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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3-2편] 생각을 보는 것은 정의되지 않는다 | 쉬어라.(33:59)
(00:01~5:00)
29페이지에 넘어가서 보겠습니다.
아래에서 일곱 번째 줄부터 보겠습니다.
< 신이라고 하든 존재라고 하든, 혹은 다른 단어를 쓰든,
그 말 뒤에 숨은 실재를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자, 왜 없느냐? 본질을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왜 없느냐? 본질은 절대거든요.
말로 정의하는 것은 상대만 가능해요.
이것도 중요한 대목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쓰는 언어는 전체가 다 상대만 다루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는 무엇을 본다 그러면, 항상 주관 객관이
나눠져 있어요. 오케이?
그러니까 '나'도 포함하고, '무엇'도 포함하고, '본다'도 포함하는
전체, 절대, 요게 본질이거든요.
그러니까 본질은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아는 것이 언어밖에 없어. 언어에 익숙하지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절대를 상대 언어로 자꾸 잡으려고 해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이 언어에 속하는 거에요, 언어를 넘어서는 거에요?
생각은 언어로 생각해요. 맞나요?(예.)
언어로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언어로 생각하는 생각으로는 언어,
언어가 닿을 수 없는 본질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점을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생각으로는 포착이 안 되니까,
'생각으로 포착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무의미합니다.' 라고
하는 말 많이 들었죠?
근데 죽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할 줄 아는 게 생각밖에 없어.
그래서 쉬라고 자꾸 표현을 하는 것이 거기에 있는 거에요.
생각으로 잡을 수 없는데 자꾸 생각으로 잡으려고 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 많은 사람들이 생각으로 잡으려고 하다가
나가 떨어졌을 때, 깨닫게 된다.
잡으려고 잡으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안 돼 가지고
마침내 포기해 버렸어, 그럼 뭐만 남아요?
나만 남아. 그게 깨달음이라 이거예요.
그 모든 깨달음의 경험이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은,
처음에는 이걸 대상으로 잡으려고 한다.
그래서 열심히 하다가 하다가 나가 떨어진다 이거예요.
안 잡히니까.
가만히 있으면 그냥 그냥 그냥 자각이 일어나요. 가만히 있으면.
왜냐면 가만히 있어도 죽은 건 아니니까.
가만히 있으면 자기밖에 안 남아. 그럼 저절로 깨닫게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모든 스님들이 망상만 쉬어라. 망상만 쉬어라 하면,
망상 중에는 잡으려고 하는 그 욕망도 쉬어라 이거예요.
그래서 쉬면, 자기만 남잖아요. 안 찾으면 자기만 남잖아요.
그러면 그때 희한하게 이런 말을 해요.
안 깨달을래야 안 깨달을 수가 없게 된다는 거에요.
왜냐면 살아 있으니까.
그니까 우리가 깨달으려고 하는 의지는 있잖아요.
근데 엉뚱하게 이걸 밖에서 구한다 이거예요.
깨달음의 대상은 자기인데, 자기를 자꾸 밖에서 찾는다 이거예요.
그래서 쉬어라, 그 말을 정말로 들어버리면 내려놓아 버리면,
깨달으려고 하는 의지는 있죠?
근데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이제 알아챘어.
내려 놓았죠. 깨달으려고 하는데 찾는 건 그만뒀어.
그럼 뭐가 남아요?
이것만 남아, 이거 지금 지금 이것만.
자꾸 본문 들으면서 정말로 한 번 놓아 보세요.
그러니까 참 그 원리가 그렇잖아요. 자기를 깨닫는 건데.
자~, 손이 손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자꾸 손이 손을 깨달으라 했는데, 자꾸 이걸 쥐고 있다 이거예요.
뭔가를 쥐려고 한다 이거예요.
그러면 손이 손을 못 깨닫지. 손이 손을 못 잡지.
손이 손을 잡으려면 아무것도 쥐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지금 손이 손을 잡고 있다는 이치를 깨달아 버립니다.
그래서 깨닫는다고 표현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요걸 한 번 해야 돼.
그니까 결국 보는 거는 뭐냐?
자기 치구심(馳求心)을 보는 거에요.
치구심(馳求心), 제가 공부한 사람이,
(5:01~10:00)
모든 공부한 사람이 이걸 깨달아야 돼.
치달려서 구하는 마음(치구심, 馳求心).
하여튼 제가 계속 쓰면서 말마(馬)자가 들어간다 이거예요.
말이 얼마나 빠릅니까.
우리 마음이 그렇게 빨리 일으킨다 이거예요, 구하는 마음을.
구하는 마음을 말이 뛰쳐 나가는 듯이 미친 듯이 구한다.
그러니까 치(馳)라는 말은 미쳤다는 표현이죠.
미친듯이 구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줄을 알고 정말로 한 번 자각이 일어나서
하~ 그래서 때렸다 이거예요, 한 번은???
얼마나 자비로워요. 상황 이해 되지요?
한 번 딱 자기한테 그런 인연이 온다.
그런 시절 인연이 때가 되면 온다.
