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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가족서사의 아픔과 기쁨
―조용숙의 시세계
이은봉
조용숙의 시세계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다층적이다. 그의 시세계가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까닭은 단순하다. 오늘의 이 사회가 매우 복잡하고 다기한 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오늘의 이 사회는 자본주의적 근대를 가리킨다. 오늘의 이 사회를 가리켜 자본주의적 근대라고 했지만 그의 시에 그려져 있는 가족서사는 다분히 봉건적 중세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는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가족서사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아득한 과거의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기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그의 이 시집 『얼굴』이지만 이 시집의 시들에게 공통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공통점은 상상이나 환상에 기초하기보다는 경험에 기초한 시들, 곧 기억에 기초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시는 거개의 경우 이런저런 죽음과 뒤얽혀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요한다.
경험에 기초한 그의 시, 곧 기억에 기초한 그의 시는 대부분 실감 있는 현실, 곧 리얼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리얼한 현실은 유년시절에 시인이 고향집에서 겪는 가족서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가족서사야말로 이 시집을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적 층위로 읽힌다. 따라서 이 글은 그의 이 시집에 드러나 있는 서정적 가족서사의 몇몇 특징을 살펴보는 데 의의를 두려고 한다.
시를 통해 재구성하는 그의 가족서사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아온 것이 그의 가족서사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외할머니는 외할머니대로 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리하여 결코 즐겁고 기쁘게만 추억되지는 않는 것이 그의 가족서사이다.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가족서사는 우선 다음의 예를 통해 압축적으로 확인이 된다.
어제와 오늘이 뒤섞인다 젊은 외할머니와 늙은 엄마가, 사돈 눈치만 보던 외할머니와 며느리한테 똥기저귀 수발시켜 놓고도 당당하던 할머니가, 재산 다 날려 먹고 큰소리 뻥뻥 치던 아버지와 죽어라 농사만 지은 엄마가, 귀하디귀한 아들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이, 홧김에 죽은 친구와 죽어라 살고 있는 내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출렁인다
―「리폼」 부분
이 시로 미루어보면 어린 시절 시인의 가족은 “재산 다 날려 먹고 큰소리 뻥뻥 치던 아버지와 죽어라 농사만 지은 엄마”를 중심으로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살았던 듯하다. 뿐만 아니라 「덩굴손」「튀밥」등을 보면 빚보증을 잘못서 “재산 다 날려 먹”은 아버지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별로 넉넉하지 않았던 듯싶다. “안주머니에 도장을 가득 넣어 다니시”며 “면사무소로 등기소로 농협으로 김 씨 박 씨 이 씨”(「덩굴손」) 등에게 빚보증을 서 주었던 것이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젊은 시절에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등 조금은 유복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이 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지로 나온 갓 스물/먼 친척 할머니 집에 얹혀살”(「술래잡기」)았던 것이 시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아온 가난한 삶과, 그것이 만드는 갈등 및 고통을 드러내는 데 별로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타고난 환경을 딛고 주어지는 나날의 삶에 언제나 씩씩하고 건강하게 대응해온 것이 그이다. 몇몇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난의 슬픔과 고통은 물론 딸로 태어나 겪는 온갖 설움까지도 거칠 것 없이 시로 담아내온 것이 그라는 것이다.
