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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전철 안에서 듣고 있으면 작은 위로가 된다.” 가수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반을 꺼내든 김지효(27·회사원)씨의 말이다. 한 건설회사의 신입사원인 그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빠른 음악보다는 여유로운 연주와 편안한 목소리가 담긴 음악들이 좋아졌다고 했다. 사회초년생으로 고군분투하다 보니, 음악을 듣는 순간만이라도 여유와 안정을 되찾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 좋아했던 댄스음악보다는 차분하고 편안한 음악에 마음을 쏟고 있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은 보컬도 평범하고 연주도 차분하지만, 소박하고 이질감이 들지 않아 좋다고 했다. 그런 음악을 들을 때면 누적된 피로가 잠시나마 풀리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싸이 빌보드 2위’만큼이나 값진 변화
아이돌 시대의 댄스음악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매사에 신속성·효율성·완벽성을 요구받는 사람들은 음악만이라도 한 템포 쉬어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들은 효율적 프로세스를 거쳐 빈틈없이 만들어지는 요즘의 음악에는 사람 사는 맛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불완전하고 미완의 것이라 하더라도 부르는 이의 일상이 녹아있고 연주자의 감성에 젖어들 수 있는 음악을 원한다. 살아 숨쉬는 음악, 날것 그대로의 음악이 대세로 떠오르는 이유다.
작년 대중음악계는 물론이고 문화계 전반에 걸친 모든 이슈는 싸이에 의해 잠식되었다. 그러나 댄스음악에 의해 오랜 시간 잊혀졌던 ‘날(生)음악’의 복권 역시 싸이만큼이나 거센 흐름이다. ‘힐링’이라는 키워드가 대중음악에도 침투하면서, 잡다한 조미료를 제거하고 음악 본연의 재료로만 담백하게 만들어낸 음악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노랫말에서는 화려한 레토릭 대신 일상의 언어로 보편적인 사연을 다룬다. 사운드는 각종 전자 조미료 대신 ‘악기들 간의 합주’라는 대중음악 본연에 충실하게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깝고도 쉬운 음악을 통해 청자들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찾고 힐링이라는 목적을 이룬다.
작년 상반기를 강타한 3인조 밴드 ‘버스커버스커’ 열풍이 대표적이었다. 동네 청년 같은 순박한 느낌의 보컬, 거칠고 투박한 기타 연주, 그리고 평범한 일상과 풍경을 담담하게 기록한 노랫말이 어우러진 이들의 데뷔앨범은, 여타 인기 아이돌 가수들을 누르고 각종 차트를 장기간 독식했다. 1985년에 발표된 들국화 1집 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전국적 흥행을 기록한 순간이었다. ‘살아있는 밴드 사운드’, 그리고 ‘청자와의 교감’이라는 키워드가 대중에게 통한 것이다. 그래서 버스커버스커의 흥행은 작년 싸이의 빌보드 2위와 더불어 우리 가요계의 값진 기록으로 남았다.
- ▲ KT&G 상상마당 제6회 레이블마켓에서 인디가수들의 음반을 전시·판매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녹음 방식에도 변화의 바람
음악을 통해 위로받기를 원하는 청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고음질·고음향’에만 집중해온 기존의 녹음 방식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버스커버스커는 앨범 내 일부 곡에서 원테이크 녹음(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녹음을 마치는 것)을 시도하여 음색은 거칠지만 바로 옆에서 노래하는 듯한 생동감을 살렸다. 기존 디지털 녹음 방식에서 벗어나 테이프 데크(tape deck·자기 테이프를 통한 녹음 장치)로 녹음하는 사례도 늘었다.
작년 9월 22일 1집 음반을 발매한 나얼의 경우, 앨범 내 2곡을 릴 테이프로 녹음하고 메이킹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나얼의 1집은 가장 원초적 형태의 펑크(Funk)나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 장르를 지향하는 ‘아날로그 앨범’으로, 녹음 방식 역시 아날로그 시대의 것을 택한 셈이다. 또 동시에 기존 디지털 녹음에 비해 따뜻하고 푸근한 청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로파이(Lo-Fi·저음질 녹음)를 지향함으로써 아날로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고, 듣는 이들이 음악에 보다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피로를 해소한다.
이러한 흐름에 이승기도 합세했다. 작년 11월 22일 발표한 음반 ‘숲’은 아예 부클릿에서부터 ‘힐링뮤직’을 표방하고 나섰다. 속도전과 물량전이 거듭되어온 가요계에서, 이승기는 나홀로 템포와 사운드의 체급을 낮추었다. 그 결과 타이틀곡 ‘되돌리다’는 발매된 후 음원사이트 ‘멜론’에서 4주째 주간차트 정상을 지켰고,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상위권에 머무르며 흥행 궤도를 유지하고 있다.
인디신에서 시작된 힐링 뮤직
인디 레이블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의 안성문 팀장은 이러한 현상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인디신(indie scene·독립음악계)에서 감지되어 왔다고 했다. 댄스음악들의 숨가쁜 속도 경쟁이 펼쳐지는 주류 음악계에서 원하는 메시지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꾸준히 인디신으로 청취 영역을 옮겨왔다. 이들은 음악을 듣는 3분만큼이라도 정신 없는 도시생활에서 탈출하여 가수와 교감하며 안정을 누리고 싶어한다. 이러한 새로운 소비층에 의해 화려한 사운드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소박하게 보여주는 날(生)음악이 인디신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주류 음악계에 아이돌 가수들의 빠른 음악이 인기를 얻을수록, 반동적으로 인디 음악계의 템포는 느려져 왔다. 청자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녹음 방식에 있어서도 탈(脫)디지털 시도가 두드러졌다. 요즘 주류 음악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아날로그 녹음 방식의 재현 역시 인디신에서 먼저 시작한 흐름인 셈이다.
꾸준히 현대인을 위한 힐링 음반을 제작해온 안성문 팀장은 최근에는 힐링을 전면에 내세운 콘서트까지 기획했다. 작년 12월 23일에 열렸던 여성 듀오 ‘옥상달빛’의 콘서트는 ‘힐링 캠프’를 주제로 하여, 야외 캠핑장처럼 무대가 꾸며졌고 관객들도 아웃도어 의류를 입고 참석했다. 콘서트 중간에는 관객들로부터 작년 한 해 동안 고생했던 사연들을 모아서 읽어주고 위로해주는 시간도 있었다. 이날의 힐링 공연은 인디 콘서트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대형 규모로 치러졌고, 1500개 좌석이 모두 매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안성문 팀장은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에는 보편적인 사연을 담백하고 쉽게 부르며 청자와의 교감을 추구하는 가수들이 많기 때문에, 콘서트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음악을 통해 위로받기를 갈구하는 이들이 대다수”라며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공연을 치른 옥상달빛 또한 “공연장을 찾은 팬들이 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듯 외로워 보이고 미동도 없었다”면서 “현대인의 피로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