그래서 계속 구하다가 한 번 정말로 이치를 알아차리고
정말 쉴 때 그냥 저절로 나타난다는 거에요.
의식이니까, 지금 이거니까.
그러니까 이거를 지금 구하는 마음 때문에 이걸 못 본다.
보세요. 구하는 마음은 방향이 이리로 가지요.(손으로 앞을 가리킴)
근데 이거는 어디 있느냐면 여기 있어요.(손으로 뒷통수를 가리킴)
그래서 사실은 계합(契合)이 일어날 때는, 보세요.
계합이 일어날 때는 제가, 지금 제가 의자하고 계합하는 거와 같아요.
지금 지금 제가 붙어 있죠. 요게 계합이에요.
그러면 자기가 여러분한테는 어디에 있어요?
여기 있어요,(손으로 앞을 향해 뻗음) 아니면
지금 의자처럼 우리가 깔고 앉아 있어요?
등이 어디에, 지금 제가 제 등이 어디에 붙어 있어요?
의자에 붙어 있잖아요. 요게 계합(契合)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요렇게 계합해야 될 거를 미친듯이
앞으로 가서 계합하려고 하니까 방향이 틀렸다 이거지.
제~일 중요한 거, 방향이 틀렸다.
근데 왜 우리가 자꾸 앞으로 찾는가?
우리는 평생 동안 꿈을 크게 가져서 이상을 세워서
그 이상의 실현에 존재의 의미를 둬서 거기에 미친듯이 돌진해라,
이렇게 배웠다 이거예요.
평생 앞으로 나가게끔 배웠다 이거예요.
'이상을 세워서,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에 이상이 있으니까
달려나가라!' 이렇게 배웠다 이거죠.
근데 이 공부는 그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
이상이 아니고 철저한 현실이다, 철저한 현실.
철저한 현실은 뭔가?
우리가 지금 깔고 앉아 있는 이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욕망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거를 놓아야 계합한다.
생각은 앞으로 나가는 거에요, 생각은.
그래서 정말로 쉬라고 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게(뒷편) 본질이잖아요?
이게(앞편) 나의 현상이잖아요?
이 현상이 본질하고 딱 붙어버리면 전체가 하나가 돼 버려요.
본질 따로 없고 현상 따로 없고 현상이 본질이고
본질이 현상이 되어야 중도(中道)예요.
그래서 이거를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최후의 우리 공부는 중도(中道), 연기(緣起), 불이(不二).
이게 뭐냐? 즉이다, 즉(卽).
색즉시공 공즉시색. 언제 '즉'이 일어나는가?
현상과 본질이 하나 되었을 때.
자, 이것을 비유를 들어서 말해 볼게요.
여러분, 본질이 따로 없어요.
그래서 과도기에는 과도기에는 '본질이 지금 등에 있다.'
라고 표현을 하는데 하나가 되어보면 전체가 본질이에요.
그러니까 아미타불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체가 아미타불이에요.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체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신이에요.
이렇게 되는데 그 과정에는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본질이 등에 있다.' 라고 방편으로 말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가는 것을 등쪽으로 나가야 돼.
그래서 이렇게 하나가 된다, 계합한다 이 말은 뒤로 물러난다.
그런데 실제로 물러나는 게 아니고
하도 밖으로 치구심이 밖으로 나가니까 방향을 지금...
하여튼 제일 중요한 거는 방향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이쪽이 방향이에요.(손으로 뒷쪽을 향함)
그러면 느낌상으로는 밖에서 놀던 현상이 이제
밖으로 안 나가고 자기 자리에 앉는 느낌.
(10:00~15:00)
의식이, 생각이, 모든 것이 밖으로 안 나가고
자기 자리에 앉는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렇게 하나가 되는 느낌이 온다는 거에요
그러면 찰카닥, 아, 이걸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질을 먼저 알아야 돼.
본질을 먼저 알아야 본질이 자기 등에 있다는 걸 알지.
본질을 먼저 알아야 돼요, 순서가.
지금 현상밖에 몰라요.
현상밖에 모르는 사람이 본질을 먼저 한 번 알아야 돼요.
그 다음에 현상이 본질하고 계합하려면 본질 쪽으로 가야 돼.
이걸 쉰다고 표현하는 거에요.
딱 여기서 하나가 돼.
그러면 모든 게 다 본질이면서, 현상이에요.
구분할 수가 없어요.
한 개의 손이 손바닥과 손등이 있는 것처럼.
모습은 본질 현상이 달라 보여도 하나라는 거에요.
그니까 요게 하여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그런데 지금 여러분한테 이치상으로 비유를 해서 느낌을
느껴 보도록 제가 유도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면 이런 거에요
여러분, 시간이란 것이 어쩔 수 없이 현상에서는 흐르지요.
본질에서는 시간이 없어요. 영원한 현재뿐이라서 없어요.
그러나 현상에서는 시간이 있지요?
그것이 흐르고 있지요.
자,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현상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있잖아요.
어디서 흘러요? 이런 질문이에요.
시간이 어디서 흘러요?
시간이 어디서 흘러요?