콩밭 매는 엄마 졸라 쌀 한 됫박 들고 한껏 부풀어오르다 대문 앞에서 목덜미가 잡힌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지배가 실컷 처먹고 배지가 부르니까 군입정이여 오빠가 달라고 했으면 금방 내줬을 거잖유 왜 나만 안 되유?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엄마를 마당에 꿇어앉힌다 어린것이 하도 졸라서 할 수 없이 내줬슈 그려? 니가 지지배를 잘못 가르쳐서 지 할미한테 박박 대들게 만든 겨 뻥튀기 불씨가 집안으로 옮겨붙는다 이 집에서 아무 쓸모없는 이 늙은이 하나만 죽어 없어지면 되겠구먼 아니다 이 집하고 논밭 그대로 두고 니들 여섯 식구만 나가면 되겄네 대청에 걸려 있던 효부상이 마당으로 굴러떨어진다 마당에 꿇어앉은 엄마가 나대신 할머니한테 용서를 빈다 지 할미한테 눈 똑바로 치켜뜨고 쳐다보는 저년 좀 봐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열 살밖에 안 된 내가 농약병 뚜껑을 따 들고 뛰쳐나온다 여자로 태어난 게 무슨 죽을죄여? 순식간에 집안이 활활 타오른다 여자로 태어나서 억울하게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나랑 같이 죽자 엄마 순간 엄마가 내 손을 가로챈다
당신 똥 기저귀 빨아 널던 내 손을 꼭 잡아주고 가신 할머니 묘소에 튀밥 한 봉지 들고 찾아가던 날, 먹는 동안에 굶어 죽는 음식이 튀밥이라는 어머니 말씀에 산자락에서 불어온 바람 한 자락, 봉분 앞에 핀 할미꽃을 흔들다 간다
―「튀밥」 전문
이 시 역시 가족서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1연은 과거의 사실을 기초로 하고, 2연은 현재의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 2연 모두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기는 하다. 따라서 표면적인 시제와는 달리 1연은 기억과 추억의 가족서사라고 할 수 있고, 2연은 지금 막 전개되는 현재의 가족서사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연은 시인이 유년시절에 겪은 ‘쌀튀밥’과 관련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쌀튀밥이라니! 쌀이 얼마나 귀하던 시절인가?) 1연의 어린 화자는 우선 ‘쌀튀밥’을 매개로 가난하던 유년시절의 현실을 그려낸다. 그런가 하면 그는 가족 내의 아들 중심주의, 곧 남성우월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화자는 사람들의 순간적인 격한 감정이 어떻게 죽음을 불러오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난의 설움으로 인해 이처럼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어린 화자는 2연에 이르게 되면 의젓한 성인의 마음으로 당시를 회고하기도 한다.
이처럼 튀밥을 매개로 한때는 어린 화자를 심하게 구박했던 것이 할머니이다. 하지만 2연의 내용에 따르면 말년에는 “당신 똥 기저귀 빨아 널던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것이 그이기도 하다. 그런저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어른이 된 시인은 이 시의 2연에서 “할머니 묘소에 튀밥 한 봉지 들고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시인의 집안에 불화와 고통이 적잖았던 것은 무엇보다 가난과 무지 무지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를 좀 더 꼼꼼하게 읽어 보면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때의 또 다른 원인은 지난 1970년대 초에 독일에 광부로 일을 하러 갔다가 사고로 죽은 막내삼촌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막내삼촌과 관련된 가족서사를 시인은 봄이 되면 해마다 찾아오는 제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섬세하게 노래하고 있다.
고향집 처마 밑에 제비집 한 채 있었다 삼십 촉 전구를 뒷간으로 쓰던 녀석들 작대기를 내려치는 순간, 문밖으로 튀어나온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내 머리채를 낚아챘다 몇 년 후 돌아가신 할머니의 품에서 나온 편지엔 독일에 광부로 간 젊은 작은아버지가 불구의 몸으로 앉아 있었다 고향 떠날 때 남긴 머리카락 한줌과 빛바랜 주민등록증 한 장도 나란히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까치발 딛고 선 할머니가 제비를 기다린 것은 활처럼 휜 등을 펼쳐 제비집에 무명 솜과 지푸라기 넣어주었던 것은, 이십오 년 동안 소식 한 장 없는 아들, 빛바랜 주민등록증 하나로 기다리다 먼 길 떠나던 그날, 그리운 아들 모습 눈부처로 새겨가느라 차마 감지 못하고 가신 길
제비집은 할머니와 작은아버지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던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면회소였다
―「제비집」 전문
이 시 역시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1연은 길고 2연은 짧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도 2연은 1연에서 진술한 내용을 정리하고 매조지하는 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2연은 1연의 결구인 셈이다.
1연의 내용에 따르면 “독일에 광부로 간” 아들, “이십오 년 동안 소식 한 장 없는 아들”을 “빛바랜 주민등록증 하나로 기다리다 먼 길 떠난 것이 할머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독일에 광부로 간” 할머니의 아들이 시인의 막내삼촌이거니와, 이 막내삼촌의 죽음은 그의 가족서사가 비극적 정서를 갖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막내삼촌의 죽음이 이처럼 큰 상처로 남았다는 것은 그의 가족 전체가 막내삼촌에게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가족 전체의 기대주였던 막내삼촌이 불귀의 객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 전체가 매우 큰 좌절과 절망을 겪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막내삼촌과 관련해 그의 가족이 느끼는 좌절과 절망은 또 다른 그의 시의 몇몇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풍구」의 “한 줌 재가 되어서도 두 번 다시 고향을 찾지 않을 막내 삼촌을 부르다 신들린 듯 있는 힘껏 풍구를 돌린다”(「풍구」)와 같은 구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러한 가족서사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언제나 따듯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미 한국현대사의 일부가 되어 있는 파독광부의 비극을 이제는 그도 객관적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비극적 가족서사를 이처럼 객관적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어제와 오늘의 세계를 넓은 가슴으로 포용할 수 있는 지극한 모성의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친가의 슬픈 가족서사만이 아니라 외가의 슬픈 가족서사까지도 그가 감동어린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마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외할머니의 묘소에 다녀온 엄마 옆에 나란히 누워
어느덧 외할머니가 된 엄마를 불러본다
열네 살에 스물여덟 홀아비한테 시집와 옷고름 푼 지 하루 만에, 전처 자식 끌어안고 빈 젖을 물렸다는 외할머니, 서른둘부터 팔남매 혼자 키웠다더니, 이제 네 아버지 만나 할 말 있다 하시던 날, “네 아버지 나의 첫사랑이었다” 수줍게 고백하던 밤, 잠든 외할머니 손톱마다 붉은 봉숭아물 들여놓았다는 엄마
외할아버지 쌍분 아래 저만치
아직도 젖 먹여야 할 자식 남아 있다는 듯
홀로 누운 외할머니
저승길 잃지 말고 아버지 잘 찾아가시라
손끝마다 꽃등 켜드린 딸의 마음 알았을까.
