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사찰순레 법회 (3) / 취재부
극락전 앞에서 단체 기념촬영
취재부
8월 31일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정방산 성불사를 방문하였다. 성불사는 가곡 '성불사의 밤'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찰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고 경주 부근에 있는 사찰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방산은 평양에서 50킬로 떨어진 곳인데 산 모양이 정방형으로 되어있어 정방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정방산 입구에는 정방산에 대한 안내 글들이 여기 저기 써 있었다. 순례단을 태운 버스가 둥그런 굴다리를 통과하자 바로 조그마한 연못이 나왔다. 이곳을 지나 성불사까지 5분 정도 걸었다.
우리 순례단이 성불사 입구에 도착하자 삭발한지 오래되어 더벅머리가 된 주지 법성스님이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2001년부터 주지가 된 이 스님이 전임 주지에게 도안스님이야기를 들었다고 단장 도안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며 우리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가곡과는 달리 주승이 20여명의 객을 맞이한 것이다. 이 주지 스님의 할아버지가 6.25 전쟁시기 이 성불사의 주지였는데 6.25때 사망하고 그 후임에 이 주지의 아버지가 주지로 있다가 열반하자 현재 이 스님이 대를 이어 주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불사의 밤'작곡가 이 은상씨가 이 성불사를 방문하였을 적에 잠이들었던 주지 스님은 어쩌면 이 주지스님의 할아버지인지도 모를 일이다.
성불사 뿐만 아니라 보현사 최형민스님 아들도 현재 북경대학으로 유학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는데 돌아와 보현사 주지를 맡을 예정이란다.평양 용화사 현 주지도 전 주지스님의 아들이다. 북한 불교계는 부모들의 일을 자식들이 계승하여 하는 것이다.
성불사는 높은 산중사찰도 아니고 주민들이 사는 곳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신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주지 스님 외 한 두사람만 보였다. 순례단은 주지스님과 함께 법회를 하였다. 순서는 삼귀의, 반야심경, 법성스님 인사, 도안스님 설법, 성불사의 밤 합창, 사홍서원, 성불사 경내 관람 후 기념촬영 이었다.
천년건물 응진전
법당인 극락전에서 법회를 가졌는데 주지 법성스님은 "남과 해외동포불교인들이 자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성불사는 현존하는 목조건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응진전은 고려시대 건물이다."고 말했다. 도안스님은 " 1990년대 중반 큰물사태때 '우리민족서로돕기 공동회장'으로 이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직접보았다. 분단이 되고 전쟁이 끝난 지 50여년이 흘렀다. 분단되어 시간도 많이 흘렀고 통일이 되어야 어려움과 고통을 적어진다. 이런 이제야말로 통일을 위한 햇불을 들때다."라고 통일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이어 "이 사찰은 천년고찰이다. 천년고찰이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 건물이 천년 된 사찰은 남한에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성불사는 천년된 건물이 몇 개 있다. 아주 귀중한 사찰이다. 이 지역을 관광개발하여 문화재를 널리 알리고 경제수입도 올려야 한다. 그리고 이 사찰이 불교신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도량으로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순례단과 법성스님은 가사을 잘 아는 도안스님이 지도로 아주 경건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가곡 '성불사의 밤'을 합창하였다.
'성불사의 밤' 노래를 부르는 순례단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법회를 마치고 극락전 바로 앞에 서있는 5층 석탑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법성스님이 사찰에 대한 소개와 안내를 하였다.
성불사는 898년 처음 세워졌고 극락전, 응진전은 고려시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법당인 극락전은 6. 25 전쟁때 건물 앞 부분이 폭격으로 일부 손상이 되었는데 복원하였고 내부 단청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청풍루,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 성불사기적비 등은 이조시대 건물이다. 응진전에는 5백 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 법성스님은 청평루를 가리키며 그 유명한 풍경이 저기에 걸려있었는데 그 원형의 사진이 없어 현재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불사 방문에 이어 동명왕릉을 구경하고 이어 정릉사를 방문하였다.