그러니까, 보세요.
시간이라는 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물질이 있죠?
맞아요? 여러분, 요 물질이 있는데,
물질하고 시간이 동떨어져 시간이 있어요?
어딘가 있어요? 시간이, 어디서 흘러요, 여러분?
자, 지금 이제 제가 요 말 비유로 하는 거에요.
시간이 저 하늘에서 흐르는 게 아닙니다, 이거예요.
그러면 시간이 어디에서 흐르는가?
내 살이 시간이 흐르는 거고, 이 탁자가 시간이 흐르는 거고,
그니까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물질 하나 하나
두두물물 자체가 시간이다 이거예요.
시간이 그 물건들과 관계 없이 따로 흐르는 게 아니라,
시계 속에서 흐르는 게 아니라, 실제 시간은 하나 하나가 모든 물질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거 자체가 지금 시간이다 이거예요.
그럼 다시 말하면 시간하고 물질하고 나눌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점을 만약에 여러분께서 착안하신다면
본질과 현상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본질과 현상의 관계도 본질 떠나서 따로, 현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본질 자체하고, 그래서 '즉(卽)'이라는 말이 불가사의에요
'즉(卽)', 이걸 이제 불가사의라고 표현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표현을 하고.
모든 것의 방해는 뭐냐? 즉(卽)의 반대말.
좀 더 말을 강하게 합시다. 즉(卽)의 원수.
우리가 지금 즉(卽)을 해야 되는데,
즉(卽)을 하면 중도, 연기, 불이가 되는데, 하나가 되는데
이 하나를 못하게 만드는 지금 원수,
이게 '분리감'이라는 거야.
지금 여러분께서 자기를 보면 나한테
분리감이 있는가 없는가가 느껴진다 이거예요.
여러분, 나 따로, 세계 따로예요.
이치는 아닌데, 실제 느낌에는 나 따로, 세계 따로잖아요.
그럼 나한테 분리감이 있다 이거야.
그러면 이 분리감을, 이게 원수야, 깨달음의 원수야.
이 분리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잖아요.
분리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잖아요.
요 분리감을 만들어 내는 게 '생각'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분리감하고 생각은 딱 같이 붙어 있다.
결국에는 분리감, 생각, 요런 것이 나를 지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을 해야 돼.
나의 현재 상태가 분리감이 지배하고 있는,
또, 생각이 많아요, 적어요? 많잖아요.
그니까 그게 그걸 인정을 해야 돼.
(15:01-20:00)
인정을 하고,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되잖아요.
마음 공부의 핵심은 이거 해결하는 거잖아요.
분리감의 극복이잖아요.
그러면 분리감이 일어나지 못하는 나의 의식 상태,
그거를 내가 챙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되는 거에요.
분리감이 일어날 수 없는 나의 의식 상태.
그게 현재에 깨어 있기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을 교재로 선택해서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가
현재에 깨어 있으면 분리감이 사라진다.
분리감이 사라지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수시로 깨어 있는 연습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지금 혼자서는 잘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혼자서는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만나는 시간을, 도(道)와 만나는 시간을.
집에서는 여러분, 유튜브가 요즘 워낙 잘 되어 있으니까
좋은 법문 유튜브로 많이 들으시고, 유튜브 법문 듣는 동안에는
그래도 생각에 끄달리고 있지 않잖아요.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시고, 그리고 틈이 나시면 이런 도량에,
도의 장소 도장(道場), 도장(道場)을, 발음을 도량이라고 해요.
도량에 인연을 맺으셔서 시간만 나면 또 거기 가서 있으면
도량에서는 여러분, 일반인들이 와서 일반 이야기를 안 하죠.
그렇지 않나요? 도량에서는 도(道)의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도(道)의 이야기를 하는 도반들이 있는 곳,
그런 곳과 인연 맺어서 자주 가서 시간을~.
여러분 모든 게 습관의 문제 아닌가요?
그런 시간을 가져야 된다 이거죠.
자, 그래서 분리감, 생각을 잡는 방법은 뭔가?
저걸 이루려면, 중도를 이루려면 분리감을 극복해야 되는데
분리감은 생각이고 생각은 어둠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어떻게 밝히느냐, 이걸 밝히는 것은
내가 돌아봐서 이 순간에 무명(無明)이냐 광명(光明)이냐,
이거 체크할 수 있다 이거예요.
톨레가 제시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거는 뭐냐, 굉장히 상식적이고 그리고 아주 보편적인 방법이 있어요.
뭐냐? 딱 하나, 생각을 보라는 거에요. 생각을 보라.
생각을 보면 불이 켜진다. 생각을 보는 것이 관문이에요.
생각과 생각을 보는 의식. 그러니까 이거에 대한 철저한 구분.
생각은 구름이고, 그걸 보는 의식은 태양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정신 상태가 생각이 많으냐,
아니면 생각을 보고 있느냐.
'생각을 보고 있느냐' 이거 참 중요해요.
생각을 보면 생각이 흘러가고 있어요.
그러고 지나가도록 둘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생각을 보면.
안 보면 어떻게 되느냐?
