각을 고치고, 침묵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세 번째는 군인들이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본문 36절-3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지금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희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희롱하고, 공격하고, 핍박하고, 복음을 짓밟고, 희롱하는 적그리스도들이 많습니다. 군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아무리 희롱해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면 그 십자가에 주님과 내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 캠피스가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널리 전하라. 그러면 당신은 인생에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시고, 군인들의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제 내(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고난에 동참하면, 그 십자가의 고난이 축복입니다. 이 십자가를 널리 전하고, 이 복음의 능력으로 인생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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