퉁퉁 부은 다리로 밤새 봉숭아 꽃등 밝혀 든
신랑 기다리는 외할머니 봉분 앞에서,
봉숭아 씨앗처럼 툭툭 튕겨 나온 모녀
―「봉숭아」 전문
이 시는 “외할머니의 묘소에 다녀온 엄마 옆에 나란히 누워/어느덧 외할머니가 된 엄마를 불러”보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이 시는 엄마의 엄마, 곧 외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서사를 그리는 데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 따르면 “열네 살에 스물여덟 홀아비한테 시집와 옷고름 푼 지 하루 만에, 전처 자식 끌어안고 빈 젖을 물”린 것이 외할머니이다. 이제는 “외할아버지 쌍분 아래 저만치” “홀로 누”워 계신 외할머니……. 그래도 자신의 딸인 엄마에게 네 아버지가 내 첫사랑이었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것이 외할머니이다. 그러한 밤이면 엄마는 “잠든 외할머니 손톱마다 붉은 봉숭아물 들여놓”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가족서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소간은 힘들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낸 것이 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를 통해 드러나는 삶 일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건실하고 씩씩해 보인다. 쉽게 꺾이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는 강인한 정신을 바탕으로 일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증거는 우선 “수원역 24시간 편의점에서/좀 이른 저녁”으로 “컵라면”을 먹으며 드러내는 그의 정신자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원역 24시간 편의점에서
좀 이른 저녁을 먹는다
밥상 위에 차려진 저녁 메뉴는
컵라면 하나
나보다 조금 먼저 젓가락을 든
노숙자 옆에서 컵라면 포장을 뜯는다
단단히 뭉친 면발을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어대는 그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내 라면에도 뜨거운 물을 붓는다
뜨거운 물에 바로 풀어지는 면발 앞에서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손바닥에 전해지는 컵의 온기로 녹여낸다
세상에 굽신거리기 싫어
거리에서 혼자 밥 먹는 날이 많았을 그와
아무데나 함부로 고개 숙이기 싫어
세상 살아가는 일이 불편한 내가
먹으면서 서로 정이 든다는 가족처럼
어느새 많이 닮아 있다
―「겸상」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먼저 “나보다 조금 먼저 젓가락을 든/노숙자 옆에서 컵라면 포장을 뜯”으며 노숙자로부터 이런저런 동병상련을 느낀다. “단단히 뭉친 면발을 나무젓가락으로/휘휘 저어대는” 노숙자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자신의 “라면에도 뜨거운 물을 붓는” 시인의 모습이 아주 생생하다. 이어 그는 “뜨거운 물에 바로 풀어지는 면발”처럼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손바닥에 전해지는 컵의 온기로 녹여”내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세상에 굽신거리기 싫어/거리에서 혼자 밥 먹는 날이 많았을 그와/아무데나 함부로 고개 숙이기 싫어/세상 살아가는 일이 불편한” 자신이 “먹으면서 서로 정이 든다는 가족처럼/어느새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이 시에서 시인은 “수원역 24시간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노숙자에게 애틋한 연민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때의 연민은 자기와 함께 “컵라면”을 먹고 있는 노숙자보다는 노숙자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는 시인 자신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예의 서사에서 독자 일반이 느끼는 정서는 자못 건강하고 씩씩한 기상이다. 편의점 안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을 먹으면서도 굴하지 않는 넉넉한 마음 말이다. 물론 컵 라면을 먹는 장면과, 그에 따른 서사에 전혀 슬픔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시에서 그는 자신의 이러한 감회를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깡통연가」 「암벽타기」 등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한편으로 그의 시는 이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두루 주목이 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시는 거칠 것 없는 해학을 보여주기도 하여 더욱 관심을 끌기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나게 되는 가족서사를 담고 있는「씨감자」나 , 아버지가 귀신에 홀렸던 얘기를 그리고 있는 「그 겨울의 휴거」와 같은 시가 그 대표적인 얘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시가 지니고 있는 툭 터진 해학으로부터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호연지기를 읽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해학은 「보름달」「살곶이다리」 등의 시에 이르러 짐짓 에로틱 분위기와 함께 하면서 시적 흥취를 높이기도 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가족서사와 관련된 그의 사유는 다음 시에 이르러 좀 더 높은 정신의 경지를 이루는 듯하다.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
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쩍쩍 갈라진 몸피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잎사귀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