안 보면 생각과 의식이 붙어버려요. 안 보면.
보통 사람은 생각과 의식이 떡이 되어서 살아요.
이게 무명이라는 거에요.
근데 광명은 생각과 의식이 떨어진, 거리가 있는 거에요.
이때 거리가 나중이 되면 차원의 거리가 되는 거죠. 차원이 다른 거에요.
생각과 의식은 차원이 달라요.
생각을 보기. 생각을 보면 생각을 보는 놈이 깨어난다, 강화된다.
생각을 보는 놈이 의식이다.
생각을 보는 것이 본질이고 생각은 현상입니다.
현상의 대표는 생각.
그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내가 보고 있느냐,
못 보고 있느냐의 차이 하나, 이게 수행이에요.
내가 이 순간에도 생각이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생각을 내가 보고 있으면 깨어 있는 거고
못 보고 있으면 못 깨어 있는 거에요.
못 깨어 있는 것을 무의식, 무명(無明)이라고 부르고
깨어 있는 것을 의식, 광명(光明)이라고 부른다, 이거예요.
그 광명이 대적광(大寂光)이에요. 크고 고요한 광명.
크고 고요한 광명이 지금도 불광이 방광(放光)하고 있는데
모든 인간한테는 불광이, 부처의 빛이, 의식의 빛이, 방광하고 있는데
이걸 쓰느냐 못 쓰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수행은, 압축하면
일상에서의 수행은 생각을 보느냐 못 보느냐에 달려 있다.
누가 해야 돼요?
(20:01~25:00)
언제 해야 돼요?
그러니까 뭐 수행 어떻게 합니까? 뭐 나는 왜 안 됩니까?
이런 거는 다 그 뭐라고 부르나?
어리광이죠. 어리광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어요.
대신해 보면, 하여튼 보는 것만큼 익어 있는 생각은,
생각은 익어 있어요. 우리한테, 일반적으로.
생각은 익어 있고, 생각을 보는 의식은 설어 있어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 설어 있어.
그러면 자꾸 생각을 보면, 생각을 보는 설어 있는 의식은 익어지고
그리고 우리를 막 끌고 다니는 생각은 보면 볼수록 익어 있던 것이 설어져요.
그러면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생각, 익은 생각은 설게 하고
설은 의식은 익게 한다.
생각을 보는 만큼 생각 보는 의식은 강화된다.
그러다가 이렇게 되면, 얘가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해요.
그럼 깨어나는 거에요.
이때는 깨어나지 않을래야 깨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깨어나는 거에요. 이게 깨어나면 좋은 건 뭐냐?
생각이 그냥 지나가 버리네.
생각이 안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거기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는 거지요.
지나가 버린다, 하여튼 말 끝에
제가 이런 말 드리죠?
좋아요, 생각이 구름처럼,
요즘 어제 그제 구름은 새털구름이래요.
새털구름 좋았잖아요.
구름이 아름답다고, 생각이 아름다워지기 시작하는 거죠.
먹구름일 때는 우울하고 짜증 나고 그런데
이게 새털구름처럼 되면서부터는 생각이 아름다워져요.
번뇌적 보리야.
다음 페이지 30페이지 가겠습니다.
아래에 < 우리 자신의 진정한 존재 상태를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자, 톨레의 답변은
<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
제가 처음 오신 분도 계셔서 마음은, 톨레가 말하는 마음은
생각, 감정을 말해요. 현상을 말해요, 생각 감정.
< 우리는 생각,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
대부분이 그래요.
대부분이 자기 생각을 자기라고 봐요.
나라는 것도 생각이에요, 여러분.
김 아무개도 생각이에요. 오케이?
남자다 하는 것도, 여자다 하는 것도 생각이에요.
자, 질문,
여러분 생각하지 않을 때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생각하지 않을 때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벙~찌지요, 뭐가 벙찌는지 아세요?
생각이 벙쪄요.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은 무엇입니까?
그거를 견뎌야 돼요. 요 질문 앞에서 견뎌야 돼.
처음에는 생각이 벙쪄요.
벙찐 다음에 생각이 어찌할 바를 몰라.
막 우왕좌왕 하고 막 그게 보여요, 해보시면.
이 질문 앞에서.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은 무엇입니까?
답하려고 하는 건 전부 생각이잖아.
그래서 답을 하려고 하는 요놈이
막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이 느껴진다니까 처음에는.
그러다가 벙찌게 돼요, 자꾸.
혹시 "뭡니다." 하면 제가 그건 당신 생각이니까.
그렇지요? 입 열면 당신 생각이지요. 그러면 입 못 열지요.
그러면 생각 입장에서는 벙찌는 거에요.
그 상태를 견뎌야 해요.
견디면 어쩔 줄 몰라하는 몽키 마인드가 이 몽키가
막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점점 점점 내가 소용이 없네라는 것이
자각이 되면서 물러나는, 몽키 마인드가 물러나요.
그 상태를 견뎌야 돼요.
견디면 몽키 마인드는 내가 쓸모가 없구나 하는 걸
자기가 스스로 이제 알고 침묵을, 침묵한테 양보해 버려요.