정릉사 전경
'조선의 절 안내'란 책자에 의하면 "정릉사는 고구려의 고유한 절건축 형식대로 8각 7층탑을 중심으로 중금당과 동금당, 서금당이 있고 중문과 회랑이 그것을 둘러싼 1탑 3금당식 절이다. 매 건물의 짜임새와 두공, 단청은 고구려 무덤벽화에 기초하여 고구려건축양식을 그 대로 살렸다."고 되어있다. 필자가 1995년 방문한 정릉사는 보광전, 룡화전, 극락전 3개의 건물과 8각 7층탑만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회랑(담)이 둘러쌓여져 있어 아주 균형잡히고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건물들이 건축된지 얼마되지 않은 새 건물들이고 남한의 절들처럼 방문자가 많지 않아 절에서 느껴지는 정감은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이 절에는 주지 용산스님과 정진 스님이 있었다. 용산스님은 2001년부터 주지였다고 한다. 우리는 법당인 보광전에서 이 두 스님과 함께 예불을 하고 탑을 중심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절 기념품 판매점에서는 절을 소재로 한 그림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기념품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정릉사 법당에서 예불하는 순례단
저녁에는 릉라도 5.1경기장에서 아리랑 축전을 관람하였다. 축전 관람료는 한 사람당 50달러로 3등석이었다. 특등석은 300달러이고 1등석은 150달러, 2등석은 100달러라고 한다.
경기장 규모는 아주 컸다. 우리 순례단은 이곳에서 남한에서 온 천주교 신부와 수녀들을 보았다. 우리가 들어섰을때는 관중석 맞은편에서 각 학교가 속한 지역이름을 쓰는 카드섹션을 하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저녁 8시에 시작했다. 시작할 때 민족의 수난기를 맞이하여 피란을 가는 장면이 나오면서 아리랑 노래와 김정구의 '두만강 푸른 물에'라는 가요가 등장했다. 이어서 항일투쟁과 북한 역사의 전개를 보여주었다. 우리 일행들은 대형 운동장에서 10만명이 출연해서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것 같은 화려한 연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진감이 넘치며 수 만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그저 숨을 죽이고 보았다. 아리랑은 북한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아리랑을 보기 위해서 처음 간 날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한바탕 비가 온 뒤라 일하는 사람부터 출연하는 학생들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이 물을 없애는 작업을 하느라 공연의 시작이 늦어졌다. 운동장을 정비하고 공연이 시작되어 약 30분 이상 흘렀을 때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비을 맞으면서 대집단체조와 공연을 했는데 빗방울이 굵어지고 점점 거세져서 비가 그칠때까지 공연을 중단하였다.
출연진중 일부는 운동장에서 비를 맞으면서 기다리는 동안 수 천명의 학생들이 한 사람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공연은 비로 인해 취소되었고 우리 일행은 평양을 떠나기 전날인 10월 2일날 다시 공연장을 찾아 이 공연을 보았다. 공연을 본 순례단들은 이 작품은 오직 북한에서 만 볼수 있는 작품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세계 어느 작품이 10만명을 동시에 출연시킬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현단계 북한 공연예술계의 창작 역량을 국가적으로 결집한 결정체가 곧 <아리랑>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아리랑이 국가 주도로 하는 대규모 문화행사라고 해서 화제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성격의 행사의 기원은 세계 최대의 국가를 건설했던 몽고라고 볼수 있다. 몽골은 1206년 칭키스 칸의 취임식때 거행된 대규모 행사들의 전통을 살려 수천명이 참여하고 한 번에 몇 주 동안 계속되는 행사용 연극을 후원했다. 1275년에는 군대가 공연한 행사용 연극에서 몽골군대의 역사를 요약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6부로 이루어졌으며 각 부는 케레이트와 옹 칸의정복, 탕구트 정복, 금나라 정복, 서부와 허난(河南황허 남부)의 정복, 쓰촨(四川)과 남조(南詔)의 타이국가정복, 고려와 베트남 정복 등을 기념하고 재연한다. 칭키스칸에서 손자 뭉케 칸에 이르기까지 몽골 제국 창건의 중요한 단계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1)
아리랑 축제 공연 장면
몇 개월간 장기공연하는 이 아리랑을 보기 위해 북한 전 지역에서 날을 정해 버스로 상경한다고 한다. 이 공연의 관중을 유치하기 위해 남한과 외국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세계에서 딱 한군데에서 만 볼 수 있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남한에서도 1만명이 평양을 방문하였다고 하니 남북관계가 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주석1)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서 옮김
2005년 12월 186호
<계속>
미주현대불교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