무엇이 그토록 생에 대한 집착의 끈
놓지 못하게 했을까
새까맣게 썩은 그의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
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의 일가
제 안에 들어와 이젠 식솔이 되어버린 그들을
나무는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일까
다 함께 죽을 수도 없는 삶
이제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는 그는
하늘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쟁여두었던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려
식솔들을 감싸 안는다
이른 봄 성치도 않은 나무의 몸에 피가 돌 듯
연푸른 잎사귀 돋는 것은
몸에 새긴 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만이
저 아닌 다른 것을
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인다
―「가족」 전문
이 시의 제목은 ‘가족’이지만 ‘가족’이 이 시의 직접적인 대상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는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나무 한 그루”와, “나무 한 그루”의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의 일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중심대상인 “나무 한 그루” 및 “버섯과 벌레”가 가족 전체를 상징하는 이미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나무 한 그루”는 가장을 상징하는 이미지이고, “버섯과 벌레”는 식솔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따르면 이내 이 시에서 시인이 나무, 곧 가장의 시각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나무의 가슴팍이, 곧 “새까맣게 썩은” 나무의 가슴팍이 “버섯과 벌레”의 삶의 터전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안에 들어와 이젠 식솔이 되어버린 그들을” “차마 내칠 수 없”는 것이 나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혼자일 수 없”어 이제는 “쟁여두었던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려/식솔들을 감싸 안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나무, 곧 가장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책임감이 강한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라면 충분히 “저 아닌 다른 것을/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가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는 그가 꿈꾸고 있는 가족의 이상적인 가장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흔히 아버지를 가장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이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그 역시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는 그물코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족서사를 토대로 펼쳐지는 그의 시는 때로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모성으로서의 자각 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가스레인지」, 「멍」, 「액화부유방증」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더러는 왜곡된 사회현실이나 어긋난 민족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기도 하는 것이 그의 시인데, 전자의 예로는 「전역신고」 「달콤한 휴식」「혀를 뽑다」 「알리바이」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얼음새꽃」「그날 이후, 나를 생리를 입을 토했네」 「통일호 2010호 열차」 등을 들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귀뚜라미 보일러」 「모서리를 몸속에 다 접어 넣는 데 걸리는 시간」 「갈대」 등에서처럼 섬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참다운 지혜를 깨닫는 시를 보여주기도 하고, 「매직」 「거울」 「물소가죽 소파」 「풍선인형」등에서처럼 상상이나 환상을 받아들인 시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 그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의지와 지향을 갖는 그의 시를 본고에서 빠짐없이 다 논의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서정적 가족서사를 중심으로 한 지금까지의 언급만으로 그의 시에 관한 논의를 매조지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섭섭해 섬세한 관찰력과, 조촐한 깨달음이 돋보이는 그의 좋은 시 한 편을 함께 읽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 “길 가다 주운 쪼글쪼글한 대추 한 알”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그에 따른 신선한 발견을 담고 있는 다음의 시를 함께 읽는 것 말이다.(조용숙 시집 『모서리를 접다』, 2013. 3. 30)
길 가다 주운 쪼글쪼글한 대추 한 알
그 주름 속 깊은 길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팽팽하게 당겼던 시간의 고삐를
놓친 순간, 나무에서 떨어져 뒹굴며
반지르르한 살갗 위에 새겨 넣었을
바람과 햇볕의 문신
시간으로 쓴 표지판 하나
얼굴 위에 새겨 넣으며
온몸으로 끌어올린 단물 쟁여
단단히 여문 씨앗 하나 키워 나가는 삶
생의 계단인 아버지의 주름살
하나 둘 따라 올라가 보면
그 안에 내가 있어
잘 여문 씨앗 하나로 솔고 있을까?
―「얼굴」 전문