그러면 이 질문 앞에서 침묵하면 침묵할수록
정신은 여러분, 침묵할수록 정신이 돌아올까요?
아니면 정신이 뭐 멍 때리게 될까요?
답을 하려고 한다면 의식은 있잖아요.
(25:01~30:00)
그러니까 이 질문 앞에서 깨어 있게 된다.
답은 못해도 깨어 있게 된다.
깨어 있는 시간만큼 생각이 잦아든다. 생각의 힘이 빠진다.
이해되세요? 이 질문 앞에서 생각의 힘은 점점 점점 빠진다.
마침내 몽키 마인드가 항복하면 그 침묵의 공간,
몽키 마인드가 침묵하는 거에요. 지금 상황 이해되세요?
우리 내면이 고요하다 이 말은
생각이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죠?
이 질문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몽키 마인드는 계속 도망가자 도망가자,
여기 있으면 내가 죽으니까 안 돼, 도망가자, 자꾸 꼬시는데
도망 가지 말고, 딱 이 질문 앞에서 정면 돌파, 딱 버티고 있으면
점점 점점 고요해져요. 오케이?
완전히 고요해질 때 드러나요.
그 공간 자체가 드러나요. 그게 의식이라는 거에요.
이 질문,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누가 했는가?
육조 혜능이 깨닫고 의발(衣鉢)을 받아서 도망갈 때,
쫓아온 혜명 상좌라고 하는 사람이 의발(衣鉢)을 뺏으러 왔다가
마음을 바꿔가지고
"제가 쫓아온 것은 뺏으러 온 게 아니라 당신한테 법을 묻기 위해서 왔습니다."
라고 마음을 바꿔가지고 법을 물었을 때, 법을 물었을 때,
육조 혜능 스님이 "생각하지 않을 때 너는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때 너는 무엇이냐?, 이 질문 앞에서 혜명이 깨달았다, 이거에요.
여기 육조 단경에서 육조 스님이 도망가다가 혜명을 깨닫게 만드는 대목,
이 질문이 아주 외통수다 이거죠. 외통수!
* 외통수 : 장기에서, 상대편이 장군을 불렀을 때 궁이 꼼짝하지 못하게 되는 수.(daum 어학사전)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육조 단경을 읽고 이런 대목에서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을 자기한테 적용한다.
내가 지금 육조 스님을 쫓아가다가 만났는데
내 마음을 바꿔가지고 법을 물었다.
육조스님이 나한테 "생각하지 않을 때 너는 무엇인가?"
이런 말을 나한테 적용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
자 여러분, 이 말 듣고 여러분이 만약에 정말로 딱 작심하고
깨닫기 전에는 안 움직일 거야 하고,
이 말을 딱 염두에 떠올리고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 독한 사람이라면...
그러면 깨닫게 돼요. 근데 혼자 하기가 쉬워요, 어려워요?
몽키 마인드가 여러분, 오만 가지 합리적인 도망갈 길을 만드는 거에요.
끊임없이 귀에다 대고 "도망가자, 도망가자.", "뭘 해야 돼, 뭘 해야 돼." 하고,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라고 끊임없이 속삭여요.
그거를 혼자서는 피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 집중수행이라는 걸
만드는 거에요. 그렇게 하는 거에요. 모든 원리 이해되십니까?
이렇게 이해하고 참석하시면 훨씬 더 마음 준비가 잘 되어 있어서,
그러니까 발심을 자극하게 돼요.
일상에서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깨어 있느냐 못 깨어 있느냐,
내가 깨어 있으려면 생각을 봐야 돼.
이게 일상에서의 수행이에요.
그리고 조금 더 진하게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하려면
이 질문 안에, 이 질문이 과목이에요. 이 질문이 화두잖아요.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이 무엇입니까?"
이 말을 줄이면, "이 뭐꼬" 에요. 이게 화두예요.
이 화두 앞에서 정말로 정직하게 내가 대면하기,
화두 앞에서 정직하게 대면하기.
그러면 결판이 난다 이거예요.
<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 때문에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은 엄청난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행렬, (여러분 느껴지나요?)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행렬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지금 이런 꼴이에요.)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은 내면의 고유한 세계와 일치합니다. >
그러니까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 그게 내면 안의 우리의 본질이에요.
본질이 뭐냐? 한 생각 끊어진 자리.
(30:00~끝)
우리의 본질이에요. 본질이 뭐냐?
한 생각 끊어진 자리, 이렇게 조사 선생님들이 말씀하셨어요.
< 갖가지 생각을 헤아리면서, 그런 생각들을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아가 만들어지고, 곧 두려움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나의 생각이에요.
나의 생각을 적당히 모은 거에요.
한 인간의 자아는 자기 생각을 얼기설기 모아놓은 거에요.
그래서 한 생각을 관념이라고 하거든요, 여러분.
철학 용어로 한 생각을 관념이라고 그래요. 자기에 대한 관념,
근데 우리의 자아는 한 개의 관념이 아니고,
이런 관념, 저런 관념을 모아놓은 거에요.
그래서 이거를 철학적으로는 '복합 관념'이라고 그래요.
모든 복합 관념은 허구에요. 모든 복합 관념은 허구에요.
그래서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복합 관념의 대조적으로
'단순 관념'이라는 것이 있어요.
단순 관념, 단순 관념은 간단해요, 여러분.
고양이 보시면 고양이라고 하는 관념이 생겨요. 인간한테는.
자동적으로, 자동적으로 생기는 거에요.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가 사라져도 고양이에 대한 관념은 지금 생겼어요.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가 인상이 찍혀요, 인간한테는.
그럼 고양이가 사라져도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어요.
그게 관념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고양이를 보고 관념이 생겼어.
이거는 단순 관념이고, 단순 관념까지는 탈이 없어요.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근데 소를 보니까 소한테 뿔이 있네. 뿔이라는 관념이 또 생겼어.
근데 단순 관념까지는 탈이 없는데,
인간이 고양이도 사라지고 소도 사라지면 혼자서 심심하니까
고양이에다가 뿔이라고 한 걸 붙여 가지고 복합 관념을 만들어요.
레고 블록 쌓기 하는 것처럼,
그래서 고양이 뿔을 만들어 놓고는 또 인간이 희한한 게,
고양이 뿔이 있다고 믿어요. 이게 지금 인간의 정신 작용이에요.
이건 철학의 가장 기본 원리에요.
그래서 복합 관념은 인간이 많이 만들어놓고 있어요.
그리고 이거를 사실이라고 믿고 살아요.
사람마다 자기 복합 관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상이에요.
에고, 에고는 복합 관념이에요. 고양이 뿔이에요.
근데 그거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모시고
모든 관심은 이제 그쪽으로 집중되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거,
생각해 본다는 말은 자기 복합 관념을 본다는 말하고 같아요.
그 중에 하나가 자아에요. 생각을 보면 자기를 보는 거에요.
그 자기는 허무라는 거. 무엇이 진짜에요?
생각을 보는 것, 생각을 보는 것은 정의되지 않아요.
여러분, 생각을 보는 것은 이미지가 찍히지 않아.
아, 이거 중요하지 않나요? 관념이 찍히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거는 텅 비어 있고, 모양이 없고,
완전히 비어 있어서 관념으로 찍혀지지가 않아요.
이거 진짜야. 근데 찍혀지는 모든 것은 현상이잖아요.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방법, 현상은 이미지로 찍혀져서 관념화된다.
관념화가 언어화예요.
관념이 이 인간의 공통 관념이 언어예요.
|
저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오니 저를 살아 주십시오.
저는 오직 아버지만을 바라고 원하나이다.
생각의 노예에서 해방 시켜 주신 나의 사랑 나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만을 죽도록 죽기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거내영>과 거룩한 사제와 무형 성전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진리의 길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공부한 사람이 이걸 깨달아야 돼.
치달려서 구하는 마음(치구심, 馳求心).
하여튼 제가 계속 쓰면서 말마(馬)자가 들어간다 이거예요.
말이 얼마나 빠릅니까.
우리 마음이 그렇게 빨리 일으킨다 이거예요, 구하는 마음을.
구하는 마음을 말이 뛰쳐 나가는 듯이 미친 듯이 구한다.
그러니까 치(馳)라는 말은 미쳤다는 표현이죠.
미친듯이 구한다 이거예요.>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이 동영상을 여러번 듣고 , 녹취록을 여러번 읽으며
요즘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감정과 생각들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무소유 고백을 했음에도
의식적으로는 무엇을 바라거나 구하거나 원하지 않지만,
무의식에서는 바라는 마음, 치구심이 아직도 내달리고 있다는 것을요!
아버지의 세탁기 안에 들어왔지만,
아직 덜 정화된 부분, 저의 큰 약점이 아직 남아,
어떤 사건을 통해 그 약한 부분이 건드려지면 그것이 드러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당황스럽지만,
그러기에 더욱 화살기도로 내 맡겨드리며 아버지 품으로 숨어들지만,
지금 이 꼬라지가 저의 상태라는 것을
아버지 앞에 겸허히 인정하며 내맡겨드립니다.
마음이 자글자글 타 들어가는 듯한 이 느낌,
예전에도 있었지만 그 정체를 잘 모르다가
아버지의 세탁기 안에 들어와 시커먼 숯검댕이 때들이 어느 정도 벗겨지고 나니
숨어있던 이 껌딱지 때들이 드러나나 봅니다.ㅜㅜ
<인간이 고양이도 사라지고 소도 사라지면 혼자서 심심하니까
고양이에다가 뿔이라고 한 걸 붙여 가지고 복합 관념을 만들어요.
레고 블록 쌓기 하는 것처럼,
그래서 고양이 뿔을 만들어 놓고는 또 인간이 희한한 게,
고양이 뿔이 있다고 믿어요. 이게 지금 인간의 정신 작용이에요.
이건 철학의 가장 기본 원리에요.
그래서 복합 관념은 인간이 많이 만들어놓고 있어요.
그리고 이거를 사실이라고 믿고 살아요.
사람마다 자기 복합 관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상이에요.
에고, 에고는 복합 관념이에요. 고양이 뿔이에요. >
머리형인 제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복합관념을 쌓아 놓고 살아왔을까요!
얼마나 많은 고양이 뿔을 만들어 제 안에 쌓아 두었을까요!
그 복합 관념들이 얼마나 시시각각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저를 분리시켰을까요!
@옴니아.보조.기조실
혼자서 복합 관념들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틈만 나면 그 관념들을 들여다 보고 내면으로 강화시켜 왔을 저입니다.
지적인 유희를 만족시키는, 갖가지 책들도 그랬겠지요.
아버지께서는 마치,
저의 떄가 더욱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일과 사건들과 사람들을 세팅해 놓으시고,
저를 그곳에 풍덩 빠뜨리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세탁기인가요!
자, 보거라!
이것이 아직 덜 정화된 너의 치구심의 습관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세상의 갖가지 것들을 통해서
교육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 밖의 통로를 통해서 너에게 주입되어 온,
너를 마구 치달리게 한 것들이다.
사랑하는 아버지,
치구심이 욕심입니다.
그것이 교만의 싹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의 생각 감정, 저의 에고를 휘둘러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알아차리며,
알아차리게 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부족하고 죄스러운 이 모든것을
아버지 사랑의 용광로에 퍼 부어 넣겠습니다.
저의 똥오줌이 아무리 더럽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의 바다가 정화하지 못할 것은 없으니까요!
부디 저를 깨끗하게 하시어,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옴니아.보조.기조실
[ ■ 내맡긴 영혼은 ■ The abandoned soul
겸손한 이의 기도, "화살기도"!
지도사제 10.10.20 10:54
혹시, 내맡김의 봉헌에 참여하신 분들 중에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모든 기도를 끊고 "화살기도"만을 3개월 이상 해 오신 분이 계십니까?
제가 <후속 9>의 "열려라 꺠! = 화살기도! = 만트라!"에서
화살기도의 중요성을 장황하게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셨다고요?
그것은 여러분이 저의 지도를 100% 믿지 않고 잘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
"블레이크는
★'지각'의 문만 깨끗하면★
★★만사가 있는 그대로, 무한으로 보인다.★★"라고 썼다.
★ ★만트라를 도구로 우리는 덧없는 온갖 사념들을 흘려보내고 ★★
★영원의 절대자, 하느님 안에서 쉬는 법을 배운다. ★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차십시오★
@옴니아.보조.기조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우리 본성의 이러한 변모는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있다.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이요 성령 안에서 새로 남의 체험이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 성령의 힘을 깨달을 때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체험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현존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안에서 자유로이 우리를 변모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만트라는 하느님 사랑이
그분께서 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흘러든다는 것을 체험하게 한다.★
★ 만트라는 우리를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체험에로 인도하는 가장 간단한 장치이다.★
중략.
우리 안의 하느님 나라를 온전히 깨닫기까지 거쳐야 할 단계들이 물론 여럿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쳐야 할 단계에 마음 쓰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아가지 못한다.'
@옴니아.보조.기조실
우리가 해야 할 바는 그냥 묵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에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저 사랑과 깊은 믿음의 영으로 만트라만 외우면 된다.★★
묵상에서 발전의 단계는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이다.
때는 하느님이 정하신다.
발전에 대한 자의식이 지나치면 오히려 더뎌질 뿐이다.
올곧게 나아가도록 한없이 도와줄 스승이 필료한 때가 바로 이 시점이다.
그러나 스승도 만트라를 외우라는 단 하나의 가르침만 줄 수 있을 뿐이다.
더 해 봤자 만트라가 의식 속에 뿌리내리도록 용기와 위안을 주는 정도다.
깨달음의 길은 우리 스스로 걸어야 한다.
각자 스스로 지혜를 얻는다.
스승은 정진하라 일깨워 줄 뿐이다.
어둠을 내치는 이, 곧 '스승'(구루)이란
'한결같은 자'라는 뜻이다. (침묵으로 이끄는 말, 만트라의 힘 P41~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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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카페에 들어가기 위해 제 책상곁으로 가던 중,
제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침묵으로 이끄는 말" (분도출판사)이 제 눈에 들어왔고
그 책에 손이 가게 되었습니다.
@옴니아.보조.기조실
책을 들어 제목을 읽어보니
제가 구입했던 책인지 아니면 누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던 책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책장을 넘겨 차례를 읽어보니 만트라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책을 골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이끌어 주시고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부분만을 읽어 골라 적어 보았습니다.
추천 도서 목록에 올려드릴 것입니다. ]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수도 없이 많은 고양이 뿔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정신 작용이
블레이크가 말한 <지각의 문>을 더럽혀 왔으며
끊임없이 미친 말이 달리듯 헛된 것을 구하여 왔음을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곧
박식한 무지,지식의 허영(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을 자아 나며,
이것이 만사를 있는 그대로, 무한으로, 하느님으로 보지 못하게 함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한 사제에게 허락하신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과
끊임없는 사랑의 화살기도를 통하여
<그저 사랑과 깊은 믿음의 영으로 만트라만 외우면>
로마서 12장의 말씀 그대로,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시니,
@옴니아.보조.기조실
이 길을 제대로 알고도 어찌 이 길을 걷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허영과 교만으로 가득찬 지식들을 머리에 넣느라 쓰레기통이 되어있었던,
그래서 단순한 진리의 가보치를 알아보는데 더디기만 하였던,
아직도 시커먼 떄가 성성한, 멍청이같은 저의 모든것을
아버지께 몽땅 내어 맡겨드립니다.
맡겨드렸으니, 이제 남은 일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만트라는 하느님 사랑이
그분께서 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흘러든다는 것을 체험하게 한다.★>
<★ 만트라는 우리를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체험에로 인도하는 가장 간단한 장치이다.★>
<★그저 사랑과 깊은 믿음의 영으로 만트라만 외우면 된다.★>
딸랑 이거 하나 뿐입니다!
땰랑 이거 하나로,
제가 아버지만 바라보며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거내영과 거내영의 만트라, 화살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사람마다 자기 복합 관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상이에요.
에고, 에고는 복합 관념이에요. 고양이 뿔이에요.
근데 그거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모시고
모든 관심은 이제 그쪽으로 집중되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거,
생각을 본다는 말은 자기 복합 관념을 본다는 말하고 같아요.
그 중에 하나가 자아에요. 생각을 보면 자기를 보는 거에요. >
아멘!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공부를 통해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아상이 징그럽도록 붙어 있다는 게 보여집니다.
거내영이 아니었다면
결국은 그 아상이 우상숭배라는 걸 몰랐을 것입니다.
지금 저에게 주어진 현실이 제가 아닌데도
그 현실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주 좁은 시야에서 헤매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이렇게 이끌어 가시니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없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개념을 더욱 알아야 하고,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분리감에서 벗어나
복음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을 사랑하기에 사랑에 눈뜰 수가 있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행위도
결코 사소할 수 없다는 것에 나날이 감사드리며
그 어떤 진흙탕 속에서도 아버지만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니
밝게 빛나는 그 고요함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 고요함 안에서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지향만이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잘 이끌려 드릴 수 있고
아버지 뜻 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내맡김이 이다지도 위대한 영성임을 나날이 사무치도록 알아갑니다.
거내영과 모든 사제를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를 자각함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하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아미타불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체가 아미타불이에요.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체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신이에요.
이렇게 되는데 그 과정에는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본질이 등에 있다.' 라고 방편으로 말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가는 것을 등쪽으로 나가야 돼.
그래서 이렇게 하나가 된다, 계합한다 이 말은 뒤로 물러난다.
그런데 실제로 물러나는 게 아니고
하도 밖으로 치구심이 밖으로 나가니까 방향을 지금...
하여튼 제일 중요한 거는 방향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이쪽이 방향이에요.(손으로 뒷쪽을 향함)
그러면 느낌상으로는 밖에서 놀던 현상이 이제
밖으로 안 나가고 자기 자리에 앉는 느낌.>
생각과 의식이 떡이 된 깊은 무명 속에서 살았습니다.
무명의 어두움 속을 헤매며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음이 고통이었습니다.
< 거내영 >을 살며 반복되는 교육을 받고 생각과 의식이 점차 분리되어
틈이 생기고 둘 사를 인식하고 깨어나 광명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끊는 끊임없는 < 아버지기도 >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의 빛을 자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림으로 주도권에 몽땅 아버지께 가 있으니
더 이상 생각과 감정에 무게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만 달려 나갈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지만
아버지와 하나 될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고
그것은 본래 사랑이신 아버지 안에서부터 나와
사랑 조각으로 살게 되어있는 본질의 나를 자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고
무명에 허우적거리며 살았을 불쌍한 영혼을
거내영의 가르침으로 무명에서 벗어난 삶,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살게 해주신 크신 은총에 엎디어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려
부족한 저를 더욱더 내맡겨 드립니다.
모든 사제와 거내영과 성전에 모인 이들을 통하여
거룩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은 내면의 고유한 세계와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 그게 내면 안의 우리의 본질이에요.
본질이 뭐냐? 한 생각 끊어진 자리.>
사랑하는 신부님,
사랑하는 무심님,
올려주신 동영상 감사히 잘 시청하였습니다.
보고 또 들으면서 끊임없는 화살기도의 위력으로 생각속에 빠져 살던 저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은총을 먹고 현순간을 나아가고 있습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올라오는 제 에고는 변함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이 생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더 더 화살기도로 아버지를 부를수 있는 은총을 가르쳐 주신 신부님
무심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부족한 저를 거내영으로 이끄시어 현순간의 저를 바라보게 하시고
아버지의 이름 하나로 기뻐하게 하십니다.
무지한 저를 주신 그대로 사랑하고 죽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거 하나로 사는 지금
이 엄청난 은총에 감사를 드릴수 있어 얼마나 행복 한지요.
부족한 저와 거내영식구들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